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거룩하고 복된 주의 날에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성도님께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의 제목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지만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백여 명의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는데, 올라가시면서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이 약속, 재림을 믿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일부만 믿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심판을 가르치는데 이단은 너무 여기에 치우치거나, 그리고 자기들만 구원받는 줄로 주장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재림과 종말, 심판을 가르치지 않으면 이 또한 바른 기독교가 아닙니다. 반드시 가르쳐야 하고 강조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면 "인자의 날, 인자의 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즉 재림의 때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에 중심을 두고 사역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종말이 있고 심판이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원주임과 동시에 심판주이십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다고 해서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심판이 없다면, 심판하지 않으시면 그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세상에 공의가 있습니까? 정의롭습니까? 불의와 불법이 가득합니다. 바로잡아보겠다고 개혁을 하고 정권이 바뀌고 심지어 혁명이 일어나도 여전합니다. 세상 나라는 완전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세우고 법과 제도를 만든 사람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로잡는 것인지 보복하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기에 심판도 의롭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기에 심판도 완전합니다. 이 모든 것을 바로잡고 바르게 심판하실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최종 공의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종말이니, 재림이니, 심판이니 하는 말 자체를 듣기 싫어합니다. 갈수록 현대의학과 과학문명이 발달하여 질병도, 고통도 없는 편리한 세상이 오고 평화가 오는데 무슨 종말이니, 재림이냐고 합니다. 의학이 발전하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더 무서운 범죄, 상상도 못할 새로운 범죄가 일어납니다. 윤리와 도덕이, 양심이 땅에 떨어져버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 임금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그야말로 마지막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다가올수록 징조와 표적이 있습니다.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고 민족과 민족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처처에 지진과 기후변화로 인한 기근과 재앙이 발생할 것을 말씀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놓은 핵무기로도 지구 전체를 몇 번이나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인간과 동물의 유전자 변형도 가능한 의학은 모든 질병을 다 고칠 것 같지만 도리어 상상도 못할 위험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뉴럴 링크를 통해 짐승과 인간의 DNA를 결합하여 새로운 종을 만들려고 하고, 로봇과 인간이 결합된 인조인간의 출현을 앞두고 있습니다. AI가 나왔지만 곧 AGI가 나옵니다. AI는 한 영역, 한 분야만 전담하지만 AGI는 인간처럼 여러 분야(청소, 스포츠, 게임, 문학, 법률 등)를 동시에 다룹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인간의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고 인간을 지키고 구할 수 있는 존재를 등장시키겠다는 것이 이 산업의 공공연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것인데 성경은 마지막 때가 되면 이런 일들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컴퓨터 공학자들이 앞 다투어 개발하는 것이 양자컴퓨터입니다. 왜 양자컴퓨터 개발에 국가적으로 승부를 거느냐면 이 컴퓨터가 세계를 지배할 게임 체인저가 되기 때문입니다. 양자 컴퓨터는 지금까지의 모든 컴퓨터 기능과 속도를 압도하는 정도만 아니라 모든 컴퓨터의 보안장치나 비번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모든 전산, 인터넷, 보안을 다 장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증권이나 은행거래, 항공, 운수, 의료, 안보 시스템 등 모든 전산업무를 한 순간에 마비시킬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핵무기를 가졌느냐, 가졌다면 얼마나 가졌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양자 컴퓨터를 어느 나라가 먼저 개발하느냐에 따라 누가 세상을 지배할 것인지 결정된다고 합니다. 세상은 마지막을 향해 더 빨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인자의 날에, 즉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 심판과 동시에 성도에 대한 구원도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홍수로 심판받았지만 노아와 그 가족은 구원받았습니다. 소돔성은 불로 멸망 받았지만 롯은 그 성을 빠져나왔습니다. 마지막 때도 심판과 구원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시험 때가 되면 공부 안한 학생에겐 심판의 날과 같겠지만 열심히 공부한 학생은 선생님께 인정받고 칭찬받는 날과 같은 것처럼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세상은 심판과 환란의 날이나 성도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살전 4:16,17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들이 주님을 맞이하고 영접하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을 믿습니다.
