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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에 관한 연구
Ⅰ. 서 론
1. 연구의 목적
올바른 헌금 관을 갖는 것이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한국의 교회는 분명한 성경적 조명을 받고 있지 못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고 있다.
한국의 교회는 십일조를 헌금을 거두는 것 물론 사용하는 것조차도 어떤 기준이 없이 행하는 것을 본다.
윤종승은 "교회의 경제는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책에서 말한다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복잡하게 뒤엉킨 여러 가지의 문제를 풀어줄 실마리는 바로 헌금에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본고는 성경 적인 십일조의 이해 가운데 바른 헌금 관과 십일조의 긍정적인 실천을 유도하고자한다. 아브라함부터 흐르고 있는 구약의 십일조의 정신으로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무지를 깨우고 올바른 십일조의 정신이 정립되었으면 한다.
2. 연구의 방법과 범위
구약성경에 나타난 십일조의 원리와 십일조의 정신으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헌금을 올바로 봉헌하고 사용하는 면을 정리하고자한다.
그리고 본고의 정리하는 범위는 다음과 같다.
제Ⅱ부에서는 십일조의 개념과 그 의미를 예수시대와 교회시대와 종교개혁의 시대를 통해서 기원을 찾고자 한다.
제Ⅲ부에서는 구약성경의 십일조의 제도와 역사를 개괄하고자 한다.
제Ⅳ부는 십일조의 온전한 뜻은 무엇인가? 본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Ⅴ부는 온전한 십일조의 봉헌과 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서술한다.
또한 마지막 결론으로 제Ⅵ부에서는 본고 전제를 요약하고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 맺고자한다.
Ⅱ. 구약성경의 십일조 기원과 예수사역부터 종교개혁까지
1. 예수님 사역 후 - 종교개혁까지의 십일조
(1) 예수님 사역
신약시대에 이르러 많은 변화들이 생겨났습니다. 대제사장들의 탐욕대문에 일반제사장들은 가난하게 되었고 일반 제사장들은 십일조를 강제적으로 거두어 힘든 시대였습니다.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탈무드에 나아있는 랍비들의 한 법도인데 이것은 구약의 성경의 내용을 과도하게 앞질러 있다. 복음서에서는 십일조의 헌금에 대해서 3번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누가복음 18장12절)."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셨다. 바리새인들은 따로서서 기도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고 자신의 신앙을 정당화한다. 나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사실 그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드리면서 율법의 규정을 철저히 지켰다. 이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고 율법을 행치 않는 사람들을 멸시했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의 신앙을 낮게 평가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진정한의 곧 믿음이 없음을 지적하셨다(눅18:14). 결국 예수님께서는 십일조의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자의 자세를 못 마땅하게 여기시는 것이었다. 십일조는 복음서에 다른 두 곳 마태복음 23장 23절과 누가복음 11장 42절의 병행하는 귀절이 나온다. 여기서도 바리새인과 관련된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태복음 23장 23절)."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누가복음11장 42절)."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의 형식적인 종교의 생활과 봉헌자의 마음의 중심의 자세를 지적하고 있는 다. 원래 십일조의 대한 율법은 신명기 14장 23절에 의하면 토지의 소산의 십분의 일 즉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드리라는 것이 이었으나, 당시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레위기 27장 30절의 말씀 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요. 미세하게 적용하여 아주 사소한 채소 심지어는 그 잎과 줄기에까지도 십일조를 행하였던 것이다. 이런 엄격한 십일조의 준수가 잘못이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은 그들의 이같이 엄격한 헌금의 생활을 하면서도 그들의 생활 면, 인격 면은 여지없이 등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의 형식적인 준수에는 열을 올렸으나, 율법의 보다 중요한 면 의와 인과 신, 즉 율법의 근본 정신을 망각하고 무시했다.
이러한 태도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공의와 긍휼과 믿음이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하고 또 아무리 엄격한 십일조의 생활을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금이 될 수가 없다 즉 헌금은 철저한 준수보다도 헌금자의 마음의 중심과 생활이 중요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일조의 의미입니다
이상의 십일조 헌금에 관한 내용 외에 헌금 자에 관한 예수님의 주요한 가르침이 있다. 예수께서는 성전의 연보 궤에 앉으사 사람들의 헌금하시는 광경을 바라보시는 가운데 한 과부의 헌금의 광경을 보시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 깊은 말씀을 하셨다.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풍족한 가운데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가운데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마가복음 12장 43-44절)."
박수암 교수는 이 구절을 해설하는데 즉 과부는 단회적으로 렙돈 두 푼을 던졌으나(과거에 끝난 동작) 그 헌금은 현재 넣고 있는(현재 진행하고 있는 동작) 많은 사람의 헌금보다 더욱 많은 것이라 는 뜻이다. 말한다.
하나님은 헌금의 양을 보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헌금하는 자의 마음을 달아보신다는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많은 돈을 바치면서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복종심이라든지 헌신의 마음이 없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편리한데로 헌금을 드렸다. 그들은 헌금으로 인하여 경건의 고통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과부는 두 렙돈의 헌금을 드리므로 당장 생존의 위험을 느꼈고 그녀가 느끼는 그러한 고통은 곧 그녀의 헌금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헌신의 표였음을 증거 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기사를 통해서 드리는 헌금은 내 성애 전부를 드리는 심정으로 해야함을 가르친다.
예수님이 말하는 십일조 의미 종합적으로 살펴 볼 때 헌금을 헌납함으로 이행했다는 지 헌금의 액수보다는 봉헌자의 마음의 중심을 중히 보시고 생활 면을 더 중요하게 여기셨다.
2) 초대교회
초대교회에 바울은 십일조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는 대신 헌금의 포괄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헌금의 의미를 두 가지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복음에 은혜에 대한 성도의 한 응답이다. 헌금은 성도가 하나님의 구속에 은혜에 감격하여 육신 것으로 거기에 보답한다는 감사의 표시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헌금은 신령한 것을 나눠 받음에 대한 육신 적인 되 갚음이다. 둘째 헌금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성한 예배 중에 하나이다. 헌금은 제사장이 제사의 직무를 이행하는 것과 같은 하나의 제사행위이다. 바울은 헌금(leitourgia)이라 부른다. 고린도 후서 9장12절 이것은 공적인 봉사를 뜻하며 흔히 의식적인 봉사, 제사장으로서의 의무를 뜻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방의 교회가 예루살렘의 교회를 돕기 위하여 연보 한 헌금이 이웃의 구제의 사업에 쓰여지던 혹 복음의 사업에 쓰여지던 헌금은 인간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의 하나의 행위이다.
이상은 바울이 밝힌 헌금 관은 초대교회의 헌금 관이다. 또한 초대교회의 유무상통은 전적은 헌신과 봉사임을 알 수가 있다. 바울과 초대교회를 이해하는 헌금 관은 십일조의 의미를 더 확실하게 한다. 초대 교회는 헌금을 드리는 자의 마음과 정성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볼 수가 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서 봉사 (전 재산을 헌금하며) 물질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고백했다.
