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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뇌 기도회를 생각하며…….(유대철 바뇌기도회 창립20주년, 5개월전을 남겨두고)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이 맞기라도 하듯이, 바뇌기도회의 지난날들을 돌이켜 보니,과거의 추억들이 벌써20년이란 세월이 흐른듯 합니다.
해밀턴 천주교 공동체가 형성된것이 1991년 2월2일 공소로 시작되었고 2011년이 다 지나가는 지금 20년이 지났으니 마치 20년의 세월을 꺼꾸로 돌리는 기분입니다.
내나이도 그땐 40대 중반, 두려움 없이 고국을 떠나 이민의 어려움을 신앙의 열정으로 잊어버린 세월과도 같습니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 살수 없듯이 신앙인은 공동체를 떠나서는 성장할수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1991년 새로운 해밀턴 신앙공동체가 생기고 신앙의 목마름이 타올라 무엇이던 찾아 나설때 어려운 형제님을 위한 기도시간이 있다고하여 무조건 사람들을 모아 찾아 나선것이 나이아가라의 한 형제님의 집이었습니다. 모두들 아무것도 모르고 기도하리라고 찾아 나간것이 바뇌 성모님을 만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뇌에 발현하신 성모님이 왜 가난한 소녀에게 나타나셨고,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발현하신 성모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르드의 성모님이 무염시태를 알렸고 파티마의 성모님이 세계평화를 원했듯이 바뇌의 성모님도 우리주위의 가난하고 병든자들을 위한 동정녀 라는 것을 메세지를 통해 알게되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그밤은 함박눈이 앞을 분간할수 없을 만큼 쏟아지던 그때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이얀 그 눈들이 수 많은 은총으로 느껴지면서 성모님께 전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이제 막 햇 병아리로 태어난 가난한 해밀턴 공동체를 위하여 우리도 성모님께 기도 드리자고, 나이아가라 기도순례 기간이 끝나고 바뇌성모님을 해밀턴 조그마한 저의 집에서 매일밤 모여서 3주간 연속기도 모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당시에는 신앙공동체도 없었고 바쁜 이민생활중에 묵주기도를 모르고 지내시는 분들도 많아서 이 기도시간에 배워서 처음으로 해보시는 분들도 있었지만 하루밤에 15단을 바쳐도 지루한줄 몰랐던것 같습니다. 이기간 성모님 앞에는 촛불이 꺼지지 않았고 연인원 400여명이 2000여단의 묵주기도를 봉헌하였습니다. 이때 신자분들이 기도의 맛을 알게 되었고 성모님께 의지하고 기도로서 청원하였고 또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3주간의 기도기간이 마치고 마지막날 자연스레 나온 얘기가 계속해서 기도하고 싶다는 의견이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기도모임을 만든것이 바로 바뇌기도회(창립 1992년3월17일)가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바뇌기도회를 통하여 성령기도피정,꾸르실료교육까지 받으며 성장된 신앙생활을 계속유지 할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항상 저희들의 청원보다 앞서 많은 것을 들어주시고 이루어 주셨습니다. 공소3년만에 본당으로 승격되고 본당3년만에 자체건물을 가질수 있었는 공동체는 북미교회사상 처음이라고 봅니다.
우리들이 바뇌기도모임에서 즐겨 불렀던 노래는 지금도 귓가에 쟁쟁 그립니다. 지금도 어느장소에서 이노래를 듣게되면 그 당시의 추억과 분위기가 내 마음속에서 살아나는듯 느끼게 됩니다.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영혼 주를 찾기에 애가 타나이다…… “
“저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슬픔도 없네, 저하늘에는 눈물이 없네 거기는 승리만 있네…”
“저 푸른 언덕 넘어 구원의 음성 들려온다 수천년 기다려온 주님이 오시네……”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양하면서 알렐루야 알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내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네, 하늘 곡조가 언제나 흘러나와 내영혼을……”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알렐루야……”
“우물가의 여인” “사막에 샘이넘쳐…” “강물처럼 흐르는 사랑…” 등등
초창기 기도모임 참석자들이 지금은 많이 흩어져 살지만 그분들이 지금 이런 노래를 다시 부른다면 추억을 느낄것입니다.
