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외가로 간 우문사로
그러자,
을지 근오는 억울하다는 듯이 좀 전에 사로에게 맞아, 시퍼렇게 부어오르는 상처 난 팔뚝이 잘 보이게끔
왼 소매를 어깨까지 걷어붙이고는 그 자리에 퍼질고 앉아서는 ‘엉엉’ 울기 시작한다.
그때 이중부와 연지 을지 미앙이 게르로 돌아오다 이 광경들을 대충 목격하였다.
을지 미앙은 근오의 눈물을 닦아주며 달래고, 탄력 좋은 등나무 봉은 이제 훈육용 訓育用 ‘사랑의 매’로
변신하여, 어머니 우문 청아의 손에서 아버지 이중부의 손으로 넘어간다.
부모님의 분노한 기세에 위축 萎縮된 우문 사로가 사건 전말은 事件 顚末은 나중 일이고,
현재 벌어진 상황이 자신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됨을 깨닫고는 우선 자발적으로 땅에 무릎을 꿇는다.
그러자 을지근오는 양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잠시 후, 강아지 세 마리를 안고 왔다.
“자, 이게 범털 강아지잖아요”
“강아지들이 어디에 있었지?”
“엄마 범털 젖을 빨고 있던데요”
우문사로는 꼼짝도 못 하고 부모님에게 야단을 맞았다.
분명, 자신의 게르에서 조금 전에 사라지고 없었던 강아지들을 근오가 안고 오다니,
사로는 억울하고 분통 憤痛이 터질 노릇이지만, 현재 이러한 상황에서는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갑자기 강아지 여섯 마리가 ‘낑낑’거리며 엄마 젖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니, 공터가 개판이 되어버렸다.
사로의 어지러운 머릿속이 마치 공터 바닥을 이리저리 마구 헤매고 있는 강아지들
마냥, 자성 磁性이 사라져 방향을 잃어버린 고장 난 나침반처럼 혼란 混亂스럽다.
우문청아가 즉시 판결 내렸다.
“사로가 오해해서 근오를 도둑으로 몰았고 또, 때리기도 하였으니, 이는 사로의 잘못이 분명하다. 형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으니, 근오에게 사과하고 강아지들은 근오에게 주거라”
“큰어머니, 감사합니다. 이제 형은 용서해 주세요”
그런데, 여기에서 사용하는 ‘형 兄’이라는 단어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형’에 대한 존칭 尊稱이나
호칭 呼稱 아니라, 부모님 안전 案前에서 특정물 特定物 즉, ‘우문 사로’라는 특정인 特定人에게
부여하는 지칭어 指稱語로 사용한 것이다.
을지근오는 이처럼 용어를 교묘 巧妙하게 사용하는 언술 言術도 뛰어났다.
주위 사람들은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무심코 들으면 ‘형’을 보고 ‘형’이라 지칭하는데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다만, 당사자인 우문 사로 홀로, 마음속으로 어렴풋이,
‘뭔가 이상하다’라는 느낌을 받고 있을 뿐이었다.
당사자인 자기를 보고는 ‘형’이란 호칭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고,
부모님과 대화할 때만 ‘형’이란 용어를 가끔 사용하니 그렇다.
부모님 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형’이란 단어는 생략하고, 꼭 필요할 경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며, 시건방지게 턱을 좌우로 2번 끄덕거리며 형을
가리키는 오만불손 傲慢不遜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싸가지 없는 짓거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근오는 강아지의 본래 주인인 사로의 의견은 아예 무시해 버리고, 큰어머니에게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자신이 당당하게 강아지의 새 주인 노릇을 한다.
또, 사건전말은 차제 次第고 현재 일어난 사건의 결과가 사로가 잘못한 걸로 판결이 이미 난 것이므로,
잘못을 저지른 우문사로가 자발적으로 부모님에게 용서 容恕를 빌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피해자인 어린
동생이 가해자인 ‘형’을 대신하여 ‘용서해달라’라며 통 큰 너그러움을 보이며,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보다
먼저 빌고 있었다.
우문사로가 잘못하였다는 것을 확실하게 고착화 固着化시키며, 범털 강아지를 자신의 소유로 인정함을
주위에 그 사실을 공표 公表시키는 교묘한 말솜씨였다.
