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방학때면
역시 초등학생인 누나를 따라
고향집으로 가던 기억속의 기차는
낭만이라기보다는
언제 어디에서 내려야 할 지 모르는 막연함과
낯 선 사람들의 눈에서 위압감을 느끼던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같습니다.
1년이상을 함께 했던 친구들과 떠났던
고등학교 시절의 설악산 수학여행은
10시간 이상을 기차타고 밤을 새워 달렸던
시끌벅적한 설렘과 기쁨이었던 같습니다.
대학에 들어와서
시골에 살던 이종사촌 동갑내기와 이종 누나가
도회지의 우리집에 놀러 왔다가 돌아 갈 때에
배웅하러 나갔던 기차역 승강장(사실 이건 '플랫폼'이
더 맛깔납니다. 어릴 때부터 익숙한 낱말이라 그렇기도 하고
흘러간 유행가 대전부르수에 등장하는 가사라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에서
눈에 들어 왔던 기찻길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나란히 멀어져 가는 철길 두 줄기는
휘어져 돌아가며 마침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며
희미하게 사라지는 아련함이었습니다.
여담인데,
나와 내 누나가 이종사촌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는데,
군에 복귀하는 애인이 열차 승하차 난간에 매달려
보이지 않을 때 까지 손을 흔들던 여인이 발길을 돌리며
한적한 옆 철길옆을 고갤 숙이며 울며 걷고 있었습니다.
이 때 다가가서 수작을 부리던 사내가 하나 있었습니다.
아구창이라도 한번 갈겨 주고 싶었습니다.
참~! 분위기 다 깨 놓고 퇴짜맞던 놈.
밤기차를 타 보고 싶었습니다.
성장하며 시간과 공간의 간격을 두고 산재해있던
낭만을 끌어모아 혼자 곱씹어 보고
지치면 졸기도 하며 떠나는 기차여행은 생각만해도 설렙니다.
청량리를 9시 13분에 떠난 기차는 12시가 되어 영주역에 도착하였습니다.
25년전에 1년을 머물렀던 영주는 많이도 변해 있었습니다.
거대한 상설할인매장, 소주방, 타이맛사지......
역 주변만큼은 불야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근처의 찜질방을 검색해보았을 때에
영주스포렉스가 7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고
로얄사우나가 200여 미터에 위치해 있었는데
로얄사우나는 보이지 않고
스포렉스를 찾아 가야 했습니다.
역사를 나와 직선으로 뻗은 길엔
감자탕집, 노래주좀, 홈플러스, 순대국밥집이 즐비합니다.
그 길을 걸어 오거리까지 와서 왼쪽으로 꺾어 어두운 거리를 응시하니
멀리 건물옥상에 불빛이 보입니다.
아마 저기가 영주스포렉스인가 보다.
한기가 스민 몸을 데울 수 있는 반가운 곳인데
새벽 1시 30분까지는 탕을 청소하기 때문에
들어 갈 수가 없답니다.
좁은 휴게실에서 기다리든지 해야 하는데
다른 손님들도 있고 해서 그냥 거리구경하다가 다시 오기로 하고
다시 길로 나섰습니다.
오거리로 되돌아 와서 역에서 왔던 길 윗쪽을 택해서 걷다보니
깨끗해 보이는 모텔과 여인숙도 눈에 들어 왔습니다.
샛골목으로 들어 서는데 누군가 성큼 다가와서 말을 건넵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오니 깜짝 놀랐습니다.
"자고 가이소~!"
안 자고 가기로 하고 그냥 계속해서 걸어 보았습니다.
그렇게 영주역으로 원점회귀를 하니 약 40분이 흘렀습니다.
영주역 광장앞으로 뻗은 길이 24시간을 달릴 수 잇는 흥청망청
다른 음식은 좀 부담스러울 것 같아
순두부로 결정하고 들어 갔습니다.
해물순두부는 얼큰하게 하는데
그냥 순두부는 강남 역삼역 근처의 숨두부 비슷하더군요.
