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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시온성과 같은 교회, 가정, 성도
설교본문 : 시편 48:1~14
참고 : 시편 42, 43, 46편, 욥기 42장
설 교 자 : 송호영 목사
설 교 일 : 2024년 9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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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우리가 지난주에 한 큐티 중에 시편과 욥기 마지막 장을 각각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부와 2부에서는 시편의 말씀을 통해 환난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복과 은혜가
하나님의 성전인 시온에서부터 나온다고 노래하기까지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겠고,
3부에서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의 시간을 끝내 이기고
하나님께 그 믿음을 인정받은 욥이 하나님께 받은 갑절의 복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제 1 부 : 환난 중에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시편 2편(42~72편)의 첫 시작인 42편은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는 탄원시(탄식시)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시인이 환난 중에 기도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발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1. 절망과 불안감 속에서 탄식하는 시인(시편 42편)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살아계신)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라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곤 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생각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1) 먼 타국에서 이리저리 떠돌며 살아가는 시인(1~2절)
시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옵기를 갈망하지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성막(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쫓겨나서
멀리 타향에서 이리저리 떠도는 방랑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과거 좋았던 때를 추억하며 더욱 슬픔에 싸임(4절)
시인은 과거 좋았던 때를 추억합니다.
과거에 그는 예루살렘의 성막(성전)에서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함께 찬양하고 예배하던 그때가
얼마나 좋았나 하며 과거를 추억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 갈 수가 없습니다.
3)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2~3절)
그래서 눈물이 주야로 자신의 음식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날마다 음식을 먹듯 슬픔이 자신의 삶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고통과 슬픔은 나라를 잃고 타국에서 방랑생활을 하는 것이나,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리에 갈 수 없다는 것이 슬픔입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탄식합니다.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고”
2. 탄식 중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며 기도함
1) 낙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함(시 42:6)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시인은 낙망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기억합니다.
과거 애굽의 노예였던 이스라엘을 구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픔도 해결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나라가 망하여 포로로 사로잡혀 간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마치 실향민들이 북한 땅이 보이는 임진각에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가족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시인은 자신의 현재의 상황에서
최대한 예루살렘과 가까운 쪽으로 가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2)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주를 찾기에 갈급함(1절)
(1절 성경구절 위에)
하나님을 찾는 자신의 갈급한 상황을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목이 마른 사슴, 그것도 새끼를 배었거나 새끼를 데리고 다니는 암사슴의 경우
그 애태움이 더 심각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4월~10월)가 되면
모든 와디(시내)들은 완전히 그 물이 말라버립니다.
그때에는 언덕을 넘고 들판을 건너도 시냇물을 찾기 힘듭니다.
물을 찾다가 지쳐버리면 사슴은 목을 길게 뻗은 채 쓰러집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신의 심정을
시냇물을 찾는 이 암사슴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3.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1)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와의 차이
시 43:2에서 시인은
“주는 나의 힘이 되신 하나님이시어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슬픈 나날을 지내야만 합니까?”하고 호소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리셔서 지금 내가 이런 환난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다음 기도에 무엇이 나올 것이라 기대합니까?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는 호소가 나왔다면
당연히 나를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할 것입니다.
빚져서 집이 넘어가게 생겼으니 도와달라든지,
병들어 죽게 생겼으니 고쳐 달라든지 하는 기도가 나올 것입니다.
➠ 그러나 놀랍게도 시인은 3절에서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시 43:3)
자신을 괴롭게 하는 고통의 현장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주셔서 바른길을 걷게 하고,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셔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배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과 환난을 당하면 이 환난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 말씀에 합당하게 살지 않는다면
혹 그 시련에서 벗어나게 되더라도 다시 또 다른 시련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진정한 평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지금 당장 아픔을 해결하는 것보다
자신이 주님의 빛과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참된 성도가 되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 묵상 :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련이 왔을 때
그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 시련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시련을 주께서 주셨다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환난과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되었더라도
그 신앙의 자리가 여전히 무너진 채로 머물러 있다면
다시 그 환난의 진창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기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고통과 환난을 주신 목적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훈련이면 훈련을, 징계이면 회개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2)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여호와의 날을 기다리십니다.
다만 그들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을 가지고 오시는 여호와의 날이
속히 오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생사화복의 모든 것이 주께 달려 있으니
주께서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여 들어오시는 여호와의 날이 오면
주께 부르짖어 기도한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그날을 기다리신다는 점입니다.
아이가 밥을 달라고 울며 보챌 때 엄마도 그 밥이 뜸이 들기를 기다립니다.
아이뿐 아니라 엄마도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가져다주시는 여호와의 날이 오기를
우리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기다리십니다.
3)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잘 간직하기를 바라며 기다리십니다.
