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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년~1991년)
I won't be a rock star. I will be a legend.
나는 락 스타가 아니라, 전설이 될 것이다.
록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컬리스트 중 한명
안타깝게 요절한 천재 음악인
영국의 전설적인 록 밴드 중 하나인 퀸의 리드 보컬 겸 프론트맨이다. 보컬, 작곡, 연주, 무대 퍼포먼스 어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최고급으로 해내던 아티스트였다.
2. 유년기-대학 시절
동아프리카 인도양 해안에 위치한 섬인 잔지바르 출신으로 총독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8세기에 무슬림에 쫓겨 페르시아에서 인도의 구자라트로 피신해 정착한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파르시이며, 본명은 파로크 불사라(Gujarati: ફારોખ બલસારા, Pharōkh Balsār)이다. 파로크란 이름을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려워해서 프레디란 별명을 많이 썼다.
정통 파르시 출신답게 프레디 머큐리는 역시 인도 쪽 혈통이라고 한다. 프레디 머큐리의 아버지 Bomi bulsara는 8형제 중 하나로 태어났는데, 그의 고향은 인도 구자라트 주의 불사르(Bulsar)라고 한다. 불사라라는 성은 프레디의 아버지가 잔지바르로 건너오면서 고향 마을의 이름을 따서 그대로 붙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실제로 프레디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삼촌, 백부들도 모두 하나둘씩 잔지바르로 건너와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통 인도 혈통은 아니고 엄연히 독실한 파르시 집안에서 태어났고 자랐기 때문에 파르시계 인도인 혈통이라고 할 수 있다. 프레디의 부모님들도 생전 자신들을 인도라는 출신 배경보다 파르시라는 걸 훨씬 강조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린 머큐리는 잔지바르의 성공회 학교에서 수녀들에게 수업을 받았다. 그러나 머큐리의 부모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8세 때 그를 인도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머큐리는 인도 뭄바이 동남쪽에 위치한 판치가니(Panchgani)의 성 베드로 성공회 성당(Saint Peter church of England)에서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다행히 기독교 학교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종교의 학생들은 아무런 차별없이 받아들였으며, 기본적인 성경공부와 채플 외에는 학생들의 종교생활에 크게 간섭하지 않아서, 당시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며 학생시절을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가족과 떨어져서 공부하는 것을 무척 괴로워했다고 하며, 그 때문에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으로 자란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음악에는 일찍이 두각을 보여서, 학창 시절 합창부에서 활동을 하기도 하고 교내 밴드에서 건반을 치기도 했다. 음악 외에도 미술과 스포츠를 잘했고, 특히 복싱은 교내 챔피언이었다고. 어릴 때 가족과 떨어져서 인도에서 공부를 하며 외롭게 생활해야만 했기 때문에 이 때의 기억이 프레디의 성적 지향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이 많은 편이다. 게다가 Lesley-Ann Jones의 프레디 머큐리 바이오그래피에 따르면 프레디의 인도 유학은 끝이 좋지 못했다. 처음에는 인도의 기숙학교에서 적응하며 잘 다니는 듯했지만 학교에서 공부하던 막바지 즈음에는 성적도 확 떨어지고 프레디 본인도 방황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인도 뭄바이에서, 학창 시절 프레디. 치아가 신기하다. 거의 만화에서 나올 법한 수준의 뻐드렁니...
인도에 유학까지 갈 정도로 집안 사정이 나쁘지 않았지만, 잔지바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 술탄정이 전복되고 공화정이 수립되면서 아랍인들과 인도인, 페르시아인들이 대거 추방당하자, 프레디 머큐리도 가족들과 함께 영국으로 쫓겨나다시피 이주했는데 급하게 영국으로 가다 보니 집안 사정이 많이 안 좋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프레디 머큐리도 아르바이트를 했어야만 했는데, 비행기 화물칸에서 짐을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들에게 자기는 알아주는 뮤지션이라고 뻥을 쳤다. 단순한 허세였지만, 프레디 머큐리 스스로가 뮤지션이 될 것이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한 첫 번째 발언이었다.
퀸의 광팬이었던 신해철이 고스트스테이션에서 말하기로는 프레디가 인도 유학에서 돌아오고 잔지바르가 혼란에 빠진 이후 가족들과 다른 국가로 떠나야만 했을 때, 프레디 부모님들의 고향이었던 인도 역시 목적지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프레디 본인이 인도로 이민을 떠나는 것은 극구 반대했다고 한다. 인도로 아닌 영국으로 이민을 결정했던 것은 프레디 본인의 의사가 반영된 결정이었다고.
영국에서 일링 예술 대학(Ealing Art College) 그래픽 디자이너 학사로 대학을 마쳤다. 아무래도 당시에 1970년대 초에 그럴듯한 대학에 다니고 있던 엘리트였고 음악을 하지 않았어도 먹고 살 길이 충분히 많았기 때문에 음악을 직업으로 삼을 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퀸에 가입한 이후 직업 뮤지션으로 살아가기로 결단을 내렸고, 친한 친구에게 '아무래도 나는 음악을 해야 될까 봐.'라고 말했었다고.
