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연기
손 창 섭
어슴푸레한 등잔불 밑에서 아이들의 작문을 채점하고 있노라니까, 아랫방에서, 또 좀 내려오시라는데요, 하는 정숙(貞淑)의 조심성 있는 음성이 들려왔다. 네, 곧 내려가리다 하고, 동식(東稙)은 정숙(貞淑)이보다도, 오히려 전 신경을 귀에다 모으고 초조해 앉았을 성규(聖奎)의 그림자 같은 모양을 눈앞에 그리며, 성큼 대답은 하고서도 좀체 일어서려고 하지는 않았다. 작문지를 가지런히 추려 책상 한 귀퉁이에 밀어놓고 나서도 멍하니 앉아 있는 채동식(東稙)은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
쉴 사이 없이 입으로 성규(聖奎)가 발산하고 있을 폐결핵 균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가끔 가다 돌발하는 성규(聖奎)의 그 어처구니없는 발작을 감당하기가 끔찍해서도 아니다. 슬픈 운명을 지닌 처자를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고 앉아 있는 젊은 남편과, 그처럼 죽기 싫다고 발악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 그 생명이 진해가는 남편을 지키고 있는 젊은 아내―—이렇게 암담한 부부와 대해 앉을 때, 무엇으로든 그들을 위로할 턱이 없을 뿐 아니라, 동식(東植)이 자신 그러한 절망의 고랑창으로 휩쓸려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짜증에 가까운 성규(聖奎)의 어투로, 얼른 좀 내려오지 않고 뭘 꾸물거리고 있느냐는 재촉을 받고서야, 동식(東直)은 마지못해 일어서 아랫방으로 내려갔다. 먼지와 그을음과 파리똥으로 까맣게 전, 창 하나 없는 벽과 천장 구석구석에는 거미줄이 얽혀 있고, 때고 또 때고 한 장판 바닥에서는 먼지가 풀썩풀썩 이는 음침한 단칸방이었다. 이 방에 들어설 때마다 동식(東稙)은 어느 옛날 얘기에나 나음직한 끔찍스러운 괴물이라도 살 것 같은 우중충한 동굴을 연상하는 것이었다. 언제나처럼 성규(聖奎)는 그러한 방 아랫목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들어오는 동식(東植)을 노리듯이 지켜보고 있었다. 편포¹같이 엷어진 흉곽과 거미의 발을 생각게하는 가늘고 길어만 보이는 사지랑 생기 없는 전신에 비하면 이상하게도 그 눈만은 낭랑히 빛났다. 그러나 그것도 생기와는 성질이 다른 안광인 듯했다. 온몸의 정기가 눈으로만 몰려 마지막 일순간에 퍼런 불이 펄펄 타오르는 것 같은, 그러한 눈이었다. 동식(東植)은 성규(聖奎)의 그 눈이 싫었다. 성한 사람에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귀기가 서린 눈이었기 때문이다. 귀신이 있다면 저런 눈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두 어린것이 자는 옆에서 과자 봉지를 붙이고 앉아 있는 정숙(貞淑)이가, 널려 있는 신문지며 풀 그릇 같은 것을 치우고 내어주는 자리에 동식(東植)은 성규(聖奎) 쪽을 향하고 앉았다. 성규(聖奎)는 동식(東植)의 앉는 자리에까지도 몹시 신경을 썼다. 자기 곁으로 다가앉지 않고 윗목으로 떨어져 자리를 잡기라도 할 말이면, 성규(聖奎)는 그 야윈 얼굴을 찡그리며, 병독 있는 자기의 호흡을 꺼리기 때문이 아니냐고, 그럴 거라고, 나는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이라 죽음만을 생각하고 있지만 자네야 이제부터 생을 향락해보려는 야심가니까, 응당 나 같은 병독체가 무섭고 싫기만 할 것이라고, 고개를 노죽스레² 주억거리는 것이었다. ‘생을 향락하다니? 생의 어느 구석에 조금이라도 향락할 수 있는 대견한 요소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묻고 싶은 걸 참는 동식(東植)은 별반 병균을 꺼리거나 겁내서 일부러 자리에 간격을 둔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렇다고, 성규(聖奎)의 감정이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서, 조금도 자네의 병을 무서워하거나 싫어하는 게 아니라고, 보란 듯이 얼른 성규(聖奎) 곁으로 자리를 옮겨 앉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었다. 그러한 동식(東植)이 역시, 그 다음번부터는 의식적으로 성규(聖奎) 곁에 바싹 다가, 앉아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퍼런 불길이 이는 눈으로 들어오는 동식(東植)을 노려보고 있던 성규(聖奎)는 아무리 송장 같은 내 말이라도 자네 양심에 꽤 아프게 찔렸나 보지, 하지만 마지못해 내 옆에 와 앉아준댔자 고마울 것도 없으니, 속으로만 께름칙해 하지 말고 아예 저만큼 물러나 앉게, 그게 더 솔직해 좋지 않으냐고 비꼬아
보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러는 자네의 우정이 진정 고맙긴 하네, 그렇지만 성한 사람이 일부러 병균을 들이마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조금도 주저 말고 멀찍이 물러나 앉으라고 호젓한 소리로 중얼거리는 수도 있었다. 그런 때 그 호젓한 음성에 끌려 바라보는 동식(東稙)의 눈에, 뼈와 가죽만 남아 살색 이 꺼멓게 죽은 성규(聖奎)의 두 볼을 흘러내리는 눈물이 불빛에 번득이기도 하였다. 그런 경우에야말로 도리어 동식(東直)은 민망했다. 그가 이렇게 매일 밤이다시피 불려 내려오는 것은 결코 성규(聖査)에게 대한 우정에서가 아니었다. 성한 사람들 사이에도 쉽사리 정이 통해지지 않는 동식(東植)의 생리로서 송장이나 다름없는 성규(聖奎)에게 별로 정이란 것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일부러 느즈막해서 퇴근해 돌아오는 길에, 오늘쯤은 성규(聖奎)가 죽어 있었으면 하는 기대 (?)조차 품어보는 동식(東植)이었다. 그러한 그가 아랫방에서 부를 적마다 필경 내려가곤 하는 것은 그야말로 마지못해서였고, 그와 같은 감정을 구태여 합리화시킨다면 차라리 정숙(貞淑)을 위해서였다고나 할까? 주야로 환자의 터무니없는 푸념을 혼자 꼬박 겪어내야 하는 정숙(貞淑)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서 이기는 했다.