3) 종교 개혁
교회사에 나타나 십일조의 헌금이 의무화되면서 강제화 된 것은 6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터이다. 제2차 마콩시노드 (585년)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파면한다고 했고, 신앙고백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십일조를 바치지 않으면 죄를 범하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십일조를 거두는데 효력이 덜어지자 결국 입법과 사법의 힘을 빌리게되었다. 8세기 샤를레망 시대에는 십일조는 일반적으로 감독과 성직자를 위해서 가난한사람을 위해 교회의 재정으로 후원하기 위해서 재정 되었다.
기독교가 도입되는 나라의 반대도 있었지만 11세기-13세기는 십일조의 제도가 각 나라에서 확립되었다. 후기 중세시대 이르러서는 이것이 굉장히 남용하게 되었으니 어떤 경우에는 십일조가 성직을 사는데도 사용되었다. 종교개혁은 주로 성직에 있어서의 부패를 끊어버리는 역활을 했다. 성직의 매매의 악이 파괴되면서 교회의 권위는 크게 약화되었고 이제 세계의 중심세력은 교회에서 국가로 이동했다. 종교 개혁의 결과로 로마의 카톨릭의 교회는 이제가지 받았던 십일조를 순식간에 손실 당하였다. 종교 개혁 당시의 권력과 세력의 과도적인 상태에 빠지므로 십일조에 관한 새로운 관심이 평신도들 사이에 발전하게 되었고 그들은 수입의 정확한 분량을 하나님의 사업에 봉헌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들은 하나님이 현세의 사업을 현세의 사업을 번창하게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이 이러한 신앙의 근거로 삼는 것이 말라기 3장10절의 말씀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라기 3장10절)."
2. 십일조의 제도의 기원과 발생
1) 십일조의 용어
십일조은 히브리어로 (마아세르) 이다. 이것이 어근 는 아라비아어 동사 'ashara'
공동체를 형성한다. 어떤 무리를 형성하다. 와 명사 'ashirat'부족과 'mashar' 집회와 관계를 가진다. 열 개의 손가락을 가르키는 이 단어의 어원적인 발달은 십 = 집합, 통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라비아어에서는 십은 'ashr'이며 우기리트어에서는 'sr'이며 아카드어에서는 'esru' 성서 아람어 에서는 'asar'이다. 히브리어에서는 (asar. 아사르)는 십분의 일을 취하다. 또 히브리어로 (마아세르) 십분의 일의 몫을 의미한다.
한편 헬라어 낱말은 (데카토오) 십분의 일을 취하다. (아포 데카토오) 십분의 일을 바치다(마23;23, 눅11;42). 등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낱말들이 직접적인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 결국 십일조라 하면 그것이 정치적인 성격이든 종교적인 성격이든 간에 봉헌하거나 부과되는 소득이나 재산의 십분의 일의 몫을 가르킨다. 어떤 이는 이런 용어가 과세의 의미 가진다고 하여서 십일조(十一租) 라고 명기한다.
2) 십일조의 기원
십일조의 기원은 십일조를 바치는 셈족이외의 다른 종족의 종교에서도 오래되면서도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한 사람이 자기가 노동하여 얻은 것의 한몫 또는 전쟁에서 얻은 전리품 중에 한몫을 드리는 것은 고대의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알려져 있었다.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거주하던 고대인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추수의 첫 수확을 그들의 신에게 헌상 함을 그들의 관례로 삼았다. 그들은 금, 은, 보화, 가축이나 노예에 이르기까지 그 십분의 일을 신들의 몫으로 떼어놓았고 뿐만 아니라 토지, 취락, 행정구역까지 예외가 아니었으며 이렇게 하여 받쳐진 모든 것은 신전의 확장이나 중수, 또는 모든 종교의 진작으로 사용하였다.
고대의 바빌로니아에서는 기원전 2100년에도 제신들의 신전에 십일조를 바쳤다는 전설이 있었다. 이들 각 신전은 바빌로니아인들의 기증 물로써 유지되는 것인데 이 헌물은 자의적인 것과 강제적인 것이 있었고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십일조로서 이것은 위로 군왕으로부터 초부에 이르기까지의 계급에 여하를 막론하고 바친 것이다. 그들은 1년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치되 토지의 소득이나, 상업적인 이윤은, 전쟁중의 노획물, 도는, 조공, 기타 그 어떤 잡 수익이든지 다 받쳤다. 이상의 고대 십일조의 관례는 한통치자가 피 백성에게 그 자신의 국민에게 부과하는 현물세였다는 것을 알 수 가있다. 대개 이스라엘 외 다른 나라들 사이의 십일조는 십일조가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고, 이스라엘은 종교적인 것 즉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이 특징이다. 십일조의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십일조는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레위기 27장 30절, "땅의 십분의 일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 이라" 통해서 답변한다. 땅의 모든 십일조는 여호와의 것이다. 십일조는 예외 없이 동물의 생명분만 아니라, 식물까지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십일조는 처음 추수한 곡식이나 열매를 드리는 제사와 혼동되어서는 안되며 도한 자신을 위하여 좋은 것을 떼어놓은 후에 일부분을 근거로 해서 십일조를 드려서도 안 된다. 예를 들면 동물의 경우에서도 울타리에 남아 있는 그 상태에서 십분의 일을 계산해서 그것을 여호와께 속한 것으로 간주해야 했다. 농부는 그 십일조의 운반하기 위해서 현금으로 바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십일조의 재정적인 이익을 취하지 못하도록 그 십일조의 5/1일 추가해야 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과정을 거쳐서 확정된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한 것이었고 오직 하나님께만 드리는 거룩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십일조의 의미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의 인간의 관계 속에서 보아야한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천지만물을 창조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의 세계에 대한 소유권을 유지하셨다.
"땅의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시편24편 1절)."
사람은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가졌든지 간에 관리인 또는 청지기로서 절대적인 소유자이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책임을 다하여야 한다. 사람은 그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궁극적으로 응답 해야한다.
다윗은 제물을 가져오면서, 회중들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 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이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나이다(역대상 29장14절)."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로 받았으므로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므로 모두다 하나님께 바쳐야할 인간의 근본적인 의무이다. 이것이 사실상 십일조의 원칙이다. 그 의미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생명까지도 주셨으므로 이에 은사에 보답하며 헌신한다는 서원 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다. 십일조는 단순한 십분의 일을 의미한다. 그것은 항상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관련되어 하나님이 명령하신 특별한 사용을 특정한 소유의 십분의 일을 떼어놓는 것이다. 이 십일조는 본질상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만, 특별히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그야말로 헌금의 최저 표준이 되는 것이다. 고대 히브리인 사이에는 첫 곡물의 봉헌 및 양의 첫 새끼의 봉헌을 하나님께 그해의 수확을 전부를 바치는 신앙의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소위 맏물은 온 전체를 대표하는 바 곧 전체를 드린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십일조의 본래적인 의미는 일 부분이 아님 전체를 가르치며 이는 인간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기본적인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구약의 성서에서 십일조를 두 가지 측면으로 찾아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을 향한 측면과 사람을 향한 측면이다. 첫째로 하나님을 향한 측면으로 볼 때에 십일조는 결코 무거운 부담을 뜻하지 않는다. 백성들은 획득한 것의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오히려 십일조는 기쁨이 넘치는 자발적인 행위였다.(신명기12:12)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함으로 인해서 자신이 가지는 작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신뢰의 행위이었다.