프레디 머큐리가 워낙 노는 것을 좋아했고, 당시 영국 대학생들도 술파티 같은 것을 빈번하게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모여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숙취에 쩔어 새벽에 집단으로 널브러져 있던 일도 자주 있었다. 그리고 그런 파티에서 프레디가 기타를 연주하며 존 레논의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 목소리가 아주 끝내줬었다고 한다. 참고로 프레디 머큐리는 인터뷰에서 존 레논에 대해 레논은 가장 위대한 뮤지션이고 유일무이한 독특한 존재이며 그를 무척 존경한다고 밝혔을 정도로 그의 팬이었다. 퀸의 정규 10집 앨범 Hot Space에서는 존 레논에 대한 헌정곡인 <Life Is Real (Song For Lennon)>을 써서 수록하기도 했다.
대학 시절 기타를 연주하는 프레디. 위에 비틀즈 멤버 조지 해리슨의 포스터가 보인다. 대학 친구들은 이 때부터 프레디가 뭔가 될 법한 떡잎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한다.
3. 퀸
대학 재학 중에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다가 로저 테일러와 브라이언 메이가 이끌던 스마일을 유심히 지켜보던 프레디는 보컬 팀 스타펠의 소개로 두사람과 만나게 된다.이후 팀 스타펠이 'Humpy Bong' 이라는 밴드에 가입하기 위해 스마일을 탈퇴하자 바로 그 빈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팀의 베이스 오디션을 보았고 세 번의 오디션 끝에 베이시스트 존 디콘을 영입, 퀸이 탄생하게 되었다. 후일 로저는 스마일 시절에 웬 이상한 녀석이 공연마다 와서 공연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잔소리를 했는데 그게 프레디였고 그 잔소리가 밉지 않은 녀석이었다고 밝혔다.
팀 스타펠은 프레디와 여러모로 죽이 맞는 친구였었다고 한다. 대학 강의실에서 프레디와 팀 스타펠이 책상을 두들기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동기들은 "쟤네 또 노래 부르면서 논다"식으로 웃어넘겼다는듯. 평전에 따르면 프레디는 내성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쾌활한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낯선 사람들이나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는 내성적으로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많았으나 친한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노래도 부르고 장난도 치고 크게 떠들기도 했었다고.
로저와 브라이언은 프레디와 처음 만났을 때 서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브라이언 메이는 이미 스마일 이전에도 <1984>라는 밴드를 만들어 근방에서 이름을 날렸던 적이 있었고, 로저 테일러는 대학에 오기 전 고향에서 아마추어 밴드 활동을 하면서 역시 이름을 날렸었다고 한다. 좋은 멤버를 구하지 못해 이리저리 아마추어 밴드를 옮겨다녔던 프레디에게는 실력 좋은 기타리스트와 드러머가 더더욱 눈에 들어왔을 것이라고.목표를 포착했다 프레디는 스마일의 공연에 매니저처럼 따라다니면서 팬을 자처하고 잔소리도 늘어놓았다. 팀 스타펠이 탈퇴하고 스마일이 기획사에서도 버림받는 밴드가 되자, 로저와 브라이언은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프레디가 생각나서 그에게 연락을 취해 가입을 문의했다. 이런저런 아마추어 밴드에서 활동을 하고 있었던 프레디는 고민도 없이 바로 OK했다고.
퀸의 로고는 프레디가 디자인했으며, 위의 자켓도 프레디의 작품. 이 로고는 4,5집 이외의 앨범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로고에 들어가는 동물들은 멤버들의 생일 별자리를 나타낸다고.
밴드 이름을 'Queen' 으로 제안한 것도 프레디 머큐리였다. 처음에 다른 멤버들은 퀸이란 밴드명에 반대했다고 한다. 퀸이라는 단어에는 속어로서 'gay'와 같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는 퀸이라는 이름을 고집했고, 다른 멤버들은 그 고집을 이기지 못해 결국 밴드 이름을 퀸으로 결정하게 된다.
퀸 초기에는 글램 락의 영향을 받아 긴 머리, 검은 매니큐어, 검은 눈화장, 나비 날개같은 옷, 몸에 딱 붙는 타이즈(발레복)를 주로 입었는데 손발이 오글거리는 의상이지만 의외로 또 소화를 잘 했다. 강한 인상, 큰 얼굴과는 달리 몸매, 특히 하체가 길고 가는 편이라 그럭저럭 소화를 했다. 날개 의상은 곧 자취를 감추지만 타이즈는 퀸 중반기(1976~1978)에도 종종 보인다.
