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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In the Sight of God)
성경본문 :고린도후서 12: 19
19 너희는 이 때까지 우리가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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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자기 아내의 귀가 자꾸 어두워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 되어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의논했습니다.
“선생님, 제 아내의 청력이 전과 같지 않아서 걱정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느 정도로 심한지 먼저 집에서 간단히 테스트해 보세요. 부인이 부엌에서 일할 때 7m 쯤 뒤에서 말을 해 보세요. 알아 듣지 못하면 조금씩 조금씩 가까이 가서 말을 해 보세요. 그러면 부인의 청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래서 그는 아내가 부엌에서 저녁 식사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7m 거리에서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5m 거리에서 다시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여전히 대답이 없었습니다. 3m 거리에서 다시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할 수 없이 아내의 귀에 대고 물었습니다.
“여보, 오늘 저녁 메뉴가 뭐요?”
그제서야 아내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내가 닭요리를 한다고 세 번이나 말했는데…….”
누구의 귀가 멀었습니까?
아내의 청력이 문제가 아니라 남편의 청력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단점이나 고쳐할 점은 모르고, 상대방을 고치려 합니다.
회사에서 자기를 싫어하는 사람을 보고 “나쁜 사람, 나쁜 사람.” 하지만, 자기의 근무 자세가 좋지 않은 것을 모르고 그런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내가 전과 같지 않게 시큰둥하게 대한다고 ‘아내가 변했구나.’라고 하지만 아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내를 한숨 짓게 하는 초라한 남편으로 전락한 것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인 우리는 남을 고치려 하지 말고 우리 자신을 고쳐야 됩니다.
우리 자신의 단점을 스스로 발견해서 고쳐 나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살피는 길밖에 없습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입니다.
배고픔과 피곤함도 느끼고 화도 나는,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위대한 삶을 산 것은, 그가 쓴 편지가 성경이 되고 그의 이름이 성경에 별처럼 수놓아지도록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라고 말씀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말씀했습니다.
바울은 교인들에게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내 흉내를 내며 살아라. 나를 닮으라.”라고 설교할 정도로 완벽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그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인데 하나님 앞에서 사니, 귀한 삶을 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편지를 쓸 때, 고린도서,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를 쓸 때, 그 편지들이 성경이 되리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편지들을 하나님 앞에서 썼을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바울이 『이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노라.”
바울이 어리석은 사람처럼 교인들에게 자기 자랑과 자기 변명, 자기 간증을 하고 교인들을 책망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인들만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설교하고 하나님 앞에서 편지를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쓰니 그의 편지가 성경이 되는 축복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누구나 귀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귀한 일이 될 줄로 믿습니다.
제가 여러분만을 상대해서 설교하면 값싼 설교가 됩니다.
여러분만을 생각하며 말씀을 준비해서 설교한다면, 이 설교는 가치가 없습니다. 제
가 말씀을 준비하여 여러분에게, 우리나라와 세계 지구촌 만민에게 설교하지만 사람만을 상대해서 설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 백성에게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될까요?’ 하고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준비하고 말씀을 전하니 하나님께서 제 설교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에서 24절에도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면 하나님께서 그 일을 축복하시고 상을 내려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 환자만 보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환자를 내게 보내 주셨구나.’ 하고 감사하면서 그 환자를 존귀히 여기고 사랑하며 치료할 때 그 환자는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 병원을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사람만 상대하니 잘못할 수 있고 비굴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면 잘못할 수도, 실패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잠언 22장 29절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 앞에 설 것이요 천한 자 앞에 서지 아니하리라』
구두 닦는 일을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분의 구두를 잘 닦아 드려야지.’하는 마음으로 닦으면 반드시 성공할 줄로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저 이삼천 원을 번다는 생각만으로 구두를 닦는 사람은 큰 성공자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대구의 한 부인이 식당을 경영할 때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 식당이 모든 사람의 건강을 세워주는 식당이 되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다가 ‘화학조미료를 넣지 말고 건강에 좋은 재료와 신선한 재료만을 사용해서 사람들에게 대접하자. 가난한 사람에게는 본전만 받자.’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음식 하나하나마다 아주 좋은 재료를 사용하여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그 음식점의 음식을 먹으면 맛이 개운하고 시원하니 사람들이 줄을 이어 그 식당을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최고의 식당이 되었고 대통령상도 받게 되고 대통령께서도 그 식당을 찾아오셨습니다.