묻는 말에 대답하는 것 외에는 별로 말이 없는 정숙(貞淑)은 키가 작고 통통한 몸집과 가무잡잡한 얼굴에, 또한 유달리 새까만 눈이 언제나 젖은 것처럼 서늘하게 밝고, 총기 있게 빛났었다. 입보다도 눈으로 더 많이 감정을 나타내는 여인이었다. 폐결핵 말기의 남편을 위시해서 어린것까지 네 식구의 생활이, 과자 봉지를 붙여 약간 보탠다고는 하나, 대부분 동식(東植)의 경제력에 의헤서 유지되고 있는 요즈음이라, 그렇게 밝기만 하던 정숙(貞淑)의 눈이 차츰 몽롱하게 흐려져 가는 것 같아, 동식(東植)은 동정과 함께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의무감을 더 한층 아프게 맛보는 것이었다.
오늘밤만 해도 벌써 몇 주일째 밀려오는 아이들의 작문을 대강이라도 읽고 일일이 점수를 매겨 정리해 치우려면 결코 두세 시간에 될 일이 아니지만, 자기가 내려가지 않으면 밤새껏 정숙(貞淑)이가 혼자 시달림을 맣아야 할 것이 애처로워 이렇게 내려와 앉은 것이었다.
동식(東植)의 앉는 자리에 따라 성규(聖奎)의 신경이 과민하게 자극을 받고, 그러므로 해서 자연 동식(東植)이 또한 아무데고 덥석 앉지 못하고 적당한 자리를 택하기에 마음을 써야 하는 우울을 눈치 못 챌 정숙(貞淑)이가 아니었다. 그래 요즘 와서는 방 안 가득히 신문지니, 제품된 봉지니, 풀 그릇 따위를 일부러 널려 놓았다가 동식(東植)이가 들어서자 무난한 장소를 골라 물건들을 치우고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었다.
병균이 하루살이떼처럼 들끓고 있을지도 모르는 음산한 이 방에 들어와 앉을 때마다, 동식(東植)은 제 편에서 무슨 말이든 먼저 꺼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어구를 미처 발견하기 전에, 번번이 성규(聖奎)에게 첫마디를 빼앗기고 마는 것이었다.
“어때? 내 신색이 어제보다 좀 나 뵈지 않나?”
지금도 선수(先手)를 걸어오는 성규(聖奎)의 말에 동 (東植)은 무어라고 대답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오늘은 좀 어떤가?’ 혹은 '어제보다는 한결 원기가 있어 보이네’ 하는 종류의 말이 동식(東植)의 입에서 먼저 흘러나오기를 기다리다 못해, 제 편에서 먼저 내쏘듯이 그렇게 묻지 않고는 못 견디는 성규(聖奎)의 심리를 모르는 바 아니나, 도리어 그러한 심리의 움직임이 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동식(東植)은 자연스러운 대답에 더욱 궁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본심대로 대답한다면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글쎄 ―” 하고 뒤끝을 흐려버리고 만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거기에다 꼬리를 붙여 “글쎄, 별로 어제보다 나 보이는 것 같지 않은데” 하면 그만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러한³ 동식(東植)으로서도 그런 말이 태연히 나와지지는 않았다.
"그 병이야 어디 남 보기에 달렸는가? 당자 자신의 마음가짐에 따라 병세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은 모양이니까―—“
얼마 만에 동식(東植)은 겨우 그런 말을 발견해서 잠꼬대처럼 지껄였다. 그러고 나서 부채나 갚은 듯이 마음 놓고 찬찬히 성규(聖奎)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성규(聖奎)의 몸은 나날이 표가 나게 수척해갔다. 마치 부었던 살이 가라앉듯이 하루하루 말라 들어갔던 것이다. 그렇던 것이 요즘 와서는 그리 심하게 변화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럴밖에 없는 것이, 그야말로 인제는 정말 뼈와 가죽만 남았기 때문에, 그 가죽을 찢고 뼈를 갉아내지 않는 이상 더 야월 여지가 없을 것이다. 동식(東植)은 중학 때 생리 시간에 구경한 일이 있는 해골을 또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성규(聖奎)의 파리한 꼴은 그때 본 해골에다 가죽을 씌워 놓은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삼십 년 동안을 같이 자라고 이웃에서 살아온 동식(東植)에게도 저게 참말 성규(聖奎)인가 하고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다. 팔, 다리의 각 관절 사이가 이상하게 길어만 보였다. 그러한 성규(聖奎)를 보고 있노라면 동식(東植)은 자꾸 거미가 연상되었다.
