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갑식 기자의 Oxford Letter]
성경 . 세익스피어 다음 가는 '베스트셀러'
아내가 집 나간뒤 처제와 함께 산 크리스마스 문학의 대가
1870년 6월9일 전기(傳記)작가 시어도어 왓츠 던턴이 영국 런던의 우울한 거리에서 외침을 들었습니다. “디킨스가 죽었어요? 그럼 크리스마스 할아버지도 죽은 건가요?” 이 말은 손수레를 끌던 소녀가 했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가 떠올리는 소설가가 있습니다. 본명 찰스 존 허펌 디킨스(1812~1870년), 약칭 찰스 디킨스라고 부르지요. 우리가 매년 10월31일이면 이용의 노래 ‘잊혀진 계절’을 기억하는 것과 같습니다. 디킨스에 대한 이런 평판은 사실인 모양입니다. 부고(訃告)를 접한 노동자들은 주막에서 “친구가 죽었다”고 울부짖었습니다. 그의 일대기(一代記)가 언론을 장식했고 웨스터민스터 대성당의 묘비명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자들의 동정자였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세상은 영국의 가장 훌륭한 작가 중 하나를 잃었다.(He was a sympathiser to the poor, the suffering, and the oppressed;and by his death, one of England’s greatest writers is lost to the world.)’
크리스마스만큼 모든 이에게 꿈을 주는 날은 드물다. 형형색색의 장식품을 보며 우리는 잃어버린 꿈을 찾는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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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도 잘아는 그의 대표작은 ‘크리스마스 캐럴’입니다. 1843년 12월17일 발표된 이 단편 이후 디킨스는 5년 연속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발표합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구두쇠 ‘스크루지’(Ebenezer Scrooge)입니다. 수전노(守錢奴)인 그는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동업자로, 먼저 세상을 뜬 말리의 유령을 만나 자신의 과거·현재·미래의 모습을 봅니다. 그제서야 자기 죄를 뉘우치고 인간답게 변해 주위에 자선을 베푸는 내용입니다. 스크루지란 이름은 ‘구두쇠(screw)+사기꾼(gouge)’의 합성어입니다. 평론가들에 따르면 이 단편의 원형(原形)은 서양민담에 나오는 악귀(惡鬼) ‘교회지기를 홀린 고블린’인데 아라비안 나이트의 영향도 받았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 캐롤’의 가치는 서양에서 잊혀졌던 크리스마스의 전통이 이 소설 한편으로 되살아났다는 데 있지요. 크리스마스를 모른다니 상상이 안 가지만 계관(桂冠)시인 로버트 사우디는 1807년 이런 말을 남깁니다. “모두가 자기 아버지 시대의 크리스마스와 지금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다른지 이야기하면서 예전 의식이라든지 축제 분위기는 사라졌다고 한다.”
디킨스가 남긴 소설들이다. 그는 성경-셰익스피어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책이 팔린 소설가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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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후 스코틀랜드 문호(文豪) 월터 스콧경(卿)도 비슷한 시를 씁니다. 장편 서사시 ‘마미언’의 6편 도입부에 잊혀진 ‘떠뜰썩한 크리스마스’를 묘사하는데, 파티가 열리는 영주(領主)의 저택 홀, 멧돼지 머리, 크리스마스 파이, 크리스마스 통나무, 시끄럽게 울려퍼지는 캐롤이 나옵니다. 다른 계관시인 로드 제프리는 이런 감사편지를 보냈지요. “신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사람들에게 선한 감정을 일으키고 행동으로 옮기게 한 이 소설은 어느 기독교 성직자나 설교자의 말보다 더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서양에서 왜 크리스마스가 잊혀진걸까. 그것은 살기 팍팍한 시대상황 때문이었습니다. 1837년 빅토리아 여왕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영국은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불안이 널리 퍼져있던 시대’, 즉 고통의 계절이었습니다. 그것이 빅토리아 이후 급격한 세력팽창과 대외식민지 개척으로 바뀌려던 찰나, 디킨스가 이 소설을 내놓습니다. 사람들이 짧은 글 한편에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를 반성하며 미래를 변화시키는 걸 문학은 보여줍니다. 이런 분위기를 ‘크리스마스 캐롤’이 바꾸자 신문 ‘픽토리얼 타임스’는 소설이 나온지 6일후인 1843년 12월23일자에 사설(社說)을 씁니다. “추운 오두막에서 초라한 식탁을 마주하고 있는 사람들과 노숙자를 생각하자….”