또 그 부인은 서울대학교에 초빙되어 특강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도울 때 자기에게 복이 오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 때도 하나님 앞에서 하면 그 일이 귀한 일이 되고 그는 잘 되어 회사의 기둥이 될 줄로 확신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누구나 위대하게 됩니다.
미켈란젤로와 바흐도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들입니다.
지금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 앞에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 잘못 살 수가 없습니다.
이번에 제가 일본에 가서 성회를 섬길 때, 전도부장 목사님이 저를 따라 다니면서 비디오로 촬영을 하셨습니다.
심지어 식사할 때도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그것이 자꾸 의식되어 “목사님, 좀 편하게 삽시다.”라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목사님은 편하게 사세요. 저는 사진을 찍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배우 노릇을 하고 왔습니다. 나중에 목사님이 그것을 CD에 담아 제게 주셨습니다.
사람이 비디오카메라로 추적해도 잘못 살 수 없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항상 보고 계시는 것을 우리가 알면 어찌 잘못 살 수 있겠습니까?
욥기 31장 1절에서 4절에 보면 욥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욥은 늘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습니다.
자기 부인은 할머니가 되었는데 길에 나가보면 예쁜 아가씨들이 걸어다니니 ‘아! 예쁘다. 어찌 저리 예쁜고!’하며 자기도 모르게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의인이었던 욥도 예쁜 처녀를 한참 보니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죄송합니다. 이제는 예쁜 처녀를 주목하지 않겠습니다.’ 하고 눈과 서약을 한 것입니다.
욥이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에 그런 서약을 한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우리 연애하자. 연애하자.” 하며 날마다 유혹할 때 젊은 청년인 요셉이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9장 9절에 보면, 요셉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내가 부인과 연애하면 부인의 남편인 보디발 장군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것인데 어찌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는 아예 부인과 함께 있지도 아니했습니다.
요셉도 유혹에 약한 청년의 몸이지만 하나님의 시선을 느꼈기에 경건에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약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면 의롭게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때때로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거짓말도 하고 부끄러운 일도 했습니다. 첩을 두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런 아브라함을 보시고 답답하셔서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에 나타나시어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언제까지 그렇게 살겠느냐? 이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그 때부터 아브라함의 삶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저를 통해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 장로(권사, 집사)야, 네가 예수를 믿은 지 몇 십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가끔 그런 일을 하느냐? 이제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 잘못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롭게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선을 느끼면 이기적인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상대방을 생각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바울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때까지 우리가 우리를 너희에게 변명하는 줄로 생각하는구나.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말하노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따라 합시다.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다.”
하나님 앞에 사는 바울은 꿈에서도 자기를 위해 살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들을 세우기 위해 변명을 하기도 하고 자기 자랑을 하기도 하고 성도들을 책망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영적으로 세워주고 교회를 든든히 세워주기 위해서 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서는 자기 몸을 허비하고 자기 시간을 허비하고 자기 돈을 허비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니 자신이 아닌 성도들을 위해 자신을 쏟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가정에서도 아내는 남편을 위해,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제쳐 놓으면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이용하며 자신을 위해 살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서 살면 그럴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남자가 결혼한 지 23년 만에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은 그는 성경 공부를 시작했는데, 하루는 목사님이 남자들에게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그 숙제는, 아내를 껴안고 “여보, 사랑해요.”라는 말을 꼭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생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아내를 껴안아 준 적도 없었지만 그는 숙제를 하기 위해 부엌에서 일하고 있는 아내 옆에 가서 목사님께서 시키신 대로 아내를 꼭 껴안고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을 사랑하오.”
“아니, 어찌 평생 안 하던 행동을 하세요?”
“이건 숙제요. 숙제.”
그런데 얼마 후, 그는 정말로 자기를 위해 수고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아내의 값진 사랑과 희생을 깨닫지 못한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는 퇴근하자마자 아내를 꼭 껴안고 “여보, 당신을 정말 사랑해요. 이것은 숙제가 아니고 진짜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아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아내를 이용하는 남편은 성도가 아닙니다.
아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됩니다.
아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살면 아내가 잘못해도 아내를 책망할 마음이 없어집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밥을 먹고 나서 제 밥그릇은 항상 개수대에 갖다 놓습니다.
사과를 깎아 먹고 나면 껍질은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아내가 해 준 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도 아무 말 하지 않습니다.
혹 아내가 알고 “여보, 미안해요.”라고 말해도 “괜찮아요. 돌보다는 밥이 많아요.”하고 지나갑니다.