며칠 전에는 전구(電球) 조사를 왔던 사나이가 문안에 들어서다가 아랫목 벽에 기대앉은 성규(聖奎)를 보자, 뱀이라도 밟은 때처럼 ‘어이쿠!’ 하고 질겁해서 돌아서 나가버렸을 정도다. 그렇게 뼈와 가죽만이 붙어 있는 몸에 그래도 ‘심령’이 들어 있다는 것이 동식(東植)에게는 기적같이 여겨졌다. 최근에 와서는 그 이상 더 말라 들어갈 수 없는 탓인지 피부색이 차차 꺼멓게 변해가는 것이었다. 저 꼴이 되어가지고도 아직 생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 엉뚱한 트집과 억지를 부리는 것을 볼 때, 본인이나 가족을 위해 차라리 죽여줄 수는 없을까 하는 무서운 유혹조차 동식(東植)은 자주 경험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축 늘어져 있던 성규(聖奎)의 가늘고 긴 두 팔이 움직였다고 느껴지자, 그것은 간신히 위로 올라가 허공을 한 번 휘젓고 내려왔다. 성규(聖査)는 무엇을 생각하고인지 제 깐에는 두 팔을 번쩍 들어 휘둘러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꼭 한 번 허공에서 굼틀거려 보고 이내 떨어지듯 도로 내려오고 만 것이었다. 고만 운동에도 착 달라붙은 성규(聖奎)의 가슴이 금시 파열이라도 될 성싶게 가쁘게 들먹이는 것을 바라보는 동식(東植)은, 농구 선수로서 그 동작이 번개같이 민첩했던 중학 시절의 성규(聖奎)를 생각하고 순간 슬퍼지지 아니할 수 없었다.
겨우 숨을 가라앉히고 나서, 성규(聖奎)는 말라붙은 지렁이처럼 배배 꼬인 팔을 한쪽 손으로 주물러 보며, 오늘 저녁에는 그래도 미음을 반 사발 가까이나 먹었더니 한결 기운이 난다고 했다. 앞으로 열흘만 계속해서 오늘처럼 식욕이 왕성할 말이면 자기는 능히 뜰을 거닐 수 있도록 회복될 것이며, 그렇게만 되고 보면 자네와는 달라 원체 운동선수로 단련되었던 체격 인 만큼 수월히 죽음에서 소생할 수 있겠노라고 했다. 그것도 숨이 차서 쉬엄쉬엄 중얼거리는 것이었는데, ‘자네와는 달라’ 하는 말에만은 특별히 힘을 주어 발음하는 것이 동식(東植)에게도 그대로 느껴져 그는 다시금 성규(聖奎)의 얼굴을 눈여겨 바라보는 것이었다. 본시가 질투, 시기, 야심이 남달리 강한 성규(聖奎) 였지만 죽음에 이르러석가지 버리지 못하는 그의 집요한 성정에 동식(東植)은 소름이 끼쳐지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동식(東植)은 성규(聖奎)의 말에 적절한 대꾸가 나와 지지 않았다. 환자보다도 먼저 말을 꺼내야 할 처지에 있는 자기가, 이 방에 들어와서부터 여태 한 마디도 발언을 못 한 채 병인의 말만을 듣고 묵묵히 앉았으려니까, 본인에게는 물론 정숙(貞淑)에게까지 민망한 생각이 동식(東植)에게는 들었다. 그러나 격식에 맞는 대꾸를 하자고 들면 ‘허― 미음을 반 사발이나 먹었어?’ 하고, 우선 놀라주어야 할 것이며, 이어서 ‘됐네, 됐어, 그러노라면 차차 한 사발이라도 먹어 치우게 될 것이요, 그쯤 되면 머지않아 밥을 푹푹 퍼먹게 될 것이니 며칠 안팎에 뛰어다니게 될 걸세. 살았네 인제는 살았어’ 하고, 수다를 떨어주어야 성규(聖奎)가 만족해하겠지만, 죽음의 냄새를 피우고 앉아 있는, 해골 같은 환자의 모양을 바라보고 있는 동식(東植)의 입에서는 쉽사리 그러한 말들이 나와지지가 않았다.
동식(東植)의 입을 지켜보고 있던 성규(聖奎)는 마침에 만족한 대꾸를 기대할 수 없음을 깨달았음인지 제 편에서 다시금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내 옆에는 얼씬도 안 하던 저것들이, 이상하게도 오늘은 내 곁으로 와서 아버지 병 나으문 나비 잡으러 가 하며, 손도 만져주고 무릎도 쓸어보고 그러데 ㅡ—”
이번에도 잠자코 있기가 안 되어서,
“허 ―— 그것 참 기특하군.”
하고 비로소 동식(東稙)은 입을 열어 보이며, 옆자리에 자고 있는 큰아이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성규(聖奎)는 극히 만족한 얼굴로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보! 당신두 보았지? 아까 저것들이 내 손을 만져주구 하는걸.”
하고, 아내에게 묻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정숙(貞淑)은 말없이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남편을 보았다. 그렇게 밝고 총명하기만 하던 정숙(貞淑)의 눈에는 피로와 슬픔이 안개처럼 덮여 있었다.
“싫어서 피하기만 하던 아이들이 따르기 시작하는 걸 보니, 내게 무슨 생기 같은 것이 솟아나고 있는 모양이야. 이 여름이 채 깊어지기 전에 내 기어이 밖을 거닐게 될 테니 두고 보게. 온 사람이 그렇게 맹랑히 죽다니!”
그 모양으로 지껄이며 차차 홍분해진 성규(聖奎)는 피난지에서 이렇게 비참히 죽어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반드시 수복된 뒤, 처자를 거느리고 다시 고향에 돌아가 사람 사는 듯이 알뜰하게 살아보고야 말겠노라고, 악을 쓰듯 헐떡 이며 중얼대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도 아니겠지만 성규(聖奎)는 갑자기 뒤가 마렵다고 했다. 정숙(貞淑)이가 얼른 나가더니 사기요강을 들고 들어왔다. 들어오면서 정숙(貞 淑)은 피로와 슬픔이 안개처럼 낀 눈으로 동식(東植)을 보았다. 잠깐 나갔다 들어오겠느냐, 그대로 앉아 있겠느냐를 묻는 눈치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동식(東植)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자리를 비키면 성규(聖奎)가 또 무어라고 비꼬는 소리를 퍼부을지 모르기도 했거니와, 이런 경우에 자리를 일어서야 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랫도리만 가리고 앉아 있던 성규(聖奎)는 정숙(貞淑)의 부축을 받아 빤쓰를 벗고 요강을 타고 앉으며, 인광처럼 타오르는 그 눈으로 동식(東植)을 쏘아보는 것이었다. 동식(東植)도 주저하지 않고 마주보아 주었다.
