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루카 1,26) 하느님의 명을 받들어 마리아를 방문한
천사의 인사, 그 인사말을 들은 마리아의 반응과 그에 따른 천사의 부연 설명, 그리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 38)라는 순명의 서약과 함께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마음 편히
돌아간 가브리엘 천사, 마치 동화의 한 장면 같이 포근한 분위기 속에서 마리아의 이름을 소개하며 시작된 '주님 탄생
예고'는 작은 시골 처녀의 강건한 믿음에 찬 응답으로 큰 위기와 반전 없이 끝이 납니다. 이로써 아담에게서 시작된 인간
반항의 역사는 순명의 역사로, 죄로 인한 죽음의 결과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결과로 대역전을 이룹니다.
이토록 은혜롭고도 놀랍고 감사한 날을 기억하고 축하기 위해 교회는 3월 25일에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냅니다.
예전에 '성모 영보 축일'이라 불리던 주님 탄생 예고 축일은 말 그대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천사
로부터 들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 성탄 대축일은 12월 25일에 지내면서 예수님께서도 여느 사람 처럼 성모님
의 태중에 아홉 달을 계셨다고 믿으며 아홉 달을 거슬러 계산된 날짜입니다. 그런데 올해 3월 25일은 성주간에 포함되어
있어서 로마 미사 경본 지침에 따라 부활 제2주일 다음 월요일인 4월 8일로 옮겨 지냈습니다. 옮기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없이 지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필요한 날임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만듭니다.
'내가 은총이 가득하다고?'
'내가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고?'
'내가 아들을 낳게 되고, 그아이가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라고?'
무수히 쏟아질 법한 질문 앞에 "왜?" 가 아니라 "예!" 대답한 마리아는 신비로운 잉태 사건 앞에서 호들갑을 떨거나 들뜨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거나 내세우지도 않았습니다. 계속 이어지는 나자렛에서의 삶은 한없이 비범하지만, 마리아는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습니다.
이런 나자렛에서의 마리아의 삶을 두고, 누군가는 '깊은 산 속에 홀로 피어난 숨은 꽃과 같다.'라고 합니다. 이렇게 누가
바라봐 주든 그러지 않든 환한 얼굴로 그리고 묵묵히 제자리에 서 있던 작은 풀꽃 같은 마리아. 이런 마리아에게서 삶의
지혜를 배우고,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때로 자질구레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의 일들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섬세한 마음이 삶의 지혜가 됩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삶이 내게 호의적이거나 적대적이거나 개의치 않고 꾸준히 기도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신앙은 이벤트가 아닙니다. 고요하고 평범한 일상, 반복된 사건, 그뿐만 아니라 떨치지 못한 고통과 상처 안에서조차
살아계신 하느님의 신비로움을 느끼고 감동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성모님을 닮은 신앙인입니다. 오늘 내가 몸담고 있는
자리를 천국으로 여기고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성화의 지름길입니다. 참된 성모 신심으로 어머니이신 마리아의
삶을 따르기로 약속한 우리 각자의 매일이 부활의 기쁨으로 가득하길 바랍니다.
2024년 5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