제가 철이 들지 않았을 때는 아내를 많이 괴롭혔지만 철이 들고부터는 아내를 이해하고 ‘아내를 어떻게 도울까?’하는 생각만 합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을 이용하지 않고 희생하는 마음으로 남편을 섬기는 삶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아내의 도리입니다.
또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합니다.
요즘에는 자식을 낳지 않는 부부들이 있다고 합니다.
아기를 낳으면 몸의 스타일이 구겨지고 자식을 기르려면 고생도 되고 돈도 많이 드니, 차라리 그 돈을 모아 놓았다가 노년에 편하게 살려고 자식을 낳지 않는다고 한다는데, 그것은 저주를 손짓하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지 않는 것은 저주이지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를 막으셔서 자식을 주지 않으실 때는 낳을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태를 열어주셨는데도 일부러 낳지 않는 것은 저주를 부르는 일입니다.
창세기 1장 27절에서 28절에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축복인데, 그 첫째가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에 충만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몸이 재창조되도록 하나님께서 몸을 다스려 주십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면 유방암에도 잘 걸리지 않고 피부도 새롭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아기를 많이 낳을수록 오히려 아름답고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자라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 더 큰 행복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을 제외하고는 자식을 보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는 것입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임금이든 백성이든 자기 가정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는 자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페스탈로치도 “가정의 단란함이 지상에서 가장 빛나는 기쁨이요, 자식을 보는 즐거움이 가장 성스러운 행복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사람 사는 재미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식이 잘 자라는 것과 훌륭하게 사는 것을 볼 때, 또 자식이 결혼하여 낳은 손자를 볼 때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기쁨을 일억으로 사겠습니까? 천억으로 사겠습니까? 자식은 참으로 큰 축복입니다.
그런데 어찌 자식을 낳지 않고 편하게 살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 사람은 못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삶은 절대로 자기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늘 건강하고 젊게만 사는 줄 압니까?
사람이 늙고 병들면 얼마나 고독해지는지 모릅니다.
부부 둘만 살다가 늙으면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죽을 때 누가 찾아오겠습니까?
장례식에 누가 있겠습니까?
장례식에 상주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것이 영광입니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시편 127:4-5)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늙고 병들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석고 약한 사람이라도 자녀가 떡 받치고 있으면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자녀가 기둥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자식보다 더 큰 희망 덩어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저희 집에 들르러 오신 어머니께서 어제 아침에 “내가 없으면 우리 교회가 텅 빈 것 같다고 하는데…….”라고 하시면서 예배를 드리러 시골에 가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나가시는 교회에 교인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 고향으로 가시기 전에 아픈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저희 고향에 아들 하나만 둔 아저씨 한 분이 계십니다.
그 아들이 너무 귀해서 아저씨는 아들을 강가에도 저수지에도 보내지 않으셨답니다.
그래서 물가에 갈 기회가 없었던 아들이 수영을 배우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며칠 전에 고 3인 그 아들이 세 친구와 함께 머리를 식히러 강가에 나갔답니다.
수영을 못하는 아이라 물을 보고 겁내니 친구들이 재미삼아 그 아이를 강에 집어넣었답니다. 아이가 놀라서 “나 수영 못해! 나 수영 못해!”하며 기어 나오니 친구들이 또 밀어 넣었답니다.
“얘들아, 이러면 안 돼! 나 죽어. 나 수영 못해.”라고 하면서 바위를 붙잡고 나오는데 친구들이 또 밀어 넣어서 아이가 다시는 나오지 못했답니다.
그 세 친구의 아버지들도 죽은 아이의 아버지와 친구 사이입니다.
아버지들도 친구지간이고 아들들도 친구지간입니다.
경찰서에 잡혀간 아이들이 “장난치다 그랬습니다. 장난치다 그랬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아들을 잃은 아저씨께서 “야 이놈아, 내가 무엇 때문에 일하고 돈을 벌었는데…….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해 돈을 벌고 누구를 위해 산단 말이냐?”하시며 통곡을 하셨답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죽었으니 살맛이 없는 것입니다.
만일 아들이 서넛 되었으면 아저씨께서 그래도 견디시기가 조금은 낫지 않았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흘려들으면 안 됩니다.
젊은 부부들이여, 아이를 많이 낳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중년 부부들과 노년 부부들도 늦둥이를 한 명씩 더 낳으시기 바랍니다. 생육하고 번성하기 바랍니다.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입니다.
자식이 자라는 것을 볼 때의 기쁨이 한이 없고, 또 손자를 보는 기쁨이 한이 없습니다. 이것은 돈으로 계산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아들과 손자를 위해 희생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부모의 삶입니다.