그동안 을지 근오의 고도 高度로 위장된 교언영색 巧言令色에 수차 당한 경험이 있던, 사로의 가슴
한 편에서는 분노가 솟구치고 있으나, 부모님 면전에서 감히 경거망동 輕擧妄動할 수가 없다.
지금 벌어진 상황이 실상 實狀을 설명하기 어려운 누명 陋名을 쓴 것 같은데 분명,
본인이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밝힐 수 있는 증거가 없는 것이 문제였다.
억울한 자신의 변명 辨明을 들어줄 우호적 友好的인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우문청아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면서 말한다.
“그래, 네가 참 착하다. 사로가 동생에게 오히려 배워야겠다”
범털 강아지 실종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一段落 되었다.
그런데,
이 모든 사건은 을지 근오의 짜여진 모략 謀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사로가 사냥에서 돌아올 때쯤 범털 강아지들을 다른 곳에 숨겨두고, 비슷한 색깔과 크기의 옆 동네 강아지를 구해,
낡은 양가죽 포대에 넣어 실내 室內 자신의 침상 어두운 곳에 놓아둔 것이었다.
우문사로는 격해진 마음에 강아지들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고, 으레 짐작으로 큰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이다.
근오의 격장지계(激奬之計. 상대방 장수의 감정을 자극하여 이성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켜 원하는 바를 얻는다)
에 제대로 말려든 것이었다.
그리고 을지근오는 자신의 힘이 사로 형에 비해 약함을 잘 알고 있으니,
부모님이 귀가 歸家할 때를 계산하여 사건을 벌인 것이었다.
싸우다 자신이 불리하게 되면 이를 말려줄 후원자 後援者가 필요하였다.
활을 들고 말을 타고 나간 것은 사로가 예상외로 다른 날보다 일찍 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시간 연장책 延長策으로 꾸민 것이었다.
우문사로는 억울하기 짝이 없다.
분명히 게르에서 없어진 강아지들을 근오가 안고 오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그리고, 근오는 옆 동네에서 가져온 강아지 3마리를 땅바닥에서 집어 들고는
우문사로에게 내밀며 선심 善心 쓰듯이,
“이 강아지는 범털에게 갖다줘” 한다.
우문사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지만, 이미 자신이 잘못한 것으로 판결이 나버린 처지에서
뭐라고 더 이상 변명도 하지 못한다.
‘변명 한다’ 하더라도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속으로 울화 鬱火가 치밀어 오르나 어쩔 수 없다.
그러한 감정이 자기도 모르게 바깥으로 표출 表出될 수밖에 없었다.
근오가 내민 강아지를 발로 차버렸다.
발에 차이고 땅에 떨어진 충격으로 강아지들이 이리저리 나뒹굴며 죽는다는 듯이
“깨갱, 깨갱” 거리며 울부짖는다.
이를 보고 화가 난, 아버지 이중부가 눈을 치켜뜨며 부라리자,
을지 미앙이 얼른 이중부의 팔을 잡아 이끌고 게르 안으로 들어간다.
우문사로는 어머니에게 또다시 야단을 맞는다.
사로는 태어나서 최악 最惡의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후로도 둘은 만나면 다투고 하였다.
형제간의 알력 軋轢과 다툼의 빈도가 갈수록 잦아지고, 그 다툼의 양상이 점차 과격해지며
심각한 수준까지 이르자 그 형상이 마치, 심지에 불을 붙인 폭죽 爆竹을 양 호주머니에 넣어둔
것처럼 언제 어디서 터질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이를 우려한 우문청아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려 이중부와 의논한 바,
사로를 친정 아버지에게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그렇게 우문사로는 헨티산맥의 외할아버지 우문무특 소왕의 진영으로 가게 되었다.
이것이 사로에게는 오히려 잘 된 것이다.
이제는 부모님 눈치도 볼 것 없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가 소왕 小王이니, 사로는 왕손 王孫이다.
할아버지도 이제 연세가 많으시니 사로가 왕 노릇 한다.
단 한 분, 소왕 기혁린 사부의 눈치만 살피면 된다.
무술연마만 빠뜨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수련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만사형통 萬事亨通이다.
그렇게 무예 실력이 나날이 일취월장하는 씩씩하고 대견스러운 우문사로를 바라보는 외할아버지
우문무특 소왕의 눈에는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유일한 혈육인 외손 外孫 사로가 미덥고 든든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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