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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眞城李氏 溫溪先生 後孫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병은(八讓堂)
▣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의 학문(學問)과 사상(思想) ◈ 차 례 김종석(金鍾錫) |
1. 생애와 시대적 배경
김득연(金得硏)은 호(號)가 갈봉(葛峯)이고 자(字)는 여정(汝精)으로 1555년(명종10)에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1520-1588)와 영양(英陽) 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갈봉(葛峯)은 태어나 채 돌이 지나지 않아서 어머니를 여의고, 그 후 그는 조모의 손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이복 동생인 득숙(得숙)(石+肅)·득의(得 )를 비롯하여 3남5녀 가운데 장자(長子)로서, 어려서부터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의 급문제자(及門弟子)이면서 출사(出仕)를 단념하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고 있던 아버지 유일재(惟一齋)로부터 가학(家學)을 계승하였다. 한편 25세가 되던 1579년에 월천(月川) 조목(趙穆)(1526-1586)을 모시고 도산서원(陶山書院)과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면서 유록(遊錄)을 비롯하여 수십 편의 시(詩)를 남겼다. 그 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 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1526-1586),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등에게 유문(遊門)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따라서 30대 후반까지는 여러 문하를 출입하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8세가 되던 임진년(1592)에 왜란이 일어났고, 갈봉(葛峯)은 여러 사우(士友)들과 함께 거의(擧義)에 참여하였다. 그는 가재(家財)를 내어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군대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명나라 군대의 종사관들을 접견하는 일을 맡았다. 비록 전투에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다는 기록은 없으나 "경상도 6진이 모두 잔파하였지만, 안동(安東)이 무사하였던 것은 김득연(金得硏)의 공"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큰 활약을 하였다. 특히 이때 원군(援軍)으로 참여했던 명나라의 종사관들은 갈봉(葛峯)의 충의(忠義) 뿐만 아니라 그의 문장(文章)에 크게 감동하여 이를 찬양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갈봉(葛峯)은 일찍부터 문학(文學)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으나 과거시험에 뜻을 두지 않다가 나이 58세(광해4)가 되어 비로소 생원(生員)·진사(進士) 양시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북인정권 시대로 갈봉(葛峯)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후로 벼슬에의 희망을 끊었다. 그는 선친의 묘소 아래에 지수정(止水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한편으로 후학을 가르치고 한편으로 원근의 문사들과 교유하면서, 순수한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갈봉(葛峯)은 『지수정가(止水亭歌)』를 비롯하여 내용과 분량 면에서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가사와 시조 작가로 평가되고 있는데, 그의 문학 작품은 대개 이 지수정(止水亭)을 중심으로 해서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병자년(1636)의 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비분과 강개를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으나, 이듬해인 1637년(인조15)에 향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갈봉(葛峯)은 스스로의 공을 드러내고자 하지 않았으므로 널리 알려지지 않다가, 그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후 안동(安東)의 유림들이 연명으로 조정에 상소하여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를 요청하면서 알려지게 되었고, 1858년(철종9)에 조정에서는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추증하였다.
2. 갈봉(葛峯)의 학문연원(學問淵源)
갈봉(葛峯)의 학문적 배경을 말하자면, 일차적으로 유일재(惟一齋)를 통한 가학(家學)의 계승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갈봉(葛峯)은 유일재(惟一齋)가 36세가 되던 해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33년 동안 장남으로서 봉양하면서 학문을 배웠을 뿐 아니라, 또한 갈봉(葛峯)이 교유(交遊)하면서 영향을 받았던 남치리(南致利), 권위(權暐), 신지제(申之悌), 권태일(權泰一), 김기(金圻), 금발(琴撥) 등 갈봉(葛峯)과 가까운 주변 인물들은 공히 유일재(惟一齋)의 문인들이기 때문이다. 갈봉(葛峯)의 『행장(行狀)』에는 그의 학문연원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공은 아버지에게 배우는 틈틈이 (동문들과) 더불어 문장(文章)을 가다듬고 경전(經傳)을 공부하였는데, 입지(立志)가 굳고 공부(工夫)가 독실하였으므로, 약관이 되기 전에 이미 영특하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동문들 간에도 옷깃을 여미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葛峯先生文集 권4)
위의 자료를 상고할 때, 우리는 갈봉(葛峯)의 학문 형성에 있어서 가학(家學)의 계승이라는 측면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학(家學)은 유일재(惟一齋) 당대에 형성되었다기 보다는 휠씬 이전부터 쌓아온 학문적 전통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퇴촌(退村)의 문장과 담암(潭庵)의 학술은 후세에 빛을 발하기에 족하였으며, 특히 담암(潭庵)의 선견지명은 명철함 가운데서도 으뜸이었다. 자손들이 번창하여 가정의 교육을 받았는데, 문장(文章)과 행실(行實)로 세상에 이름을 날린 경우가 많았다. 선생(유일재)께서는 타고난 바탕이 뛰어나게 총명한데다가 가정교육을 받아 아름다움을 이어나갔다. ......(*惟一齋先生逸稿 권2, 行狀퇴촌(退村)(閱)은 유일재(惟一齋)에게 5대조가 되는데, 특히 문장으로 일찍이 이름이 있었으며『빙옥난고(氷玉亂稿)』라는 불전(不傳)의 시집(詩集)이 있었다.(*光山金氏退村公派譜 1994, 권1) 담암(潭庵)(용석)은 유일재(惟一齋)의 조부로서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유학(遊學)하였으며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있었으나 연산군의 실정을 목격하고 처향(妻鄕)인 안동(安東) 구담(九潭)으로 복거(卜居)하였다. 그는 사태를 판단하는 지기(知幾)의 안목을 갖추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 점필재(?畢齋)와 그의 학맥을 계승한 인물들이 무오(戊午)·갑자(甲子)·기묘사화(己卯士禍)를 거치면서 대거 화를 입었으나, 담암(潭庵)은 일찍 이를 예견하고 은둔함으로써 여생을 보존할 수 있었음에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光山金氏退村公派譜 1994, 권1, 潭庵公遺墟碑銘) 이로써 볼 때, 문학 내지 문장에 대한 재능은 유일재(惟一齋) 집안의 전가(傳家)의 학풍이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또한 현실에 대처하는 감각도 있었으며, 현실적 감각은 출처(出處)에 대한 뚜렷한 의식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학(家學)의 성격은 유일재(惟一齋) 대에 와서 퇴계학(退溪學)과 접목하게 된다. 유일재(惟一齋)의 학문적 성격은 자료의 멸실로 인하여 명확히 밝히기 어려운 점이 있지만, 1573년(선조6)에 퇴계(退溪)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여강서원(廬江書院)을 건립하였을 때 54세의 나이로 지역 유림들에 의해서 초대 산장(山長)으로 추대되었다는 사실 등을 감안하면, 그가 당시 퇴계학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그의 학문에 있어서 퇴계의 영향을 아울러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유일재(惟一齋)의 학문은 가학(家學)과 퇴계학(退溪學)의 접목으로 형성되었고, 그것이 갈봉(葛峯)에게로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유일재(惟一齋)가 생도들을 가르치면서 어떤 면에 비중을 두었는지를 보자.