자식도 낳지 않고 자기 몸만 잘 챙기려는 사람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나쁜 사람들입니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씨가 말라 나라가 망하는데 어찌 자식을 낳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는 자식을 많이 낳아 잘 기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나라 사랑의 길이고 하나님 앞에서 순종하는 삶이고 축복을 받는 일입니다.
일본 사람들은 대개 장수하는데,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아들 손자와 함께 사는 노인들이 장수하고 노인들끼리만 모여 살면 일찍 죽는답니다.
가족과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모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가정에서도 헌신하고 회사에서도 헌신하며 상대방을 배려하게 됩니다.
일본의 <마쓰시다 회장>은 ‘경영의 신’이라고 알려져 있을 정도로 경영에 뛰어난 사람입니다.
한번은 그가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갈비집에 갔는데, 평소와는 달리 자기 앞에 놓인 음식을 절반밖에 먹지 않았습니다.
마쓰시다 회장은 세계적인 인물이라 그를 맞이한 식당에서는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고 서빙합니다.
그런데 그가 음식을 반밖에 먹지 않으면 맛이 없어 그런 줄 알고 주방장이 ‘내 음식 솜씨가 좋지 않구나.’하고 자괴감을 갖게 됩니다.
그것을 아는 마쓰시다 회장이 주방장을 불렀습니다.
“주방장, 당신의 솜씨는 역시 출중하고 탁월하오. 그런데 내 나이가 80이 넘으니 식욕이 떨어지고 양도 줄어 전과 같이 많이 먹지 못한다오. 그러니 내가 이렇게 음식을 남긴 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마시오. 절대로 음식 맛 때문에 남긴 것이 아니라오.”
식당의 손님은 음식을 먹고 가면 그만입니다.
그런데도 주방장의 마음까지 헤아릴 줄 아는 마쓰시다 회장을 보고 손님들이 “식당 주방장의 마음까지 살피다니, 과연 훌륭한 분이구나. 이런 분이 경영하는 기업과는 계속해서 거래를 해야겠구나.”하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나 자신만 챙기면 잘 될 줄로 생각하지만, 아닙니다. 상대방을 챙길 때 상대방도 잘 되고 자신도 잘 됩니다.
히틀러가 악정을 할 때, 한스 플랭크 장군이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히틀러가 한스 장군을 불러 물었습니다.
“장군은 폴란드에 사는 유대인들을 어떻게 다스리고 있소?”
“예, 각하. 그들의 재산을 다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권리를 다 빼앗았습니다. 또 그들에게 강제 노동을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도 히틀러가 만족하지 않은 얼굴로 물었습니다.
“그게 다요?”
“아닙니다. 유대인 자체 협력기구를 만들어서 그들끼리 똘똘 뭉쳐 협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잘 했소. 그러면 유대인이 곧 멸종할 거요.”
이것은 실화가 아니라 핍박 받는 유대인들이 만든 이야기입니다.
유대인이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서 자기들끼리만 사랑하고 도와주면 언젠가는 멸종하고 만다는 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세계에 퍼져서 세계를 도와야 자기 나라도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사업을 할 때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이익도 챙겨줍니다. 그러니 세계 경제를 잡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신비롭습니다.
손해를 보는 것 같아도 오히려 복이 되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이웃을 돕는 것이 나를 돕는 것인데,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은 가정에서도 희생하고, 회사에서도 희생하고, 어떤 모임에서도 희생합니다.
얼마 전,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내가 이 모임에서 짐꾼이 되리라. 내가 이분들을 섬기리라.’라고 다짐하고 그분들을 섬겼습니다.
얼마나 짐을 많이 날랐는지 나중에는 팔이 아팠습니다.
제가 그렇게 섬겼다고 천하게 되고 짐꾼 대접을 받았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타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면 우리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살면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잘 되고 신분이 높아도 하나님 앞에 있으면 겸손해집니다.
사도행전 10장 33절에 보면, 대 제국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가 시골 할아버지 베드로 앞에 엎드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겠습니다.”라고 합니다.
고넬료가 그렇게 겸손하니 그의 집안 친척이 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고넬료가 그렇게 겸손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 앞에만 있지 않고 하나님 앞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저 지용수 앞에만 있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설교 시간에 겸손히 말씀을 받아서 은혜와 능력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저만 보면 저를 통해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저보다 더 잘나고 능력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도 부족한 저를 보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있으면 언제나 풍성한 은혜를 받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는 다윗이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산책을 하다가 어여쁜 여인이 나신으로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남자는 미인에게 약합니다.
