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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올림픽이 끝이 났습니다. 원래 올림픽이나 월드컵같은 큰 경기를 이웃나라에서 하면 주변의 나라들은 부러워하기도 하며 동일한 대륙에 속한 이웃나라의 발전에 대해 축하를 해주기도 하는 것이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그렇지 않은 듯 합니다. 일본에서 큰 국제대회가 열린다고 부러워하거나 축하해주는 것이 마음부터 우러나기 힘이 듭니다. 그런데 특히 이번 올림픽에서 일본이 홍보하면서 했던 많은 일들로 인해 오히려 한국에서는 보이콧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로 도쿄올림픽에 대해선 부정적이었습니다.
일본정부는 이번 도쿄올림픽에 대해 정치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일본제국주의를 자랑하고 각종 홍보자료를 통해 주변국과 영유권분쟁을 일으키고 자국영토로 임의로 편입시켰습니다. 일본민족의 우월성을 자랑하고 제 2차 세계대전때의 군국주의를 부활시키고 제국주의 향수를 일으키는 많은 행사를 가졌습니다. 이런 무례한 행동에 대해 항의하며 한국정부는 일본정부와 꼬여있는 한일간의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일 정상회담을 추진했지만 오히려 주한 일본대사관 총괄공사가 입에 담지못할 망언을 하면서 이런 시도마저도 무산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일본은 틈만나면 일본이 한국의 문화와 역사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며 한국민족은 일본인의 지배대상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틈만나면 대륙침략에 대한 야욕을 드러내고 고대한반도에 일본의 행정관청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며 한반도를 지배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정설은 오히려 한반도의 삼국시대 국가들이 일본에 문명을 전하고 백제의 유민이 일본열도의 지배층으로 넘어갔던 역사를 기정사실로 학계에서는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에 수치심을 가지는 일본이 오히려 고대한반도를 지배했다고 말도 안되는 거짓주장을 역사적 사실로 주장하고 초중고등학교 역사교육에 사용하고 있으니 정말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또한 지금의 일본정부는 자신들이 원하면 지금도 침략전쟁을 일으킬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수정헌법에는 침략전쟁이 있으면 방어전쟁은 가능하지만 먼저 침략하면 세계 모든 나라가 일본의 침략을 인정하지 않도록 정해놓고 있는데 이것을 다시 재개정하여 침략전쟁을 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이러니 주변국으로서 한국은 일본이 정말 가까이 하기 너무 먼 나라입니다. 물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이웃이지만 심적으로는 도무지 가까이 할 수 없는 민족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과 유대종교의 지도자들이 이런 관계였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는 유대종교의 입장에서는 신성모독과 가르침의 배반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 참다운 삶을 원한다면 자신들이 잘못 가르쳤고 편견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해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인정해야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당시 예수님을 찾을 수 없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민족과 종교적인 가치관을 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되었는 지 살펴보고 우리 또한 정말 우리의 참된 인생을 찾기 위해 예수님을 어떻게 가까이 할 수 있는 지 깨닫고 변화되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첫째, 자신의 모든 권위를 내려놓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5장 22절입니다.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예수님께서 거라사지역의 사역을 끝내시고 배를 타시고 다시 갈릴리호수 건너편으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이 구절과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9장과 누가복음 8장을 통해서 살펴보면 이 지역은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시고 중풍병자들도 많이 고치신 후에 잠시 거라사지역을 갔다 오자고 하셔서 거라사지역을 들르셨다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부두에 모였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5장 21절을 보니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이거늘 이에 바닷가에 계시더니”라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려든 중에 함께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에게 자신의 사정을 살펴달라고 요구하는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유대교의 권위는 분명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과 대제사장에게 최고의 권위가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각 지역마다 회당이 존재하고 절기가 아닌 평소 매 주 안식일에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낭독되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시간이 진행됩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에서 주민들에게 종교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의 최고 권위자는 바로 회당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소한 이 가버나움지역에서 사람들에게 권위를 나타내고 자신이 최고라고 말할만한 권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특히 종교가 중심인 이스라엘 사회에서 사람들에게 더 말발이 먹히고 더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권력을 가지고 권위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들은 자기 권위를 주장하고 욕심을 나타냅니다.