생도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는 교육의 순서를 엄격히 세우되, 구두 떼는 것을 우선하지 않고 정밀한 의미를 밝히기를 거듭하였으며, 미사여구를 숭상하지 않고, 의리와 이익의 구분을 뚜렷이 하였다. 효제충신에 근본을 두고, 사친(事親)·사군(事君)의 도리를 알게 하였으며, 그 나아갈 방향을 바로잡아 성기(成己)·성물(成物)의 공을 이루게 하였다......... 진조 나가고 암송시키는 틈틈이 생도들을 이끌고 당 위에 올라서, 성현들의 학문에 관해 강구하거나 고금의 득실에 관해서 토론함으로써 그 문하의 진로를 개척하였다.(*惟一齋先生逸稿 권2)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등 제공은 선생(유일재)께서 도산(陶山)으로 보내 학업을 마치게 하니 학문(學問)으로 이름났다. 옥산(玉山) 권위(權暐)· 청신재(淸愼齋) 박의장(朴毅長)·오봉(梧峯) 신지제(申之悌)·노천(蘆川) 권태일(權泰一)등 제공은 조정에 입신(立身)하여 당시의 명인이 되었다. 북애(北厓) 김기(金圻)·수정(守靜) 금발(琴撥)은 조행(操行)으로 명망이 무거웠다. 방담(方潭) 권강(權?)은 후진을 가르쳤으니, 당시의 명인들이 그 문하에서 많이 나왔다. 안동(安東)에서 문학(文學)이 성한 것은 대개 선생께서 창도한 결과라고 한다.(*惟一齋先生逸稿 권2, 行狀)
이에 의하면, 유일재(惟一齋) 문인(門人)들은 크게 학문(學問), 입신(立身), 조행(操行), 후진양성(後進養成)등의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으로 이해된다. 이점은 역으로 유일재(惟一齋)의 학문 경향 속에 그러한 요소가 내재하고 있으면서 갈봉(葛峯)의 학문적 토대가 되었다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갈봉(葛峯)의 학문 형성에는 위에서 언급한 유일재(惟一齋)로부터 가학(家學)을 전수한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그 외에 월천(月川) 조목(趙穆)을 비롯하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백담(柏潭) 구봉령(具鳳齡)·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를 출입하면서 퇴계학의 본령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자신의 학문적 진로를 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유일재(惟一齋)부터가 퇴계를 동방에 있어서 정주(程朱)의 유일한 적통(嫡統)으로 생각한 독실한 퇴계의 급문제자(及門弟子)이며(*惟一齋先生逸稿 권1) 월천(月川)을 비롯하여 서애(西厓)·백담(柏潭)·한강(寒岡)등 갈봉(葛峯)이 종유(從遊)하였던 인물들이 모두 유일재(惟一齋)와 더불어 퇴계학맥을 정통으로 계승하였던 동문들이기 때문이다.
이광정(李光庭)이 쓴 갈봉(葛峯)의 『행장(行狀)』에는 "기묘년에 부친께 말씀드리고 동지 몇 사람과 함께 청량산을 유람하였는데, 월천(月川) 조목(趙穆)선생을 배알(拜謁)하였다. 선생은 그가 범상치 않은 인재임을 알아보고 함께 유람할 것을 약속하였다. 공이 그 어른을 모시고 절경을 다녔는데, 맑고 고요한 가운데 혹은 시로써 화답하고 혹은 의리를 강설하면서 유유하게 며칠을 보냈다. 공은 알지 못하던 것을 더욱 많이 알게 되었고, 뿌듯하게 얻은 바가 있었으며 넉넉하게 귀의하였으니 그것을 평생의 지극한 행운으로 여겼다."(*葛峯先生文集 권4, 行狀) 하였고, 김굉(土+宏)이 쓴 『묘갈명(墓碣銘)』에서는 "또한 서애(西厓)·백담(柏潭)·한강(寒岡)선생의 문하에도 유문(遊門)하여 위학(爲學)의 방법을 더욱 알게 되었다."(*葛峯先生文集 권4, 墓地銘) 하였다. 또한 허훈(許薰)이 쓴 『묘갈후식(墓碣後識)』에는 "장성하고 나서는 월천(月川)·한강(寒岡)·백담(柏潭) 세 선생에게 유문(遊門)하니, 학문은 정밀하고 깊었으며 핵심을 계승하였다.(*葛峯先生文集 권4, 墓碣後識) 하였다.
