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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 둘째 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3장)
신앙고백
찬송 40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기도 이원준 장로,하경숙 권사,조용림 권사,염성섭 장로,(549)
성경말씀 요한복음 13:31~38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사랑의 멍 자국
찬송 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
광고 코로나 19 예방을 위해 마스크 착용(3차 전수검사 협조에 감사)
설동주 집사님 이번 주 퇴원 예정(함께 기도) 새가족, 임소환 권사
찬송 515 뜻 없이 무릎 꿇는
축도 아프니까 그만 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큰 위로가 되었던 말이 있습니다.
코로나는 코리아를 이기지 못한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국민은 이번 3차 펜데믹pandemic도 극복했습니다.
정말 대한민국은 위대합니다.
우리 국민이 영웅입니다.
바로 우리 성도님들이 영웅입니다.
우리 관계자 여러분께 힘찬 박수를 보냅니다.
우리나라는 경제, 사회, 문화, 의료 등
모든 분야에서 세계를 선도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정치, 기래기같은 언론, 검찰 개혁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께서 마무리를 잘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31절입니다.
유다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도다
하나님께서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32절, 만일 하나님이 그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께서도 자기로 인하여 그를 영광케 하시리니
이제 곧 그 영광을 그에게 주시리라
33절,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내가 일찍이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절,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번 폭설과 한파가 57년만이라고 합니다.(제주도 경우)
그런데도 우리 권사님들께서 감기 한 번 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렇게 추운 날에는 새벽 4시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새벽 5시가 넘으면 출근을 합니다.
혹시 난방은 잘 되고 있는지 걱정 때문입니다.
또 한가지 걱정은
우리 한귀자 권사님께서 뼈 가죽만 남았습니다.
목사인 저하고 벌써 8년째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권사님 왜 이렇게 마르셨지요?
그랬더니 못 먹어서 그래요.
그 순간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은 듯 띵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도 없고 죽 몇스푼 드시는데 얼마나 살이 찌겠습니까?
그러나 목사인 저는 못 먹어서 그래요.
이 말씀에 깊은 페이소스pathos를 느낍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졌습니다.
제가 새벽같이 나와서
우리 한귀자 권사님 식사를 떠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선생님들께서도
저와 똑같은 마음가짐으로 대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우리 남기열 권사님께서 폐에 물이 차서 치료 후 퇴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숨이 차서 통 식사를 못 하십니다.
그래서 제가 떠 드리면 좀 더 드십니다.
이 일이 제 새벽 숙제입니다.
목사인 제가 이렇게 공치사를 하는 이유는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34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러나 사랑이란 놈 때문에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합니다.
그만큼 복잡하고 괴롭고 어렵습니다.
지난 1월 1일에,
우리가 설동주 집사님 기도가 막혀 실신했습니다.
그리고 뇌사로 가기 2,3분차이로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기적입니다.
한 생명을 살렸습니다.
마치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듯한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병원에 심방을 가서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해 드렸습니다.
설동주 집사님께서 짜증을 내시며 죽고 싶다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는 설동주 집사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목구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는데
그런 줄도 모르고 하시는 말에 서운했습니다.
새벽같이 나와서
우리 남기열 권사님 밥 한스푼이라도 더 드시게 하려고
갖은 아양을 다 떨면서 노력하는데도 못 먹겠다고 하실 때
서운합니다.
사랑이란 놈이 이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도 또 다시 설동주 집사님 심방을 갔습니다.
간호사 심부름에 의료 소모품을 사다 드리고
궁금해할 따님과 통화를 시켜 드렸습니다.
그리고 임규철 집사와 점심을 먹고
전주까지 백 권사님 약 처방을 받으러 갔습니다.
이런 일들을 목사인 제가 궂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고 나니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리고 수원에 계시는 한 목사가 암으로 많이 아픕니다.
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제 가슴 언저리가 얹힌 것처럼 답답합니다.
함께 여행도 가고 싶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가면 그냥 쓰러지고 맙니다.
그리고 어둑한 새벽 5시면 다시 일어나 어둠을 헤치며 출근을 합니다.
이렇게 하루도 쉬지 못하고 10년을 넘게 살았습니다.
주님, 목사인 저는 이렇게 소소하게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인가 싶습니다.
3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절,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예수님께서 사랑한 베드로의 호언장담입니다.
참 기가 찹니다.
눈물도 납니다.
우리네 인간이 이렇습니다.
목사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을 때만 호언장담합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이 죽음인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2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누가복음 6장 36절입니다.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로기온입니다.
Be perfect!
완벽한 사랑아니겠습니까?
크리스찬이 아니더라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습니다.
나쁜 놈들도 할 수 있습니다.
짐승들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목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입니다.
그래서 뭔가는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못 된 짐승이 아니고서는 은혜도 모르는 나쁜 놈들이 아니고서는
서로 다투고 미워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겠습니까?
디아코니아, 섬김입니다.
요한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처럼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본질입니다.
목사인 제가 참으로 어렵고 괴로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의 괴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메타노이아가 괴롭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진정한 회개가 무엇이겠습니까?
천지개벽하듯이 우리의 삶이 개벽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메타노이아를 통하여 개벽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의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회개를 통하여 주님을 만나면 진정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겠습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은 한 가지뿐입니다.
메타노이아입니다.
회개입니다.
눈물입니다.
이것이 천국에 이르게 하는 문입니다.