잘츠부르크의 한 초콜릿 상점은 트리 모형의 장식을 걸어놓고 있었다. 잊혀진 크리스마스를 유럽에서 되살린 것은 찰스 디킨스였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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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킨스가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다룬 것은 1835년 12월27일 ‘벨스 라이프 인 런던’이라는 잡지에 실린 소품(小品) 에세이였습니다. ‘팁스’라는 필명(筆名)으로 투고한 글이 실렸는데 제목은 ‘크리스마스 축제’였지요. 말로만 듣던 유럽의 크리스마스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10월 말이면 상점마다 ‘크리스마스 주문을 받습니다’라는 플래카드가 나붙지요. 레스토랑에서는 ‘크리스마스 특선 예약’ 문구를 쉽게 볼 수 있고요. 저는 영국에서의 크리스마스가 대단하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리퀴에르와 콜마르는 11월 중순인데 벌써 크리스마스 마켓 설치가 한창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정말 예쁜 크리스마스트리며 산타할아버지 모양, 루돌프사슴과 별의별 장식품을 볼 수 있었지요. 오스트리아는 한술 더 뜨더군요. 비엔나 전체가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술렁대더군요. 우리는 크리스마스 2~3일 전에야 캐롤이 나오고 이브 저녁이 지나면 성탄절이 끝나는데 유럽은 한달 이상 크리스마스 열기가 지속됩니다. 그런 크리스마스를 만든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디킨스인데 ‘크리스마스 캐롤’은 한해도 출판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내용은 같지만 장정(裝幀)과 삽화가 매년 바뀝니다. 인류가 존속하는 한 계속될 아이템인 셈이지요.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11월이면 다 설치된다. 이때부터 새해까지 유럽은 거대한 축제를 벌인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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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초 오스트리아 수도 비엔나를 찾았을 때 시청사 앞에는 이미 크리스마스 마켓이 설치돼 있었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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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군항(軍港) 포츠머스에서 해군 경리국 하급 공무원의 8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난 디킨스는 다섯살 때 캐담(Chatham), 열살 때 런던으로 이사옵니다. 가세(家勢)는 아버지의 빚 때문에 점점 기울어가지요. 디킨스는 어렸을 적부터 고생을 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12살 때 구두약 공장 견습공으로 취직해 하루 10시간씩 일했을 정도입니다. 이것은 나중에 그가 노동자의 편이 돼 사회성 짙은 소설을 쓰게 한 거름이 됩니다. 실제로 자전적(自傳的)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에는 중산층에 속한다고 믿었던 어린이 찰스가 노동자로 전락해 느끼는 좌절감이 생생히 묘사돼 있습니다. 디킨스는 중학과정의 학교를 2년쯤 다니다 전직을 합니다. 변호사 사무실 사환→법원 속기사→신문사 속기(速記)기자가 된 후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하지요. 데뷔는 1834년 ‘보즈’란 필명으로 발표한 ‘스케치즈 바이 보즈’지만 출세작은 ‘올리버 트위스트’(1837~1839년)입니다. 디킨스가 크리스마스를 소재로 해 쓴 첫 소설은 1836년 12월말에 발표된 연작집 ‘피크위크 문서’의 11번째 연재물 ‘유쾌한 크리스마스 이야기’입니다. 이때부터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데 반전이 찾아옵니다. 1843년초 의회에서 발표된 ‘어린이 고용 커미션에 대한 제조업체들의 보고서’를 읽은 거지요. 그는 ‘짐승만도 못한 세태(世態)’에 충격을 받고 ‘빈민층 자녀를 위해 영국 국민들에 고함’이라는 팸플릿을 발행합니다. 그러다 연말이 가까워오는 그해 10월 갑자기 바쁜 와중에도 ‘이상하게 한가한 틈’을 타 ‘크리스마스 캐롤’의 집필을 서두르게 됩니다. 그는 미국인 친구 코넬리우스 팰턴에게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울다 웃다 또 울며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이상하게 흥분상태에 빠져있었다네. 미루어보면 매일 밤 런던의 컴컴한 골목을 이삼십 킬로 쯤 걸어다녔을거네. 술취한 주정뱅이가 아니면 모두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에 말이야.”
디킨스의 자필 원고다. 영국은 보존에 관한한 프랑스와 함께 세계 1,2위를 다툰다.
디킨스의 육필원고 가운데 하나다. 디킨스 박물관은 원고의 훼손을 막기 위해 햇빛을 차단하는 두터운 커텐을 쳐놓고 있었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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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롤’이 유명하지만 그의 작품 중에는 사회성 짙은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든다면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앞서 말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 등이 유명합니다. 그가 노동자의 친구처럼 여겨진 것은 귀족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 때문이었습니다. 영국 귀족주의의 속물 근성에 대해 그는 풍자를 아끼지 않았는데, 작품 속에서 그는 귀족들을 ‘고귀한 냉장고’라고 익살맞게 비꼽니다. 디킨스는 소설뿐 아니라 연극에도 열중했는데 이것은 사회를 바꾸는데 ‘글’뿐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는게 ‘니콜라스 니클비’인데 디킨스 자신이 출연하지요. 디킨즈는 대중 앞에 등장해 낭독을 하고 때론 연출가로서의 역량도 보여줬습니다. 공연투어를 하기도 했는데 영국 전역과 미국까지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보통사람에 대한 공감’을 유지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것을 평론가들은 ‘대중과의 연애(戀愛)’라고 불렀습니다. 가는 곳마다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고 대중들의 눈물 어린 환대와 지역 유지의 영접을 받았는데 디킨스는 이것을 개인행사가 아닌 공적인 행사로 여겼다지요.
