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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랑
(2월 8일 안식일 / 일몰: 오후 6시 3분)
연구 범위: 시 33:5, 시 85:10, 신 32:4, 약 1:17, 딛 1:2, 출 32:14, 마 5:43-48
기억절: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4).
고대 근동에서 열방의 '신들'은 변덕스럽고 부도덕하며 예측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아동 인신제사 같은 잔혹한 행위를 명령했다. 그런 모든 패역한 명령을 따르더라도 은총이 보장되지 않기에 사람들은 감히 자기 부족의 “신들”을 거스르지 못했다.
신명기 32:17에 따르면, 그러한 “신들” 뒤에는 “마귀”가 있었다(고전 10:20, 21 참조). 그들의 숭배 형태는 착취당하기 쉬웠고 사람들은 심각한 영적, 도덕적 어두움 가운데 있었다.
성경의 하나님은 단순히 마귀의 무리보다 조금 더 나은 그런 신이 아니다. 여호와는 지극히 선하시고 그분의 선하심은 변함이 없다. 그분의 변함없는 선하심 때문에 우리는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소망을 가질 수 있다.
고대 세계의 거짓 신들, 심지어 오늘날 현대의 신들과 극명히 대조적으로 여호와는 악, 고통, 불의, 억압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여호와는 이 모든 것을 지속적이고 분명하게 정죄하시며 그날이 이르면 그분께서 이 모든 것을 근절하실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학습 목표
깨닫기: 하나님은 원수마저 사랑하시지만 공의를 어기지 않으시며 사랑을 이루신다.
느끼기: 하나님이 돌이키시는 것은 인간에 대한 사랑 때문이며 그 사랑은 변함없다.
행하기: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굳게 잡고 세상에서 그분의 사랑과 정의를 따른다.
TMI 위로
2. 사랑의 하나님과 심판의 하나님은 다른 면이 있다고 생각합니까?(렘 9:24)
*답: 똑같다. 심판은 사랑을 올바르게 드러내는 방법(수단)이다.
3. 전능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을 어떤 방식으로 행사하십니까?(습 3:5)
*답: “그 중에 거하신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간단없이 자기의 공의를 나타내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습3:5).
4.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까? 그 말씀은 어떤 의미입니까?(말 3:6)
*답: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이 변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5. 하나님께서 후회하십니까? 그분이 후회하신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민 23:19)
*답: 후회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다는 뜻이다. 본질적으로 후회하지 않으신다.
6. 원수마저 사랑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까?(호 12:6)
*답: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지니라”(호12:6).
7. 우리가 하나님을 무섭고 노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게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답: 자기의 허물 때문이다.
결론: 하나님은 악과 연관이 없으시며, 온전히 선하시고 정의를 사랑하시기에 불의와 악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신다. 그분은 원수마저 사랑하시지만 공의를 어기지 않으시고 세상에서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며 요구하신다. 그분은 인간과의 관계에 따라 말씀을 돌이키시지만 이는 오직 사랑이며 자비하신 그분의 성품 때문이다. 그의 사랑과 공의는 언제나 변함없으며 오직 공의와 사랑으로 권능을 행하신다.
2월 2일(일) 사랑과 공의
성경 전체에서 사랑과 공의는 함께 나타난다. 진정한 사랑은 공의를 요구하며, 진정한 공의는 사랑을 통해서 다스리고 실현된다. 우리는 이 두 개념을 연결지어 생각하는 데 익숙하지 않지만, 그것은 사랑과 공의가 사람에 의해 크게 왜곡되었기 때문일 뿐이다.
시편 33:5, 이사야 61:8, 예레미야 9:24, 시편 85:10, 시편 89:14를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공의를 어떻게 생각하신다고 말하고 있는가?
[시33:5] 그는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심이여 세상에는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충만하도다.
[사61:8]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렘9: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시89:14] 의와 공의가 주의 보좌의 기초라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 앞에 있나이다.