다윗도 그 어여쁜 여인에게 정신을 잃어 그를 불러다가 취했습니다.
그리고는 돌려보냈는데 여인이 잉태했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죄를 짓고 나면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귀가 반드시 쇠고랑으로 엮어버립니다.
만일 그 여자가 다윗의 아기를 잉태했다는 소문이 퍼지면 다윗은 전국적으로 망신을 당합니다.
그러니 다윗이 군에 가 있는 여인의 남편에게 휴가를 주어 그와 함께 잠자리에 들게 해서 자기의 죄를 덮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휴가를 주어도 자기 동료와 부하들은 전쟁을 하고 있는데 자기만 휴가를 즐길 수 없다며 고지식한 남편은 자기 아내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할 수 없이 그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자기 궁궐에 데리고 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당시 왕들은 미인을 보면 그 남편을 죽이고 그 미인을 데리고 사는 것이 다반사였습니다.
그러니 다윗도 아무 거리낌 없이 그 여자를 데리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그때 하나님의 사자 나단이 다윗에게 옵니다.
“왕이여, 한 고을에 큰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살았는데 부자에게는 소와 양이 많았고 가난한 자에게는 어린 암양 새끼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그 어린 암양 새끼를 자기 어린 딸처럼 길렀습니다. 자기가 먹는 것을 먹이고 자기 품에서 재우며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부잣집에 손님이 오니 부자가 자기 집의 소와 양은 아끼고 가난한 집의 딸과 같은 어린 암양을 빼앗아다가 잡아서 대접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윗이 화를 내며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맹세코 그놈은 죽어 마땅하다. 그리고 그가 암양 새끼를 빼앗았으니 네 배로 갚아 주어야 된다.”
그러자 나단이 말합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이 우리아의 하나뿐인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그때 다윗이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았으면 “뭐? 이런 무엄한 놈!”하고 칼로 나단의 목을 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있으니 “내가 잘못했소. 내가 죄를 지었소.”하며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야가 나이 16세에 왕이 되어 52년간 성공적으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스가랴 제사장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잘 섬겨 나라가 부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계에 큰 돌을 얹어 놓고 기계를 작동시키면 돌이 날아가 적진을 공격하는 대포도 만들었습니다.
나라가 힘 있게 되자 교만해진 그는 교회에 가서도 ‘나는 왕인데…….’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향단에 분향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때 아사랴 제사장이 용기 있는 제사장 80명을 데리고 따라 들어가 왕에게 말했습니다.
“왕이여, 그것은 왕께서 할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자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던 웃시야 왕이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만 의식하여 화를 냈습니다.
그 순간 그의 온 몸에 나병이 발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별궁으로 쫓겨나 죽을 때까지 고독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왕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곳에 묻혔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지 않고 사람 앞에 있으면 교만하고 망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있으면 교만할 수도 없고 망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으면 겸손하고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있으면 마음이 편안합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배가 풍랑을 만나 바울과 배에 탄 276명 모두가 14일간 먹지도 못하고 초죽음 상태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바울은 편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바다가 왜 이렇게 소란스럽습니까? 이 풍랑으로 제 사명이 끝나는 것입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바울아, 배는 잃어도 너와 함께 한 276명은 한 사람도 생명을 잃지 않는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 누구도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한 사람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배는 잃어도 한 사람도 죽지 않으니 걱정하지 말고 우리 모두 음식을 먹읍시다. 자, 기도합시다.”
바울이 불신자들 앞에서 기도하고 음식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배는 깨어졌지만 그 276명이 다 살았습니다.
미국이 수해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일본도 대지진이 일어날 주기가 되어서 겁을 내고 있습니다.
동경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동경 시민이 많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또 그런 일이 일어날까 봐 동경 시민들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 천재지변, 이상한 일, 두려운 일, 풍랑이 계속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살면 어떤 풍랑 앞에서도 ‘하나님, 여기에 무슨 뜻이 있습니까?’하며 낙심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희망을 품고 담대하게 어려움을 극복하며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으면 고기 뱃속에 들어가도 기도하여 다시 나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으면 일곱 아들과 세 딸이 다 죽어도 다시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으며 살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최고 최선의 지혜로운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 위대한 삶, 승리하는 삶, 값진 삶을 살게 되시기 바랍니다. 어디에서나 좌절하지 않고 희망차게 사는 삶을 계속 영위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