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연이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동그랗게 뜨고있는 눈이였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눈동자는 이미 모든 생명활동을 멈춘듯 하였고, 오직 작은 숨소리만이 소연의 꺼지지않은 목숨을 알게해줄 뿐이였다 그런 소연을 한참동안 내려다보던 기주는 한숨을 쉬며 쓰러지듯 앉았다. 그제서야 소연의 작은 입술이 미세한 떨림과 함께 움직였다.
"기주씨...."
하지만 기주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소연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자신을 향한 미소를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눈물, 그 눈물....젖은 눈물을 닦을 힘도 없었다.
"기주씨... 제가... "
덜덜 떨리는 팔로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 소연이를 부축해줄 사람은 더 이상 기주가 아니였다. 소연은 여전히 차갑기만한 기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른쪽 입술의 떨림을 느꼈다. 자신의 울기전 버릇이였다.
'탁'
서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방문을 닫고 주방으로 나온 소연은 그제서야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울분을 느끼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소연이의 머릿속에서는 자신을 보며 밝게 웃어주는 기주가 살고있었지만, 현실속에서의 괴리감은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흐흑.... 다시.... 다시 시작할.... !!"
'쿠웅!'
"으아아아악!!"
너무나 큰 폭발소리에 깜짝 놀란 소연이 고개를 돌렸을땐 안방문이 강한 힘에의해 소연의 바로옆에 날아와있었고, 안방으로부터 거세게 번져나와 뱀의 혀같이 주방의 천정을 핥고있는 불의 모습을 보는순간 소연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부. 부탄가스.... 아흑! 안돼...."
몽롱한 정신을 애써 추스르려해도 눈 앞의 상황은 제정신으로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분명했다. 코를 찌르는 냄새와 연기, 생사는 알 수 없는 기주를 구하기위해 빨리 신고를 해야하는걸 알면서도 소연의 발걸음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아... 머리가....'
정신적 충격때문인지, 연기때문인지 알수없는 두통으로 두 눈을 감싸고 주저앉은 소연은 생각의 정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기위해 눈을 뜬 순간 자신의 눈앞에 떨어져있는 물체를 보자마자 소연은 정신을 잃었다.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건 청량리의 한 정신병원에서였고, 무더워진 여름날씨에 짜증이란걸 느낄 무렵이였다. 그 병원의 의사중 한명이였던 친구의 부탁으로 만난 그녀의 첫인상은 누구나 그렇듯 내게 단지 한명의 정신병자였을뿐이였다. 소지품 목록에 주민등록증도 없었고, 단 한마디의 말조차 뱉지않는 그녀에게서 그녀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정신의학 중 "사회공포증"분야에 실적이 있는 날 찾은 것이 분명했다.
일반적으로 전 세계인구의 10%정도가 이 사회공포증으로 시달리고 있고, 단순히 소심한것으로만 생각하지 자신이 사회공포증 환자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나중에 자신이 환자임을 알게되었을때의 충격은 감당할 수 없을만큼 큰 것이다. 이 사실을 그동안 보아온 나로써는 내 전문분야이면서도 별로 달갑지않은 부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친구놈의 부탁이니 한번 보기나 하자는 마음으로 감옥같은 병실층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약물을 복용하는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모조리 몸에 지니고 있었던 걸로 봐서 단지 호기심으로 하는 단계는 이미 지난 것 같았다. 내 앞에서도 오른손을 끊임없이 떨고있었고, 눈이 상당히 충혈되어있었으며, 광대뼈와 볼, 그리고 팔을 보니 이미 체중이 상당히 감소해 있었다. 내가 들어와서 바로앞에 서 있어도 보지 못하는건지 아니면 신경을 안쓰는건지 초점을 잃은 눈빛만 유지하고 있었다. 유난히 하얀 피부는 눈부실정도로 아름다웠지만, 시선이 얼굴로가면서 또 하나의 피해자를 보고있다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저려왔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날 같은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야만 한다.
"안녕. 난 이진태라고 해. 널 도와주고싶어서 왔단다."
하지만 역시 나에게는 무관심하다. 난 집중해서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 모두 잡아내야만 했다. 우선 겉모습으로 금방 생각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랫입술을 1분에 4번씩 깨물고 있으며 큰 눈동자를 자주 일정한 주기로 깜빡이는 것이었다. 대체적으로 아랫입술을 깨문다는 것은 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가 맘에 안드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고, 눈을 계속 깜빡이는 것은 현재 주위의 모습이 아닌 과거를 회상하거나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과거의 어떤 장면을 회상하려고 하는데 잘 생각이 나지않는 것일까? 아니면 과거의 그 장면이 불만스러워서 이러는것일까? 단 몇초사이에 벌써 수십가지의 생각들이 내 뇌세포들을 자극시키고 있었다.