두 번째 십일조는 인간을 향한 것 또는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이었다. 즉 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백성의 내적인 관계를 일부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1)하나님의 봉사에 종사하기 때문에 상업적인 행위와 무관한 레위인들은 그 십일조로부터 직접적인 유익을 얻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레위인들과 비레위인들과의 내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밀접한 관계 속에서 그들이 서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십일조를 드릴대마다 생각하게된다.
2) 더 나아가 소외 계층의 가난한 자들과 과부와 고아들, 그리고 고아들은 삼년 마다 드리는 십일조에 의해 살아 갈 수가 있다.(신명기14:29) 그들이 비록 무기력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그들은 공동체의 일 부분이다. 그 십일조는 그들의 유익한 삶을 보장케 해주며 건강한 사회를 향한 디딤돌이 된다.
Ⅲ. 구약성경의 십일조 제도
1. 족장 시대
십일조의 근거가 성경에 있고 그 근원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오고 있다. 십일조를 바치는 일은 셈족 외에도 타 종족의 종교 문화 중에서도 오래된 일반적인 하나의 풍습이었다. 애굽에서는 십의 이를 바로에게 바쳤다.
"추수의 오분 일을 바로에게 상납하고 사분은 너희가 취하여 전지의 종자도 삼고 너희의 양식도 삼고 너희 집 사람과 어린아이의 양식도 삼으라(창세기 47장24절)."
성경에서의 십일조에 대한 최조의 언급은 아브람이 노략질하던 메소포타미아 왕들을 쫓아가 쳐부수고 돌아와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그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준 사실이었다(창세기14:18-20). 그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가져왔고 아브람의 원수를 그의 손에 부치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여기서 곡물은 아브람의 승리의 길을 기뻐하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사례된 것이다.
이 때에 바쳐진 십일조는 멜기세덱의 대 제사장직이 아론의 대 제사장직보다 우월하다는 내용을 지적하는 것으로 히브리서 7장1절에 설명되어있다. 아브라함은 신구약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요 머리요 대표이다. 멜기세덱은 창세기14장과 히브리서 7장을 고려해 볼 때에 살렘의 와으로 예루살렘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대 제사장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아브라함의 복을 비는 자로서 선지자의 직분을 행하신 것이다.(히브리서 7장6절과 창세기 14장19절은 즉 멜기세덱이니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3직을 가지신 예수그리스도를 가르친다. 그렇다면 구약의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자에게 십일조를 바쳤다면 신약의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십일조의 기원은 모세의 율법의 이전에 있었으며 아브라함이 드린 멜기세덱의 십일조는 율법주의 적인 제도나 정신이 아니라 믿음의 발로요. 은혜에 대한 감사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이니 그 근원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께 서원 하여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순전히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시면 십일조를 드리겠나이다(창28;20-22). 하나님이 자기가 가진 물건의 십분의 일을 드리기로 서약한 야곱의 동기는 공물이 아니고 감사이다. 이 감사는 십일조의 후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강제나 곡물이 아니고 자유로이 결심한 감사의 헌금인 십일조이다.
2. 모세 시대
십일조가 크게 중시되고 그것이 제도화 된 것은 분명히 모세 시대에 들어와서 였다. 구약의 성서의 내에 보존되어 있는 가장 최초의 율법의 문서인 언약 책(Book of Covenant: 출애굽기 20:22--23:33) 에는 십일조에 관한 언급을 하고 있는 최초의 경전은 신명기이다. 신명기에는 두 규정이 언급되어있다. 한편 매년 토지의 십일조를 하나님의 관한 것이고 또 한편은 가난한 자의 생존에 관련된 법이다. 첫째 십일조는 축제의 십일조라 할 수가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삼대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종교적인 행사에서 가축과 밭에서 나는 열매를 성전에 가져다가 거기서 주재하는 레위인, 제사장, 가족들 하인들이 함께 공동축제를 하면서 먹었다(신명기12:6-7, 16-18, 14;22-27, 15;19-22, 16:3,13,16).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그러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이 네게서 너무 멀고 행로가 어려워서 그 풍부히 주신 것을 가지고 갈 수 없거든 그것을 돈으로 바꾸어 그 돈을 싸서 가지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곳으로 가서 무릇 네 마음에 좋아하는 것을 그 돈으로 사되 우양이나 포도주나 독주 등 무릇 네 마음에 원하는 것을 구하고 거기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앞에서 너와 네 권속이 함께 먹고 즐거워할 것이며 네 성읍에 거하는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 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니 또한 저버리지 말지니라
(신명기 14장 22-27절)."
둘째 십일조는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라고 불리 우는데 매3년마다 바치는 것으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과 분 깃이나 기업이 없는 자와 성에 머무는 나그네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배불리 먹도록 하는 것이었다(신명기 14:2 7, 26;12-15).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 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 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명기 14장28-29절)."
이것은 자선의 목적을 위한 십일조의 새로운 용도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신명기의 내의 십일조는 하나님이 그 땅과 소산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레위인들의 부양수단이며 자선을 위해 바쳐지는 그런 봉헌이었다. 세째 레위기서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은 땅의 곡식이나 실과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구별하여 바치라는 것이다(레위기27:33-37). 이 십일조는 회막에서 일하는 레위인의 기업이며 레인인은 십분의 일의 십일조를 여호와께 드릴 것이며 그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려야한다.
"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사람이 그 십분 일을 속하려면 그것에 그 오분 일을 더할 것이요
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그 우열을 교계 하거나 바꾸거나 하지 말라 바꾸면 둘 다 거룩하리니 속하지 못하리라(레위기 27장30-33절)."
십일조로 드린 거제 물은 곳간에 둠은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함이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인하여 즐거워함이라. 이와 같이 제사의 법전의 십일조는 거제물과 관련이 되어 있음을 보게된다. 결국 레위기의 십일조의 의식은 느헤미야 10:37-38, 12:44, 13;5,12에서 확장되었고, 또 역대 하 31: 5-12에서도 확증이 되고 있습니다.
이상으로 볼 때 하나의 십일조는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축제를 위해서 드려졌으며 또 하나의 십일조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필요했다. 그리고 성전에서 근무하는 레위의 자손들에게 후원하기 위하여 요구되었다. 이것이 위경 토비서에 기록된 랍비식의 조직인데 제사장의 곡물을 위한 십일조는 연례적으로 헌납해야하고 축제의 십일조는 첫째, 둘째 및 네째, 다섯 째 해에 내야하고 자선을 위한 십일조는 세째 해와 여섯째 해에 내야한다(토비트 1:7-8). 일곱 째 해는 땅을 묵혀 두어야하기 때문에 헌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세 가지의 십일조가 있었으나 해마다 두 가지만 바쳤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명하신 십일조의 봉헌은 두 가지 별 다른 이유들이 있다.
