본관 연혁
금천(衿川)은 현재 시흥·과천·광명·군포시 일대를 통괄하는 옛 지명이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영토였으며, 삼국시대에는 잉벌노현(仍伐奴縣)·장항구현(獐項口縣)·율목군(栗木郡)으로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는 곡양현(穀壤縣)·장구군(獐口郡)·율진군(栗津郡)으로 개칭되었다. 940년(태조 23)에는 곡양현은 금주(衿州: 衿陽)로, 율진군은 과주(果州)로 이름이 바뀌었다. 995년(성종 14) 금주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금주는 수주(樹州: 富平)의 속현이 되고 과주는 광주(廣州)의 관할이 되었다가, 1172년(명종 2)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금주는 시흥(始興)이라 별칭하였고, 과주는 부안(富安) 또는 부림(富林)이라고도 하였다.
과주는 1413년(태종 13) 과천현으로 개편되었다가 1414년에는 금주와 통합되어 금과현이라 하였으나 곧 폐지되었다. 금주는 다시 양천현과 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다가 이듬해 따로 분리되면서 금천현(衿川縣)으로 명칭을 바꾸고 현감이 파견되었다. 1456년(세조 2)에도 잠시 과천현과 병합된 적이 있으며, 1795년(정조 19)에는 금천군의 이름을 시흥현(始興縣)으로 바꾸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금천군이 되어 인천부에 속하였다가 1896년 경기도 관할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과천군과 안산군의 일부가 시흥군에 편입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로 편입되었고 1979년에 시흥군의 남면이 군포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에는 소하읍과 광명출장소가 광명시로 승격되면서 시흥군에서 분리, 독립하였다. 1989년에는 군포와 의왕읍이 각각 시로 승격되었고, 시흥군이 폐지되면서 소래읍·군자면·수암면이 통합되어 시흥시로 승격하였다.
성씨의 역사
금천강씨는 신라 때 문하시랑(門下侍郞)을 지낸 강여청(姜餘淸)을 시조로 삼고 있다. 금천강씨는 진주강씨(晉州姜氏) 세계(世系)에 인헌공파(仁憲公派)로 나와 있는데, 언제부터 금천강씨가 진주강씨에서 분파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진주강씨의 시조인 강이식(姜以式)의 후손으로 인헌공 강감찬의 아버지 강궁진(姜弓珍)을 1세조로 계대(繼代)하고 있다. 시조인 강여청의 5대손인 강궁진은 왕건이 고려를 개국할 때 경주지역에서 금천(衿川: 시흥의 옛 이름)으로 이주하였고, 금천의 지방 호족으로 고려 태조에게 협력한 공으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오르게 된다. 그러므로 강궁진이 고려가 개국할 때 금천에 이거(移居)한 뒤 강감찬을 낳으면서 금천강씨가 유래되었다.
분적종 및 분파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 의하면 강씨(姜氏)는 진주(晉州), 금천, 안동(安東), 배천(白川), 해미(海美), 동복(同福), 광주(光州) 등 여러 본관이 있다. 그러나 현전하는 강씨는 모두가 진주강씨에서 분적한 것이 확실하므로 진주강씨로 단일화 하고 있다.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금천강씨는 668가구 총 2,064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