물어보니 예전부터 이런 식으로 순두부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소고기장조림도 같이 내오니까 많이 있어 보입니다. ㅎ
나중에 영주 무섬마을이나 선비촌 소수서원 등을 돌아 볼 기회가 있다면
단체로 이 시간의 여행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로얄사우나는 없어졌다고 합니다.
다시 영주스포렉스로 갔습니다.
탕을 청소하는 것 하고 찜질방 들어 가는 것은 다른데
왜 1시 30분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는지
주인할아버지한테 여쭈어 보니
옷을 갈아 입으려면 남탕에 있는 옷장앞에서 해야 하는데
아줌마들이 청소를 하고 있으니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찜질방에 그냥 배낭을 메고 들어가서 옷 입은 채로 있을 수는 없는가?
생긴 지 오래 된 것 같은데 관리를 잘 한 것 같았습니다.
깨끗한 여러 탕을 혼자서 돌아 다니던 새벽 2시가 피곤해도 묘하게 재미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눈을 떴습니다.
영주역앞 버스정류장으로 오는 길에 한정식집도 발견합니다.
새벽에 장사를 하나? 가격도 좋은데........
봉화가는 버스를 타려면
역 건너편 정거장에서 3번 버스를 타고 영주시내버스정류장으로 가든지
역쪽의 정거장에서 1,2번 버스를 타고 장춘당약국 맞은편 정거장에서 내려야 한다고
순두부집 아줌마가 알려 주셨는데
일단 내 맘대로 결정합니다.
봉화에서 영주로 나오는 버스를 타면 영주경찰서를 지나고 왼쪽으로 꺾어
첫 정거장에서 내렸으니 영주역에서는 반대로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영주시의회 가기 전에 내리면 될 것 같았고
전에 한번 시골갔다가 영주역까지 택시타고 왔다가 다시 돌아 갈 때에
시내의 명문약국앞 정거장인가에서 탔던 기억이 나서
대략 찾아 갈 수 있겠다 싶어 촌놈똥고집을 여지없이 발휘했습니다.
어림짐작으로 가다가 내릴 곳을 놓친 듯 해서
운전기사아저씨한테 물어보니 방금 지나쳤다고 합니다.
한 정거장 더 가서 되돌아 왔으나 가까운 거리라 별 문제는 없었습니다.
모르는 곳에서는 타면서 물어보고 내릴 곳 알려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헤매지 않는 길입니다.
봉화가는 33번 완행버스가 금방 도착을 하였습니다.
영주에서 봉화까지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차창밖으로
서리가 내린 들이 마치 눈이 하얗게 덮인 것 같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봉화에 오니 시골들어가는 버스는 간발의 차로 놓치고'
내셩천변을 걸어 보았습니다.
서릿발이 작품을 만들어 냈네요.
나무상자 화분을 근접촬영하니 이렇게 나오네요.
공용정류장 맞은편 봉화시장쪽 김밥을 파는 식당에서 된장찌개를 먹었습니다.
맛이 일품이었습니다.
담양의 산에 다녀 오다가 차도로 뛰어든 고라니가
자신의 밝은 자동차 불빛에 옴짝달삭 못하고 변을 당한 얘기를 하며
좋지 않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하는 식당 사장아줌마한테
너무 걱정말라고 위로도 해드리고 하면서
차 시간을 기다립니다.
8시 35분 버스에 올랐습니다.
고향어귀입니다.
추워서 손이 떨린 건가? 보정기능에 맞추고 촬영했는데도......
11시쯤 친구내외가 세종시에서 내려 왔습니다.
점심을 먹고
여정을 시작합니다.
오전약수탕에서 물맛을 보고
저수지 감아 들어가니 생달 마을이 나오고
거기에서 소백산자락길 10구간을 시작합니다.
이 길은 외씨버선길이고 소백산자락길은 이 화면의 왼쪽으로 가야 합니다.
처음 가는 길이라 위험할 수도 있어서 친구의 아내는 자동차를 가지고
바로 부석사로 가도록 하고
친구와 저 둘이가 당당하게 출발하는데
도무지 길이 잘 안 보입니다.