마가복음 12장을 보면 포도원 주인이 농부들에게 포도농장을 세로 주고 타국에 나가서 살았습니다. 소출 이익을 세로 받으려고 종을 보냈는데 포도농장을 방문한 종들이 모두 매를 맞기도 하고 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주인은 농부들이 종들에게 이렇게 한 이유는 종들이 주인의 권한을 잘 행사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들이면 상속자이니까 주인의 대리인이라고 생각하고 제대로 세금을 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아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주인의 아들마저 죽이며 세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원래 주인이 있는 땅에서 임대하여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이 마치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욕심부리며 주인을 멸시하고 주인의 아들까지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단절되어 하나님의 소유를 자신의 소유인양 악한 일들을 자행하고, 빼앗고자 하는 인간의 죄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가 주인행세를 하려고 합니다. 유대종교의 지도자들도 하나님이 주인이신 것을 기억하며 자신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따라야할 것을 알아야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기가 마치 종교의 권위자로 생각하고 모든 하나님의 뜻은 자기들이 결정한다고 생각하기에 자신들 또한 하나님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이기에 죄인이고 실수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자신들이 하나님앞에 나와야할 일이 생겨도 하나님앞에 나오지 않고 하나님앞에 무릎을 꿇어야할 일이 생겨도 겸손히 무릎을 꿇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이라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아야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8장 11,12절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하나님앞에 세리나 바리새인이나 모두 죄를 짓고 살아가는 사람인데 세리는 죄를 고백하며 무릎을 꿇는데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롭게 살아가는 것을 자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니 얼마나 하나님보시기에 답답한 인간이겠습니까?
예수님 당시의 대부분의 회당장도 그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고 사람들앞에서 자신의 종교적 의를 자랑하며 멋진 삶을 살아가고 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는 일명 쇼윈도 신앙인이었습니다. 의식적인 종교행위를 하며 사람들에게 절대 참다운 겸손을 보여주지 않는 가식적인 모습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는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종교를 대표하는 권위를 가진 종교지도자라고 할지라도 나도 하나님앞에서는 은혜받을 하나님의 종임을 인정하는 것이 바른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위치의 사람이라도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와 무릎꿇고 은혜를 갈망하기를 원하십니다.
여호수아 5장 15절입니다.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 권위가 어떻든, 내 존재가치가 어떻든, 내 지식이 어떻든, 나의 재력이 어떻든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와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올 수 있었던 이유, 회당장이 예수님의 발앞에 엎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든, 자신의 직책이 어떤 위치이든, 자신이 내세울만한 인간적인 자랑거리가 뭐가 있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앞에서 자신은 회개할 존재, 은혜받을 존재, 변화되어야할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의 어떤 가진 것을 볼 때는 하나님앞에 제대로 은혜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제대로 간구할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모든 권위와 인간적 자랑거리를 내려놓고 우리 주님을 찾아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기를 기대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 둘째, 큰 어려움의 해결자는 오로지 예수님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5장 23절입니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명예와 권력,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하지 않고 예수님을 찾아와 발앞에 엎드렸습니다. 왜 그가 이렇게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릎을 꿇고 엎드렸을까? 그 이유가 지금 방금 읽은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온 이유는 바로 야이로의 딸이 죽을 형편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생기면 당연히 해결책을 찾아야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지금 우리가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이 생겼는데도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해결해주겠지’, ‘이 상황은 시간이 지나면 다 해결되는 일이야’라고 느긋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하지만 진정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습니다. ‘예방약을 만들어서 해결하려는 사람’, ‘치료제를 찾아내어 전염된 사람들을 치료하는 것을 통해 해결하려는 사람’, ‘코로나로 인해 생겨난 여러 가지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적 해결책을 찾아보는 사람’, ‘교회에서도 방역대책을 세우는 사람’, 어떻게 하면 ‘방역수칙에 맞게 예배를 해보려고 하는 사람’ 등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마 오늘 본문에서 문제를 만난 회당장 야이로도 죽음의 위기까지 몰린 딸을 위해 이런 저런 해결책을 찾아서 동분서주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이런 노력을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을 깨닫고 찾아온 것이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앞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겪고 있는 문제들속에서 우리는 혹여나 이 회당장 야이로처럼 이것저것 다 해보고 안되겠다 싶어 예수님을 찾지는 않으십니까? 물론 그 때라도 하다하다 안되어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는 것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이런 저런 헛된 수고가 되지 않고 제일 먼저 예수님을 찾았으면 얼마나 예수님께서 기뻐하실까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앞에 감사와 기도라고 생각하며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찾았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칭찬하실까요?