퀸 초기의 프레디는 유난히 무대조명과 의상에 집착했다고 한다. 공연 준비 금액의 절반 가까이를 의상과 조명에 쏟아부을 정도였다고. 게다가 도저히 남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 기괴한 의상을 멤버들에게 입으라고 강요해서 퀸이 공연 준비를 하는 대기실에서는 '으악! 도저히 이런 거 못 입겠어!'라는 소리가 자주 튀어나왔었다고. 특히 퀸에서 나이가 제일 어리고 성격이 수줍었던 멤버 존 디콘이 이상한 의상을 자주 강요받아서 난감했던 적이 많았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프레디는 1집을 녹음하면서 장난 삼아 "로네츠(The Ronettes)"의 "I Can Hear Music"을 녹음했던 적이 있다. 의외로 녹음 퀄리티가 좋아서 음반으로 발매했는데, 이때 본명을 쓰지 않고 'Larry Lurex' 라는 이름으로 발매했다. 물론 당시에 프레디는 무명의 가수였기 때문에 본 이름으로 발매한 음반 역시 묻히다시피 잊혀졌는데, 나중에 이것이 프레디가 무명 시절에 녹음했던 앨범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지금은 수집가들 사이에서 꽤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다고 한다. 젊은 시절 프레디의 미성을 느낄 수 있는 곡이다.
3집 발매 전까지 퀸은 여타 무명 밴드가 그렇듯이 금전 사정이 좋지 않았다. 이는 프레디도 마찬가지라 퀸이 처음으로 방송 출연을 했을 때 길거리 가전제품매장에 진열된 TV로 방송에 나온 자신의 모습을 봐야 했다고.
데뷔 앨범인 <Queen>을 시작으로 점점 이름을 알리면서 명곡 <Bohemian Rhapsody>가 수록된 <A Night at the Opera>가 대박을 치면서 인기를 얻었으나 이상하게 평론가들한테는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듣기 좋은 육자배기도 한두 번인데 자기 까는 소리를 줄창 들으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만무. 인터뷰도 잘 안 하고 평론가들에 대한 감정도 무척 좋지 않았다. 특히 성 정체성 때문에 더 그랬는데 프레디의 게이 의혹과 개인 사생활을 파헤치려는 찌라시를 생산해내는 언론의 행태로 그는 언론을 더욱 불신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프레디는 여러모로 언론에서 가십거리가 되기 쉬웠다. 일단 인종 측면에서 보자면 일단 프레디 본인이 유럽인이 아니었다. 프레디는 인도계 파시족, 즉 영국에서도 차별받기 쉬운 아시안 인종이었고 뿐만 아니라 어릴 적에 영국으로 이민을 온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멀리 있는 잔지바르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파시족 혈통은 그 시절 온갖 차별과 혐오를 받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유럽 각지에서 인종차별, 혐오 범죄가 심심찮게 터지고 있는데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시절에는 오죽했을까. 프레디의 절친했던 친구 엘튼 존은 '만약 프레디 머큐리가 영국에서 태어난 유럽인이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씁쓸하게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이런 태생적 정체성이 있었던 프레디에게 양성애 성향까지 있었으니 언론에서는 더없이 공격하기 쉬운 대상이었던 셈. 프레디가 언론과 평론가들을 불신했던 이유는 자신의 이러한 정체성을 이유로 공격을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나중에 프레디도 평론가들의 계속된 악평에 짜증이 폭발했는지 "그 새끼들이 뭐라고 지껄이든 상관 안해요." 라는 식으로 소리를 질렀다는 후문도 있다.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거친 록 뮤지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클래식 음악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장르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 그의 이런 음악 성향은 어릴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다. 게다가 판타지 전설 같은 것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이런 관심사 덕분에 퀸 초기 가사에는 '요정'이나 '괴물', '정의의 기사' 같은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70년대와 80년대 보컬이 차이가 크다. 70년대에는 아름다운 미성을 토대로 비성과 구강 공명을 적절히 활용하며, 적절히 가성을 넘나드는 방식을 주로 썼는데 80년대에 들어서서는 구강 포먼트를 최대로 하고 목을 조으고 댐핑을 엄청나게 줘서 드라마틱한 탁성을 유도했다. 이는 한국의 판소리 명창들이 주로 쓰는 방식이다. 또 뒤로 먹는 소리나 목을 조은 가성도 많이 썼다. 이러한 창법의 변화로 1970년대 공연엔 창법이 목에 무리가 가는 수준은 아니어서 컨디션 분배도 잘 됐는데, 1980년대 공연부터는 성대에 엄청 무리를 주는 창법으로 인해(먹는소리,턱으로 누르는 소리 등) 목에 피로가 빨리 축적되어서 공연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달린다. 이런 경향은 마지막 투어인 매직 투어에서 두드러진다.
참고로 콧수염을 처음 기른 것도 1980년부터다. 즉, 이 때부터 아예 노래 스타일이나 패션 스타일까지 바꿔버린 것. 때문에 콘서트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프레디 다큐멘터리인 Who Want To Live Forever에서 지인들의 인터뷰를 보면 미국 뉴욕 여행에서 게이 클럽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이 때 프레디가 이때 미국의 게이문화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더 이상 발레복을 입지 않고 가죽자켓에 짧은 머리에 콧수염 등 마초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80년 이후 갑자기 목소리가 바뀌어 버린 이유에 여러 추측이 있지만 추구하는 음악이 달라진 것도 큰 영향을 줬을것이고, 성대 폴립이 생기고 줄담배를 피우면서 피치를 맞추기가 어려워진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말년에 에이즈로 고생하다 죽었는데, 1991년 11월 23일 에이즈 감염을 공식 인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그 다음 날인 11월 24일에 숨을 거뒀다.