월천(月川)·서애(西厓)·백담(柏潭)·한강(寒岡)과 갈봉(葛峯)의 관계는, 당사자들의 문집에서 갈봉(葛峯)과 관련된 언급을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과 위에서 갈봉(葛峯)의 『행장(行狀)』을 쓴 사람과 『묘갈명(墓碣銘)』등을 쓴 사람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사승관계(師承關係)라고 하기에는 부족하고 출입(出入) 정도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지만 갈봉(葛峯)은 이들과의 관계를 통하여 상당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월천(月川)을 만난 것에 대해서, 앞에서 '평생의 지극한 행운으로 여겼다.'고 했는데 실제로 『갈봉집(葛峯集)』에는 맨 첫머리에 나오는 『부용처사를 배알하고(謁芙蓉處士)』부터 『송현에 이르러 시재를 송별하면서 3행자를 써서 읊음(到送峴送別是齋用三行字)』, 『집에 돌아온 이튼날 창연히 운산을 바라보며(到家翌日 望雲山)』에 이르기까지 24수의 시는 갈봉(葛峯)이 25세 때 56세의 월천(月川)과 함께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면서 주창 수창(酬唱)한 것들로 갈봉(葛峯)에게 있어 월천(月川)이 갖는 적지 않는 의미를 느끼게 한다. 또한 한강(寒岡)과 백담(柏潭)에 대한 갈봉(葛峯)의 감정도 그가 쓴 제문(祭文)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강(寒岡)에 대한 제문(祭文) : "여유있는 마음과 높은 식견으로 사문(退溪)에 질의하시고 ........... 많은 선비들을 이끌고 『심경』을 가르치시니, 어두운 거리에 해와 별이 비치는 듯, 나의 수많은 어리석음 깨우치셨네.")(葛峯先生文集 권4, 祭寒岡鄭先生文)
백담(柏潭)에 대한 제문 : "세상의 종사이시니 국사를 맡을 지혜를 갖추었고, 나라의 보배시니 어떻게 공경하지 않으리오......... 일찍이 문장(門墻)에 기대어 태산북두처럼 우러렀고, 얼굴을 맞대고 질의하니 깨우쳐 주신 은혜 두터웠네."(葛峯先生文集 권4, 祭柏潭具先生文,)
비록 은유적 표현이지만 한강(寒岡)과 백담(柏潭)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월천(月川)과 서애(西厓)에 대한 제문은 없고 오히려 백암(柏巖) 김늑(金?)(1540-1616)과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1539-1617)에 대해 제문을 썼다. 이 점은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따라서 제문의 유무가 절대적인 기분이 될 수 없다는 하나의 사례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갈봉(葛峯)의 퇴계학 계승이라는 점에서 영향을 끼친 인물들은 지금까지 거론된 한강(寒岡)·백담(柏潭)·월천(月川)·서애(西厓)·백암(柏巖)·회곡(晦谷) 등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3. 갈봉(葛峯)의 교유관계(交遊關係)와 학문형성(學文形成)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이, 연배로 보나 인간관계로 보나 퇴계(退溪)의 급문제자이자 유일재(惟一齋)의 동문들로서, 갈봉(葛峯)으로서는 교유(交遊)라기 보다는 종유(從遊)의 대상이되었던 인물임에 비해, 그야말로 교유(交遊)를 통하여 갈봉(葛峯)의 학문형성(學文形成)에 영향을 끼친 인물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무대는 지수정(止水亭)이었다. 본래 지수정(止水亭)은 부친 유일재(惟一齋)의 산소를 모신 와룡산(臥龍山)의 지세가 산고수급(山高水急)하여 이를 제어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였는데, 갈봉(葛峯)이 거기에 머물면서 지역의 문사(文士)들과 교유(交遊)하는 장소로 삼았던 까닭에 그의 학문 형성의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지수정(止水亭)을 출입하였던 대표적인 인물로 북애(北厓) 김기(金圻)·계암(溪巖) 김영(金?)·수정재(守靜齋) 금발(琴撥)·옥산(玉山) 권위(權暐)·노천(蘆川) 권태일(權泰一)· 금역당(琴易堂) 배용길(裵龍吉)·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도헌(陶軒) 유우잠(柳友潛)·석남(石南) 이경준(李敬遵)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알려져 있는 사람도 있고 전혀 알 수 없는 사람도 있는데, 지금까지 알려져 있는 사람에 대해서만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기(金圻)(1547-1603) : 자(字)는 지숙(止叔)이고 호(號)는 북애(北厓)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중형(仲兄) 전(?)과 함께 어려서부터 퇴계문하(退溪門下)에 배웠으며, 유일재(惟一齋)의 문인(門人)이기도 하다. 퇴계(退溪)가 사망하고 문집이 오래도록 완성되지 않았는데, 공이 산장(山長)을 맡아 그 일을 마쳤다. 임진년(1592)에는 종제(從弟)인 해(垓)와 더불어 거의(擧義)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었고, 후에 공(功)이 기록되어 감찰(監察)의 증직을 받았다.