아무리 하나님이시라도 아무런 원칙도 없이 무조건 복을 주실 수는 없습니다.
그 복에 합당한 믿음이 있는지 확인한 후에야 그에 합당한 복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날을 기다립니다.
우리가 그날이 오기까지 믿음을 잘 간직하며 인내하며 기다리기를 하나님께서도 바라시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을 지켜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을 받을 수 있게 되면
우리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며 춤을 추시는 것입니다.
마치 아이가 좋은 시험 성적을 받으면 엄마가 더 기뻐하는 것처럼
우리가 복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십니다.
제 2 부 : 시온성과 같은 교회
1. 환난 중에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1)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1절)
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여기에서 말하는 환난은 사람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완전히 막혀버린 공포의 환난입니다.
여러 가지 상황이 모두 얽혀 있어서
그 시련의 자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환난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납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큰 도움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큰 도움을
환난의 한복판에서 만납니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라고 노래합니다.
2)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뛰놀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2절)
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 바닷물이 흉용하고(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셀라).
환난이 그저 한 나라의 침략 정도가 아니라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는 두려움,
바닷물이 솟구쳐서 그 힘에 산이 요동하는 종말론적인 대공포가
실제로 내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지신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내 주는 강한 성이요(5절)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이 성 중에 계시니 성이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 성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가장 강한 성이 됩니다.
내 주님이 바로 강한 성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주님이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기 때문입니다.
4) 저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6절)
6. 이방이 훤화하며 왕국이 동하였더니 그가 소리를 발하시매 땅이 녹았도다.
이방이 으르렁거리며 침략을 했으나
하나님께서 한 번 소리를 발하시니 땅이 녹았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땅이란 열방을 뜻합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帝國)입니다.
그 나라들이 자기들의 힘을 믿고 세상 많은 나라에 두려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말씀하시니 그 나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습니다.
2. 시온에 거하시는 하나님
1) 하나님의 성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생수(시 46:4)
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안전하게 거하면서 오히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에서 생명수의 샘물이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주의 성소에서 하나님의 생명수가 나뉘어 그의 백성에게로 흘러갑니다.
그리고 4절은 하나님의 생명수가
주의 성소에서 그의 백성에게로 흘러가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엄청난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샘물을 받으며 사는 것,
이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곳에는 두려움과 공포가 있습니다.
그들이 비록 이방 여러 나라의 왕들의 보호를 받고
그 강력한 군대를 가진 이방 나라의 왕궁에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한번 소리를 발하시면 두려움에 산이 흔들리고 땅이 녹습니다(3, 6절).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일어날지라도 하나님께서 도우시니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는 자는 환난 중에도 오히려 노래할 수 있습니다.
2)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5절)
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가 사는 이 성 중에 거하시니 성이 요동치 않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가장 깊은 밤이 새날이 밝아오는 새벽으로 변합니다.
가장 깊은 어두움의 자리가 오히려 새날을 여는 새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깊은 어두움의 자리를 ‘아침의 기점(起點, 시작점)’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셨으므로 가장 깊은 절망의 자리가
새날을 여는 복된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혜는
환난 중에 큰 도움이신 하나님을 바라본 자들에게만 임합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7, 11절)
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11.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고 이 구절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여기에 (셀라)를 붙였습니다.
어떤 시련과 환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할 자가 되십니다.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3. 시온성과 같은 교회(시편 48편)
1) 터가 높고 아름다운 산, 시온산이 바로 그러하도다(2절)
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큰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터가 높고 아름다운 산’은 예루살렘 성을 가리킵니다.
물론 예루살렘 성이 다른 곳보다 높은 곳에 있으니 터가 높다고 할 만합니다만,
여기에서의 뜻은 ‘하나님의 은혜가 높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산에 좋은 나무가 심어져서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그 산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기도와 예배가 가득하니 아름답습니다.
시편 48편의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기쁨의 노래로 가득한 곳처럼
아름다운 곳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하고 물은 후에,
“시온산이 바로 그러하도다”하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하는 시온산이야말로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2) 주의 이름과 같이 주의 찬송도 땅끝까지 퍼졌으며(9~10절)
9.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성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10.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주의 찬송도 땅끝까지 미쳤으며(주님을 찬송하는 소리가 땅끝까지 퍼졌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11.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 한가운데서 주님의 이름과 함께
주의 인자하심과 주님을 향한 찬송이 세상 끝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묵상합니다.
이것은 주께 예배드리는 그곳이 바로 시온성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본래는 다윗이 세운 예루살렘 성이 시온 성이지만,
그가 그 성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렸으므로
시온성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48편의 시인 역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온성이
세계 끝까지 퍼져나가리라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공의로 심판하시니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하라(10~11절)
(10~11절 성경구절 위에)
장차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
시온산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노래하던 자들은 주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니 주께 예배드린 자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다 주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온산에 있는 자는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유다의 딸은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말하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을 뜻합니다.