남편과 동식(東疽)의 사이를 가리듯이 하고 앉아, 남편을 거들어주는 정숙(貞淑)의 뒷모습을 어루만지듯이 흐르고 있던 동식(東植)의 시선이, 정숙(貞 淑)의 오른편 귓바퀴에서 멈추어졌다. 거기에는 참새 눈깔만 한 기미가 희미한 불빛에도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빛난다’고밖에 형용할 수 없으리만큼 동식(東稙)의 눈에는 생생한 기억과 매력으로 반영되곤 하는 기미였다. 어렸을 때 한 동네에서 자라며, 말이 적고, 눈만 빛나고, 바지런한 정숙(貞淑)의 귓바퀴에서 어쩌다가 새까만 기미를 발견할 수 있었던 동식(東植)은, 자기만이 아는 정숙(貞淑)의 귀중한 비밀이라 여겨, 어린 가슴에 자랑과 기쁨을 동시에 간직하고 향락해왔던 것이다. 그는 그 비밀을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정숙(貞淑)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동식(東植)이가 중학교 삼학년에 진급하는 해 봄에 정숙(貞淑)은 여학교 일학년에 입학하였다. 당시 평양까지 기차 통학하던 동식(東植)은 역시 평양 어느 여학교의 합격 발표를 보고 돌아오는 정숙(貞淑)이와 같은 차를 탔다. 둘이는 자리를 잡지 못한 채 출입구 근처에 나란히 서 있었다. 동식(東植)도 비교적 말이 적은 편이라 둘이는 묵묵히 서 있었다. 정숙(貞淑)은 창에다 이마를 대듯이 하고 밖을 내다보다가 자주 동식(東植)을 돌아보며 행복스러운 미소를 보냈다. 그러나 동식(東植)은 창밖 풍경 같은 데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는 정숙(貞淑)의 오른편 귓바퀴의 기미를 내려다보며 혼자만의 비밀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다가 동식(東植)은 연필 끝으로 고 새까만 기미를 건드려 보았다. 정숙(貞淑)은 간지러운지 한 손으로 귀를 털었다. 동식 (東植)은 한 번 더 연필 끝으로 기미를 꼭 찔러 보았다. 정숙(貞淑)은 이번에도 손으로 귀를 털고 얼굴을 돌리며 다정하게 해죽이 웃었다. ‘장난하문 못 써!’ 그 맑은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마침내 동식(東植)은 새 눈깔 같은 고 기미를 예리한 물건으로 콕 찔러 보고 싶었다. 그러면 거기에서는 빨간 피가 아니라, 까만 피가 빼짓이 솟아오를 것만 같았다. 그러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주머니에서 조그만 칼을 꺼내 들고 있었다. 동식(東植)은 긴장과 흥분에 떨리는 손으로 칼끝을 기미 가까이 가져다댔다. 다음 순간,
"아야!”
하는 정숙(貞淑)의 가느다란 비명을 들었다. 동시에 때마침 차가 어떤 역 홈에 들어 닿는 것을 다행으로 동식(東植)은 그것이 중간역임을 미처 분별할 사이도 없이 재빨리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때 동식(東植)은 흥분과 수치심에 쫓기듯이 역 구내를 벗어나 어둑어둑해오는 밀밭길을 무턱 대고 달렸던 것이다.
그리고 장성해서 또 한 번―—그것은 오늘날까지 동식(東植)에게 어떤 의무감을 강요하는 원인이 된, 동식(東植)에게나 정숙(貞淑)에게나 한결같이 중대한 사건이었다…….
"미안하네. 원체 먹은 게 적으니까 별루 나오는 것두 없어.”
그러한 소리에 깜짝 놀라듯, 추억에 잠겼던 동식(東植)은 펄쩍 정신을 차려 성규(聖奎) 쪽을 보았다. 동시에 역한 냄새가 코에 풍겼다. 그것은 단지 구린내만이 아니었다. 그럴싸해서 그런지 송장 냄새에 가까운 것이었다.
뒤를 보고 난 성규(聖奎)는, 긴장, 흥분, 대화 끝에 오는 피로감을 일시에 느끼는 모양이었다. 어서 좀 누우라고 권하는 것도 듣지 않은 채 버텨보던 성규(聖奎)는, 벽에 기대고 있는 상반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저 혼자 화를 내다 말고, 마침내 검불이 쓰러지듯 그 자리에 누워버리고 말았다. 천장을 향하고 반듯이 누운 채 성규(聖奎)는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였다. 게다가 눈까지 감고 있어 그대로 아주 숨이 끊어진 것이나 아닌가 하고 유심히 들여다보는 동식 (東植)의 눈에, 그래도 아직 살아 있다는 증거로 갈비뼈만 앙상한 그 가슴이 겨우 알아볼 정도로 할딱할딱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동식(東植)은 옆에 있는 낡은 담요를 끌어다가 살그니 환자의 몸을 덮어주고 물러나 앉았다.
건넛집에서 열한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부터 몇 마리씩 발동하기 시작한 모기 소리가 뜸뜸이⁴ 앵앵거리는 고즈넉한 초여름 밤이다.