1)그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시기로 약속 하셨기 때문에 레위 지파 사람들이 그 땅의 12/1를 유업으로 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레위지파는 그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요셉의 후손이 둘로 나누어 대신차지 하였다. 만일 레위지파가 타 방법으로 분 깃을 나누지 못한다면 그 땅의 분배는 불공평하다. 2)레위지파는 성전에서 일했으므로 노동의 댓 가를 받을 가치가 있기 대문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의 자격으로 십일조는 당신의 것이라고 선언 하셨고 그 십일조는 당신이 레위지파 사람들에게 주셨다. 즉 '나는 너희(레위인들)의 분 깃이라고 말씀하셨다(민수기18;20, 칼빈주석). 율법의 하에 드리는 십일조에서 토지의 소출과 목축의 십일조를 드리느 것이 의무였다(레위기27:30-32). 소나 양은 막대기로 통과하는 좋건 나쁘건 10번째의 십일조의 몫으로 갈라놓았다.
3. 왕정 시대
농산물 포도생산 가축 등의 십일조를 징수하는 것은 왕실의 한 특권이 되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왕에게 십일조를 바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사무엘 상 8: 15:17). 왕실에 바쳐지는 십일조는 왕실의 성소를 유지하기 위하여 있었다는 설명이 있어 왔다. 심지어는 우상숭배를 하는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십일조를 바치게 되었는데 그런 경우는 십일조가 우상에게 드려졌다(암모스 4:4). 십일조를 바치라는 히스기야 왕에 명령은 레위인들을 위한 것이 마땅하다.
이 명령은 잘 수행되어 당시의 성전 내의 십일조를 보관할 방이 이었다(역대 하 31:4-12). 이와 비슷한 설비가 느헤미야에 의해서도 시행되었다(느헤미야 10:39, 13:10).
4. 포로후기 시대
에스겔은 하나의 일반세 (에스겔 45:13이하)를 거둘 목적으로 왕의 공중예배를 겪려 하는 것을 말하고있다. 제사장들은 자기들의 생계를 위해 첫 이삭과 거제 물을 받게 되어 있었다(에스겔 44:30). 느헤미야의 시대에 레위인들이 한 제사장의 감독 아래 있는 모든 도시와 성읍 안에서 십일조를 거두고 그 다음에는 제사장들을 위한 성전 안에 있는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두고 보관하였다(느헤미야 20;37). 이러한 계획이 실시되지 않던 때에는 레위인들도 스스로 생계를 구려 나아가야 했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느헤미야 13장 37-39절)."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던 시대에는 십일조가 소홀히 여기어 졌다(말라기 3:7-12)."
말라기는 십일조와 헌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 하며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번영을 이루라고 한다. 이로서 바벨론 포로 이후 십일조의 의식은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그들은 성전이 재건이 되고 여호와께 제사의 제도가 시행됨이 틀림이 없다(말라기 1:7-10). 도덕의 생활은 환멸을 느낄 정도로 도덕적인 회의가 나타났다. 제사장들은 자기의 직무에 싫증이 나고 여호와께 병든 짐승을 바치고 법의 집행이 편파적이며 안식일이 무시되고 십일조를 내지 않아 레위인들이 그 직무를 포기하지 않을 수 가없었다(느헤미야 13;10). 충실한 신앙이 아무 이득이 풍조가 만연하였다. 이혼의 유행(말라기2:13-26) 이방인과 결혼이 통례로 여기어 지는 것, 고용인의 임금을 착취, 이러한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3장 7절로 '내게로 돌아 오라 나도 너희에게로 돌이키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말라기 3장7절)."
Ⅳ. 구약성경의 십일조의 중심사상
1. 구약 족장들의 십일조사상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중심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재물과 헌물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과 재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기억하여 감사하는 것이다. 둘째 모든 주어진 재물은 자기의 자신의 선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를 위한 선물인고로 당연히 자기의 것으로 삼아서도 안됩니다. 십일조의 헌납의 관계는 모세의 율법의 이전 태고 적부터 비롯되었으며
다소간에 강제성을 띠고 전래되었음을 알 수 가 있다. 아브라함이 특정한 경우에 십일조를 낸 것이라든지(창14:20) 야곱이 또 특정한 경우에 십일조의 이행을 서원 한 것이 그렇다(창29:22).
헌금의 역사를 소급한다면 그 기원은 하나님께로 소급된다. 하나님이 인간의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파괴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찾아 오셨다. 범죄의 수치를 가리우고 하나님 앞에 서도록 희생의 제물을 바쳐야 했다. 이것이 헌금의 모델로서 범죄의 수치를 가리우기 위한 속죄와 창조주 되신 하나님과 그 분의 지으신 만물의 다스리는 인간 관계의 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조상들에게 가르쳐주신 것으로 아담이후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인간의 헌금은 신적이라는 것이다. 십일조의 역사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V.P. Black, 의견에 따르면, 무릇 인간은 그 조물주에게 수입의 일정 양을 바쳐야 하며 그 한계선으로 십분의 일 이하이어서는 하나님은 시초부터 인간에게 명하셨다는 것이다. 즉 제사의 의식과 십일조의 헌납은 세상의 시초로부터 알려졌고 이행되었으며 인류가 세계가지로 확산 될 때 이 전통 역시 각 곳으로 묻혀 옮아갔다는 것이다. 창세기 4장3-7절을 읽으면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인의 제사가 열납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에 이유는 많겠지만 V.P. Black, 의견에 따르면, 아벨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그대로 바쳤고 그러나 아벨의 바친 바의 최소의 부분적 이나마도 바치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 점에 관한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거로 가인이 바친 제물은 흠이 없었으나 하나님이 명령하신 전부 또는 그대로를 바치지 않음으로서 결전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가인이 정죄 되는 것은 예물의 정량을 채우지 못했거나 혹은 충분한 제물을 가져오지 못한 때문이라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다. 한편 노아가 홍수 후에 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린 기록이 있다(창 8:20). 노아의 희생의 제사는 인간이 하나님께 바치는 두 번째 경우로 보는데 여기서는 제단, 불, 그리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의 구별이 언급되기 시작한다. 이후로는 아브라함이 두 번이나 단을 쌓고 야훼의 이름을 불렀고 (창 12:7-8) 이어 이삭이 브엘세바에서 단을 쌓았고(창 26:35) 야곱 또한 단을 쌓은 기록이 나온다(창 33:20).
이상에서 열거된 사실을 종합해 볼 때에 아담의 두 아들의 최초의 기록된 행위에서 수입의 첫 열매를 바침으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본연의 의뢰심과 의무감 등을 알 수가 있다. 그 후 대대손손 땅의 소산이나 정결한 짐승 도는 날 짐승을 정선하여 하나님께 드린 사실을 보는데 이 모든 것은 각 민족 각 시대에 창조주 하나님께 각자의 제물의 일부를 바치는 것 자기의 본분으로 삼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연합한 원수들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이요 제사장인 멜기세댁에게 전리품을 십분의 일을 선물했다(창 14:17-24).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때에 소돔 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 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 깃을 제할지니 그들이 그 분 깃을 취할 것이니라(창세기 14장17-24절)."