죽을 무렵엔 눈도 안 보이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프레디는 1987년, 멤버들은 1988년에 이미 그의 에이즈 감염을 알았다고 한다. 그 즈음부터 프레디 머큐리는 급속히 초췌해지며 에이즈 감염설이 퍼지고 있었는데(당시 본인은 강력히 부인), 이때 프레디는 멤버들에게 '너희들도 내 문제가 뭔지 알고 있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선 얘기하고 싶지 않아. 난 그냥 죽을 때까지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라는 식으로 고백을 했다. 나머지 멤버들도 그의 뜻에 따라 더 이상 그 문제를 논하지 않고 음악 작업에만 몰두했다. 멤버들과 주변 사람들은 프레디를 보호해 주기 위해서 누군가가 물어보면 에이즈에 걸리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정확히 언제쯤에 에이즈에 걸렸는지는 모르지만 에이즈 전문가들과 주변 인물들은 Live AID 이전 때일 것이라고 한다. 이때부터 프레디가 몸에 이상을 조금씩 느끼기 시작했고, 공연 후에는 엄청 지쳐버리는 등 많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프레디의 에이즈 감염 시기는 팬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인데 에이즈라는 질병 자체가 잠복기가 일정하지 않고 사람마다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팬들이 추정하는 에이즈 감염 시기는 프레디가 1982년 미국에 놀러갔을 때, 혹은 Hot Space 앨범 이후 프레디가 잠시 음악에 열정을 잃고 밤놀이에 빠졌을 때, 아니면 더 올라가서 1970년대 말 미국에서 클럽에 드나들 때까지도 감염 시기를 넓게 잡는 의견이 있다. 프레디에게서 면역 결핍 증상이 나타난 시기로 계산을 해 보면 감염 시기는 1982년, 1983년 사이가 유력하다고 한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당대의 사회적 시선 때문에 HIV 보균자 검사를 받는 것을 꺼려했는데 프레디 역시 그랬다. 하지만 동성애인인 짐 허튼과 일본 여행을 가기 전에 비밀리에 검사를 받았는데, 병원 측의 누군가가 정보를 흘렸는지 언론사 쪽에 프레디가 HIV 검사를 받았다는 소문이 바로 나버렸다.
물론 프레디 역시 인간인지라 에이즈 감염을 처음 선고받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의사가 처음으로 프레디에게 에이즈의 감염을 알려줬을 때 프레디는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눈물까지 보였다고 한다. 프레디의 마지막 순간의 이야기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who wants to live forever'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했는데, 무척이나 싱크로율이 높은 재연배우가 에이즈 감염을 선고받았을 당시 프레디의 혼란스럽고 절망스러운 모습을 아주 잘 표현했다.
프레디는 파파라치들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기 때문에 파파라치들을 따돌리기 위해 자신의 차량에 마네킹을 분장시켜서 시선을 따돌린 후 자신은 나중에 다른 차량으로 나가는 등 많은 고생을 했다. 그래서 결국 런던의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지내기 시작한다(이 때 스위스 몽트뢰에서 체류한 기간이 늘어난 것 같다) .
프레디가 병에 걸림으로써 1986년을 기점으로 퀸은 라이브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프레디는 매직 투어 이후로 병색이 짙어졌으나, 1988년경까지 솔로곡으로 라이브를 계속했다. Barcelona를 몽셰라 카바예와 함께 라이브를 했었다. 즉, 1989년 The Miracle 앨범이 발매될 당시에 프레디가 라이브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안 됐었던 것은 맞으나, 1986년 이후 프레디가 어떤 라이브도 일체 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병색이 짙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프레디는 음악에 대한 열정 하나로 약을 먹어가며 악착같이 버텨내고 몸이 잠깐 좋아지면 그때 다시 작곡하고 노래하기를 반복했다. 프레디의 생전 마지막 퀸 정규 앨범인 Innuendo는 프레디가 언제쯤 스튜디오에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멤버들에게 연락하면 나머지 세 멤버들이 데모 버전을 미리 만들어 놓고,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을 때 스튜디오에 와서 보컬을 녹음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생전 마지막 싱글인 <The Show Must Go On>는 음이 높아서 브라이언 메이는 프레디가 이 곡을 부를 수 있을지 걱정했다고 하는데, 프레디는 "I'll fuckin' do it, darling"이라고 내뱉은 후, 투병 중임에도 불구하고 독한 보드카를 쭉 들이키더니 삑사리 없이 한 큐에 녹음을 마쳤다고 한다.