김영(金?)(1577-1641) : 자(字)는 자준(子峻)이고 호(號)는 계암(溪巖)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으로 김부륜(金富倫)의 아들이다. 예안(禮安)에 살았는데 임진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체찰사(體察使)로 영남에 부임하였을 때 16세 나이로 찾아가 배알(拜謁)하였다. 문과에 급제하고 1615년(광해7)에 승정원 주서(注書)가 되었으나 북인 정권을 비관하여 벼슬을 그만두었다. 1618년 인목대비가 폐위된 뒤로는 두문불출하고 독서로 낙을 삼았다. 인조반정 직후에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도승지에 추증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다.
권위(權暐)(1562- ? ) : 자(字)는 숙회(叔晦)이고 호(號)는 옥산(玉山)·옥봉(玉峯)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통훈대부 권옹(權擁)의 아들로 도지촌(道只村)에 살았다. 유일재(惟一齋)의 문인(門人)으로 문과에 합격하고, 공조좌랑, 해미(海美)현감, 강진(康津)현감, 예조좌랑을 지냈다.
권태일(權泰一)(1569-1631) : 자(字)는 수지(守之)이고 호(號)는 노천(蘆川)·장곡(藏谷)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권춘란(權春蘭)의 아들이다. 유일재(惟一齋)의 문인(門人)이며, 구봉령(具鳳齡)의 문인(門人)이기도 하다.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거쳐 형조판서를 지냈다. 접반사로 가도(?島)에 갔다가 병에 걸려 돌아오는 길에 정주(定州)에서 죽었다. 갈봉(葛峯)의 시 가운데 특히 권태일(權泰一)과 수창(酬唱)한 것이 많다.
배용길(裵龍吉)(1556-1609) : 자(字)는 명서(明瑞)이고 호(號)는 금역당(琴易堂)·장육당(藏六堂)이며, 본관은 흥해(興海)로 배삼익(裵三益)의 아들이다. 1585년에 성균관에 입학하였고, 1602년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擧義)하여 대장 김해(金垓)의 휘하에서 부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세마(洗馬)·시직(侍直)·부솔(副率)을 지냈고, 충청도사에 이르렀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으로, 유성룡(柳成龍)·조목(趙穆)·남치리(南致利) 등의 문하에도 출입하였다.. 천문·지리·병법에 조예가 있었고 특히 역리(易理)에 밝았다.
그 외 금발(琴撥)(1573- ? )의 자(字)는 자개(子開)이고 호(號)는 수정재(守靜齋)이다. 유일재(惟一齋)의 문인(門人)으로 오천(烏川)에 살았다. 유우잠(柳友潛)의 자(字)는 상지(尙之)이고 호(號)는 도헌(陶軒)이다. 갈봉집(葛峯集)에 유우잠(柳友潛)과 수창(酬唱)한 시(詩)가 있다. 또 이경준(李敬遵)의 자(字)는 백헌(伯憲)이고 호(號)는 석남(石南)이다. 갈봉집(葛峯集)에 이경준(李敬遵)과 수창(酬唱)한 시(詩)가 있다.
이들을 보면 대개 유일재(惟一齋)의 문인록에 등재되어 있는 인물들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들과 함께 수업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것인데, 그 구심점은 역시 유일재(惟一齋)였던 것이다. 이와 연관하여 언급할 수 있는 것이 낙계회(洛契會)라는 모임으로, 이것은 유일재(惟一齋)에게 배웠던 사람들로 이루어진 모임이었다. 그들이 유일재(惟一齋)의 몰후(歿後)에 스승의 학덕을 기리고자 몇 사람의 발의로 낙계회(洛契會)를 만들었는데, 위에 열거한 인사들이 지수정(止水亭)에 모여 상영(觴詠)하던 사이였다면 이들이 주로 낙계회(洛契會)를 이끌어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들을 중심으로 갈봉(葛峯)의 교유(交遊) 범위를 좀 더 확대하여 보기 위해서는, 지수정(止水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짐작되는 그의 시(詩)를 분석하여 기증(寄贈) 혹은 수창(酬唱)의 대상이 누구였는지를 확인해 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될 것이다. 갈봉(葛峯)의 시(詩:晩詩) 가운데 구체적인 기증(寄贈)·수창(酬唱)의 대상이 표기되어 있는 경우는 100명이 넘는데(葛峯文集) 그 가운데 비교적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은 권수지(權守之:泰一)·권시중(權時中:得可)·권인보(權仁甫:宏)·금사휴(琴士休)·금자재(琴子開:撥)·김경청(金景淸)·김자준(金子峻:?)·남자기(南子紀:太別)·유상지(柳尙之:友潛)·이기성(李器成:適)·이백헌(李伯憲:敬遵)·정면보(鄭勉甫:?)·정자홍(鄭子弘:士毅) 등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개별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넓게는 퇴계학파 좁게는 유일재(惟一齋) 문하의 영향권에 속하면서 당시 안동(安東)지역 처사(處士)층을 형성하였던 주요 인물들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갈봉(葛峯)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완성함에 있어서 교유(交遊)하던 인물(人物) 중에서는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 이광정(李光庭)은 "학문에 있어서는 남치리(南致利)·권우(權宇), 문예에 있어서는 권태일(權泰一)·배용길(裵龍吉), 실천에 있어서는 김기(金圻)·김영(金?)의 도움의 받았다.(行狀)고 하였는데, 이는 적절한 지적으로 보여진다. 권태일(權泰一)·배용길(裵龍吉)과 김기(金圻)·김영(金?)은 다같이 지수정(止水亭)에 출입하면서 시(詩)와 정담(情談)으로써 갈봉(葛峯)과 교유하지만, 권태일(權泰一)은 가장 많은 시를 주고받았던 사람이다. 김기(金圻)는 의병장 김해(金垓)와 종반간으로 임진년에 갈봉(葛峯)과 함께 거의(擧義)하였던 사람이며, 또 김영(金?)은 비록 갈봉(葛峯)보다 년하(年下)이지만 광해군의 폭정에 맞서 벼슬을 버리고 두문불출함으로써 출처(出處)에 있어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갈봉(葛峯)은 만년이 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기도 하였으나, 출처(出處)의 문제에 있어서는 김영(金?)과 뜻을 같이 하였다. 다만 남치리(南致利)·권우(權宇)는 다같이 30대 후반에 요절함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교유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갈봉(葛峯)은 어려서부터 두 사람에 대하여 동문선배와 평생을 벗으로서, 그리고 퇴계의 급문제자로서 학문적인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葛峯先生文集)