노아시대에 왜 홍수 심판이 있었습니까? 왜 하나님은 홍수로 세상을 심판했을까요? 왜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시켰습니까? 하나님께서 왜 세상을 그렇게 심판했을까요?
1.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해집니다(롬1:28). 윤리도덕이 마비가 되고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내어주고 모든 더러운 것을 육체의 욕망대로 행합니다(엡4:19). 소돔성도, 노아의 홍수 때도 그랬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여호와께서 사람들의 죄악이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라고 합니다(창6:5). 소돔성에 대해서는 “그 성의 죄악이 심히 무거우니”라고 했습니다(창18:20). 에스겔 16장 49절에서는 소돔의 죄를 지적한 것이 나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고 합니다. 쌓고 모으는 것만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곳에 흘러가게 하는, 베풀고 나누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다.
또한 벧후 2:7에 보시면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했다고 합니다. 유 1:7에도 기록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 소돔성은 육신의 쾌락을 좇아 온갖 동성애와 음란이 난무하고, 하나님께서 가증이 여기는 죄악이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죄 때문에 하나님도 심판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죄 때문에 심판받는 것입니다. 소돔성의 멸망을 언제나 거울로 삼아야 합니다.
2. 죄가 있다고 다 심판하는 것은 아닙니다. 회개하지 않기에 심판하는 것입니다. 죄인이라고 다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라도 회개하면 용서하시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니느웨이성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 회개하라고 전했을 때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이 다 금식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돌이켰습니다. 심판하겠다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심판하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이 다 망한다면 우리도 벌써 망했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죄인이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24장 6절에 보면 하나님은 죄를 녹슨 가마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피를 흘린 성읍, 녹슨 가마 곧 그 속의 녹을 없이하지 아니한 가마여, 화 있을진저 제비 뽑을 것도 없이 그 덩이를 하나하나 꺼낼지어다”라고 합니다. 죄를 녹에 비유했습니다. 가마솥이 녹슨 채로 사용할 수 없듯이 죄를 가지고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제비뽑을 것도 없이 다 깨어버리겠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가마를 비우고 숯불 위에 놓아 뜨겁게 하여 그 속에 더러운 것을 녹게 하며 녹이 소멸되게 하라고 합니다. 녹을 제거해야만 가마를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녹을 닦아내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와 회개로 죄를 닦아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보혈만이 우리 죄를 사하는 줄 믿고 나아와 돌이키는 것입니다. 잘못된 길에서, 잘못된 방법에서 돌이키고 다시는 그 길을, 그러한 방법을 따르지 않겠다는 결단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용서받는 길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회복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노아 때도, 소돔성도 돌이키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멸망한 것입니다.
당시에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이 그곳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몇 명의 의인이라도 있었으면 그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심판을 면하거나 연기시켰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입니다.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의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의인이 없을 때에 그 성은 망하고 맙니다. 강한 군대가 성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중에 거하는 거룩한 자녀를 보시고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의인 열 명이 그 성을 멸망으로부터 지키는 파수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소금이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는 것처럼!
오늘 예수님께서는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마지막 때는 소돔성과 같고 노아 때와 같을 것이라고 하시며 "롯의 처를 기억하라"하십니다. 즉 롯의 아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 즉 구원받지 못했는지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왜 끝까지 구원받지 못했습니까?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소홀히 여겼습니다. 소돔을 탈출하면서도 여전히 세상 것을 사랑했고 미련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보다 소돔성의 풍요를 사모하고 그리워했습니다. 그것이 결국 뒤를 돌아보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좌로 우로 치우치고 뒤돌아보게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발걸음은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마음은 뒤에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몸은 소돔과 고모라를 벗어났지만 마음은 아직도 그 죄악의 도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몸은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애굽을 떠나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몸은 홍해를 건넜지만 마음은 아직도 애굽에 남아 있었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것은 그와 같이 되지 마라는 주님의 간곡한 부탁입니다. 롯의 아내처럼 되지 말고 믿음에 굳게 서서 온전히 구원받은 성도가 되라는 것입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세상의 명예와 영광과 권세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여 구원의 은총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 때에 세상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우리가 받은 구원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리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