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6:10]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 본절의 '죄에 대하여'란 표현은 각별한 주의를 요한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자신의 죄로 인한 필연적인 죽음이 아니다. 그는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짐지우신 자기 백성의 죄와 허물을 위해 죽으셨다(사 53:4-6). 또한 본절의 '단번에' 란 표현은 구약의 속죄 제사 규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다.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이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씩 제사를 드렸으며 백성들은 죄를 범할 때마다 희생 제물을 가져왔으니 그 제사는 반복적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되신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에 대제사장들이 반복적으로 드려왔던 그 제사 대신 자기 몸을 제물로 바쳐 '오직 한번만' 드림으로써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 피흘리신 제사는 구약의 모든 피제사의 최종적 제사요,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이기에 제사를 또 드리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죽으실 필요가 없다.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혹은 '하나님 안에서'로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으나
이보다는 '하나님을 위하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해석하는 것이 합당한 듯하다 우선 본절의 '하나님께 대하여'란 표현은 '죄에 대하여'와 대조되어 있다. 따라서 이 문구의 해석은 '죄에 대하여'란 표현에 대한 해석과 문맥적 일치를 요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하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온전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권고한 12-14절 내용과도 조화된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는 그의 서신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한 바있다.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본절에 대해 스토트는 다음과 같이 매우 논리적이면서 간략하게 설명했다. "만약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죄에 대한 죽으심이었으면, 그의 살으심이 하나님에 대해 살으심이고, 그리고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살으심 안에서 그와 연합되었다면, 우리 자신은 죄에 대하여는 죽었으며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이 여겨야 한다."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 2절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를 누림을 말한다.칼빈은 이에 대해 말하기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성도는 영적 자유를 얻은만큼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날마다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성화의 삶을 살도록 분투해야 한다.
이것은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과 의 가운데 온전히 거할 때가지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엔 크리스토 예수) - 본절에서 이 문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와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라는 전 후의 문구에 동일하게 연결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떠나서는 죄의 세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생각할 수 없고 생명의 부활도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커다란 건축물의 초석과도 같은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바울은 이 표현을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하였던 바, 성도와 그리스도간의 관계성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에 대한 보다 상세한 내용에 관해서는 본장 주제 강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참조하라. 여길지어다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로기제스데'는 현재 명령형 복수 2인칭으로 '권고'로 해석해도 되며 '명령'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12절과 13절에 사용된 동사가 명백히 명령형으로 해석되므로 본절도 권고형보다는 명령형으로 해석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즉 성도는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여겨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진 사건은 성도들을 그러한 신분으로 만든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사건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적인 사건을 파악하여 그것을 굳게 붙잡는다는 의미이다.
[롬 6:12]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그러므로 - 바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없다는 자신의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 교리적으로 피력했던 진술들을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본 접속사를 사용했다.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 바울은 성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가 성도들 가운데서 역사하고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바울이 논리적인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 그렇지 않다. 바울은 다시 14절에서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라고 언급함으로써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것은 죄에 대한 성도의 죽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실재적으로 발생했던 사건에 대한 진술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죄가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은 보장되어 있다.
다만 죄가 연약한 인간의 몸을 통해서 역사하고 있고 이것 역시 현실이다. 그러나 죄가 이전과 같이 성도들에게 왕노릇할 수는 없다. 성도들에게는 오직 그리스도만 주인이다. 그런데도 죄는 성도들의 연약한 몸을 통하여 역사하면서 자신이 주인인 체 할 수 있다. 이러한 거짓된 가장조차 허용하지 않기 위해 바울은 본절과 같은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성도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의 신분을 가지고 있으나, '죽을 몸'을 지닌 현재는 아직 죄와 투쟁하는 신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죽을 몸'의 '죽을'은 헬라어로 '드네토'이며 이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원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벌로써 내려진 필연적인 죽음을 가리킨다 아담은 하나님께 범죄하기 전에 죽지 아니하는 '생령'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가 범죄한 후부터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고 이 사망의 진노는 모든 인간에게 그대로 내려졌다. 그러나 사망의 진노는 구속함을 받은 성도에게는 더 이상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면서 타락한 세상과 부딪히게 된다.