4. 갈봉(葛峯)의 사상적(思想的) 제양상(諸樣相)
지금까지의 고찰에 의하면, 갈봉(葛峯)의 학문과 사상은 퇴촌(退村)과 담암(潭庵)의 단계에서 형성된 가학(家學)이 유일재(惟一齋)에 와서 퇴계학(退溪學)과 접목하면서 갈봉(葛峯)에게 전수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물론 그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하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현존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렇게 정리하는 것은 학맥이나 교유관계와 같은 외형적인 정황을 가지고 추론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갈봉(葛峯)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그 내용에 대해 일정한 정리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갈봉(葛峯)이 남긴 시(詩)·유록(遊錄)·기문(記文), 의병활동(義兵活動)과 관련된 여러 가지 자료, 그리고 후대인들이 갈봉(葛峯)에 대해 평론해 놓은 행장(行狀)·묘갈(墓碣) 등 철학적인 저술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그 속에서 포착되는 갈봉(葛峯)의 학문과 사상에 관해 정리해 보고자 한다.
시(詩)에 나타난 갈봉(葛峯)의 구도정신(求道精神)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갈봉(葛峯)은 25세가 되던 1579년(기묘년) 9월에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하였다. 주지하듯이 청량산(淸凉山)은 퇴계(退溪)가 오가산(吾家山)이라고 불렀던 만큼 퇴계학(退溪學)의 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량산(淸凉山)은 빼어난 산세와 경치로 예로부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은 곳이기도 하지만, 청량산(淸凉山)을 유람한다는 것은 퇴계(退溪)와의 관련성을 배제하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더욱이 이 때 갈봉(葛峯)이 방문하였던 곳은 거의 퇴계(退溪)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단순한 유람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갈봉(葛峯)이 이때 쓴 시(詩) 24수와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이 문집에 남아 있다. 이 가운데 갈봉(葛峯)의 구도 정신을 느낄 수 있는 시(詩)와 그 외에 몇 수에 대해 고찰하기로 한다.
만사가 지금은 한 자락 꿈만 같은데 萬事如今一夢依
만사여금일몽의
내 평생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이 한이로다 此生長恨未 衣
차생장한미구의
다만 선생께서 다니시던 곳을 좇아갈 뿐 追惟杖屢經行處
추유장루경행처
초목은 향기 머금고 아직도 빛을 발하네 草木含馨有餘輝
초목함형유여휘
「도산서원에서 느낀 바를 읊음(入陶山有感」2수 가운데 둘째 수
갈봉(葛峯)이 청량산에 오르기 전에 먼저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방문하여 지은 시이다. 이 시에는 갈봉(葛峯)은 '직접 배우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하여 퇴계학에 대한 계승의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의지는 함께 동행하였던 월천(月川) 조목(趙穆)에 의해 더욱 부각된다. 즉 송천(松川)에 사는 권미도(權味道)(得設)의 소개로 부용봉(芙蓉峯)아래 소명헌(昭明軒)에서 월천(月川)을 배알하였는데, 비록 예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금방 마음이 통하였고 함께 유람을 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갈봉(葛峯)은 "(유람에 동행하겠다는)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없이 기뻤다. 개인적으로는 명승의 고장에 와서 장노(長老)를 모신 참으로 이번 산행의 행운이었다.)"(葛峯先生文集 권4 淸凉山遊錄) 라고 그 의미를 부여하였다.
우러러 보니 푸른 하늘이요 굽어보니 연못이라 草木含馨有餘輝
초목함형유여휘
천연대 앞에는 솔개가 날고 고기는 뛰노네 鳶魚飛躍一臺前
연어비약일대전
큰 스승 역책하신 후에 사람들은 끊어졌지만 泰山頹後無人會
태산퇴후무인회
새와 고기 뛰노는 모습은 저절로 한가롭네 縱翼揚鱗任自然
종익양린임자연
--「천연대(天淵臺)」
도산서원(陶山書院)을 방문한 후 退溪가 즐겨 찾던 도산서원 앞 강가에 있는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읊은 시이다. 천연(天淵)이란 말 자체가 「시경(詩經)」의 "솔개는 날아 하늘에 이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연비려천(鳶飛戾天), 어약우연(魚躍于淵)"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하늘과 땅에서 이치가 밝게 드러남을 의미하는 것이다. 퇴계(退溪)의 학문과 생애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면, 그것은 '이(理)가 현현(顯現)하는 연비어약(鳶飛魚躍)의 세계'를 향한 추구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갈봉(葛峯)은 하늘과 물을 굽어보면서 퇴계(退溪)가 꿈꾼 바로 이러한 세계를 그렸던 것이다. 갈봉(葛峯)은 구체적인 성리설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유적지 답사와 시작(詩作)을 통하여 퇴계학(退溪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렬한 대로 분수에 만족하고 守拙安吾分
수졸안오분
한가로이 거하며 홀로 읊조리네 居閑獨自吟
거한독자음
하늘과 땅은 내 작은 집이요 乾坤一草屋
건곤일초옥
바람과 달은 영원한 내 마음이네 風月百年心
풍월백년심
--「산 속 정자에 홀로 앉아(山亭獨坐)」
이 시는 갈봉(葛峯)이 지수정(止水亭)에서 시를 읊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안분지족하는 처사(處士)로서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한 마음 자세를 잘 보여주는 시이다. 따라서 이 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갈봉(葛峯)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다.