얼마나 마르고 초췌해졌는지 1991년 2월에 촬영한 <I'm Going Slightly Mad> 뮤직 비디오를 보면 두꺼운 화장으로도 병색을 감추기 힘들 정도. 콧수염이 없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움푹 패인 두 볼이 팬들을 안쓰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쾌한 분위기와 멤버들의 코믹한 표정 연기가 인상적인 뮤비.
프레디는 건강이 허락할 수 있을 때까지 음악 작업을 했고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 죽기 직전에 찍은 'These Are The Days Of Our Lives'의 뮤직비디오도 원래 애니메이션으로 대체하려고 했는데, 프레디가 고집을 부려서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는 평범한 내용으로 바꿨다. 그래서 퀸의 80년대 후반 뮤직비디오들을 보면 시간이 지날 때마다 프레디가 점점 병색이 완연해지면서 초췌해지는 게 보인다. 프레디는 자신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을 죽기 전날까지 인정하지 않았지만 되려 뮤직비디오 때문에 에이즈 감염설이 널리 퍼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죽기 전 근 1년 간 언론에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더 이상 치료가 의미 없음을 알게 되자 스스로 치료를 거부했다. 그리고 실제로 당시에는 에이즈라는 병이 발견된 지 십여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생명을 연장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이 전무했다.
프레디가 면역 결핍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곁에는 그의 애인이자 이발사였던 짐 허튼이 함께 있었고, 그는 프레디의 임종까지 곁에서 지켰다. 당시 짐도 1990년에 받았던 에이즈 검사에서 양성 판정을 받았지만 프레디에게 1년 간 그 사실을 숨겨왔다고(짐 허튼은 2010년에 죽었다). 프레디가 죽어가고 있을 때 그의 절친이었던 가수 엘튼 존이 자주 병문안을 왔었다고 한다. 프레디의 병문안은 허락을 받은 몇 사람만 할 수 있었고, 엘튼은 그 중 한 명이었다.
프레디는 죽기 직전 그나마 몸이 괜찮을 때 그림을 상당수 그렸다고 한다. 저택에 틀어박혀 에이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무슨무슨 그림이 비싼 가격에 팔렸다는 뉴스가 나오자 프레디는 내가 해도 저 정도 보단 잘하겠네.라면서 그 자리에서 그림을 몇 점 그렸다고. 그 이후에도 디자인을 공부했던 대학 시절 경험을 살려 그림을 몇 점 더 그렸고, 프레디는 자조 섞인 목소리로 애인인 짐 허튼에게 '이거 내가 죽고 나면 무지 비싸게 팔릴 거야.'라고 농담처럼 말했었다고 한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밝게 여생을 보내려 노력했지만 슬프게도 결국 1991년 11월 24일 프레디 머큐리는 스스로 일어날 힘조차 잃어버린 채 그의 비서에게 에이즈에 걸렸음을 인정하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게 하고 채 24시간이 안 돼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고는 전세계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처음에 세계 언론은 앞다투어 에이즈를 부각하며 프레디가 이 병에 걸렸다고 기사를 썼지만, 곧 그 내용은 다시 프레디가 죽었다는 기사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의 사망 기사는 전 세계 신문의 1면으로 다루어졌다.
세계를 흔들었던 가수가 세상을 떠나자 멤버들은 에이즈 모금행사 겸 프레디 추모 공연을 개최하는데 이 콘서트에는 엘튼 존, 메탈리카, 데프 레파드, 액슬 로즈, 로버트 플랜트, 조지 마이클, 데이빗 보위 등 당대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그리고 멤버들은 그의 유작을 모아 발매하고 죽음을 애도하며 'No one but you'를 작곡한다. 그리고 이 곡을 끝으로 그의 친구이자 멤버였던 존 디콘은 1997년, 은퇴를 선언한다.
참고로 독실한 조로아스터교 신자였던 프레디의 부모님들은 프레디를 조장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현대 문명에 조장이라는 풍습은 거부감이 많이 들 수밖에 없었고, 또 프레디 또한 종교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세속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지인들이 극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결국 프레디는 화장되었고 재는 대중이 알지 못하는 곳에 뿌려졌기 때문에 그의 무덤은 없다고 알려졌었다.
하지만 지난 2013년 영국언론들에 의해 프레디의 묘지로 추정되는 묘비가 런던 켄살 그린표지에서 발견되었다. 이 묘비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아닌 프레디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라고 기재 되어있으며 프레디의 출생년도와 사망연도가 똑같이 기재되어 있다. 프레디의 최후에 대해 알고 있는 연인 메리 오스틴과 퀸 멤버들은 이 묘지가 발견된 뒤 진위여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지만 대다수 팬들은 유년기를 제외하고 프레디가 평생 살았던 런던에 묻힌것이 맞을거라는 결론을 내리며 추모 발걸음을 이어가고 있다.이 묘비에는 오늘도 팬들의 헌화가 가득하다.