이정표는 새 것이라서 틀림이 없는 갓 겉은데........
산악회의 댕기가 가끔 보이는데 길은 없고
비탈진 산속에서 안간힘을 쓰고 정신을 집중하면서 동산 하나를 넘었습니다.
지도의 자락길은 저수지변으로 편하게 걷는 것 처럼 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마침내 평지로 내려 설 수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 뒤뜰할배라는 택호가 있었는데
아마 부인이 여기서 시집을 오신 모양입니다.
사람이 떠난 빈 집.
농사의 흔적은 있고......
물야초등학교 오전분교가 폐교된 후 학예관으로 변하였는데
그 옆에 과수밭 속에 저런 건물이 있습니다.
길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난 번에 이 곳에서 결혼식이 열렸을 때에
동네유지가 사는 집이가 보다 했습니다.
알고 보니 다목적회관이었습니다.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보니 위에서 보았던 지도와 이정표 모두 다 문제였습니다.
생달마을에서 본 자락길의 파란색 길은 저수지 왼쪽으로 나 있었고
아래의 지도는 저수지 윗쪽으로 돌아 나와서 걸어야 하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결국 없는 길에 이정표가 서 있었으니 산길을 헤맬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부석사 가는 길.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걸어 갑니다.
정자가 든든합니다.
추운 겨울 맞춤형입니다.
찬바람이 몰아쳐 오기도 하고 분지를 걸을 때면 포근한 햇살이 어루만져주기도 했습니다.
우뚝 선 소나무가 외롭게 당당합니다.
부석사에 도착을 하였으나
표를 끊지 않고 그냥 주차장으로 내려가기만 하면 안되냐고 물어보니
매표소 직원은 완강합니다.
실랑이를 벌이는데 누군가 우리를 부릅니다.
희한하게도 친구의 아내가 시간짐작을 하고선 우리를 데리러 왔네요.
길을 잘 모를텐데도 말입니다.
어쨌든 부석사 구경은 생략하고
대구에서 온다는 친구가 있어서
바로 고향집으로 돌아 가야 했습니다.
당초의 계획보다는 4분의 1 정도에서 그쳤습니다.
다음 기회에 한번 제대로 걸어 보고 싶습니다.
황토방아궁이에서 고구마를 구워 먹었습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은박지에 싸서 두번 정도 시도하여
마침내 성공.
황토방은 땜빵 보수를 통하여 구색만 갖추고 있습니다.
뜨거운 방에서 친구내외와 또 추가로 합류한 다른 친구하고
넷이서 소주와 막걸리로 새벽까지 살아 온 이야기를 나누고
옛추억을 하나둘씩 꺼내면서 우정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친구내외는 오전약수탕의 탄산약수도 담아 갔습니다.
마그네숨과 칼슘이온인가 하는 것이 각각 40퍼센트를 넘고
철분은 고작 2%에 불과한데도 철맛이 강합니다.
친구 부부의 차를 타고 세종시까지 같이 와서 추어탕을 먹고
KTX로 서울로 돌아 왔습니다.
세종시로 가는 길에 금왕휴게소에 들렀었는데
전에 한번 와 본 것 같아서 전망대쪽으로 가보니 역시 기억이 맞았네요.
요즘은 기억을 재생하는 게 쉽지 않은데 괜히 기쁩니다.
금왕휴게소 뒷편에 있는 산소가 인상적입니다.
윗쪽의 조상 묘 하나는 별도로 상석이 있으나
나머지는 작은 비석으로 열을 세우고 아래에 단체 상석이 있네요.
공간도 절약하고 참배도 단체로 하기에 편하고 괜찮은 것 같습니다.
다음 주도 연휴가 있으니 시골집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 때는 소백산자락길 25킬로미터를 제대로 걸어 보려고 합니다.
그 날의 기다림에 약간은 들뜬
오늘도 바람처럼.
첫댓글 참 여유로움이..제겐 부러움 이기도 합니다.
서릿발이 작품이 정말 새롭네요.
다음 시간이 주어진다면 저길을 오롯히 가보고 싶네요^(^
참 기분이 좋은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