이미 문학계에서 상당히 연구되어 있지만, 갈봉(葛峯)은 안동(安東)지역의 처사문학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안동(安東)의 처사문학은 재도론(載道論)과 천인합일론(天人合一論)으로 요약되는 문학관과 미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이종호, 문학을 통해 본 안동 선비의 유교적 규범의식과 풍류의식-16,7세기 처사층의 시가를 중심으로, 인문학과 문화학, 2001) 이 시가 그러한 정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갈봉(葛峯)이 송소(松巢) 권우(權宇)를 평가하면서 "세상 사람들은 그의 재주가 아름답다고 칭송하지만, 실로 덕행(德行)이 심신에 갖추어지면 문예(文藝)는 다만 그 나머지일 뿐임을 알지 못하니, 어찌 우리 유가에 있어서 개탄할 일이 아니겠는가?"(葛峯先生文集 권4)라고 한 말도 이와 통한다. 즉 덕행(德行)이 본령이고 문예(文藝)는 지엽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점에서 갈봉(葛峯)이 비록 정치한 성리설이 전개나 치열한 논변을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퇴계(退溪) - 유일재(惟一齋)를 계승한 자신의 철학을 북인정권 하에서 벼슬길이 막힌 17세기 초반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시를 통해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적이 물러갔다는 말이 정말인가 賊退之言是果然
적퇴지언시과연
신민의 분노 하늘에 닿을 듯 하네 臣民之憤極通天
신민지분극통천
주화(主和)는 예로부터 임시방편이었을 뿐 要和自古皆姑息
요화자고개고식
후환을 어찌 알리오 더욱 참혹할는지 後患焉知火益燃
후환언지화익연
--「서울 소식을 듣고 분하여 적다(문서보분이기지(聞西報憤而記之)」2수 가운데 첫째수
이 시는 갈봉(葛峯)이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던 해에 지은 것이다. 73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비분강개한 심정을 시로 표현하였는데, 당시 최명길(崔鳴吉) 등에 의해 제기되고 있던 주화론에 대해서도 거부하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는 임진년의 왜란이 있었을 때 직접 거의(擧義)에 나섰던 사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여기서 우리는 갈봉(葛峯)의 의식세계가 지수정(止水亭)을 중심으로 하는 문예활동에 그치지 않고 국가적 범주의 우환(憂患)의식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자세는 '도학적이면서도 단절된 처사(處士)로서의 삶'과 '국가적 문제에 대한 선비로서의 우환(憂患)의식'이라고 하는 양면성을 가진 처사문화와 통한다. 갈봉(葛峯)은 퇴계학맥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치를 바탕으로, 처사문화가 안동문화로 자리잡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으며, 퇴계학의 또다른 한 면모를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의병활동(義兵活動)에 나타난 갈봉(葛峯)의 실천정신(實踐精神)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갈봉(葛峯)의 처사적 삶의 방식을 단순히 소극적인 현실 도피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시와 가사에 대해 문자적 표현만 가지고 접근하는 경우, 간혹 그를 이상을 좇다가 현실의 벽에 부딪혀 좌절한 이상주의자로 보기 쉽다.(김득연의 강호시가 연구, 상지대 논문집(論文集) 1997) 이렇게 되면 '매일같이 벗들과 술 마시고 시나 읊은(일휴동지상영(日携同志觴詠)'것이 그의 참모습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갈봉(葛峯)의 행적과 사상을 전반적으로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부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 각종 국가위기 시에 그가 보여준 실천적 자세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조정에서도 포상을 하거나 함이 없었으며, 또한 문집에도 몇 편의 우국(憂國) 시(詩)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거의(擧義)에 관해 직접 언급한 글을 남기지 않아서 자세한 내막을 알기도 어려웠다. 이에 관한 비교적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는 2백여 년이 지난 1824년(순조24)에 권인호(權仁頀) 등 안동(安東) 유림들이 연명으로 올린 상소문이다.