동식(東植)은 문득 고개를 돌려 정숙(貞淑)을 바라보았다. 정숙(貞淑)은 단 한 장이라도 더 능률을 올리려고 작업에만 열중하고 있었다. 입고 있는 ‘몸뻬’ 무릎이 풀에 번들번들 덞었다.⁵ 그렇게 고정하던 정숙(貞淑)이건만 병든 남편 단련과, 내직에⁶ 여가가 없어 세탁도 못 해 입는 것일까? 혹은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일까? 하기는 바닥이 다 나간 신발을 끌고 다니는 것이 보기에 하도 민망해서 동식(東植)이가 사다준 고무신마저 팔아버리지 않을 수 없었던 정숙(貞淑)이라, 갈아입을 누더기 한 가지 남아 있을 까닭이 없었다. 그렇다고 동식 (東植)이가 어떻게 해줄 경우도 형편도 못 되었다.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채 맨발로 뛰어다니는 정숙(貞淑)의 두 어린것을 위해, 오래전부터 고무신을 한 켤레씩 사다 주리라고 별러오면서도, 얼마 안 되는 교사의 봉급과 배급으로 성
규(聖奎)네와 공동생활을 하다시피 하는 요즈음, 좀체 고만 정도의 여유조차 돌아가지 않는 동식(東植)이었던 것이다.
‘좀 쉬어가며 하시구려!’
그 한 마디가 입 안에서 뱅뱅 도는 것을, 성규(聖査)가 들으면 날카로워진 신경에 또 무어라고 트집을 잡을지 몰라 꾹 참고, 이 기회에 일어서 나가려고, 한 번 더 성규(聖奎) 쪽으로 시선을 보냈던 동식(東植)은, 그만 주춤하고 도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가죽만 남은 성규(聖奎)의 귀 언저리로 번질번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울고 누워 있는 환자를 그대로 남겨두고 나가버릴 수가 없어서, 동식(東植)은 멀거니 그러한 성규(聖奎)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정숙(貞淑)의 종이 다루는 소리만이 바스락바스락 들렸다.
하도 고즈넉한 탓인지, 성규(聖奎)는 갑자기 눈을 뜨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이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미음을 좀 마셨을 때는 그래도 기운이 나는 것 같더니, 뒤를 보고 나자 이렇게 전신이 푹 꺼져 들어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소생하긴 틀린 것 같아!”
간신히 알아들을 정도로 그렇게 중얼거리고 난 성규(聖奎)는, 한참이나 동식(東植)과 정숙(貞淑)을 번갈아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란히 앉아 있는 걸 보니 신통히도 어울리는 부부 같네.”
느닷없이 불쑥 그런 소릴 하고 나서, 성규(聖奎)는 다시 말을 이어, 자기가 죽은 다음에 정식으로 정숙(貞淑)이와 부부가 되라는 것이었다. 자네가 여태껏 독신을 지켜오는 것도 정숙(貞淑)을 생각해서일 게고, 정숙(貞淑)이 역시 내 아내가 된 이상 표면에는 나타내지 않지만, 속으로는 자네를 잊지 못하고 살아왔을 터이니…… 하며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아버리는 성규(聖奎)의 바싹 마른 얼굴은 일종의 체념과 안도 속에 더 한층 조그맣게 졸아드는 것만 같았다. 성규(聖奎)는 신음하듯 말을 이어, 그때 자기가 정숙(貞淑)을 뺏다시피 동식(東植)과의 사이를 강제로 갈라놓지 않았던들, 이처럼 슬픈 처지에 정숙(貞淑)이가 놓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중얼거리며, 후유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미친 사람처럼 그 뼈만 남은 팔을 내밀어 동식(東植)의 양복 가랑이를 움켜쥐더니, 흥분에 떨리는 음성으로 부디 정숙(貞淑)이와 부부가 될 것을 죽기 전에 자기에게 약속해 달라고 조르는 것이었다. 그럴 것 없이 당장 오늘밤부터라도 정숙(貞淑)을 윗방으로 데리고 가라고 떼쓰듯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좀 전부터 일손을 멈추고 입술을 깨물고 앉아 있던 정숙(貞淑)이가 별안간 앞으로 푹 엎어지며 흐득흐득 느껴 울기 시작했다.
얼마 뒤 자기 방에 돌아와 누워서도 동식(東植)은 오래도록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성규(聖奎)의 죽음은 단지 시일 문제라고 생각되었다. 그가 죽은 뒤 처자들의 일이 난감했다. 친정 편으로나 시집 편으로나 남한에 일가라고는 없는 정숙(貞淑)은 두 어린 것을 데리고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그들 삼모자를 어디로고 떠나버리라고 버려둘 수도 없는 노릇, 그렇다고 성규(聖奎)의 말대로 부부가 된다면 모르거니와, 독신인 자기가 남편 없는 정숙(貞淑)을 도대체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성규(聖奎)의 말이 무시 못 할 새로운 운명의 예언인거나처럼 구체적인 실감으로 동식(東植)을 압박해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성규(聖奎)가 지적한 것처럼 정숙(貞淑)을 생각하며 살기 위해 독신을 지켜온 동식(東植)은 아니었다. 8·15 해방 이래 한결같이 계속되는 초조, 불안, 울분, 공포, 그리고 권태 속에서, 물심 어느 편으로나 잠시도 안정감을 경험해본 적 없는 동식(東植)은 결혼에 대한 특별한 관심도 느껴보지 못한 채, 앞으로 살아가노라면 어떻게든 자기의 ‘생활’이라는 것이 빚어지려니 싶어 어물어물 지내오다 보니, 오늘날까지 남들같이 출세도 못 하고 돈도 못 모으고, 따라서 궁상스런 홀아비의 신세도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와서는 차차루 여러 가지 의미에서 독신의 불편을 느끼게도 되고, 가끔 결혼을 권하는 이도 있지만, 결혼이라는 것의 번거로움과 짐스러움이 앞서 적극적인 태도를 취할 용기가 나질 않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성규(聖査)가 죽은 뒤 당분간이라도 정숙(貞淑)이와 한 집에서 어름어름 지내게 되노라면, 동식(東植)은 오랫 동안 정숙(貞淑)에게 대해서 지녀온 어떤 의무감( 임감이래도 좋다)에서라도, 새로이 덮어 씌워지는 운명의 그물을 벗어보려고 끝까지 버둥대지는 못할 것만 같았다. 정숙(貞淑)에게 대한 일종의 책임감—―그것은 조금도 불쾌한 압박이 아니었고 따라서 ‘그때 일’을 후회하는 동식(東植)도 아니었다.