"이름이 뭔지 물어봐도 될까?"
하지만 그녀의 관심이 내가 아닌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정신질환 환자들은 한번에 여러 가지를 소화해낼 수 없는게 대부분인데, 지금 그녀의 관심은 양손으로 꼭 쥐고있는 배게의 모서리였다. 우선 배게와 연관된 좋았던, 또는 싫었던 기억이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기에 현실속의 내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배게의 모서리를 신경질적으로 구기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손놀림으로 봐서는 좋은 기억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배게하면 침대고, 침대하면.... 뭐 좋은 기억일 수 밖에 없겠군.
"혹시....남자친구 있니? 남자친구는 이름이 뭐야?"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걸 볼 수가 있었다. 아주 조금 짧은시간 움직인것이기에 내가 잘못본 것일수도 있지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회공포증에 걸린 환자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자신의 영역에 침범하는 걸 아주 싫어하고, 그 표현을 매우 신경질적, 폭력적으로 나타내기에 지금의 내 행동에 어느정도의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계산이 되어있었다. 단지 내게 말을 거는 희망적인 반응이면 좋겠지만, 나를 죽이려고 할 수도 있는 노릇이였지만, 내가 정신과 의사를 희망한 죄라면 어쩔 수 없는것이 아닌가.
조금씩 다가가는 내 눈에 햇빛을 받아 수축된 동공과 여전히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직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그녀를 앞에두고 답답함에 잠시 시선을 돌렸을 때 병실문을 보게되었다. 그 작은 창에는 내 친구놈이 나와 이 환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애써 눈웃음을 짓고있었다. 자신도 무척 난감한 일을 나에게 부탁해서 미안한지 어색하게 웃는걸 보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하지만 덕분에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떨리는 순간을 놓치게 되었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발작하는 그녀의 양손에 내 목을 맡겨야만 했다.
"꺄아!!"
"어헉!"
나는 당황하기도하고, 잠시 몽롱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그녀의 손을 내 목에서 조금씩 떼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눈을 감고 소리를 지르며 나를 죽이려하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과거의 다른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듯했다.
'덜컹!'
이 상황을 보고 놀란 내 친구놈이 남자간호사 2명을 데리고 들어왔다. 난 눈을 크게뜨고는 그녀의 왼팔을 밀어내고있는 내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을 피고는 들어오지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남자간호사들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들 생각인것 같았지만, 친구가 신호를 보내고 먼저 나가자잠시 머뭇거리고는 다시 나갔다. 그녀의 손을 내 목에서 서서히 밀어내고 있자니 예전의 환자들이 내 눈위에 필름처럼 스쳐지나가며 어울리지않는 정적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힘들게 힘을 쏟고있는데 어울리지않는 시간의 정지. 난 정신질환자가 이상하게도 팔힘이 세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되새겨야만 했다. 비정상적으로 감소한 체중으로인해 거의 뼈만남은 그 앙상한 팔에서 나오는 힘은 나름대로 팔씨름에 자신있는 나도 손과 목의 거리를 힘들게 유지하는 정도였다.
눈을 감고있던 그녀가 눈을 크게뜨며 처음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있을때에는 그로데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더니 눈을 크게뜨니 공포영화가 따로없었다. 당장이라도 심하게 충혈된 안구를 내게 뿜어낼듯 커져있는 눈은 절대적으로 피하고만 싶었다. 상황은 더 안좋아졌다. 너무 놀라서 심장이 순간적으로 멈추는 것을 느낀후 나의 팔은 떨리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그녀의 손아귀의 힘은 그 반대로 더 세지고 있었기때문이였다. 그녀의 눈에서는 공포를 느끼고있는듯한, 또 어떻게보면 분노가 절정에 이른듯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너.... 지금 뭐...뭐... 보고있는 거야.... 으...."
이마에는 땀이 맺히고 있었고, 힘이 딸려서인지 얼굴에서는 열이나고 있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뭔가 내게, 또는 그녀에게 변화가 필요한 타이밍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내 노력이 가상하게 보였는지 드디어 그녀가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한마디를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