고(故) 징사(徵士) 김득연(金得硏)은........ 선조 임금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義兵)을 창기하였는데, 솔선하여 가재(家財)를 내어서 의창(義倉)을 설치하고 널리 군사를 모았습니다. 이에 피란가던 사람들이 감동하여 되돌아와 합류하였고, 밥 굶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고 힘을 보탰습니다. 군율은 엄격하였고 위세를 크게 떨쳤으며......... 죽음을 맹세하고 국은에 보답하기를 7년을 하루 같이 하였습니다. 그 당시 남산(南山)의 웅읍(雄邑) 대진(大鎭)이 무너지지 않은 곳이 없었는데, 안동(安東)에는 적이 감히 들어오지 못하였으니, 문충공 유성룡이 "경상도 6진이 모두 파괴되었고 안동(安東)만이 홀로 완전하다."고 한 것은 대개 김득연(金得硏)의 공을 가르키는 것입니다.(갈봉(葛峯) 후손(後孫) 김병문(金丙文)씨 조장 상소문(上疏文)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를 요청하는 이 상소문을 통하여, 우리는 갈봉(葛峯)이 의병활동에 있어서 상당한 활약을 하였음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은 임진년(1592)에 그치지 않고 정유년(1597)에 왜군이 재침입하여 왔을 때까지 이어졌다. 갈봉(葛峯)이 맡은 일은 주로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군량을 조달하는 한편, 원병(援兵)으로 참여한 명나라 종사관들을 접견하는 일이었다. 경리 양호(楊鎬)와 도사, 설호신(薛虎臣)은 그의 활약상을 보고 크게 감복하였으며, 종사관 장무덕(張懋德)·진천총(陳天寵)·주공유(朱孔儒)는 군량을 인수하기 위해 의창(義倉)에 왔다가 갈봉(葛峯)을 알게 되었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갈봉(葛峯)은 정성스럽고 진실하니 뛰어난 군자이다....... 그가 나아가 접견하는 모습을 보니, 크게 절도에 맞고 삼가 헤아려 행동하거나 말하는 가운데 크고 작은 일이 모두 적절하여 중도를 지키지 않음이 없었으며, 그의 법도는 성인의 문하에서 배우지 않은 사람이라면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군량을 받고 의창(義倉)에 관해 말하다가 그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葛峯先生文集 권4)
특히 무술년(1598)에 援軍이 永川에 진주하고 있었을 때, 양호(楊鎬)는 갈봉(葛峯)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증정하였으며, 장(張)·진(陳)·주(朱) 3종사는 글(序文)을 지어 갈봉(葛峯)의 덕행과 문장과 충의를 칭송하였으며, 나아가 비문(碑文)을 지어 그의 행적을 영원히 남기려 하였으나 군사가 이동함으로 인하여 비(碑)는 세우지 못하고 글만이 후손이 수중에 남게 되었다.
그로부터 40여년이 지나서 병자호란(1636)이 일어나고 이듬해 삼전도(三田渡)의 맹세가 있었을 때, 80이 넘은 갈봉(葛峯)은 여전히 비분강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관문에서는 삼 년 동안 피리소리로 세월을 보내고, 변방은 천하의 병사들이 내는 먼지로 뒤덮혔는데, 글 읽은 서생을 무엇에 쓰리오, 늙은 검은 갑 속에서 울고 있네."(葛峯先生文集 권3) 라고 절규하였으나, 몸은 이미 늙어 시로써 울분을 달래다가 그해 9월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처럼 갈봉(葛峯)의 '국가적 문제에 대한 선비로서의 우환(憂患)의식'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일관되고 있었다. 명나라 종사관들의 말을 들어 본다.
'꽃과 열매가 함께 무성하다.'는 말을 이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 할 것인가? 실속없이 화려하기만 한 말로 세상을 현혹하는 따위는 하지 않는다. 다만 위로는 공경(公卿)이 있고 다음으로 대부(大夫)가 있는데도, 선비는 사민(四民) 가운데 우두머리로서 창의(倡義)를 높이 일으키고 나라를 도와 헌신하였으며, 양식을 내어 병사들에게 먹이고 재물을 내어 백성들을 모았으니, 자상하고 화락하며 미더움이 넘쳐서 고을 백성들에게는 크게 권면함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칭호가 그를 따라다녔으며, 어진 백성과 사류들은 "진실하도다. 갈봉 의사여!" 라고 하였다. (行狀)
갈봉(葛峯)은 그들로부터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문장(文章)이란 평을 듣기도 할 정도로, 문예적 자질이 있어서는 당시에 확고한 인정을 받았지만, 위의 인용문은 그가 단순히 문예적 재주에만 몰두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는 일개 처사(處士)에 불과했지만 나라가 위태로울 때는 사재를 털어 거의(擧義)에 참여하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꽃과 열매가 함께 무성함(화실병무(華實幷茂)'이란 문장(文章)과 조행(操行)을 함께 갖추었다는 말이다. 즉 문예적 자질과 용기있는 실천을 함께 중시한 것이 그의 삶의 철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광정(李光庭)이 "공은 문장을 짓되 갈고 다듬는데 공을 들이지 않았고 뜻 가는대로 붓을 달려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行狀) 한 것은, 이러한 결단력 있는 자세가 문학 작품에 반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한 한말에 극치를 이루었던 탁암(拓菴) 김도화(金道和)(1825-1912)를 비롯한 퇴계학맥 속에서 이루어졌던 안동지역의 의병운동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한 사례이기도 하다.
갈봉(葛峯)의 정신적(精神的) 정착(定着) - 『지수정기(止水亭記)』
갈봉(葛峯)이 『지수정기(止水亭記)』를 지은 것은 임란(壬亂)이 끝나고 20년째 되던 해이며 본인 나이 64세가 되던 1618년(광해10)이었다. 이 대는 3, 40대의 전쟁 참여와 50대의 과거 응시 등 나름대로 여러 가지 시행착오를 거친 이후였으며, 나이로 보아도 인생의 정점에 서 있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수정기(止水亭記)』는 갈봉(葛峯)이 학문적으로나 사상적으로 정리되고 정착된 나름의 철학을 반영하고 있는 글이다. 저술 시기와 내용에 있어서, 이미 앞에서 검토한 『산 속 정자에 호로 앉아(산정독좌(山亭獨坐)』라는 시와 통하지만, 더욱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자신의 최종적 세계를 서술하고 있다.