4)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온전한지를 살펴보라(12절)
(12절 성경구절 위에)
그러므로 시인은 시온성의 성벽이 어떠한지 망대는 어떠한지를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시온성인 예루살렘의 성벽과 망대를 살펴보라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시온성이 예배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으니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인지를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실 때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함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묵상 :
42편부터 48편까지를 보면 환난과 고통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성전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수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리라는 노래를 기쁨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48편에 이르러서는
다윗이 그의 궁전인 시온성에서 하나님께 예배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곳,
시온성과 같은 그 성전, 그 교회에서 나오는 은혜와 감격과 기쁨과 찬송이
그의 마음에 가득 채워집니다.
고라의 후손이 부른 이 노래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시온성과 같은 교회가 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제 3 부 : 하나님의 판결과 욥의 회복
위의 시편의 말씀에서
환난과 시련 중에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고라의 후손의 노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시편의 시인들도 때로 고통 중에 절망하기도 하고, 하나님께 절규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때로는 기쁨으로 노래하다가, 때로는 슬퍼하기도 하는 신앙생활을
우리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어떤 상황이 어더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일입니다.
욥기 마지막 장에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에게 주시는 복이 나옵니다.
1. 욥의 삶의 변화 : 벌을 받지 않으려는 삶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으로
1) 욥의 회개(1~3절)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 이루시지 못할 일이 없는 줄 알았삽나이다.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바로 저입니다.)
내가 깨닫지도 못한 것을 함부로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그동안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왜 이런 재앙을 주셨는지
그 까닭을 물어보겠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욥에게 대답하라고 말씀하시자
욥은 아무 말도 못합니다.
병을 고쳐 달라는 말도, 이 재앙에서 구해달라는 간구도 하지 못합니다.
오직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한 것을 회개할 뿐입니다.
➠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 바로 저입니다(3절)
(3절 성경구절 위에)
개역개정 성경에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3절) 하고 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바로 저입니다”하는 죄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여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놓은 자가 바로 욥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2)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절)
5. 주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귀로만 들었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➀ 전에 들은 소문들 :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벌을 내리신다더라
➠ 하나님의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 살았던 욥
전에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을 소문으로만 들었습니다.
그래서 욥은 하나님께 벌을 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심지어 혹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지은 것이 있을까 봐
해마다 자녀들 수대로 번제를 드릴 정도로 벌을 받지 않기 위해 힘썼습니다.
복은 받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재앙을 받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재앙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자기가 어떤 점에서 잘못한 것인지 말해달라고 하나님께 절규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고 고통만 주시니
욥이 견디지 못했던 것입니다.
➁ 욥은 그렇게 했는데도 왜 재앙이 왔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런데도 재앙이 왔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왜 이 재앙을 받았는지, 어떤 실수 때문인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벌을 받을 만큼 잘못한 일은 없으니
하나님과 대화를 해도 자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➂ 그런데 재앙을 당하는 과정에서 욥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주께서 어떤 분이신지에 대하여 지금까지는 귀로만 들었으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절).
귀로만 들었다는 것은 소문으로만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다더라 하는 말만 듣고
그 런 일을 하지 않으려 힘써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벌을 받고 받지 않기 위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바로 그분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주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➃ 고난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기 위한 과정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욥기의 주제라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고백입니다.
욥기는 욥이 왜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동안 그 긴 대화의 과정을 이끌어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이렇다더라’하는 소문만 들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3) 그러나 고난의 과정에서 욥의 신앙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하나님께 벌을 받지 않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변했습니다.
전에는 그가 받은 복을 잃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다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자기가 가진 재물과 복에 관심이 있었으나
이제는 하나님 바로 그분만을 주목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고백했더니
오히려 두 배의 복을 주셨다는 것,
이것이 욥기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2. 욥의 친구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욥의 중재의 기도
1) 욥의 친구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7절)
7.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진노하나니,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며 말한 것이 내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음이니라.
욥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자
여호와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내가 너와 네 두 친구에게 진노한다”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세 친구에게 진노하신 것은
욥의 친구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말한 것이
욥이 말한 것처럼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부족한 지식을 근거로 욥을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흉악범 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2) 너희 자신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고 욥에게 중재의 기도를 요청하라(8절)
➠ 욥에게 대제사장의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하라는 것
8. 그러므로 너희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 자신을 위하여 번제를 드려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그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어리석게 말한 대로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너희는 나를 두고 말할 때에 나의 종 욥처럼 옳게 말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욥의 세 친구에게 그들 자신을 위하여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되,
하나님의 종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번제를 드릴 때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로 번제를 드립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때와 똑같이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를 가지고
욥에게 가서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위하여 욥이 대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욥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 욥이 그들을 위해 번제를 드려 주어야
그들이 죄를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 수송아지와 숫양을 가지고 욥에게 갔고
욥이 그들을 위하여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욥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시고
욥의 친구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3. 갑절의 복
1) 하나님께서 욥에게 갑절의 복을 내리셨습니다(10, 12~13절)
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한 후에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에 주셨던 모든 소유보다 갑절을 주신지라.