8·15 해방이 되었을 때, 학병으로 끌려 나갔던 동식(東植)은 그래도 무사히 고향에 돌아올 수가 있었다. 그의 생환을 축하하러 모여드는 친척과 이웃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보다도 선참으로 찾아온 것이 정숙(貞減)이었던 것이다. 하얀 모시 적삼에 세피아색 치마를 입고 조그만 항아리를 하나 안고 대문 안에 들어서는 정숙(貞淑)을 마루에 앉아 바라보았을 때, 동식(東植)은 하마터면 ‘아’ 하고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정숙(貞淑)은 댓돌 밑에 이르자 마치 소학생이 선생님에게 인사하듯이 두 발을 모으고 서서 깍듯이 경례를 하였다. 그러고는 홍조된 얼굴을 수건으로 문대며 아랫방 마루로 올라가 들고 온 단지를 동식(東植)의 모친 앞에 밀어놓았다. 그것은 꿀단지였다. 참벌꿀이 가득히 들어 있었다. 여학교를 나오는 길로 홀어머니를 돕기 위해 군수 공장에 취직했던 정숙(貞淑)은 여자정신대에는 끌려 나가지 않고 견딜 수가 있었다. 그 대신 사방에서 혼담이 일어났으나, 전쟁이 끝나기까지는 시집을 안 가겠노라고 그때마다 머리를 내저었다고 한다. 그 당시, 어떤 사람들은 정숙(貞淑)이가 동식(東植)을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한 패는, 역시 군대에 끌려 나간 성규(聖奎)를 기다리는 것이라고 우겼다. 동식(東植), 성규(聖奎), 정숙(貞淑)은 삼사 년간이나 날마다 같이 평양까지 통학을 했으니, 그렇게들 수군거릴 만도 했다. 며칠 뒤 해질 무렵이었다. 자전거로 동식(東植)이가 십여 리 떨어져 있는 외가에 다녀오노라니까 마침 정숙(貞淑)이가 냇가 사장에 혼자 앉아 방금 뽑아온 무를 씻고 있었다. 동식(東植)은 무엇에 끌리듯이 자전거에서 내려 그리로 다가갔다. 정숙(貞淑)은 고개를 들고 말없이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머리에 썼던 타월을 풀어 옆에다 앉을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한 광주리나 되는 무를 다 씻고, 해가 진 뒤에도 둘은 모래를 주물고 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들었다. 아까까지도 남이던 정숙(貞淑)이가 어둡자 내 사람 같았다. 언제나 마찬가지로 정숙(貞淑)은 말이 없었으나, 전신으로 말 이상의 것을 퍼부었다. 어둠은 얼마든지 두 사람에게 비밀을 배〔孕〕 게 했다. 정숙(貞淑)의 피부는 채 식지 않은 모래보다도 뜨거웠다. 정숙(貞淑)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모로 틀었다. 정숙(貞淑)의 오른쪽 귀가 동식(東植)의 입술을 스쳤다. 밤눈에도 새까만 기미가 보이는 것 같았다. 동식(東植)은 잦은 숨결을 몰아쉬면서도 기미를 탐내어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었다.
정숙(貞淑)에 대한 동식(東植)의 어떤 의무감이란 초저녁 이슬 내리는 그날 밤에 비롯한 것이었다.
그 다음날 성규(聖奎) 역시 살아 돌아왔고, 그 다음다음날 이 고장에선 굴지의 지주였던 동식(東植)의 부친이 돌연 인치당해 가더니, 사흘 만엔가는 동식 (東植)이마저 끌려 들어가서 열흘간이나 두들겨 맞고 나왔다. 전 재산은 완전히 몰수당했을 뿐 아니라, 이십여 일 만에 석방되어 나온 부친은, 한 주일이 채 못 가서 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동식(東植)의 몸이 전대로 추서기에도 두 달 이상이 걸렸다. 그렇게 정신없이 삼사 개월을 지내놓고 보니, 그동안에 정숙(貞淑)은 성규(聖査)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자기와 결혼을 하면 무사히 동식(東植)을 나오게 힘써 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영 시베리아로 유형 당하게 될 것이라는 성규(聖奎)의 위협에 마침내는 정숙(貞淑)이가 동하고 말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당시에는 좌익 청년 사이에 성규(聖奎)의 세력이 어지간했고, 사실 동식(東植)이가 열흘 만에라도 나오게 된 데는 그의 힘이 적지 않았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던 것이다.
동식(東植)과 정숙(貞淑) 사이의 그날 밤의 비밀까지는 모른다 해도, 그 정도의 그들의 과거만도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성규(聖奎)의 과민한 신경을 자극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사오일 전이었다. 직원회를 끝내고 어두워서야 돌아온 동식(東植)은 아랫방에서 성규(聖奎)의 발악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기 방 문고리 쇠를 잡았다 말고 아랫방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가쁜 숨소리와 함께 내뱉듯이 씨부렁거리는 성규(聖奎)의 지청구가운데, 거듭 자기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은 동식(東植)은, 살그니 자기 방으로 들어와 버리고 말았다. 아래윗방에서 전등을 공동으로 쓰느라고 벽에 뚫어놓은 구멍으로 그는 아랫방을 넘겨다보았다. 방바닥에 토해놓은 검붉은 피를 성규(聖奎)는 떨리는 손으로 움켜서 돌부처처럼 옆에 앉아 있는 정숙(貞淑)의 입에다 문대주며 다자꾸⁷ 먹으라는 것이었다.
