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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대함의 기반
23: 20-33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21. 너희는 삼가 그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22. 네가 그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나의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찌라
23.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24. 너는 그들의 신을 숭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소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훼파하며 그 주상을 타파하고
25. 너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27.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너의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모든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28.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29.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되어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30.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쫓아내리라
31. 내가 너의 지경을 홍해에서부터 블레셋 바다까지, 광야에서부터 하수까지 정하고 그 땅의 거민을 네 손에 붙이리니 네가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낼찌라
32. 너는 그들과 그들의 신과 언약하지 말라
33. 그들이 네 땅에 머무르지 못할것은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 네가 그 신을 섬기면 그것이 너의 올무가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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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지만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한 주간 동안 담대하게 하셨습니까?
수1:9에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요일 5:14에는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고 하여, 우리의 담대함의 기반은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신자는 왜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함께 찾아서 내 것으로 삼읍시다.
모세의 인도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내 산 광야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십계명을 받았고, 하나님의 거룩한 민족으로서의 삶의 가치관과 방식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애굽에서 해방시켜서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면서 거기 가서 살 때에 지켜야 할 사항들을 말씀하셨고, 거기에 도착하기까지 하나님이 어떻게 그들의 길을 보장하실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가나안땅으로 가라 하시면서 그 땅을 "내가 예비한 곳" 이라고 하십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고, 마음으로 계획만 세우시고 구체적인 준비는 없는 분이 아니라 이미 다 예비해 놓고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앞길을 예비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우리는 담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은 그들이 앞으로 들어갈 가나안 땅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땅이 아니라, 그들이 살다가 나오는 애굽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었습니다. 애굽이라는 나라는 그들의 고국이 아닙니다. 요셉 때에 전부 70명에 불과한 그들 가족을 하나님이 거기로 들여보내셨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어주마.”고 약속 하신 바 있었기 때문에, 그 약속을 이루어 주시려고, 세계에서 가장 강대국이고 안정된 나라였던 애굽에 땅을 예비하시고 거기로 들어 보내셨던 것입니다. 애굽은 아주 소수였던 그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길러준 요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이라는 강대국을 예비하시고, 아브라함의 후손 70명을 거기에 보내어 커다란 민족으로 번성하도록 섭리하셔서 70명이 들어갔었는데 수 백 만 명으로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충분하게 번성하기까지 철저하게 보호하셨습니다. 그리고 충분하게 번성하자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내가 준비한 땅으로 가라’고 가나안 땅으로 보내려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애굽 생활에 젖어서 하나님이 부르셔도 애굽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내 보내기 위하여 애굽사회를 바꿔버리셨습니다. 애굽의 왕조가 바뀐 것입니다. 그동안 요셉의 실력을 인정하고 등용하고 요셉에게 특혜를 주었던 왕조는 셈족왕조입니다. 그런데 셈족왕조가 몰락하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조가 집권 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요셉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번성에 대하여 염려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새 왕이 생각하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이상 번성하면 큰일이다. 혹시 다른 나라가 우리나라를 침략해 왔을 때, 우리 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의 편이 되면 우리가 위험 할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번성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을 하루아침에 노예로 만들어서 아주 혹독한 일을 시키고, 일에 녹초가 되어 아이를 낳을 수 없게 하는 정책을 썼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마구 번성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거기에 보내신 목적이 안전하게 번성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정책도 그들의 번성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겁을 먹은 애굽 왕은 “이스라엘 사람은 남자 아이를 낳아 기르면 안 된다. 낳거든 바로 죽이라.”는 무식한 유아살해 명령을 내렸고 그런 상황에 빠지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해방을 간구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준비시킨 모세를 보내어 그들을 해방시켜 주셨고, 이미 준비해 놓으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거기 들어가기 전에 사전교육을 하고 계시는데, “내가 가나안땅을 너희를 위하여 준비해 두었고, 분명히 그 땅을 줄 터이니 두려워말고 가라. 그리고 너희가 가는 길도 내가 철저하게 보호하여 주리니 두려워말아라. 다만, 거기에 가서 이렇게 살아야 내 백성답고 너희가 계속하여 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면서 보내시는 내용이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담대한 신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보장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담대함의 기반을 찾아봅시다.