그렇기에 바울은 더 이상 죄의 유혹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신분에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지속적으로 애쓸 것을 당부하고 있다. 몸의 사욕(私慾)을 순종치 말고 - 죄는 우리 죽을 몸을 통해서 역사한다. 그 몸에서 죄를 짓게 하는 욕구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몸의 욕구대로 행하게 되면 죄에 대하여 죽은 성도는 도전을 받게 된다.
성도라면 당연히 죄와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또한 투쟁해야 한다. 비록 죄에게 패배할 때가 많을지라도, 성도는 이미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이므로 염려할 필요는 없다. 한편 '순종치 말고'라는 말은 난폭하고 불같은 정욕대로 행할 것을 사단이 강요한다는 암시를 함축한다. 사단의 세력은 성도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지나 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한다.
여기서 죄의 심각성과 타격적인 지배성을 상기할 수 있다. 일찍이 사단은 그리스도께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내걸은 바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사단의 유혹을 이기시고 꾸짖은 것처럼 성도는 죄악의 곁에 가지 말며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롬 6: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 '지체'라는말은 12절의 '죽을 몸'이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불의의 병기'란 표현은 각각의 지체가 죄의 종이 되어 불의를 행하는 도구가 됨을 나타낸다. 특히 바울은 '병기'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단순히 각 지체가 불의를 행함에 있어서 도구적인 의미보다 더 적극적인 수단이 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사실상 성도라 할지라도 자기 몸의 지체를 제어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은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오직 너희 자신을...하나님께 드리며 - '너희 자신'은 '너희 죽을 몸'(12절)과 '너희 지체'와 동의어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란 표현은 11절 내용의 반복으로, 성도가 의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자의 신분임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지 새로운 피조물"로서,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으로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마땅하다. 그 이유는 성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며, 값으로 산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
혹자는 바울이 몸의 지체를 악에 대항하고 의를 위해 전쟁하는데 사용되는 무기로 생각하게 된 것이 그의 선생들이나 스토아 철학자들에게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 오히려 바울은 구약의 '거룩한 전쟁'에 대한 개념을 영적 전쟁에 적용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은 성도의 삶을 군사적 삶에 비유하는 표현법을 즐겨 사용했다. 거듭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죄와 투쟁하기 위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성도가 자신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싫어할 때, 이미 그는 자기의 몸이 불의의 병기로 사용되고 있으며 어떠한 의의 열매도 맺지 못하게 됨을 깨달아야 한다.
[롬 6:14]"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 성도가 자기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바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와 완전히 분리된 삶을 살 수 없다. 그렇지만 자기 몸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그 사람에게 죄가 왕노릇할 수는 없다. 한편 '주관치 못하리니'에 해당하는 헬라어 '우 퀴리유세이'는 미래 능동태 직설법이다.
여기서 이 단어가 미래 시제인 것은 단순히 장래에 되어질 일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주관치 못한다는 내용을 강력하게 확증한다. 즉 죄가 성도를 주관치 못하는 것은 장래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확실히 그렇다는 것이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말미암는다.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
본절에서 '법'이 '은혜'와 대비되어 있으므로 이 '법'은 '법칙'이나 '세상적인 법'이 아니라 '율법'을 의미한다. 바울이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킨 것은 죄가 성도를 주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즉 율법 아래 있는 자는 율법의 종이 되어 그리스도와는 관계없이 죄의 문제만으로 고민하여 항상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게 되니, 그 사람은 죄의 종이다.
그러나 은혜의 원리에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에 거하게 되므로 결코 죄가 그에게 왕노릇할 수 없다. 이 사실은 8:1, 2에서 바울이 선포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을 뿐 아니라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