오호라, 사군자로 이 세상에 태어나 진실로 원하는 바는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지만, 나아가 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물러나 산림에 처하는 것이 마땅하다. 산림은 선비가 마땅히 머물며 궁구하고 수양해야 하는 곳이다. 평생 배운 것이 실질을 추구함이니, 산림에서 궁구하고 수양하는 것이 어찌 다만 경치를 즐기기 위함이겠는가? 대(臺)와 소(沼)에서 이름을 돌아보고 의미를 생각하여 임경(臨鏡)·소심(小心)·자비(自卑)·향상(向上)에서 낙산(樂山)·낙수(樂水)와 양성(養性)·낙천(樂天)에까지 이르렀으니, 경(敬)에 그침과 효(孝)에 그침과 신(信)에 그침이 어찌 나의 분수 안에 있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즉 이 정자는 단지 물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른바 그칠 곳을 알아서 안정됨이 있고 그 그침에 능히 편안함으로써 지선(至善)의 경지에 그친다는 것 또한 이로써 이룰 수 있을 것이다.(葛峯集 권4, 止水亭記)
이 짧은 인용문에는 갈봉(葛峯)의 인생사, 그에 대한 자신의 반성, 그리고 앞으로의 지향점이 함축되어 있다. 그는 단적으로 '지수정(止水亭)은 단지 물을 그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고 하였다. 즉 자기 자신이 그칠 곳을 알아서 지선(至善)에 그침 즉 '지어지선(止於至善)'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지어지선(止於至善)'이란 물론 『대학(大學)』에서 제시하는 유자(儒者)의 행동 기준이지만, 갈봉(葛峯)에게 있어서 지선(至善)에 그친다 함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는 출사(出仕) 자체를 원천적으로 배제하지는 않았다. 사군자가 진실로 해야 할 일은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거의(擧義)에 나서기도 하고 과거(科擧)에 응시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주변적 상황으로 여의치 않을 때에는 물러나 산림에 은거하는 것이 마땅한데, 이 때에도 그저 '경치나 즐기면서 음풍농월이나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7, 80이 넘어서 지은 우국시(憂國詩)에서도 여전히 현실에 대한 우환(憂患)의식을 느길 수 있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 지선(至善)에 그친다 함은,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과 경치를 즐기고 음풍농월하는' 것 사이에서 선비가 취해야 할 지선(至善)의 경계를 찾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결국 그것은 처사로서 산림에 은거하여 자연적인 삶을 누리면서 본성을 기르고 유학의 이념적 순수성을 지키는 것이었다.
5. 결론
이상에서 갈봉(葛峯) 김득연(金得硏)의 학문과 사상에 대해 고찰하였는데, 구체적인 내용 보다는 외적인 사실이나 정황을 가지고 논한 감이 없지 않다. 갈봉(葛峯)이 장성하여 활동한 나이가 되었을 때는 전시(戰時)이거나 선조말기에서 광해군 대로서 북인정권의 시대이거나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의 시대였다. 그는 일찍부터 처사(處士)의 길을 선택하였고, 자신의 생각은 대개 시(詩)로 읊었으며, 국가적 위기 시에는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지금까지 검토한 바에 의하면, 갈봉(葛峯)의 학문은 가학(家學)과 퇴계학(退溪學)이 접목된 아버지 유일재(惟一齋)의 학맥을 계승한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또한 조목(趙穆)·유성룡(柳成龍) ·구봉령(具鳳齡)·정구(鄭逑) 등의 문하에도 종유(從遊)하는 한편, 권태일(權泰一)·권득가(權得可)·금발(琴撥)·김영(金?)·유우잠(柳友潛)·이경준(李敬遵) 등 주로 유일재(惟一齋)의 문인들과 교유(交遊)하면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정립시켰다. 따라서 그의 학문적 성격은 넓게는 퇴계학맥을 계승하였고 좁게는 좁게는 유일재(惟一齋)의 학맥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철학을 이론이나 학설의 형식으로 피력하기 보다는 시(詩)와 실천(實踐)으로 보여 주었기 때문에 개념으로 정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의 생애에서 나타난 사상적 특징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필자는 그것을, 앞에서 인용한 바 있는 명나라 종사관의 표현을 빌어, '화실병무(華實幷茂)의 철학'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그것은 문장(文章)과 조행(操行) 혹은 문예(文藝)와 실천(實踐)을 함께 중시하는 철학이다. 갈봉(葛峯)은 일찍부터 문학(文學)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졌으며 가사와 시조에 있어서 우리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업적을 남겼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영남유림 사회에서 '안동(安東)이 무사하였던 것은 김득연(金得硏)의 공(功)'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인에 머물지 않고 국가적 차원의 우환(憂患)의식을 가진 선비이기도 했다. 필자는 퇴계학파의 학문적 성격을 이론적 천착 일변도로 파악하는 자세에 대해서, 다른 논문을 통해 그 문제점을 제기한 바 있거니와(退溪哲學에 있어서 實踐의 問題, 논문), 퇴계학맥을 정통으로 계승한 갈봉(葛峯)의 거의(擧義)는 퇴계학(退溪學)이 갖는 실천적 측면에 대한 또 하나의 실례가 된다고 본다.
그의 '화실병무(華實幷茂)의 철학'은 각기 시대와 상황에 따라 표출되었지만,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지수정(止水亭)을 지을 60대 중반 무렵에 가서 자신의 철학으로 정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리고 그 형식은 지선(至善)에 그침 즉 '지어지선(止於至善)'이었다. 문예(文藝)와 실천(實踐) 사이의 지선(至善), 출(出)과 처(處) 사이의 지선(至善), 임금을 섬기고 백성을 윤택하게 하는 것과 경치를 즐기고 음풍농월하는 것 사이에서 지선(至善)을 찾는 것이 그의 학문과 사상의 과제였으며, 처사(處士) 김득연(金得硏)의 평생의 과제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