첫째, 당신의 사자가 우리 앞서 인도하시는 일이 담대함의 기반입니다.
이스라엘은 400년이나 살아서 아주 익숙한 애굽을 떠나고 있습니다. 아무 연고도 없고 보지도 못한 가나안 땅으로 가는 것이 너무나 불안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나안땅을 너희를 위해서 예비해 놓았다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그 땅을 본적도 없습니다. 게다가 그 땅은 아무나 가기만 하면 차지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빈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는 이미 강력한 부족들이 차지해서 몇 백년 동안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체격이 좋은 거인족이었고, 아주 악했으며, 그들의 성은 아주 높았고,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무기하나 없고, 싸워본 일도 없고 오로지 노동만 해본 유순한 민족입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나서 물도 먹을 것도 없는 광야로 들어섰다는 것 자체가 자살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무슨 재주로 그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살아남겠습니까? 아무도 미래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에게 틀림없이 광야를 건너서 가나안땅에 도착하고 그 땅을 차지하게 해준다고 하십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믿고 기쁨으로 따랐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스러웠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떤 말씀입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경험과 판단력을 의지하는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사업을 경영하고, 성경 말씀대로만 자식을 양육하고, 가정을 경영하라고 하시는데, 그렇게 하면 죽도 밥도 안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살 양식을 예비하셨고, 우리가 살아갈 방법을 예비하셨고, 우리가 가야할 목표를 예비하셨으며, 그곳에 들어가도록 당신의 두 팔로 인도하시는데, 경험도 없고 길도 모르는 우리들끼리만 가라고 길만 알려주시고 멀리서 바라만 보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의 사자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며 한발 앞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을 알아야 담대해 질 수 있습니다.
세금을 탈세하고 거짓말을 하면서도 사업을 못해먹겠다고 아우성인데, 어떻게 꼬박꼬박 세금을 다 내면서 사업을 할 수 있겠느냐고 할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주일날도 학원 보내면서 공부 시키는데 온 정성을 다하는데 주일날이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학교 공부보다 성경을 읽으라고 하면서 대학에 보낼 수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찬스라고 생각되는 여름방학 그 귀한시간에, 학원 며칠 빠지고 수련회에 보내라고 하면, 어떻게 대학에 들어가란 말이냐고 역정 내는 사람들이많습니다.
남의 직장에서 월급쟁이 하면서도 모두가 적당히 거짓말을 하면서 부수입을 챙기며 살아가는데, 남들 다 그러는데, 어떻게 거짓말 한마디 안 하고 정직하게만 살 수 있단 말이냐, 쥐꼬리만한 월급만으로 어떻게 가족을 부양하라는 말이냐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너무 많습니다.
매달 생활비가 부족한데 어떻게 십일조 드리고 감사헌금 드리고 선교헌금을 하면서 살라는 말이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문하고 싶어 합니다.
애굽 생활이 몸에 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 될 리가 없었고,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이해될 리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을 감사하면서 아뢰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그보다 먼저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네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감당하기 어렵거든 내 짐을 지고 내 일부터 해보아라. 그러면 내가 네 짐을 져서, 네가 안간힘을 썼어도 해결 못했던 일을 간단하고 쉽게 풀어주마,”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믿음이 없으면 이 말씀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해본 경험도 없고, 골방에서 하나님을 독대하며 기도를 해 본적도 없이, 불신자들과 똑같은 방법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권하시는 삶의 방식이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십년, 이십년을 믿어왔지만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고 모양만 신앙생활 한다고 하다가, 결국 믿어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로 내가 예비한곳에 이르게 하리라.” “가나안은 고사하고 물 한 방울도 없는 이 광야에서 우리가 살아남을 수나 있겠느냐, 왜 이 광야로 이끌어서 우리를 여기서 죽게 하느냐”고 모세에게 대드는 사람들에 하시는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자라면 하나님의 이 말씀을 믿고 순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순종해 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사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되고, 작은 순종의 경험은 보다 큰 순종을 하게 되어 더 큰 경험을 하게 되며, 그래서 사자같이 담대한 신자가 되는 것이지, 작은 순종도 없이 담대해 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모두 다 예비해 놓으시고 그길로 가라 하시며, 우리가 가는 길에 당신의 사자를 함께 보내어 그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전달 하시고 보호하시며, 결국 거기 도달하게 하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담대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의 신앙 길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앞서 가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둘째, 하나님의 사람다운 생활이 담대함의 기반입니다.