“이년! 너도 같이 죽자. 나와 함께 죽잔 말야! 둘이 함께 죽어야 한다. 그렇다면 난 언제 죽어도 겁나지 않는다. 그래 같이 살다 나만 혼자 죽으란 말야? 너는 살구 나만 혼자 죽으란 말야? 안 된다, 안 돼. 나 죽은 뒤 넌 동식(東植)이놈하구 얼릴 판이지? 그렇지? 안 그래? 내가 다 안다, 다 알어. 이 동식(東植)이놈 어디 갔니? 여태 안 돌아왔냐? 동식(東植)아! 동식(東植)아! 이놈 나 죽길 기다려? 안 죽는다, 안 죽어. 너희 연놈이 판치고 살라고 내가 죽어? 안 죽는다. 안 죽는다. 이년! 내 필 먹어라, 어서 먹어!”
그러고는 기운이 진해 그 자리에 쓰러져 기신을 못 하면서도, 음성은 알아들을 수 없으나 악을 쓰느라고 물고기처럼 입을 넙죽넙죽 하는 것이었다. 정숙(貞淑)은 입에다 피 매닥질⁸을 한 채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날 밤 동식(東植)은 꿈을 꾸었다. 정숙(貞淑)을 위해서라도 성규(聖奎)를 죽여 버려야 한다고 정숙(貞淑)이가 말리는 것도 듣지 않고 그는 칼을 들고 성규(聖奎)에게로 달려들었다. 서로 붙잡고 얼마 동안을 엎치락뒤치락 하던 끝에, 그만 자기편에서 성규(聖奎)에게 깔리고 말았다. 아무리 요동을 해도 바위와 같은 중량으로 자기를 타고 앉은 성규(聖奎)는 꼼짝도 안 할 뿐 아니라, 검붉은 피를 토해서는 동식(東植)의 입에다 막 퍼 넣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입을 악물고 반항을 했으나 마침내는 성규(聖奎)의 힘을 당하지 못하고 김이 떠오르는 피를 받아먹었다. 인제는 꼼짝 못하고 폐병에 걸려 죽는구나 생각하며 자세히 보니, 자기를 타고 앉은 것이 성규(聖奎)가 아니라 정숙(貞淑)이었다. 동식 (東植)은 그만 소스라쳐 놀라 소리를 지르고 잠에서 깼다.
아랫 방에서는 역시 종이 접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렇게 무리를 하다가는 정숙(貞淑)의 건강도 그예 결단이 나지나 않을까! 그래서 남편을 따라 죽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동식(東植)은, 저렇게 사는 것과 차라리 죽는 것과 그 어느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를 곰곰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다음 날 동식(東植)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성규(聖奎)는 이미 죽어 있었다. 반 시간쯤 전에 거품이 꺼지듯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죽기 바로 전에 동식(東植)을 찾았다고 한다. 몇 번이나 동식(東植)의 이름을 불렀다는 성규(聖奎)는, 아내의 손을 꼭 쥐고 죽었다고 한다. 손을 좀 만져보자고 하여 정숙(貞淑)이가 내민즉, 몇 번이나 쓰다듬어 보더니 손에서 흙냄새가 난다고 하며 무슨 소린지 손이 저리지 않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손을 꼭 쥔 채 숨이 끊어졌다는 것이다.
다음날 저녁 때 정숙(貞淑)이하고 나란히 화장터에서 돌아오는 동식(東植)은 남이 부부로 보아줄까 봐 겁났다. 말없이 옆을 따라오는 사람이 정숙(貞淑)이가 아니라 자기의 그림자처럼 동식(東植)은 느끼기도 했다. 그것이 별안간 성규(聖奎)의 그림자 같은 착각도 일었다.
그날 밤 잠결에 동식(東植)은 여자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꿈이 아닌가 생각하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귀를 기울이니 아랫방에서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새어왔다. 동식(東植)은 공연히 가슴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의식하며, 일어나 벽 한 귀퉁이에 뚫려있는 구멍으로 아랫방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동식 (東植)의 얼굴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랫방 벽에는 괴상한 여인의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신을 가다듬어 찬찬히 보니, 그것은 정숙(貞淑)의 그림자였다. 식상 겸 책상 대용으로 쓰는 사과 상자 위에 엎더져 우는 정숙(貞淑)의 몸이, 바로 앞에 놓여 있는 등잔불에 확대되어 아랫목 벽 가득히 비친 그림자였다. 상자 위에 잉크병과 종잇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정숙(貞淑)은 누구에게 편지를 쓰다 말고 북받쳐 오르는 가지가지의 설움을 터뜨린 것 같았다. 정숙(貞淑)은 울다 말고 상반신을 일으켜 옆에서 자고 있는 어린것들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러다가는 도로 상자 위에 엎더져 어깨를 들먹이며 우는 것이었다. 동식(東植)은 갑자기 전신이 와들와들 떨려오는 것을 깨달았다. 이가 덜덜 마주치고 손발이 이상할 정도로 떨렸다. 도로 자기 자리에 와 누워서도 동식(東植)은 얼마 동안 떨리는 것이 멎지 않았다.
이튿날 정숙(貞淑)은 역시 태연하였다. 운 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동식(東植)에게는 왜 그런지 정숙(貞淑)의 전신이 쓸쓸한 그림자처럼만 느껴졌다. 피로와 슬픔이 안개 끼듯했던 정숙(貞淑)의 그 눈은 퀭 빈 속에 서글픈 공허감만이 서려 있었다.