시편 27편 7,8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아모스 5장 4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소아시아 쪽으로 선교하려고 시도하는데 이상하게 자꾸 길이 막힙니다. 성경에는 ‘예수의 영이 허락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꾸 일이 안 풀리고 시도하려는 계획들이 막히고 상황이 잘 열려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성경에서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습니까? 원래의 사도 바울의 성격같았으면 “안될 일이 뭐냐? 그냥 하면 되는 거지.. 계획대로 무조건 시도하고 될 때까지 해야되는거지”라고 했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아시아쪽 전도의 길을 열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혹은 “해도 안 되네 전도여행을 포기해야겠네” “돌아가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믿음으로 살아가며 항상 하나님의 뜻을 갈망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시아로 가기 위한 방법을 자꾸 찾기 이전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물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어느 쪽으로 갈까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곳으로 갈께요’라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기도하던 어느 날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였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 하나가 ‘와서 도우라’고 요청하는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인 줄 알고 마케도니아로 전도의 방향을 틀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바울 자기 계획,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물었고,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나아갈 길입니다.
야고보서 1장 6~8절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야고보사도는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내가 생각해보고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께서 분명히 하신 말씀인데 그 말씀을 의심하며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의뢰하고 하나님앞에 우리의 삶을 맡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세상적 가치관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바르지 못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정함이 없는 인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힘든 일을 겪을 때 우리는 우리의 노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고 우리의 모든 상황을 해결해주실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우리 성령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기보다 우리 하나님앞에 찾아와서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는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완전한 해결자되시는 주님앞에 찾아와 문제해결의 열쇠를 찾는 저와 여러분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 셋째, 예수님께서 함께 해주실 때 기꺼이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마가복음 5장 24절입니다.
“이에 그와 함께 가실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회당장 야이로가 자신의 모든 기득권과 사람들의 의식을 고려하지 않고 해결자되시는 예수님이 마을에 계시기에 예수님을 찾아가서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낮아지는 자세를 보여줄 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소원을 듣고 야이로의 집으로 발걸음을 향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시고 함께 하시려고 야이로에게 손을 내미셨다는 말씀이죠.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실 때 역사가 나타난다는 것이고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다는 말씀입니다.
나이지리아 칼라브르에서 큰 선교의 결실을 얻고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선교사중 한 명으로 알려졌던 ‘메리 미첼 슬레서’라는 선교사가 질병에 걸려 고국으로 돌아와 생사의 위기를 이겨내고 8년 여만에 다시 역경의 선교 현장으로 복귀했습니다. 그녀가 다시 나이지라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현지인들과 그곳에서 같이 선교하던 동료들에겐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종일 선교사 사택은 시장과 같이 사람들로 들끓었다고 합니다. 가까운 지역부터 아주 먼 지역까지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찾아왔습니다. 너무나 많은 방문객으로 인해 식사까지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 방문객들에게 슬레서 선교사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당신에게 주십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면 당신에게 빵을 주실 것이고 물을 주실 것입니다. 복종은 건강을 가져다 줍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함께 끝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열매와 우리의 삶에서의 역사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함께 해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안에 거하는 삶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4,5절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4장 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경을 여러 나라의 말로 바꿀 때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중 하나가 ‘보혜사’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파라클레토스’가 한국어로 ‘보혜사’인데 이 단어의 뜻은 너무나 풍부합니다. ‘안위하다’ ‘훈계하다’ ‘권고하다’ ‘격려하다’ ‘도와주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 ‘파라클레토스’는 정말 어떤 단어로 번역해야할지 어려움을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남부 필리핀 쫄로아노 모로부족이 쓰는 성경에는 “계속하여 옆에 서서 같이 가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고 중앙 멕시코의 오토미 인디언이 쓰는 성경에는 ‘보혜사’를 “우리 영혼에 따스함을 주시는 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이보리코스트에 사는 빠울리부족은 ‘보혜사’를 “생각을 꽉 동여매시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성령이야말로 신자와 항상 같이하시는 동반자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참다운 ‘보혜사’이고 성령님은 또 다른 ‘보혜사’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는 먼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열매를 맺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의 생각을 지켜주시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에게 참된 평안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아모스 5장 14절입니다.
“너희는 살려면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회당장 야이로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 혼자 신앙생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하지 말고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열매맺는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고 ‘주님이 함께 할 때 신앙의 열매를 맺고 주님과 동행할 때 우리가 가장 잘되는 길이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신앙의 마음을 다시 세워야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기 위해서 내려놓아야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권위, 우리의 자랑거리, 우리의 지식, 우리의 명예, 사람들에게 내세울만한 것을 생각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신앙생활하는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 내가 해결하려는 마음보다 모든 문제의 해결자되어주시는 예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을 붙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우리의 문제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문제를 풀어나가실 때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함께 가야합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문제가 풀려지고 예수님과 동행하면 평안이 넘치고 예수님과 동행하면 은혜가운데 담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과연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님과 가까이 지내며 예수님이 가시는 곳을 함께 가는 사람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말 주님과 함께 하며 은혜가 충만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