터질듯한 화산
록 음악 역사상 최고의 보컬리스트 중 한명
일단 짚고 넘어갈 것은 그가 역사상 가장 다재다능한 록 보컬리스트 중 한명이라는 점이다. 프레디보다 고음을 잘 부르는 가수도 있고 프레디보다 특정 장르를 잘 소화하는 가수들도 있지만 프레디만큼 다양한 장르의 곡들을 록음악화 하여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가수는 거의 없다. 퀸의 구성원들은 각자 다른 음악적 취향을 갖고 있었고 프레디 본인도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보인 만큼 퀸의 곡들은 록이나 발라드 뿐만 아니라 성악적인 요소를 갖기도 하고 흑인음악이나 디스코, 로커빌리 등 실로 다양한 장르를 다뤘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프레디의 다재다능함인 것이다. 사후 추모콘서트에서 내로라하는 거물 뮤지션들이 공연했지만 프레디만큼 훌륭하게 소화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주는 예이다.
보컬로서 역량이 드러나기 시작한 건 대학시절부터였다. 단 그때에는 천하의 프레디 머큐리도 실력이 다듬어지기 전이라, 목소리 기복이 심하고 다소 거친 면을 보였다고 한다. 주위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무척이나 예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목소리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다"라고. 그 뒤로 혼자 엄청나게 연습을 했는지 퀸이 결성될 즈음에는 어느정도 안정된 보컬을 보여주게 된다.
프레디 머큐리는 어릴 적 합창부 시절을 제외하고 누군가에게 정식으로 노래를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보컬 부분에서 누구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가끔씩 맑은 가성으로 성량이 풍부한 오페라적 창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프레디 머큐리는 젊을 적에 엄청난 미성이었다가, 나이가 들자 창법을 바꾸어 그 특성을 많이 잃은 케이스이다. 성대 질환이 생기고 담배를 피워 피치가 조금 떨어지고 음색이 변한 감이 있지만 그보단 창법의 변화로 내츄럴 보이스를 내지 않고 먹는 소리를 사용하게 된 것이 차이점을 도드라지게 한 이유이다. 주로 연대별로 그 차이가 크게 드러나는데, 70년대 보컬은 성구전환을 정석적으로 조심스럽게 하되, 성대가 최대한 벌어지지 않게 노력한 상태에서 고음이 되면 후두가 크게 올라가는 형식의 벨팅창법을 주로 사용한 반면에 , 80년대에 들어서는 전체적으로 인골라에 빠져서 노래했고 성대가 벌어지고 갈라지는 탁성을 주로 썼다. 소리도 조심스럽게 가리던 취향에서 가성이든 쥐어짜는 탁성이든 되는 대로 뽑아내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사실 프레디 머큐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나 목소리는 다수가 1980년대 스타일이다. 초창기 앨범, 퀸 1집을 들어보면 멜로디가 재미없어도 프레디의 미성 덕분에 들어볼 만한 곡이 몇 곡 있을 정도이다. 미성이었던 시절에는 그야말로 굉장히 중성적인, 야누스적인 미성이었다. 남성의 목소리와 여성의 목소리가 혼재된 듯한 그 마성의 목소리는 지금도 경탄의 대상.
프레디 머큐리의 목소리 전성기는 1980년도 초반이다. 하지만 1982년도 후반으로 접어 들수록 계속되는 공연으로 점점 컨디션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고 프레디의 지속적인 흡연으로 인해 목소리가 두터워지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당시 발매한 Hot space 앨범이 실패했으며 1983년도에는 아예 공연을 하지 않고 휴식기를 가졌다. 1984년도에 The Works 앨범과 함께 다시 투어를 했으나 이 시기는 프레디의 컨디션 기복이 엄청나게 심했던 시기다. 목 상태는 지난 투어로 인해 나빠져 있었고 흡연으로 목소리도 두터워져 본 고장 런던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눈물 날 정도로 삑사리를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변화된 목소리에 적응된 프레디는 컨디션이 좋았던 날에는 두터워진 목소리로 고음을 지르는데 전성기만큼 올라가는 건 아니지만 오히려 그 두터운 고음이 전성기 고음보다 매력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194년도 마지막 공연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의해 만들어진 반투스탄들 중의 하나인 보푸사츠와나의 썬 씨티에서 가졌는데 변화된 목소리에 완벽히 적응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총 9일간의 공연에서 10월 19일 공연에서 프레디는 보헤미안 랩소디를 Live Aid급으로 불러냈다.