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의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 마리, 약대(낙타) 육천 마리,
소 천 겨리(1,000쌍), 암나귀 천 마리를 두었고,
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으며,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욥의 재앙을 당하기 전에 가졌던 것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욥은 양 14,000마리, 약대(낙타) 6,000마리,
소 천 겨리(1,000쌍), 암나귀 천 마리를 두었고,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낳았습니다.
온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이전에 있었던 욥의 자녀들보다
두 배나 더 아름다운 자녀들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10절)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욥에게 갑절의 복을 주신 때가 욥이 회개했을 때가 아니라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을 때였다는 점입니다.
욥이 회개하였을 때 이미 욥의 영적인 신분은 모두 회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욥기 42장에서 하나님께서 욥을 ‘내 종’이라고 네 번이나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 때에
그의 질병이 고쳐지고 잃어버린 재물이 회복이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길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3) 욥이 회복되자 다시 찾아오는 사람들(11절)
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및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가락지를 욥에게 주었더라.
하나님께서 욥에게 갑절의 복을 내려주시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전부터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이 그를 찾아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뻐하면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들은 욥이 받았던 모든 재앙을 생각하면서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금 한 조각과 금가락지를 욥에게 주었습니다.
욥의 인간관계가 회복된 것입니다.
욥은 다시 이전에 사람들로부터 존귀한 자로 여김 받던 시절로 돌아왔습니다.
4. 욥이 받은 갑절의 복은 끝까지 승리한 자가 받는 부활의 기쁨을 의미합니다.
1) 나이 늙고 기한이 차서 죽었더라(16~17절)
16. 그 후에 욥은 백사십 년을 더 살면서 아들과 손자와 4대손까지 보았고,
17. 욥은 이렇게 나이 늙고 오래 살다가 수명이 다해 죽었더라.
그 후에 욥은 백사십 년을 더 살면서, 아들과 손자와 4대손까지 보았습니다.
이때의 욥의 나이를 50세~70세로 봅니다.
그러면 욥은 190세~210세를 살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 구약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했던 70인역 성경에는
욥이 240세를 살다 죽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당시 평균 수명의 세 배에 달하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의 말씀 그대로 욥은 수명에서조차
갑절의 복을 더 받아 다른 사람보다 세 배의 수명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2) 욥의 갑절의 복은 예수님의 부활의 기쁨을 상징합니다.
구약의 말씀들은 대부분 신약의 말씀의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친구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한 욥이
예수님의 그림자 역할이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욥이 받은 갑절의 복은 부활의 기쁨을 가리킵니다.
부활의 기쁨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나 복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엄청난 기쁨이라는 것을 욥의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는 것입니다.
결 론 : 시온성과 같은 교회,가정, 성도
1) 신령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교회가 바로 시온성입니다.
다윗의 시대에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드렸으니
예루살렘 성이 시온성이 되었지만,
지금은 신령과 진리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참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바로 시온 성입니다.
주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교회가 바로 시온성과 같은 교회인 것입니다.
사람이 몇 명 안 되는 작고 초라한 교회라 할지라도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온 힘을 다하여 기쁨의 함성으로 외치며
하나님께 찬양하고 있다면 그 교회가 바로 시온성과 같은 교회입니다.
2) 시온성과 같은 교회, 시온성과 같은 가정, 시온성과 같은 사람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시온성과 같은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믿음을 가진 가정은 시온성과 같은 가정이고,
주께서 그 믿음을 인정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자는
시온성과 같은 사람입니다.
크게 부흥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시온성과 같은 교회가 되기를 바라십시오.
크게 부자가 되기를 바라지 말고
시온성과 같은 가정, 시온성과 같은 성도가 되기를 간구하십시오.
● 묵상 :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또는 주님 오실 때까지 끝까지 승리한 자들에게
욥이 받은 갑절의 복을 내리십니다.
주께서 복을 주시리라는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시온성과 같은 교회와 가정과 사람의 자리를 지켜서
승리하는 자들이 됩시다.
주님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광대하심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주께서 계신 곳 시온성의 안전함을
깨달아 알게 하옵소서.
그러므로 우리가 속한 교회가
주께서 받으실만한 시온성과 같은 교회가 되도록
주님을 힘써 섬기며 경배하게 하옵소서.
끝까지 승리하는 자에게 주시리라는 그 소망을 붙잡고
주님 오시는 날까지 끝까지 승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