1996년 4월14일 벨지움 바뇌성모발현지를 순례하고 피정에 참가할 기회를 가졌는데 루르드나 파티마 성지같이 유명하지 않아서 바뇌마을은 너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었고 바뇌발현 메세지와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가정의 소녀에게 성모님이 나타나시어 직접 샘물가로 인도하신 성모님의 발자취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또한 그기에는 병든자를 위한 종합병원이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바뇌기도회가 아직도 해밀턴공동체에 지속되고 있는것은 성유대철 성당 공동체 성장의 밑그름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뇌성모님을 캐나다에 알리신 잊지못할 분이 김분다 자매이십니다. 바뇌성모상을 벨지움에서 캐나다까지 직접 운반해 오시고 대형 바뇌성모상을 나중에 성유대철 성당에 기증한 것이 지금 성전에 설치되어 있는 바로 바뇌성모상입니다. 해밀턴 공동체에서 전국 캐나다로 바뇌성모님의 메세지가 전파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김분다 자매님은 바뇌성모님과 정말로 인연이 많으신 분입니다. 신학생인 조카가 벨기에에서 사고로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본인도 마지막 죽음을 벨기에 바뇌성모님 계신데서 죽고 싶어하시어 아픈 몸으로 2005년 바뇌발현성지에 가셨다가 쓰러지시고 캐나다에 송환되어 몇개월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마지막 까지 가난하게 사시다가 원하시던 성모님 곁으로 가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신앙생활을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하였다고 느껴집니다. 모든것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고 신앙의 열정으로 살아온 보람을 느낍니다. 이제 은퇴 나이에 앞으로 10년 혹은 20년후엔 우리도 한분씩 언젠가 살아질 날, 하늘나라 성모님 옆에서 다시 모여 성모님과 같이 기도드리는 감격의 순간을 상상하여 봅니다.
오정호 프란치스코
바뇌 성모성지
바뇌 성지 대성당
벨기에의 작은 시골마을 바뇌에서 1933년 성모님께서 열두살 된 마리에뜨 소녀에게 나타나셨다.
성모님께서는 마리에뜨 소녀 통해 여덟번 나타나시면서 특히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특히 말씀하셨다.
오늘날 벨기에는 국민의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로서 명실상부한 가톨릭 국가이지만 성모님이 발현하셨던 당시엔 공산주의 사상에 물든 무신론이 벨기에 전체에 만연해 있었다. 그리하여 보랭에서 성모님이 발현하셨다는 사실을 비웃는 이들이 많은 가운데 성모님은 바뇌를 통해 다시금 벨기에 국민들, 나아가 전 세계인의 마음을 두드리셨다.
벨기에는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수중에 들어갔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도 히틀러가 이끄는 독일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성모님이 발현하신 당시 독일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있었으며 벨기에는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성모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성모님은 당신 자신을 "구세주의 어머니, 하느님의 어머니,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칭하셨다.
성모님은 "나는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왔다." 라며 구체적으로 언급하셨다.
"많이 기도하여라."는 당부는 발현 때마다 강조되는 사항이다. 기도와 회개의 요청은 발현의 핵심 목적인 것이다.
"성당을 지으라."며 요청하신 것은 바뇌에서 뿐만 아니라 과달루페에서, 루르드에서, 파티마에서, 보랭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를 통해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간접적으로 시사하셨다.
바뇌의 성모
성지 내부
성모님께서 발현하시어 마리에뜨와 만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장소
성모님께서 마리에뜨에게 발현하심
바뇌의 성모
마리에뜨가 무릎을 끓었던 자리
보이는 지팡이들은 바뇌의 성수를 마시고 나음을 받은 이들이 두고 간 것이다.
성모님이 세 번을 멈췄다 가신곳, 가정성화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모님이 세 번을 멈췄다 가신곳
바뇌성지 샘터
바뇌성지 샘터
샘터, 순례자들이 손을 담구고 영육간의 강건과 치유를 기도한다.
바뇌성지 샘터
바뇌의 성모, 샘터
샘터 옆에는 수도꼭지를 이용해서 순례객들이 성수를 받아갈 수 있다.
바뇌성지, 기념처가 보이는 곳에는 기도할 수 있는 곳과 뒤에는 초봉헌 하는 곳이 있다.
바뇌성지, 초 봉헌소
야외 미사장소
바뇌성지, 마리에뜨네 가족이 살던 자그마한 집으로 성모님께서 가정으로 찾아오심
<바뇌의 동정녀 발현>
바뇌의 성모발현
○ 첫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15일 주일
주위가 깜깜하고 추웠던 밤 7시경, 마리에뜨는 남동생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창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갑자기 광채가 나타나더니 정원에 아름다운 부인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부인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갸우뚱하면서 합장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다. 너무 멋진 부인이 나타났다고 어머니께 말했지만 어머니는 허튼소리 말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너무 감격한 마리에뜨는 성모 마리아이심을 느끼고는 모든 행동이 급작스럽게 변했다. 교리반에도 열심히 나갔다. 오로지 성모님 마음에 들기를 원하였다. 첫번째 나타나신 성모 마리아
께서는 한마디의 말씀도 주시지 않으셨다. 마리에뜨에게 미소만 지으셨다.
○ 두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18일 수요일 저녁 7시경이었다.
영하 12도가 되는 강추위에서도 마리에드는 집 근처 큰 길 옆, 3일 전에 성모님을 보았다고 하던 그 곳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성모님께서 하늘 저 멀리에서 점점 가까이 오시면서 전나무 사이를 통하여 내려오셨다. 마리에뜨 앞 약 1m50cm 정면에서 계셨다. 마리에뜨는 미소짓는 성모님을 바라보면서 뒷걸을질로 가시는 성모님을 따라가다가 성모님께서 멈추시자 무릎을 꿇었다. 작은 샘이 있는 길 옆에 서신 성모님께서는 마리에뜨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셨다. "네 손을 물에 담가라" "이 샘은 나를 위하여 보존되어 왔단다."