1985년도는 브라질 리우에서 역대급 관중을 데리고 공연을 했는데 이는 유로 공연 최다 관중 콘서트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첫째날 콘서트에서는 그 어렵다는 Somebody to Love를 전성기급으로 불러냈다. 일본에서 가진 콘서트에서도 Bb4 고음을 5초 동안 흔들림 없이 부르는 등 멋진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찾아온 Live Aid에서는 2옥타브 후반대의 고음을 너무나도 편한 표정으로 내지르며 역대급 무대를 생중계로 보여주어 퀸의 전성기를 다시 한 번 이끌었다. 전성기를 다시 연 후 1986년도에 가진 MAGIC 투어는 전반적으로 그리 좋았던 컨디션은 아니였지만 엄청난 관객을 동원하며 관객들과 함께하는 공연들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이렇듯 프레디는 전문적인 보컬 수업은 받은 적이 없지만 아름답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나이를 먹고 계속되는 투어로 1980년대 중, 후반의 공연에서는 목을 좀 사리는 모습이 종종 보이지만 노래를 잘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디씨 락갤에서는 프레디가 낫냐 xx가 낫냐 떡밥이 심심치 않게 도는데 그런거에 현혹되지 말자.) 라이브에서는 3옥타브 대의 진성 고음을 잘 보여주진 않지만, 가성 고음은 의외로 많은 편이다. 3옥타브 후반대~4옥타브 초반대의 고음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다. 로버트 플랜트의 가성이 날카롭다면, 프레디 머큐리의 가성은 굉장히 부드러운 느낌.
다만, 성대가 유난히도 약한 데다가 정식적으로 보컬 수업을 배운 적이 없어서 라이브 기복이 있는 편. 그러나 프레디 머큐리가 음악활동을 하던 70-80년대에는 컴퓨터 기술이 그렇게 발전했던 때가 아니고, 이를 감안하면 스튜디오에서 그의 가창력은 왜 그가 락 역사상 최고로 불리는지를 느낄 수 있는데, 라이브에서는 안 나오는 고음을 마구 난사하기도 하고, 저음도 굉장히 안정적이며, 발음도 정확하다. 자신을 포함한 퀸 멤버들 모두의 곡을 앨범에 싣다보니 장르도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부족함이 없다. 발라드, 디스코, 성악 등 장르70년대에는 미성 위주였지만, 70년대 후반부터 탁성까지 쓰면서 80년대 중후반부터는 미성과 탁성을 자유자재로 쓴다. 가성도 자유자재로 쓸 줄 아는데, 아름다운 가성을 보여줄 때가 있는가 하면, 이게 샤우팅인지 뭔지 분간이 안가는 괴성(...)을 보여줄 때도 있는데, 이게 다 곡에 있어서 어색함이 없다.
1990년대 들어가면서 다시 1970년대 창법으로 돌아갔다. 아니, 1970년대보다 더 가볍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돌아갔다.
소리가 가벼워져 소리가 명료하게 들린다,
프레디가 자기 곡을 너무 쉽게 부르는 탓인지 퀸의 곡은 그렇게 어려운 곡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막상 약 2~3시간 진행된 프레디 머큐리를 추모하기 위한 콘서트에서 많은 유명 가수들이 퀸의 곡을 불렀지만, 원곡만큼 해냈다고 평가받는 무대는 조지 마이클의 Somebody to love, 익스트림의 퀸 메들리 정도 뿐이다.
80년대에 낸 솔로 싱글에는 자신의 음역을 과시하는 Exercises In Free Love란 곡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에서는 그야말로 여성과 남성의 음역을 넘나드는 마성의 음역을 보여준다. 최고음은 3옥타브 파(F5). 여성의 두성을 구사했다.
락 역사상 최고의 프런트맨
퀸이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밴드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받는데는 프레디의 무대 장악력이 가장 큰 기여를 했다. 그는 특유의 연극적이고 화려한 동작들과 관객 유도스킬을 바탕으로 퀸이 수만의 관객을 아우르는 스태디엄 공연을 해나가는 데에 매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프레디 머큐리의 무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연은 1985년 라이브 에이드로, 그는 전세계의 내로라하는 뮤지션들이 총출동한 자리에서 밥 겔도프와 엘튼 존이 '그들이 쇼를 훔쳤다'고 평할 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줌으로써 당시 U2나 듀란 듀란과 같은 신진 세력들에 밀려 슬슬 동력이 떨어진 듯 보이던 노땅 취급받던 퀸을 다시금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한편 프레디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인 받침대 없는 마이크는 무대 위에서 지휘봉이나 에어 기타(...) 등등 다양한 용도로 쓰이며 퍼포먼스에 볼거리를 더해주었다.
오늘날 그를 존경하는 많은 후배 뮤지션들은 그 열정적인 무대 매너를 존경의 요인으로 뽑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라이브 에이드 공연은 그 임팩트 때문에 대형 공연의 교과서처럼 여러 뮤지션들에게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고, 커트 코베인은 유서에서 자신은 프레디 머큐리처럼 음악과 공연을 즐길 수 없다며 한탄 비슷하게 적어 놓기도 하였다. 퀸에 뒤늦게 빠진 팬들은 무대에서 마치 거인과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낄 수 있다.
프레디 머큐리는 최고 수준의 작곡가다. 특히 대중적인 멜로디 메이킹(편곡을 제외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락계에서는 폴 메카트니-존 레논을 제외하면 적수를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다. 비틀즈를 제외하고 락계에서 프레디 머큐리만큼 대중적이며 작품성 있는 선율들을 무수히 뽑아낸 사람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대중음악 전반을 놓고 보면 아바, 엘튼 존 정도가 대등하게 비교될 수 있다.
