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며
2000년 밀레니엄 시대가 열릴때 우리는 열렬히 이 해를 희망의 해로 기억했다.
샴페인의 흰 거품은 어느 해보다 높이 뛰어 올랐고, 이제는 새로운 해의 진입으로 저마다의 달뜬 가슴을 안고 있었다..그리고 독서회에서 이원복 교수의 21세기 미래사회를 토론할때는 이시대를 불투명하고 예측 불가능하는 사회로 이해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패러다임은 또 다시 새로운 시각으로 받아들여 져야 했고,타인과의 관계에서 새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 원칙을 딸라야 했다. 그리고 그후, 6년.
독서회도 나도 변함없는 그 자리에서 월요일의 아침 커피는 어느 해보다 달고 포근했음을 고백한다. 8년전 아이를 보대기에 엎고, 육아와 가사노동에 책 한줄 읽지 못하는 현실이 나는 참으로 서글펐다. 아이를 재우는 밤이면 그 시간이 아까워서 책이라도 한줄, 글이라도 한줄 더 나의것으로 만들겠다는 고집은 내 삶을 스스로 그래도 방치 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약속 이기도 했다.
2006년, 도서관의 부재에 관한 논쟁이 정리 되면서, 개인적으로 조금은 편안한 한 해였다.
사회를 진행하면서 모아보니 나는 그런대로 소설과 영화에 관련된 사회를 많이 진행했던것 같다.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은 여러모로 기억에 남는 책이다. 중국 상해와 항주을 여행하면서 느낀 일주일의 중국여행에서 중국 견문록은 참으로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한비야가 그러지 않았던가, 중국은 수문을 열기 직전의 댐이라고.. 한마디로 “핑크빛”이라고 말한 그녀의 진솔함과 특유의 친화력은 책에서 고스란히 묻어났다. 잘 나가는 국제 홍보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7년간의 세계 오지여행과 꿈을 이루는 행동있는 실천을 보여주는 한비야
그녀는 분명 큰 그룻이다. 그리고 잊지못할 동인 문학상을 빛낸 한강의 몽고반점.
책을 읽고 참 난감하고 고민을 많이 했던 기억이 선명한 소설이다.
한강의 화려한 문체, 쉽지않는 소재, 몽고반점 하나로 유추해낸 기발하고 독특한 소설을 우린 어떻게 풀어 내어야 할까?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으로 끌어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뭘까
수상작 선정이유는 현대인이 상실한 몽고반점을 예술적 상징으로 삼아 잃어버린 원초적 순수성의 회복을 시도한 점이라고 했다. 처제의 몽고반점을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을 발견한다는 설정은 감탄이 나는 대목 이었다. 몽고반점 하나로 더불어 나도 고민했던 작품이었다.
5월엔 광안리 에서는 이 해인 수녀님을 만났다.
여고시절, 수녀님의 시 한줄 안 읽고 지나가 버린 시간이 있었을까?
가을되면 시한권을 옆에 끼고 동산에 올라가 곱고 물든 단풍잎을 시집에 끼웠다. 시 한구절, 한구절을 음미하면. 덩달아 마음이 부풀고 시 한줄에 눈물을 흘리던 소중한 시간들이 박제 되어있다. 그래서 시집은 내게 묘한 유년의 추억같은 떨림을 준다.
민들레 영토는 내 삶의 뿌리에서 위안 이었으며,, 휴식 같은 시 였다.
그런데 수녀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5월의 따사로움을 따라 올라간 언덕에 소담한 수녀님의 글방과 따뜻한 이야기들. 2006년도 가장 아름다운 만남 이었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이번 해에 유독 많이 읽었던 중국과 일본 소설,
중국작가 위화와 샨샤는 또 한번 중국의 힘을 보여준 작가들 이었다.
위화의 허심관 매혈기와 샨사의 즉천무후는 사회 진행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을 만나 참으로 행복했다. 일본작가 요시모토 바나나, 바나나를 읽는 방법은 따로있다. 따스한 차 한잔과, 편안히 기대 앉을수 있는 의자와 봄볕처럼 온 몸을 느긋하게 풀어지는 풍광, 여기에 몸을 내맡기고 그가 이끄는 분위기의 파장에 주파수를 맞춘다. 또한 그녀의 소설은 유독 쉼표가 많단다. 여느 소설처럼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 어렵고, 때론 책 읽기가 곤혹 스럽다고 한다. 진중한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가볍게 느껴지는 책일 수도 있으나, 그 가벼움을 통해 고된 일상과 일상의 슬픔, 거기에 짓눌린 무거움을 산뜻하게 들어올려 공중에 띄워 놓는다 물론 허니문은 제목과는 다르게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상처를 통해서 햇볕에 말려가는 작업을 요시모토 바나나는 독자들을 가볍게 풍선처럼 올려놓았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쓰기도 한번쯤 눈여겨 볼수 있어 좋았던 책이었다.