이것이 Who am I ?
잃어버린 나 자신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가을에 피는 국화를
이승과 저승 사이에 피는 꽃이라 합니다.
그래서 삶과 죽음을 중재한다고 해서 장례예식장 조화로 사용됩니다.
그리고 가을에 고창 선운사에 가면 상사화(꽃무릇)가 가득합니다.
우리 집 화단에도 상사화가 한몫합니다.
단풍이 붉게 물들기도 전에 붉은 상사화가 땅에서 먼저 피어납니다.
마치 터지는 불꽃 같고, 양귀비 속눈썹 같기도 합니다.
이 상사화도 이승과 저승을 연결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산사에 많이 심습니다.
순이 봄에 먼저 나왔다가
잎이 다 진 후에 꽃이 핍니다.
꽃과 잎은 평생 서로 만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꽃말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슬픈 추억입니다.
그래서 스님을 사랑한 여인이 죽어서 상사화로 피었다고도 합니다.
목사인 제가
이승과 저승 사이에 피는 꽃을 말한 것은
바로 이 말하기 위함입니다.
사랑은
죽음과 부활의 징검다리입니다.
저는 결혼이라는 것이 사랑의 결정체인가 싶습니다.
지금 이혼율이 50%가 넘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혼했어요” 이런 TV프로그램까지 있습니다.
잡상스럽습니다.
이혼한 부부들이 나와서 연애하듯이 지내는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변했습니다.
이혼을 미화시키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망측스럽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결혼의 결정체이겠습니까?
의문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코로나19에 삶을 도둑맞았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우리는 절제를 통해서 잘 극복하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 달이면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할 것입니다.
바로 사랑이 이런 겁니다.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내를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사랑 아니겠습니까?
사랑은 우리 삶의 서투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의 배경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기 위해서 가는 마지막 길입니다.
이 길목에서 소경 바디메오를 만났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0절입니다.
소경이 겉옷을 내어 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소경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처음 만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소경 바디매오는 거추장스러운 겉옷 따위를 벗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뛰어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어서 거추장스러운 겉옷은 무엇입니까?
이 거추장스러운 겉옷 때문에
소중한 인생을 망가트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거추장스러운 것이
체면은 아닙니까?
명예는 아닙니까?
아니면 우리가 그렇게 집착하고 있는 돈입니까?
아니면 가짜 사랑입니까?
이 거추장스러운 것들 때문에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까?
그렇다면
이 거추장스러운 겉옷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진정한 사랑을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한 사랑이란 진정한 우리의 삶이기도 합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묻을 것입니다.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소경 바디메오는 Rabbuni ! I want to see.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소경 바디메오에게
눈을 뜨기를 원하는 것보다 무엇이 더 소중하겠습니까?
이와 똑같은 질문을 세벳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도 했습니다.
What do you want me to do for you?
그런데 이 두 놈은 예수께서 세상의 임금이라도 되면
영의정(국무총리), 죄의정(부총리) 벼슬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소경 바디메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장 5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경 바디메오는 돈보다, 명에보다, 체면보다
세상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기를 원했습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세상을 똑바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눈을 떴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벗겨졌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런 기사와 이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엊그제만도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우리 설동주 집사님께서 기도가 막혀서 시퍼렇게 죽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모두가 증인입니다.
그때 우리는 한마음으로 설동주 집사님을 살려 달라고 몸부림쳤습니다.
이제 우리 설동주 집사님께서 병원에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기적 아니겠습니까?
다음 주면 퇴원을 해서 우리들 곁으로 오실 겁니다.
바로 기사와 이적은 믿는 자의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뇌를 남기지 않고 심장을 남겼습니다.
심장이 있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 벽화에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놓고 깃털과 무게를 비교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아누비스 옆에 앉은 괴물의 먹이감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 양심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깃털보다 더 무거운 죄의 멍 자국이 있습니까?
감사합니다.
기도 1 / 참 좋으신 주님, 오늘이 신축년 새해 둘째 주일입니다.
57년만에 폭설과 한파가 찾아왔습니다.
코로나19에, 한파와 폭설에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우리들의 몸과 마음까지도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이러할 때 주님의 사랑으로 이 세상을 녹여 주시옵소서.
지금 우리 모두가 어렵습니다.
너무나 힘이 듭니다,
이럴수록 서로 절제하고 양보하는 미덕이 있어야겠습니다.
사랑이신 주님,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사랑을 가르쳐 주옵소서.
사랑을 배우게 하옵소서.
사랑을 실천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기도 2 / 우리의 신앙 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용궁에 간 토끼처럼 간을 집에 두고 다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과 양심을 집에 두고 다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시간 우리의 신앙과 양심과 사랑이 회복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 3 / 신앙의 본질이 섬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섬기며
얼마나 사랑하며 살고 있느냐가 신앙의 척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을 사랑의 저울 위에 올려놓습니다.
깃털보다 무겁습니까?
신앙과 양심에 멍 자국 때문에 괴롭습니까?
회개합니다.
그리고 무거운 삶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자 하는 심정으로
헌금을 합니다.
주일, 주정, 감사 헌금을 드립니다.
드린 손길들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도 /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진심으로 사랑하며 살기를 원하는 우리 성도님의 머리 위에 자녀들 위에
그리고 병상에서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회복하고 있는 우리 설동주 집사님 머리 위에
그리고 새 가족이 된 임소환 권사님 머리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