찰스 디킨스는 소설뿐 아니라 연극무대에도 자주 올랐다. 그는 글과 함께 육성으로 가난한 시대를 사는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려 했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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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요즘의 할리우드 스타같은 인기를 소설가로서 누렸기에 그가 신문이나 잡지에 발표한 의견은 큰 영향을 미쳤지요. 하지만 그는 가정적으로 별로 행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20년이상 함께 지내왔고 10명의 자녀를 낳은 아내 캐서린과의 별거였습니다. 디킨스는 연극에 관여하던 중 열일곱살의 젊은 여배우 엘런 터너에게 마음이 끌리고 말았는데 다른 문제는 아내 캐서린이 집을 나간 후 그 여동생 조지아나가 조카들을 돌본다는 명목으로 디킨스 집에 머물게된 거지요. 체면을 중시한 빅토리아 시대에 커다란 스캔들이었습니다. 디킨스는 어린 시절의 가난을 딛고 나이들어 많은 돈을 벌었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았지요. 건강도 점점 나빠져 저녁 식탁에서 쓰러진 다음날 숨을 거둡니다.
디킨스 가족의 식당이다. 그런데 돈을 벌면서 디킨스는 아내와 불화를 겪었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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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聖經)과 셰익스피어에 이어 세계에서 세번째로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다는 찰스 디킨스의 흔적은 영국에 다섯군데가 있습니다. 고향 포츠머스와 어린시절을 보낸 로체스터, 44살 때 구입한 하이햄의 갯즈힐 저택, 바닷가 마을 브로드 스테어즈 등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이 런던 다우티가(街) 48번지 집입니다. 1837년부터 3년 간 살았던 그 집에서 ‘올리버 트위스트’ ‘니콜라스 니클비’를 썼는데 아직도 그가 쓰던 책상이며 펜같은 유품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그곳을 방문한 날 비가 많이 내렸습니다. 인근에 있는 셜록 홈즈 박물관은 악천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관람객들이 줄을 섰지만 주택가에 자리잡은 찰스 디킨스 박물관은 한산했지요. 그럼에도 관람객은 끊이지 않았지만. 디킨스 박물관은 셜록 홈즈 박물관에 비해 정리가 상당히 잘돼있었습니다. 성경과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책이 팔린다는 작가의 집다웠는데 박물관에 그가 창출한 경제적 이익만 5억파운드가 넘는다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디킨스 박물관이 있는 거리는 조용한 주택가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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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 있는 찰스 디킨스 박물관의 내부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가 정리돼 있다./사진=이서현
찰스 디킨스가 글을 쓰던 책상이다. 부근의 셜록 홈즈 박물관과 달리 디킨스 박물관은 보존상태가 좋았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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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햄 갯즈 힐 저택에는 에피소드가 있지요. 네살 때 아버지와 그곳을 지나는데 아버지가 “나중에 돈을 벌면 여기서 살 수 있다”고 한 그 집이었다고 합니다. 갯즈 힐 저택은 셰익스피어의 희곡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 ‘헨리4세’에서 할 왕자 등이 강도짓을 모의한 장소가 바로 그곳인데 지금은 중학교 건물로 사용될 만큼 규모가 큽니다. 디킨스를 두고 ‘결말이 뻔한’ 소설을 쓴다는 비판이 있지만 세계적인 문호들은 이를 반박합니다. 밀란 쿤데라는 “디킨스 소설의 유머는 껍질에 불과하며 감정이 넘쳐흐르는 문체로 냉혹함을 가렸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카프가도 존경을 표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성공을 거뒀지만 불행한 자기 삶을 나타낸 말이 아닐까요.
디킨스 박물관 지하에 있는 세탁실이다. 왼쪽에 보이는 세탁통에 옷가지 등을 넣고 발로 밟아 빤다. 관객이 들여다보는 것은 불을 지피는 아궁이다./사진=이서현">
디킨스 박물관 내부에 있는 침실이다. 빅토리아시대 영국의 침실은 대부분 이런 디자인이었다./사진=이서현
디킨스 시대에 발간된 신문-잡지와 함께 디킨스의 족적으로 정리해놓은 곳이다. 당시 비참했던 생활상을 볼 수 있다.
디킨스를 그린 삽화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이다./사진=이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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