우선, 당신의 사자의 말을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나의 사자가 네 앞서 가서 가나안의 족속들에게로 인도하면,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23). 여기서 말하는 사자는 누구일까요? 그 사자는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요, 그들을 보호하는 사람입니다. 여기 말하는 하나님의 사자는 그들의 앞에서 이끌고 있는 모세를 말합니다. 모세가 그들을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족속의 땅까지 인도할 것이고, 모세가 거기까지 인도하면 하나님이 그 땅의 주민들을 끊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자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하나님의 종을 신뢰해야 합니다.
만약 당신의 사자를 함부로 대하여 노엽게 하면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21)고 하셨습니다. “내 종, 모세의 말을 잘 듣고 노엽게 하지 말아라. 그는 내 사람이라.”라는 말씀입니다. “그는 내가 불렀고 내가 명령을 그에게 주어 너희에게 전달하고 인도하는 내 사람이다. 그는 너희를 위한 나의 사람이다. 그를 함부로 대하고, 그 말을 듣지 않고 모독하는 것은 나를 모독하는 것이고, 너희 축복을 망가뜨리는 짓이다. 그런 사람은 내가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테러범이라고 하더라도 전화선은 끊지 않습니다. 전화선을 끊지 않아야 자기가 목적한 것을 달성할 수가 있고 위기상황이 발생할 때 대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축복을 받겠다고 나온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는 주의 종을 멸시하고 함부로 대하면 살아남지도 못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 주의 종을 무시하고 괴롭히는 죄를 짓느니, 차라리 교회 다니지 않는 게 자기에게 나을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주의 종을 귀히 여기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축복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길은 아주 쉽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사자의 말을 잘 듣고 따르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다음을 이렇게 해결 해 주십니다.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되리라.”(22) 안전의 복입니다.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라.” (25) 건강의 복입니다. 당시에 좋은 물은 아주 귀한 자원이었고, 고대 사람들은 질병으로 다 단명하였습니다.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잉태치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26) 번성의 복입니다. 그 당시는 사람이 귀해서 국민이 많아야 강대국이었습니다.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 네가 이를 곳의 모든 백성을 파하고, 너의 원수로 너를 등지게 할 것이며,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 그 벌이 히위족속등 가나안족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27-28) 너희가 생명을 걸고 싸우지 않아도, 자연을 동원해서 자연스럽게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리라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동원할 수 있는 방법은 천가지 만가지도 넘습니다.
이것을 안다면 담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담대하십시오.