성모님께서는 떠나시면서 마리에뜨에게 말씀하셨다. "잘 있거라. 다시 볼 때까지"
○ 세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19일 목요일
저녁 7시쯤에 매우 나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마리에뜨는 로사리오 기도를 하였다.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다. 마리에뜨가 '아름다운 부인이시여,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여쭈었다. "나는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이다" 이렇게 성모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밝히셨다. 마리에뜨가 묻는 말에 성모님께서 대답하셨다. "이 샘물은 모든 백성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보존되어 왔단다." 성모님께서 떠나시면서 마리에뜨에게 말씀하셨다. "너를 위해 기도하겠다. 잘 있거라. 다시 볼 때까지"
○ 네번째 나타나심-1933년 1월 20일 금요일
마리에뜨는 피곤한 몸은 일으켜 저녁 7시 45분경에 정원으로 나갔다. 무릎을 꿇고 로사리오 기도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성모님께서 또 오셨다. 무엇을 원하시느냐고 여쭙는 마리에뜨에게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작은 성당을 하나 원한단다"
○ 다섯번째 나타나심-1933년 2월 11일 토요일
이 날은 성교회가 성모님께서 루르드에 발현하신지 75주년 기념하는 행사를 거행하였지만 산골 소녀 마리에뜨는 이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밤7시경 마리에뜨는 밖에 나가 로사리오를 바치기 시작하였다. 성모님께서는 마리에뜨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나는 고통받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다." "다시 볼 때까지 안녕"
○ 여섯번째 나타나심-1933년 2월 15일 수요일
저녁 7시에 마리에뜨는 다른 때와 같이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본당 신부가 증거를 요청한다고 말씀 드리니까 성모님께서는 아무 말씀 하시지 않다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는 떠나셨다. "나를 믿어라. 나도 너희를 믿겠다." "기도 많이 하여라. 다시 볼 때까지 안녕"
○ 일곱번째 나타나심-1933년 2월 20일 월요일
이날 밤에는 눈바람이 불었다. 마리에뜨는 무릎 꿇고 기도하였다. 성모님께서 미소 지으시면서 말씀하셨다. "사랑하는 딸아, 기도 많이 하여라. 다시 볼 때까지 안녕"
○ 마지막 나타나심-1933년 3월 2일 목요일
비가 쏟아지는 밤이었다. 성모 마리아께서는 마리에뜨에게 슬픈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나는 천주의 모친이며, 구세주의 어머니이다." "기도 많이 하여라"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잘 있거라(Adieu)"하시면서 마리에뜨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성호를 그어 축복을 하신 다음 떠나가셨다.
바뇌의 성모는
벨기에 동부 리에주에 있는 바뇌에 살았던 12세 소녀 마리에트 베코에게 발현한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는 말이다. 1933년 1월 15일에서 3월 2일 동안 마리에트는 그녀의 가족과 지도신부에게 자신을 ‘가난한 이들의 동정녀’라고 칭한 순백의 옷을 입은 아름다운 부인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 부인은 고개를 약간 왼쪽으로 갸우뚱하면서 합장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있었으며, 마리에트에게 “나는 고통을 받는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왔다. 나를 믿어라. 나도 너를 믿겠다.”라고 말하였다. 성모는 마리에트를 작은 샘이 있는 곳까지 안내한 후, 이 샘을 치유의 샘이라고 부르며 “이 샘은 모든 백성들과 병자들을 위해서 보존되어 왔단다.”라고 말하였다. 이 치유의 샘이 있는 곳은 시간이 흘러도 수많은 순례자가 방문하고 있다. 오늘날 작은 샘은 매일 7,570,390.352밀리리터의 물을 산출하고 있으며 수많은 기적적인 치유 사례가 보고되고 있다.
마리에트의 환시 사례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벨기에 주교단이 공식적으로 조사하였다. 주교단이 작성한 보고서는 더 심층 높은 조사를 위해 로마에 제출되었다. 1942년 5월 리에주 교구장 케르크호프스 주교는 성모 발현의 신빙성을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1947년에는 교황청으로부터 성모 발현에 대한 공식 승인이 내려졌다.
성모 발현 이후, 마리에트는 성직이나 수도사가 된 다른 성모 발현 목격자들과는 달리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며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았다.
유첨 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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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때 그사람들을 손꼽아 봄니다. 장소를 제공했고 고생도 했지만 지금은 편안한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는 A형제님내외,등등 머리에 햐얀눈을 올리고 은퇴한 뒷방 늙은이가 되었네요.그때를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댓글도 많이 올라올긴데! 빈칸이 민망하여 꺼적어 보았네요. 역시 Frank는 짱이네!
그때의 잊지 못할 일들을 이 댓글난에 다 적을 수 있을까요? 성 유대철 성당의 역사속에 바뇌 기도회는 생생히 살아 있음을 저는 확신합니다.아무도 기억하지 못해도,아무 기록도 없드래도 우리 본당의 역사속에서 영원하리라 믿슴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