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잃었습니다. ● 며칠 전 꽃바구니를 들고 병문안을 가는 길이었다. 신경 써서 만든 꽃바구니인지라, 빼곡히 꽂혀있는 꽃이 꽤 무거웠다. 꽃이 상할까 지하철을 타고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앞에 한 새댁이 잠들어버린 네 살 남짓한 딸내미를 억척스럽게 안고 서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번쩍 안고 있을까 생각하는 동안, 종점에 가까워지면서 자리가 듬성듬성 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한사람은 꽃을, 또 한사람은 잠든 아이를 보듬고 앉았다. 나는 참 아름다운 꽃바구니를 가지고 있었다.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에서 수많은 눈길을 받은 꽃이다. 그런데, 한숨을 내쉬며 지친 팔로 딸을 추스르는 어머니가 쥔 것은, 너무 진부하기는 하지만, 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우리는 똑같이 꽃을 들었네요.’/ 내 쭉 째진 눈으로 지친 그이가 알아차렸을 리 만무한 다정한 눈빛을 건넸다. ● 젊은 시절은 신파에 감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점점 나이가 들수록 소위 달달한 미학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인생이 녹록치 않음과, 얽히고 설킨 관계에서 오는 위로가 일종의 마약같은 안위를 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기 때문일 것이다.
김지혜는 일상적 인물, 혹은 일상적으로 보이도록 의도된 인물들을 주로 표현한다. 이를테면, 뾰로통한 입으로 잡은 손을 따라가는 소녀, 누운 여자의 뒷모습, 아기를 안은 할아버지, 해맑게 응시하는 아가 등 작가 주변에서 일상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는 장면이나, 영화잡지의 스틸 컷, 배우의 인터뷰, 할머니와 어머니, 특정 개인들의 초상이 작가의 전적 기호(嗜好)에 의지하여 취사선택된다. 그렇지만, 장면이 존재할 뿐 내러티브를 개입시키지는 않는다. 따라서 묘사된 인물을 바라보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동물적 직감, 가령 아이가 화가 난 것 같다거나, 기대어 누운 모습이 무료해 보인다거나, 혹은 두 사람 사이에 끈끈한 무언가가 흐르고 있다는 불확실하지만, 암시된 ‘인상’에 의존하게 된다. 이는 인물에서 구체적인 행동-맞쥔 손 등으로 소재가 전이된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작가 스스로 지극히 개인적이면서 감상적인 피사체를 선택함에 있어 애당초 단일한 구성원리나 설화적 의미를 거부함과 동시에, 서로 교감이 일어나는 바로 그 찰나를 찾아 방점을 찍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아이를 안은 여인과 꽃을 든 나’ 사이에 일어난 바로 그 교감이다. 따라서 이 사소한 방점은 매우 다층적 함의를 내포한다. 묘사된 개개인들은 작가가 일으킨 교감을 포함하되, 아울러 관람자들이 제3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중용적 교감, 일반화된 교감 역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작품이 소수 호사가들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독창적인 귀중품 즉 소통 불가능한 '타자화 된 대상'에 그치는 것에 머무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소통을 원하는 윌리암 모리스가 말한 '대중예술로서의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사용하는 표현방식과도 연결된다
작가는 ‘관찰된 인물, 감정, 태도’라는 감상적이며 소예술(lesser arts)적인 소재를 가지고 광목, 비단, 융이나 타프타 등의 천과 단색조의 실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를 다듬어낸 수공적인 솜씨 등이 더해지면, 이 작품은 곧바로 그 유명한 퀼트의 여성주의적 함의들을 떠올리게 한다. '여성들만의 독특한 삶, 감성 그리고 망조직으로 구성된 정치학의 모양새'를 갖고 있는 바로 그 퀼트미학 말이다. 그렇다면 작가 김지혜 역시 퀼트의 공예적 특성과 두드러진 장식성에 동의하는 것일까? 또는 서구 페미니즘 미술역사에 서장을 장식하는 퀼트의 역사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퀼트의 독특한 감성들을 전적으로 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형식적 표현들은 퀼트의 공예적 특성을 빌어 순수예술에 대립하거나 여성적 감수성을 앞세워 남성적 제 도에 반하고자 하는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공예적인 인위성과 말끔한 마감을 의도적으로 탈피하려 다양한 회화성을 도처에 심는다. 회화의 캔버스의 재료로 주로 사용되는 광목의 사용이나, 단색조의 실을 쓰되 마치 드로잉의 거친 선처럼 매듭을 화면 밖으로 노출시킨다거나 실밥들을 의도적으로 보이게 처리하는 것. 또는 화면의 일부분을 물감으로 마감하고 심지어 작품을 설치할 때조차 너덜너덜한 천이 그대로 노출된 채 걸리도록 의도한다. 만약 필자가 말리지 않았다면, 모든 작품들이 틀을 거부한 채, 설치미술보다 더 거친 모습으로 전시되었을 것이다. 이 거친 마감과 의도된 형식파괴의 작업들은 그녀가 공예적인 것과, 순수예술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순수예술과 공예의 역관계를 이용, 공예의 속성을 취하되 공예가 아닌 또는 그것을 슬쩍 흉내 낸 미술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록 명확한 이슈나 내러티브가 부재할 지라도, 여성적이며 감상적이어서 자칫 약할 수 있는 일상적 소재들을 공예적 속성을 부가함으로써 한층 힘을 실어줌과 동시에 대중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적절한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네오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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