정숙(貞淑)은 여태껏 밀렸던 일들을 모조리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동식 (東植)의 것도 양복, 내의, 양말까지. 조금만 덞은 것이라도 다 내다 빨아주었다. 조각난 낡은 천들을 용하게 무어서⁹ 아이들의 옷도 한 벌씩 지어 입히고, 제품된 과자 봉지를 갖다 주고 찾아온 돈으로 고무신도 한 켤레씩 사다 신겼다.
일방 동식(東植)에게는 앞으로 정숙(貞淑)의 처신 문제가 걱정이었다. 본인은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설마 죽기 전에 성규(聖奎)가 하던 말처럼 나와 부부가 될 생각이야 아니겠지. 그러나 이대로 몇 달이라도 지내게 된다면, 동식(東植)은 성규가 남기고 간 예언이 주는 어떤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의탁할 곳도 생활력도 없는 정숙(貞淑)을 내보낸다는 것은 더욱 못 할 일이 아닌가? 오늘도 비 오는 길을 우산도 없이 돌아오며 그런 궁리를 되풀이하던 동식(東植)은, 적당한 시기에 본인과 잘 의논하기로 하고, 슬픔과 피로가 풀리기까지 당분간은 가만히 두리라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빗소리 때문에 동식(東植)이가 돌아온 기척을 못 들었는지, 아랫방에서는 두 어린 것을 상대로 호젓이 지껄이는 정숙(貞淑)의 음성이 흘러왔다. 옷을 갈아입고 있던 동식(東植)은 불시에 손을 멈추고 아랫방 쪽으로 유심히 귀를 기울이지 아니할 수 없었다. 정숙(貞淑)이가 아이들을 향해, 동식(東植) 아저씨가 좋으냐고 묻고 아래와 같은 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자, 그럼 명호(明鎬)부터 대답해 봐! 어디?”
“난, 좋아!”
“좋아? 그렇지! 그럼 명옥(明玉)은?”
“나두 좋아!”
“응, 둘이 다 동식(東植)이 아저씨가 좋지? 그러면 엄마가 없어두 동식(東植)이 아저씨랑 살 수 있겠지?”
그 물음에 대한 아이들의 대답은 얼른 들리지 않았다.
“왜 대답을 못 해. 어디 바른 대로 말해 봐. 엄마가 없어도 동식(東植)이 아저씨하고 셋이 살 수 있지?”
그제야, 네 살짜리 명옥(明玉)은,
“난 싫어. 난, 엄마카 살 테야!”
했다. 그러나 여섯 살 먹은 명호(明鎬)는,
“엄마 어디 가?”
하고, 도리어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잠시 조용해지더니, 이어
“아냐, 아냐, 엄마가 어딜 가다니. 너희들을 그냥 두구 엄마가 어딜 간단 말이냐?”
그러한 삼모자의 대화를 엿들은 동식(東植)은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깊어 가는 밤과 함께 비는 더욱 세차게 내리 부었다.
다음날 아침, 명호(明鎬)가 별안간,
“엄마야, 엄마야!”
하고 부르다가, 다급하게,
“아저씨! 아저씨! 엄마가! 아저씨.”
하소 울기 시작했고, 명옥(明玉)이마저 따라 우는 바람에 동식 (東植)은 가슴이 서먹해서 벌떡 일어나 달려 내려가 보았다. 정숙(貞淑)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머리맡에는 무슨 약봉지가 있었고 물 사발이 엎질러져 정숙(貞淑)의 저고리와 방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정숙(貞淑)이가 죽기 전에 켜놓은 등잔불이 고요히 시체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상자 위에 놓여 있는 한 장의 봉투가 동식(東植)의 시선을 끌었다. 그것은 유서였다.
――이 길이 필경 제가 가야 할 길인 줄 알고 가옵니다. 겹치는 죽음은, 물심양면으로 선생님께 부담이 될 줄 아오나, 제 시체가 선생님의 손으로 거두어져야 앞서간 남편이나 제 한이 풀릴까 하와, 한 번 더 괴롬을 끼치기로 하였습니다.
두고 가는 두 어린것들이 가슴에 걸리오나, 역시 그것들에게도 약속된 운명이 있어, 결국은 저 갈 길들을 가게 될 줄 믿사습니다. 짐스러우시거든 언제든지 서슴지 말고 고아원에 데려다 맡겨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망설이던 말 한마디만 더 적기로 하옵니다. 명호(明鎬)놈의 양쪽 귀가 선생님의 귀를 닮은 줄을 아시옵니까? 손가락 끝으로 꼭 집었다 놓은 것 같은 귓불〔耳朶〕이, 선생님의 것처럼 참하게 안으로 오그라들었사옵니다. 저는 명호(明鎬)의 고 귀를 어루만질 적마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했습니다. 명호(明鎬)의 귀의 생김새는, 세월과 함께 제 속에 자라난 기쁨이었고 또한 슬픔이었습니다.
×月 × ×日
정숙(貞 淑) 올림
시체를 앞에 놓고 구태여 자기의 귀와 명호(明鎬)의 귀를 비교해볼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명호(明鎬)의 귀가 분명히 자기의 귀를 닮았다는 이 새로운 사실이 그에게는 놀랍고 저주스러웠다.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동식(東植)은 한동안 죽은 정숙(貞淑)의 얼굴을 지켜보며 앉아 있었다. 그러한 동식(東植)의 머릿속에, 줄기가 마르거나 열매가 물면¹⁰ 결국은 떨어지고야 말듯이, 정숙(貞淑)은 그렇게 죽을 수 있었으리라는 동감과 함께, 고인이 남기고 간 두 어린것의 슬픈 운명을 자기는 책임져야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끝-
2016년 5월 12일 읽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