퀸 결성 때부터 브라이언 메이와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했으며, <Bohemian Rhapsody>나 <Don't Stop Me Now>,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 <We Are The Champions>, <Somebody to Love>, <Killer Queen> 등 퀸의 수많은 대표곡들이 프레디의 작품이다. 위 노래들은 2018년 한국에서도 아직까지 광고 음악이나 예능 프로그램 배경 음악으로 잘 쓰이고 있다. 노래 제목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은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한 음악 최소 한두 곡은 알고 있을 정도. 음만 들려주면 "아~ 그거~" 하면서.
다양한 장르의 시도 및 혼합이 송라이터로서의 프레디 머큐리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로, 퀸 초창기(1, 2집)에는 보통 알려진 퀸과 프레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헤비락 작곡에 치중했고, 그 이후 각종 발라드를 통해 피아노 발라드 스페셜리스트로도 자리매김했다. 그 외에도 프로그레시브 락, 가스펠, 팝, 디스코, 로커빌리, 오페라 등 다양한 음악을 시도했다. 디스코 쪽은 기존의 퀸 스타일과는 거리가 있었던 <Hot Space>나 본인의 솔로앨범(<Mr. Bad Guy>)에서 두드러진다.
대중적이고 기억하기 쉬운 멜로디를 뽑아내는 솜씨 또한 아주 일품이며, 그러면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대중음악에 비해 특이한 전개, 수 차례의 조바꿈 등 복잡한 구성을 음악에 녹여내곤 했다(대표적으로 Bohemian Rhapsody, Bicycle Race와 Queen II에 수록된 곡들). 반면 그 자신은 악보를 거의 볼 줄 모른다고 말했다. 퀸 멤버 및 관계자들의 말에 의하면 프레디는 자신이 만든 곡을 일반적인 악보 형식이 아닌 그만이 알아볼 수 있을 법한 이상한 기호로 종이 여러 장에 적어 스튜디오에 가져왔다고. 대부분의 노래는 피아노로 작곡했는데, 작곡하는 것도 좀 특이한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오랫동안 피아노 앞에 앉아 머리를 싸매거나 고뇌하는 게 아니라, 멜로디가 떠오르면 녹음하지 않고 머릿속에 넣어둔 후 나중에도 그 선율이 남아있으면 그제야 녹음하고 작곡을 시작한다고. 선율이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는 건 그 선율이 허접해서 기억할 가치가 없어서라고(...).
작곡가로선 70년대 중후반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80년대엔 밤놀이에 빠져서 음악 작업에 매우 소홀해졌고, 게이클럽의 음악에 영향받은 가벼운 댄스음악으로 일관하다 보니 70년대 곡들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하지만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80년대 후반기부터 다시 창작열을 불태워 <Barcelona>나 <Innuendo> 같은 명곡들을 써낸 거 보면 마지막까지 재능은 어디 가지 않은 모양.
본인이 작곡을 하고 나서도 로저나 존이 작곡을 할 때면 으레 곁에서 기꺼이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다만 브라이언은 본인만의 확고한 작곡과 연관된 신념(?)과 방식이 있어서 프레디의 도움이 굳이 필요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서로 같이 의견을 통일시키려고 하다 보면 꼭 싸움이 터졌다고(...)
6.4. 연주자로서
퀸에서 리드보컬 포지션 외에 피아니스트로도 활약했는데, 정확한 리듬감이 그의 연주에서 보여지는 차별적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브라이언 메이에 따르면 프레디 머큐리가 작곡 후 녹음을 할 때 피아노 연주를 처음 깔고 시작하는데 메트로놈도 없이 그냥 자기 맘대로 한큐에 녹음하는데 그 박자가 메트로놈을 놓고 친 듯이 한 치도 틀리지 않고 정확해서 마치 드러머가 피아노를 치는 듯했다고 설명하였다.
건반악기로 신디사이저를 주로 활용하는 락밴드에서 그랜드 피아노는 그다지 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의 사운드를 선호해서 스타인웨이앤드선스를 스튜디오나 공연에서 활용했다. 존 디콘이 You're My Best Friend를 작곡했을 때 프레디에게 일렉트릭 피아노의 연주를 부탁했지만 프레디는 그랜드 피아노 놔두고 왜 그런 악기를 쓰냐고 거절해서 결국 디콘이 직접 연주해 녹음하기도 했다.
하지만 머큐리 본인은 스스로의 연주 실력은 그다지 맘에 들어하지 않았고 때문에 80년대 들어서부턴 본인이 직접 연주하는 대신 프레드 멘델, 마이크 모란과 같은 세션 뮤지션들을 적극 활용하게 되었다. 또한 후기 라이브에서도 피아노에 앉아있는 대신 무대를 돌아다니며 관객을 이끌어가는 방침을 택함에 따라 공연에서의 건반 연주도 라이브 한정 세션맨이었던 스파이크 에드니에게 거의 떠넘겨지다시피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