여기 아브라함이 된 십분의 일을 단순히 내는 자의 십분의 일을 내는 자의 기분을 따라 낼 수도 있고 안낼 수도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당연히 내야 하는 의무적인 것이었다. 즉 신분이 낮은 자가 신분이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기 위해서 바치는 정당한 것이었다. 또 멜기세댁에게 바친 이 십일조는 강제적이고 의무적인 것만 아이라 믿음의 발로요 은혜에 대한 감사의 사례로도 볼 수 있다. 야곱아 만일 자기에게 하나님이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주시고 안전하게 해주시면 자신의 받은 것의 십분의 일을 돌려 드리겠다고 약속했다(창세기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세기 28장 20-22절)."
여기에서 특이 하는 것은 야곱이 십일조를 서원 하는데 하나님께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과 합의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계약의 백성에게만 가는 한 것으로 신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십일조는 모세의 율법으로 제도화되었으며 모세의 오경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세 가지의 십일조가 있다 또한 십일조의 일을 드림으로 그들의 소유의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짐을 상징하고 있다. 민수기의 규정은 십일조를 토지의 문제와 관련해서 설명하고 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이 후로는 이스라엘 자손이 회막에 가까이 말 것이라 죄를 당하여 죽을까 하노라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율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수기 18장:21-24절)."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내가 너희의 거제물을 타작 마당에서 받드는 곡물과 포도즙 틀에서 받드는 즙같이 여기리니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 너희의 받은 모든 예물 중에서 너희는 그 아름다운 것 곧 거룩하게 한 부분을 취하여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민수기 18장:26-29절)."
레위 족속을 제외한 나머지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모두 자기네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들은 그 토지가 유산과 기업으로 생계에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레위인들 만은 이 토지를 할당받지 못했다. 이들은 토지가 없는 까닭에 생계의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십일조 중에서 그들의 수입을 해주셨다. 이상 위의 성구들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에게 해당된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서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또한 바쳐야 한다. 여기에서 십일조의 선택은 기계적이 아님을 알 수 가있다. 그들은 그들의 가장 좋은 것에서부터의 선택이다. 십일조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이상에서 볼 때에 신명기 법전의 십일조는 "함께 나누는 잔치", 의 성격이 강하게 반영되어 반해 제사 법전에서의 십일조는 하나님이 직접 요구하시는 것으로 성전의 봉사자들의 몫으로 규정되어 나타난다. 모세의 오경에 나타나있는 십일조의 규정 속에는 다음과 같은 십일조의 사상이 흐르고 있다.
첫째 십일조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마음에서 드려져야하고 예배를 참석하는 모든 사람들의 사이에서 교제로 사용되어야하고 함께 사용되어져야한다.
둘째는 십일조는 믿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가난하고 궁핍한자를 위해 사용하여야한다는 것이다. 즉 십일조는 구제와 분배의 원칙 하에 이루어져야한다.
세 째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주어졌으므로 하나님이 정한 일정량을 곧 십분의 일을 정확히 드려져야한다. 드리는 모든 것은 최상으로 드리도록 한다. 그리고 이 헌금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는 이들에게 지원되어야한다.
2. 예언자들의 십일조 사상
이스라엘 왕정시대 이후 성서 속에 십일조에 관한 규정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종교의 행위에 나타난 십일조에 대한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종종 비치고 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생활에 대한 예언자들의 태도는 날카롭고 직선적이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고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 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아모스 4장4-5절)."
여기이스라엘의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헐벗는 사람들은 억누르고 한편으로는 십일조와 희생제물을 드리면서 종교 행위를 계속했다. 그들의 모든 제사의 의식을 제 때에 맞추고 행하여 나팔을 불어 대며 선전하였다. 아모스는 너희 제물 너희 십일조라고 외치며 '너희'라는 대명사를 쓰면서 계속 반복하므로 여호와 게서 그들의 의식을 외면하고 계신다는 점을 강조하고있다. 즉 여호와 게서 마음에도 없는 '너희' 제사에서 얼굴을 돌리고 계신다는 아모스 선지자의 주장이다. 아모스는 정의가 없는 생활, 외형화된 제사 그리고 마음이 담겨져 있지 않는 헌금에 대한 극도로 비판적이었다. 한편 예언자 말라기는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와 이스라엘)을 통칭함을 향하여 여호와를 경멸한 백성을 책망하고 그들에게 촉구하였다(말라기 1장6절, 3장7절)."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열조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도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3장7-10절)."
말라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여호와께 돌아가리이까" 하고 물었을 때 회개의 표시와
여호와께 은혜와 간사의 표시로 그 동안 중단되었던 십일조를 드릴 것을 요구했다.
그는 십일조를 속이지 말라고 촉구한다. 십일조를 속이는 것은 곧 십일조를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이며 하나님의 것을 도덕 질 하는 범죄이기 대문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십일조 정량을 다 채우신 십일조를 요구하신다.위의 본문의 십일조의 상납은 하나님의 강복을 보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십일조는 항상 복 주기 위한 조건이 될 수 가 없다. 십일조의 이행은 하나님께 바랄 것이 없다는 표시가 도겠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예언자들의 십일조에 대한 언급에 있어서 헌물의 자체보다도 헌납자의 마음과 자세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예언자들은 간절히 바란다. 이느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와 교훈과 상통한다
3. 십일조의 중심 메시지
신약의 성서에서 십일조에 대해서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은 없다. 하나님의 강복은 결코 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유의 의사에 따라 결정하신다. 은혜와 풍성한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강복 하시기를 원하시지만 그것을 마고 있는 것은 죄진 인간이다.
우리의 종교적인 신앙과 생활은 우리의 품격 안에서 그리고 상황 속에서 그 결과가 있는 것이다. 종교의 생활 가운데 인과 의를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의 추억 속에서 틀림이 없다는 확인되는 보상이 있고 형벌이 있다. 산상 보훈에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가 자기의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마태복음6장 2절)."
시험해보라는 하시는 말씀은 약속의 보장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의심을 가지고 테스트(test) 해보는 것이 아니라 확신(prove)을 가지고 증명하는 것이다.
십일조의 이행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표시요 의무에 속한다. 비록 이행하였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자랑이 되거나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 할 수 있는 권리도 못된다.
Ⅴ. 십일조의 봉헌과 사용
1. 봉헌의 기준
1) 비 성서적인 봉헌
본 장에서 잘못된 봉헌 관을 살펴 더욱 바른 성서적 헌금 관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① 율법적인 봉헌관
율법적인 봉헌 관은 헌금의 대한 기준들을 그 율법의 정신 보다 더 그 율법자체의 문장에 집착하여 이를 해석하고 실행하는데 지나치게 의존하는 헌금 관을 말한다. 신학의 역사를 볼 때 율법적인 봉헌 관이란 봉헌의 칭의나 구원의 수단으로 보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를 바리새인에게 찾아 볼 수 가있다. 마태복음 23장23절 과 누가복음 11장42절의 보는 그대로 그들의 양적인 것들에 관심을 갖어 미소한 약용식물까지도 계산하여 십일조를 드렸으나 근본의 정신이 되는 의, 와, 인과 신는 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명시된 십일조를 드렸으나 십일조를 문자 적으로 준행 하므로 하나님께 대한 책임을 다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도 십일조의 헌금을 하지 않으면 벌받는다는 것으로 헌금을 죄와 벌로 직결시켜 생각하므로 헌금을 하는 것이 기쁨이 아니라 부담스러운 하나님의 멍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외식하는 자가 되거나 도둑같이 죄책감에 잡히게 되는 것이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누가복음18장9-13절)."