4월 이야기 영화를 이야기 해야겠다.
이와이슌지 감독을 국제 영화제의 오픈 시네마에서 직접 봤다.
“무지개 연가”에 제작을 같이 한 이와이 슌지는 우리가 4월 이야기와 러브레타에서 만난 감독이기도 했다. 그의 영화는 파스텔톤 처럼 은근하고 그리움을 몰고오는 마력이 있다. 4월 이야기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벽장속에 숨겨 놓고 보고 싶은 영화라고.
그만큼 애정을 느끼는 영화인것 같았다. 4월 이야기는 누구나 스쳐 지나온 4월의 한페이지를 기억하게 하는 봄의 영화였다. 4월의 캠퍼스, 그 아련한 기억을 쫒아 첫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봄의 새순처럼 풋풋하고 상큼했다. 4월 이야기를 옥희언니의 새로운 경주집에서 토론했는데, 정갈하게 꾸며놓은 언니집과 그날의 웰빙식사는 오랜 여운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존재감을 흔들었던 하얀성, 노벨 문학상을 따낸 터어키의 오르한 파묵,
난 그분에게 미안하다. 시간이 너무 없었던 한 주라서 급체하듯 책을 읽어내었고, 얇은 기술로 텍스트를 만들었다. 독서회 몇 년에 기교를 부리듯 사이트를 훑어내는 옳치않는 행동에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그 분 책은 특별히 사서 소장하고 두고 두고 읽을려고 나름대로 죄값을 정했다.
오르한 파묵 위대한 터어키 인이다. 그를 통해 터어키는 국제적 문명국가 대열에 선 나라라고 언론이 극찬하고 있다. 조국과 언어에 영광을 가져다 준 하얀성을 세계문학사는 이야기 하고 있다. 하얀 성은 소설의 실제 저자가 문서보관소에서 17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모종의 필사본을 발견하고 그것을 현대어로 바꾸어 세상에 내놓게 된 경위를 밝히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는 곧장 이 진위가 확실치 않은 필사본 속으로 들어간다.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 출신의 노예가 쓴 수기 형식의 필사본이 소설 <하얀 성> 그 자체인 셈이다. 하얀성 이후 이스탄불은 내 가슴에 불이 하나 지펴졌다. 파디샤와 호자의 학문과 세상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 그리고 터어키에 대한 나의 동경심까지..
그리고 다 열거하지 못한 뒷 이야기들, 일상의 편린들, 기억이 나지않는 초기 치매증세와 더불어 노화의 진행으로 안과를 찾았던일. 의사의 처방
“컴퓨터 사용과 책읽기를 제한 하세요”
이 글을 마치면서 괜히 마음이 부풀어 오는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부산시청에서 독서회 단체부문 최우수상과 개인 최우수상이 가져다 준 희열감도 조금은 차지한다는 생각까지 보태어서 참으로 길었지만 짧았던 한해였다. 열거 하지 못한 책 이야기
그 감동은 내 가슴에 머리에 각인 되어있다.
참으로 독서회 회원들 감사하다.
책의 중심을 꿰뚫지못하고 방황만 하며 , 삶의 리듬까지 느슨한데다 상황이 늦은 나에게 이런 지적 충동과 성취감을 끊임없이 선사했으니 말이다. 책이 있어 좋았지만, 그대들도 있었고, 그리고 우리를 꿋꿋하게 받혀준 해운대 바다 너도 그 자리에서 우리 도서관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주어서 고맙구나.
2007년 독서회, 더 나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우리 함께 해요
한 해 참으로 고마웠어요.
첫댓글 한 눈에 정리가 되는 듯한 느낌입니다. 여러모로 독서회가 우리들 마음에 깊이 자리 하고 있네요. 바쁘게만 보냈는데 우리들의 흔적을 회지에 고스란히 남겨 먼훗날 곶감 먹듯이 하나 하나 빼내어 읽어 봐도 좋겠어요. 지영씨 수고하셨어요.
우리모두가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냈다니 참으로 대단한 마음 뿐이네요. 저의 마음 또한 전혜린 마음 입니다. 고맙니다.
함께 토론하지 못한 시간이 넘 많군요. 특히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은 넘 아쉽습니다. 개인적으로 읽고 있습니다. 지영 씨 고마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