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차지하게 하셨네.”(2테살 2,14)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한가위, 가을 추수의 기쁨을 가족들과 함께 나누며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조상 친지들을 기억하는 수확의 계절 9월도 벌써 중순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기록적인 폭염과 습한 날씨로 기후 환경의 위기, 생태 환경의 위기를 절감할 수밖에 없는 요즘입니다. 순교 성인들을 기억하며 순교자 성월을 보내는 9월의 넷째 주일, 전례력으로 연중 제 25 주일인 오늘 이 미사 안에서 듣게 되는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 앞에서 가장 큰 사람, 하느님께 첫째가 되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우선, 오늘 제 1 독서의 지혜서의 말씀은 하느님 안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의인들이 악인들에 의해 고통 받는 모습을 전합니다. 악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에게 덫을 놓자. 그자는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율법을 어겨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나무라고, 교육받은 대로 하지 않아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탓한다. 그의 말이 정말인지 두고 보자. 그의 최후가 어찌 될지 지켜보자. 의인이 정녕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하느님께서 그를 도우시어,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내실 것이다.”(지혜 2,12.17-18)
악인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의인들과 비교되기에 의인들을 시기할 뿐만 아니라, 그들을 죽이려고 덫을 놓으면서 끈질기게 괴롭힙니다. 악인들은 의인들의 인내력을 시험하고, 그들이 겪어내는 아픔을 즐기는 가운데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악인들이 하는 말 그대로,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보호해주실 것이며, 적대자들의 손에서 그를 구해 주시고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복음 말씀은 마르코가 전하는 복음 말씀으로서, 지난 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에 이어지는 두 번째 수난 예고의 말씀입니다. 지난 주 복음 말씀 중에서 카이사리아의 필리피 지역으로 가시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물음 뒤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를 묻습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명답변을 하게 되고 이후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앞으로 겪게 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그 후에 있을 부활을 말씀하시면서 마르코 복음 안에서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감히 예수님의 말씀을 중간에 끊고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자 예수님은 그를 사탄이라 규정하시고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을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그 같은 태도는 바로 사탄과 다름 아님을 통렬하게 지적하십니다. 그 후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들은 각자 자신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신 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마르코 복음 안에서의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이에 대해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마르 9,31-32)
예수님이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실 때 베드로가 사탄이라 지탄받던 모습이 떠올라서였던 것인지, 제자들은 예수님이 두 번째로 수난 예고를 말씀하실 때, 분명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감히 그 누구도 그 말씀의 의미를 묻는 것조차 두려워 아무도 묻지 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용기조차 없는 비겁하고 치졸한 제자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염치없는 제자들의 모습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심해져 이제 정말 가관의 모습을 보이기에 이릅니다. 그 순간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마르 9,33-34)
모르는 것을 모른다 말할 용기도 없으면서,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는 염치없는 제자들이 그래도 예수님 곁에서 제자라고 뽐내고는 싶었는지, 그들끼리 자리다툼을 하며 더 높은 자리, 더 나은 자리를 차지하고자 말싸움에 이은 논쟁을 벌였던 것입니다. 아주 가관 그 자체이며, 꼴사나움의 절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런 논쟁을 벌였다는 사실이 스스로 부끄러웠던지 제자들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이 묻는 질문에 또 대답하지 않고 입을 열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물음에 입을 열지도, 모르는 것을 묻지도 않는다는 점에서는 시종일관 뚜렷하고 일관된 모습을 보이는 제자들입니다. 이에 예수님도 답답하셨던지 열 두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윈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5ㄴ-37)
예수님이 제자들을 두고 하시는 이 말씀 가운데 첫 문장,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의 꼴찌,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은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스스로 겸손과 겸양을 실천하라는 뜻으로 단순하게 이해될 수 있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말씀이 담고 있는 참된 의미는 그 다음에 이어지는 어린 아이 하나를 두고 하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온전히 담겨져 있으며,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어린이들이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의미가 보다 더 확실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어린 아이는 아직 성숙한 어른으로서 자라지 못한 그 미숙함으로 인해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20살이 넘은 성인 남자만을 온전한 하나의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유다인들의 문화는 여자와 어린 아이들을 천대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화 안에서 예수님이 어린 아이 하나를 품에 안고 그 아이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예수님을 그리고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말씀하시는 것은 당시 유다인들에게는 그들의 상식을 완전히 깨부수는 파격 그 자체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들끼리 더 높은 자리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지, 얼마나 꼴사나운 짓인지 그들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충격적 방식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사람으로도 여기지 않는 이 어린 아이 하나, 울고 싶으면 웃고 싶으면 웃으며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땡깡 부리는 이 어린 아이만도 못한 제자들 그들 스스로의 모습을 깨닫고 하느님 안에서 가장 큰 사람, 첫째가는 사람이 되기 위한 방법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옆에 있는 사람을 밟고서라도 더 높은 곳으로 더 나은 자리로 올라가는 것이 세상 안에서 성공하는 방법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렇게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더 나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삶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는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삶이 과연 진정 행복하고 기쁜 삶인지 우리 스스로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말하는 행복과 성공의 가치는 우리의 메마른 삶에 더 심한 갈증과 허기짐만을 일으키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 2 독서의 야고보서가 이야기하듯, 시기와 이기심이 가득한 곳에는 혼란과 온갖 악행만이 가득하며 여러 욕정들로 인한 분쟁과 싸움만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야고 4,2-3)
사랑하는 송동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환호송의 말씀을 기억하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하느님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부르시고, 복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가 차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헛된 기쁨, 가짜 행복이 아닌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과 참 기쁨을 누리고 향유할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해 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 아버지 그 분이십니다. 그 하느님을 믿고 그 분이 일러주는 복음의 길을 따라 나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나에게 주어지는 내 삶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이 먼저 걸으신 그 뒤를 따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가장 큰 사람, 하느님께 첫째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 하느님을 믿으며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참된 지혜를 통해 순수하고 평화로우며 관대하고 유순한, 자비와 좋은 열매가 가득한 삶, 편견과 위선이 없는 의로움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백성의 구원이다.
어떠한 환난 속에서도 부르짖으면 내가 들어 주고, 영원토록 그들의 주님이 되어 주리라.”(입당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