이미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율법의 요구인 저주와 형벌에서 구원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율법과 저주에 형벌아래 있지 않다. 비록 우리가 율법을 충분히 지킬 수가 있는 양심을 갖지는 못했으나 그리스로로 말미암아 채워주신 그 은혜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위와 같이 신자는 율법에 대하여 불 완전성으로부터의 이미 구속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율법주의 헌금관은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부정하는 것이고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된 신자들에게 또 다시 그 굴레을 시우는 것이다.
② 반 율법주의 봉헌관
반 율법주의 봉헌관은 율법주의 봉헌관과의 정반대로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과 복음은 근본적으로 상반된 관계에 있으므로 믿음으로 의롭게된 신자들은 도덕율에 대한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는 신학적 입장에서 보는 봉헌관이다. 또 이를 무율법주의 헌금관 이라 부른다.
이는 구원받은 신자들에게는 율법이 완전히 필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봉헌관을 갖인 자들은 완전 자율적인 봉헌 관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것을 완전 복음 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봉헌은 각 사람의 생각에 달려 잇고 하나님의 말씀의 규정을 따르기보다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무방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을 값산 인간의 동정물로 폭락시키고, 교역자를 삯군으로 전락시키며, 거룩한 교회를 인간들의 단체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반 율법주의 적인 봉헌 관을 갖는 것은 기본적인 율법의 신학적인 사상이 폐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것은 율법의 저주와 형벌에서 해방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라디아서 3장13절)."
율법 그 자체가 폐지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볼 때에 반 율법주의 봉헌 자유론 자는 폐지되어야한다.
③ 금욕주의 봉헌관
금욕주의 봉헌관 금욕주의는 ( s) '아스켄시스' 회랍어에서 나아서 그 뜻이 수령 도는 훈련이라 한다. 악덕을 물리치고 고행과 단절로써 미덕을 살려 나아가는 일종의 조직적인 실천생활을 말한다. 금욕주의는 모든 물질 관에서 물질을 죄악시한다. 다라서 금욕주의 봉헌관 봉헌 드리는 것을 죄악시한다. 성도가 버려야 할 하나님과 대립되는 세상적인 것으로 본다는 말이며 성도가 극기해야 한다는 대상으로 바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금욕주의 현상은 교회의 있어서 헌금의 기피 현상이라 할 수가 있다. 이러한 헌금관을 갖진 교역자는 강단에서 헌금에 대한 설교를 기피한다. 이유는 헌금은 세상 적이며 물질적이며 속화를 뜻하기 때문이다. 평신도가 이러한 봉헌관을 갖는 경우는 봉헌하는 일을 등한히 하는 일이 많다.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물질은 심히 좋은 것들이다. 따라서 물질을 죄악시하는 것은 비 성서 적이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세기 1장31절)."
④ 무교회주의 봉헌관
무 교회주의 봉헌 관은 교회당이 없는 사람들의 교회를 말한다. 무교회주의는 미국의 프리머드 형제단과 필라델비아 성경학교의 운동 그리고 일본의 내촌 감상의 계통의 김교신, 노평구, 송두용, 함석현 등과, 같은 이들에 의해 소개되었다. 이들은 교인들이 예수님께 속해 있으므로 보이는 조직체는 가질 필요가 없다고 본다. 조직교회는 부패했기 때문에 가질 필요가 없다. 교회의 의식이나 의전, 신조, 회당, 조직등 교회의 모든 제도는 교회주의 교권주의 형식주의 산물로 간주하고 이들 일체를 거부하고 있다. 고로 헌금의식의 일부로 볼 때 역시 거부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교회주의 헌금관이란 헌금제도 자체를 거부하는 헌금 부정관이다.
⑤ 현대주의 헌금관
근래의 문제되고 있는 헌금관이다. 여기서 현대주의란 인간의 이성과 권위와 인간의 인격의 존엄성을 강조하는 인본주의 그 사상적 기원을 두고 있으며 여기에 바탕을 둔 헌금관은 현대주의 교육을 받은 현대인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나온다. 예컨대 교회사명을 사회개혁이나 인류복지로만 본 다는지 십일조에 대한 여러가지의견이 나올 수 있다.
합리적으로 해석해서 십일조는 농경 사회에 10인이 1인을 돌보는 제도로 보고 현대사회에 부적합하다고 본다. 더 있는 자는 더 내고, 적게 가진 자는 덜 내는 방식으로 십일조를 내도록 하자는 견해들이다. 인본주의 적이다.
⑥샤머니즘 헌금관
샤머니즘이란 원시종교의 한 형태로 신령이 실재 존재하며 이 신령이 샤먼이라 부르고 주술 자에게 붙어서 악마와 요정을 ?아 내고 그 부하인 복지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민간신앙이다. 한국에 들어 온지 오래되었고 한국인의 마음 바탕 속에서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다. 한국 교회 내 에서도 깊숙이 자리잡고있다. 샤머니즘의 특징은 기복이라는 것이다. 고로 샤머니즘의 헌금관도 헌금을 현실적 기복 적이다. 샤머니즘에 기복사상은 샤먼의 직무에 잘 나타나 있으니 그 직무를 통하여헌금관을 생각해본다. 샤먼의 직무는 크게 셋이다.
첫째는 사제의 직무이다. 샤먼의 축복 권을 행사한다. 행운을 빈다. 조건부적인 댓가를 받는다.
기독교의 구속의 은혜에 대한감사로 드리는 것과 다르다. 우리 나라 부흥회에서도 샤머니즘적인 요소가 있다.
둘째는 직무가 예언적이다. 샤먼은 신령과 직접적으로 교통한다. 흑자는 입신을 시킨 후에 그 입신자의 가족 중에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어 그의 지시를 따라 헌금케 한다.
셋째는 재앙을 씻어 버리는 굿을 통해서 병을 떼어버리는 의무를 행한다. 여기에 드리는 헌금은 감사가 아니고 재앙을 벗어버리기 위하여 방편으로 사용한다. 신유의 집회시 조심해야한다.
또 복을 바라고 이를 위하여 헌금하는 것이나 재물의 축복이 주어지고 자신에게 픽박이나 환난이 없는 상태에서만 감사헌금을 하는 것과 같이 조건적 상태에 있는 것 역시 이런 헌금관의 소산이다.