다음은,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절대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24절에서는 그들의 신을 본받거나 섬기지 말고 깨뜨리라고 하셨고, 31절에서는 우상을 숭배하는 그 백성들과는 어떤 약조도 맺지 말고, 그들의 신과도 언약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은 사람이 만든 가짜 신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하나님을 찾아 섬기도록 종교성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뭔가를 섬기게 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누가 참 신이고 어떤 것이 가짜인지는 알 수 있습니다. 개업을 하면서 고사를 지내는 사람들이 돼지 대가리를 삶아 제물로 놓고 만 원짜리를 코에 도르르 말아 끼워놓고 절하면서 킥킥대고 웃습니다. 그게 신도 아니고, 그것이 사업을 잘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짓을 하는 것은, 거짓된 신을 섬기는 세상을 본받아서 하는 것입니다. 거짓 신을 섬기는 것이 왜 나쁘냐 하면, 거짓된 신을 섬기면 그들의 생활이 거짓된 생활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존대하며 그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와, 자기에게 복을 달라고 가짜 신에게 절하면서 킥킥대는 자의 가치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참신 하나님을 바로 섬기지 않으면, 결국 인생은 자기 안에 있는 종교심 때문에 가짜 신에게라도 절하면서 양심 찔리는 일을 하다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종을 통해 전달되는 말씀을 삼가 듣고 순종해라. 그리고 이방신과 관계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만 섬겨라.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문하시는 핵심 내용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기본입니다. 이것을 준수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결코 신자가 아니며 축복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종교다원주의라는 사상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 도전을 합니다. “모든 종교는 다 같은 것이다. 선과 악을 구분할 필요도 없고 지금까지의 가치관을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자. 참 종교와 거짓종교가 있다는 생각도 버리자. 모든 종교는 결국 착하게 살자는 것이 아니냐. 그러니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독선을 따르지 말고, 각자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자.”고 꼬입니다. 그러면 그게 종교에 매이지 않게 해주는 멋지고 자유로운 사상인 것처럼 생각하고 따라갑니다. 사단의 목소리이고 거기서는 담대함을 얻지 못합니다.
셋째, 담대함의 결정적인 기반은 하나님의 주밀성입니다.
“그러나 그 땅이 황무하게 됨으로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희를 해할까 하여, 일 년 안에는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네가 번성하여 그 땅을 기업으로 얻을 때까지 내가 그들을 네 앞에서 조금씩, 조금씩 쫓아내리라.” 29-30절 말씀인데,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유익하게 하시려고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시는지 여러분에게 보이십니까?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시되, 이스라엘의 숫자가 아직은 그 땅을 다 차지할 만큼은 안 되므로, 가나안땅 사람들을 한꺼번에 다 몰아내시면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생기고, 그러면 들짐승들이 거기서 살면서 이스라엘을 해칠지 모른다. 그러니 너희가 번성하는 속도에 맞춰서 조금씩, 조금씩 가나안 원주민들을 쫓아내 주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하신 것이 왜 아직도 주어지지 않을까? 내가 간구한 것이 당장 이루어 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준비가 다 되지 않은 상황에서 급하게 다 이루어 주시면, 그것이 우리에게 해가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무심하시거나 무능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성장속도를 배려해서 그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만큼 주밀하게 우리를 배려하신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나안땅을 한꺼번에 다 비워주면 남는 땅에 들짐승이 번성하여 그들을 해할까 하시는 것처럼, 우리의 소원을 처음부터 다 들어주면, 우리의 마음에 교만과 안일이라는 짐승이 자라서 아직 어린 신앙을 해칠까봐서 우리 신앙 성장에 맞추어 조금씩, 조금씩 우리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는 운동화를 사 줄때 지금 딱 맞는 운동화를 사는 것이 아니라 조금은 큰 것을 사서, 자라면서도 신을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런데, 가난한 부모가 생각하는 것은, 그 아이의 발에만 맞추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주머니도 맞추려는 것입니다. 지금 딱 맞는 옷과 신발을 사주면 조금 크면 또 다시 사주어야 하니까, 돈을 덜 들이기 위해서 조금 큰 것을 미리 사줍니다. 자기의 주머니 사정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자 아버지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전능하신 분이고, 당신의 아들까지 주신 분입니다. 다만 우리를 배려해서 우리의 성장속도에 당신의 사역을 맞추시는 분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이 믿어지십니까? 믿을 수만 있다면 당연히 담대해집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신데, 우리가 왜 근심하면서 살아야 합니까? 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자를 우리 앞서 보내시며 미리 말씀하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데, 우리가 왜 장래를 불안하게 생각하면서 고민합니까?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가려고 하면 염려와 근심을 해야 하지만, 우리 앞서 가시는 주님을 따라가려고만 하면, 두려울 것이 없고 실패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주밀하게 보살피고 인도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찬양하면서 사자를 따
라갑시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앙생활이고, 그렇게만 산다면 담대하지 말라고 해도 담대하게 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한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