2. 십일조의 헌납
예수께서는 헌금의 드림에 있어서 결코 형식적이나 강제적인 자세를 원치 않았다. 그는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이요 자유 의지적인 봉헌을 원하셨다. 봉헌자가 이렇게 자의에 의해서 헌금을 바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께서 "은밀성"을
강하게 강조 하셨다, 그는 자신들의 이름이 알려지기 원하는 마음에서 헌금을 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이 심하게 경고 하셨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마태복음 6:1-3절)."
구제를 비롯하여 종교의 의식을 행할 때 예수께서는 남에게 자랑함이 없이 자긍하지 않고 은밀하게 행하게 하는 것 중에 행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예수님의 앞에서 체면보다 형식보다 물질의 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의요 마음중심이요 은밀함이었다. 한편 바울이 헌금하는 봉헌의 자세를 보자. logeia 라고 했다. 바울이 말하는 logeia 어떤 강제성을 자발적인 애정에서 생겨나는 목적이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 후서 9장7-8절)."
또 이런 연보의 자유성과 자발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잠언 11장24절, 로마서 15장25-26절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금관을 제시한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고린도 후서 8:1-5절)."
바울의 헌금에 의거하면 어떤 율법적인 강제성을 가지고 할 것이 아니었다. 그런 헌금은 마음에 없는 헌금이며 이런 헌금의 자발성은 가지고 할 것이 아니었다. 이런 헌금은 자발성이 무 궤도적이거나 기준과 규칙을 전혀 무시하는 자발성이 아니었다. 그는 헌금을 성도의 당연한 의무로 보았으며 그저 기분이 내키는 데로 할 것이 아니라. 그는 어떤 기준 없이 기분 내키는 대로 할 것이 아니라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라고 말하고 있다. 헌금의 규칙성과 십일조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는 한가지 성경적 봉헌의 기준을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이호정씨는 그의 논문에서 마게도니아 교회의 모범을 소개한다.
헌금을 드리는 정신은
①극심한 환난에서, ②엄청난 가난에도 불구하고, ③큰 기쁨으로,
④힘에 지니도록, ⑤자원하여, ⑥성도를 섬기기 위하여, ⑦바라던 것을 남아서
고린도 후서를 중심으로
①정기적으로 매주 첫 날에, ②조직적으로 저축하여 두어, ③개인적으로 각 사람이, ④아기지 않고,
⑤목적을 가지고 준비하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게획 있게, ⑥즐겁게, ⑦쾌히 선뜻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신도 하나님 앞에 헌물을 드릴 때 자발성 규칙성, 은밀성, 등을 견지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므로 드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본다. 그렇지 못한 헌금은 하나님 앞에 기쁨 되지 못함을 인식해야한다. 십일조의 헌납의 목적은 구체적으로 예로부터 이스라엘인들은 십일조를 드리는데 거기에는 각각 다른 목적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매년 중앙성전에 가져와야 했다. 이것은 십일조를 드리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신앙적인 교육의 목적이 이었다. 그리고 그 십일조는 함께 모인 이들과 함께 먹고 교제를 하는데 사용되었다. 도한 가난한사람들을 위하여 드려지는 것이었다. 구제를 이하여 사용한다. 주로 제사장들을 후원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합법화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십일조를 드리는 일에 오해가 있었다. 하나님을 공경하며 이웃을 돌보는 수직적으로나 수평적으로나 균형적이고 조화로운 선의 목적으로 사용되어야한다. 하지만 신실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어김이 없이 상을 받는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상황은 말라기 성구에서 기인되는 것으로 본다.
"너희는 열의 하나를 바칠 때 조금도 덜지 않고 성전 곳간에 가져다가 넣어 내 집을 양식으로 스게 하여라 그렇게 바치고 나서 내가 하늘의 창고의 문을 열고 갚아주지 않는지 두고 보아라. 만군의 야훼가 말한다(말라기 3장10절)."
물론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께로 복 받고 상 받는다는 것은 옳은 이야기다. 그렇지만 십일조를 기복의 수단으로만 섬기고 드렸으므로 받아야 한다는 보상적인 의식의 구조는 신앙의 초보적인 단계라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단계를 버리고 고상한 헌금관을 가져야한다.
나 중심의 헌금 관에서 신적이고 이웃 관계 적으로 헌금 관을 가져야한다. 성서에서 보듯 초대성도들은 성령의 감동을 쫏아 헌금을 흔쾌히 바쳤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사도행전 2:45-46절)."
성령을 체험한 초대의 교회의 성도들은 그들이 하나님이 한 형제요 한 자매이며 흠뻑 느끼면서 분배의 생활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내어놓아서 가난한자와 필절 한 자에게 나누어지며 식탁 공동체로 다같이 어울린다. 이는 십일조의 목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임태수 교수는 바울 서신의 연보의 목적을 다음 세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목적이다. 둘째 특히 어려움을 겪고있는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다.
셋째는 세상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주후 1-2세기 역시 구약의 전통을 이어 가고있다. 이상을 볼 때에 십일조 율법의 규정이나 초대 교회 이후에 그리스도 교회는 모두 유사한 목적을 갖고 헌금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즉 선교적, 교육적 목적을 비롯하여 종교지도자들을 위한 후원, 구제(사회봉사)선교공동체의 교제를 위해 헌금했다.
3. 십일조의 사용범위
앞서 십일조의 사용 및 분배는 율법에 명시된 십일조의 규정에 나타나고있다. 여기서 논할 십일조 헌금의 사용 문제도 이에 준하여 다룰 수밖에 없다. 구약의 십일조 사용은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친교 하는데 사용되었다. 즉 이스라엘의 공동체 일원이라는 긍지와 기쁨을 갖게 하는데 사용되어 졌다. 십일조는 하나님 앞에서 함께 나누는 교제에 사용되어 졌다. 둘째는 십일조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은혜에 감격하여 드리는 것인데 이것은 성전봉사자들인 레위인 들을 위하여 생계를 보장해 주는데 쓰였다. 레인인들이 뗀 십일조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
이처럼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기업이 되었다. 종합해 볼 때에 십일조는 공동체의 친교, 교육, 구제, 그리고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 사용되었다. 현대에서도 이런 성서적 근거의 바탕으로 십일조가 올바르게 분배 사용되어져야 하리라고 본다. 율법시대에 레위인들에게 사용된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어느 정도 알 수가 있는 자료가 있다. 대천덕 신부는 레위인의 십일조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용도를 밝히고 있다. 민수기는 레위기인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생활비로 쓰고 남은 나머지를 무슨 용도로 쓰라고 밝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밝힌바에 의하면 그들이 십일조를 받기는 받았어도 그들의 생활에 쓰고 난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의 사업을 하는데 서야할 책임이 이었다는 것이다. 아마 추측 건대 그들의 십일조의 나머지를 성막의 건축 및 치장 성전의 수리에 사용했을 것이다. 때로 필요에 따라서 그와 같은 목적을 위해서 특별히 헌금하였다는 기록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후대에 그들이 쓰고 난 나머지는 일단 예루살렘에 보관하였다가 나중 시골에 있는 제사장들에게 질서 있게 분배되었다.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느헤미야 10: 37-39절)."
결론적으로
레위인들은 십일조를 받아서 일부는 생계의 수단으로 일부는 하나님의 사업 즉 성막의 건축 및 치장, 성전의 수리에 사용했다. 분만 아니라 쓰고 난 나머지는 시골의 제사장들을 위해 사용되어졌다. 이 같은 사실은 오늘 각종 사례비를 부의 축적의 기회로 삼는 일부 교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옛날 레위인들을 본받아서 하나니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앞으로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헌금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떻게 분배해야하는데 있다. 헌금의 올바른 분배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한몫은 하나님께 바치고 나머지는 스스로 가지는 것을 의미 할 수 없다. 십일조는 이제 설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그 순간의 필요의 충족을 위하여 순간마다 헌금을 다양하게 분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처음에는 덧이 없고 모순되어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임재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인식하지 못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만 그럴 것이다. 앞으로 헌금을 분배하는 모든 결정은 사람의 순간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산다는 종말론적 인식의 근거 하여야한다.
현대에서 레위인을 교역자, 교회의 일을 전담하는 자는 교회의 직원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십일조는 이분들을 위하여 사용되어져야한다. 그러나 이점에 관해서 칼빈의 지적한 바 현대 교역자가 십일조는 레위지파의 사람들의 생계를 위하는 것으로 보아 십일조가 당연히 자기의 몫이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히브리서는 7장12절은 율법에서 레위인 제사장에게 말씀하셨던 것들은
저들이 무엇이든지 이제는 그리스도에게 귀속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레위인과 제사장의 권위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목적을 갖기 때문이다. 교역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할 합당한 열매를 마치 그리스도에게서 도둑질하듯 찬탈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교회에서 바치고 있는 십일조는 구약시대나 예수님의 당시에 히브리 사람이 바치던 네가지십일조가 한 묵음이 되어 잇는 형태이다. 수입에서 차례로 십일조를 떼어놓은 것이 아니라. 단 한번 열의 하나를 떼어놓은 십일조이다. 교회에서 바치는 십일조 비하면 히브리 사람들은 십의 삼 조를 드리는 셈이다. 교회는 십일조 가운데서 교역자에게 사례비를 지출한다. 교역자의 첫 번째 십일조(Mishna)이다. 교회의 건축이나 수리,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 드리는 두 번째 드리는 십일조(Mishna)이다. 또한 가난한사람을 위한 십일조(Mishna)도 있다. 십일조는 신앙의 공동체를 발전시키기 위해서 지혜롭게 쓰여 져야한다. 십일조의 사용에 역점을 두어야한다. ①신앙공동체의 친교와 교육을 위하여 ②대내외적으로 구제하는 일 ③교역자의 사례비, 신학 연구생 양성, 인재의 교육, 재교육을 위하여 ④선교비와 전도비로 사용 ⑤개교회의 예산의 십일조를 노회에 노회의 십일조를 총회에, 사용되어질 때에 주님의 사업을 효과적으로 할 수가 있다.
Ⅵ. 결 론
십일조의 근본적인 목적은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다. 시편450장9-12절은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십일조의 명하심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물질세계의 주권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고 순종하므로 물질보다 크신 하나님을 섬기며 물질을 바르게 다스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목적이 있다.
십일조의 근본적인 목적 세 가지는 무엇인가.
① 내 자신의 전체의 생활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표로서
② 하나님이 내려주신 모든 은혜의 간사에 표시인 동시에 실제적인 신앙의 고백이다.
③ 그리스도의 교회 향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지금까지의 본고의 내용을 요약한다면
십일조 하면 그것이 정치적인 목적이든지 종교적인 목적이든지 간에 봉헌하거나 부과되는 소득이나 재산의 십분의 일을 가르킨다. 이 십일조는 이스라엘 분만 아니라 고대의 수많은 민족들 사이에 알려지고 행해지던 풍습이었다. 이집트나 고대의 바벨론 에서 행해지던 풍습이 있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은 다분히 정치적이며 이스라엘에 행해지던 십일조는 창조주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며 우주의 하나님을 기억하며 실시하는 종교적인 제도 였다.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신앙의 고백에 차원에서 봉헌하여 드렸다. 십일조의 본래적인 의미는 십분의 일 일부분이 아닌 전체를 가르키며
"로마서 11장 36절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는 의식 속에서 행해졌다.
구약의 성서에서 언급되는 십일조의 기원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족장들에게 비롯된다. 그러나 십일조가 제도화되는 것은 모세의 율법에서이다.
이스라엘의 세 가지 십일조는
①축제 도는 교제의 십일조
②구제의 십일조
③여호와께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다.
이 십일조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계속 행하여 졌고 신약 시대에고 관습으로 남아 있었다. 교회사에도 십일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대의 상황을 다라 강조되기도 하고 쇠퇴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의 십일조의 사상은 태고 적부터라는 사실이다. 가인과 아벨의 이후 하나님을 기억하는 의미에서 의미의 제사를 드렸음을 알 수가 있고 여기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랐다. 또한 율법에 규정에 따르는 규정된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목적과 교제, 구제의 성격, 성전의 봉사자들을 후원하는 성격이 강하게 대두된다.
그리고 예언자들이 드리는 십일조는 이들에게 있어서 십일조뿐만이 아니라 생활 면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도 마찬가지이었다 헌금의 이행, 헌금의 액수보다는 봉헌자의 마음 자세에 더 관심을 가졌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헌금의 드림에 있어서 자발성을 특히 호소한다. 이상을 살펴볼 때에 구약성서에 십일조의 규정과 신약성경의 십일조언급은 상당히 연관성가지고 있으며 구약의 십일조 사상은 율법적인, 물질적인 반면에 신약의 사상은 은혜 적이며 심령 적이다.
하여튼 성경에 흐르는 십일조의 사상은 의무성과 자발성을 띠고 있음이 분명하다. 십일조를 드리는 때는 자발적이며 은밀하게 드린다. 그리고 규칙적으로 온전하게 드리는 것이 중요하다. 십일조의 사용하는 용도는 복음의 전도자를 위하여, 도 신앙의 향상시키고 유지시키기 위하여 교육의 목적을 위해서, 교회, 사회의 소외 계층을 구제하기 위하여 신앙 공동체의 신앙 교제를 목적으로 사용되어져야한다. 십일조는 이제 성령의 인하심을 따라서 그 순간의 충족을 필요로 하기 위하여 순간마다 다양하게 헌금을 분배해야한다. 성경의 분배의 목적을 원칙으로 하면서 영원을 위해 사는 사람들답게 성령의 역사 하심을 따라 순간의 필요를 따라 채워야하며 사용하여야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교회는 십일조 하면 말라기 3장을 연상시키는 말라기의 십일조를 강조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교회의 강단에서 말라기의 십일조의 내는 자의 축복을 강조함으로써 십일조를 냄으로서 복을 받겠다는 이기심을 충동질하는 사용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이와 같은 십일조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는 십일조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십일조의 대한 인식을 오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십일조를 분명 낼 때에 분명히 축복이 뒤따른다. 십일조를 바르게 내고 사용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