*답: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하신다. 사랑과 공의가 하나님께 공존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공의를 사랑하신다고 분명하게 선언한다(시 33:5, 사 61:8). 성경에서 사랑과 공의의 개념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는 함께 가며,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의와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하신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불의한 법, 속이는 저울, 가난한 자와 과부 또는 약자에 대한 불의와 압제 등 모든 종류의 불의를 일관되게 비난한다. 사람은 많은 악과 불의를 행하지만, 하나님은 끊임없이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렘 9:24) 분이시다. 따라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자와 압제하는 자를 벌하고 불의와 압제로 신음하는 자에게 정의와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심판을 매우 좋은 일로 열렬히 기대한다.
실제로 의와 정의는 하나님 나라의 기초이다. 반듯한 하나님의 사랑의 정부는 정의롭고 의로우며, 개인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불의를 빈번히 저지르는 이 세상의 부패한 정부와 전혀 다르다. 하나님 안에서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시 85:10)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면,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정의와 자비가 그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훈> 진정한 사랑은 공의를 요구하며, 공의는 사랑을 통해서 다스리고 실현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원하시며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공의는 십자가에서 고통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때 강하게 인식된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실현되고 사랑은 우주에 들어난 것으로 이해하면 잘 못된 것일까?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 안에서 용서하고 구원하는 사랑으로 실천되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는 것을 지극히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고 그 사랑이 이루어지면 공의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분리하려고 할 때 사탄의 올무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이해가 되면 하나님은 두려운 존재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 스스로 의롭게 되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된다고 계시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사랑과 공의가 함께 이루어진 사실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영감의 교훈> 공의에 나타나는 사랑 -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자비에 못지않게 공의에도 표현되어 있다. 공의는 그분의, 보좌의 초석이며 그분의 사랑의 열매이다. 진리와 공의로부터 자비를 분리시키려는 것이 사탄의 목적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율법의 의가 평화의 적이 된다는 것을 밝혀 보려고 애써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는 이것들이 서로 분리될 수 없도록 단단히 결합되어 있으므로 전자는 후자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셨다”(시대의 소망, 762).
<기도> 하나님, 저희는 죄인이기에 이기적으로 사랑하면서도 사랑하고 있노라고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참사랑을 저희 마음에 부어 주셔서 마음이 새롭게 되도록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의 공의를 사랑하며, 세상에 나타낼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2월 3일(월) 전적으로 선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말로만 공의를 사랑하신다는 주장하며 사람에게 정의를 사랑하고 행하라고 요청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온전하게, 주저함 없이 그 특성을 실천하신다. 성경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거룩하시고, 신실하시며, 의로우시고, 사랑이시라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언제나 오직 사랑, 의로움, 공의를 행하신다. 그분은 결코 어떤 잘못도 행하지 않으신다.
신명기 32:4과 시편 92:15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시32:4]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시92:15] 여호와의 정직하심과 나의 바위 되심과 그에게는 불의가 없음이 선포되리로다.
*답: 사람이 자기의 허물을 고백하여 고치도록 누르시고 하나님 자신은 불의가 없고 정직하시다.
“그분 안에는 불의가 전혀 없”(시 92:15, 시 25:8, 시 129:4 비교, 흠정역)으며 하나님은 의롭고 사랑으로 가득하시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시고 아침마다 빠짐없이 자기의 공의를 비추시거늘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습 3:5)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과 불의를 사랑하는 자의 성품을 직접 대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유익을 바라시며, 모든 이에게 최상의 결과를 주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신다.
시편 9:7, 8과 시편 145:9-17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시9:7,8] 여호와께서 영원히 앉으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 8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결을 내리시리로다.
[시145:9~17]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10 여호와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성도들이 주를 송축하리이다 11 그들이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업적을 일러서 12 주의 업적과 주의 나라의 위엄 있는 영광을 인생들에게 알게 하리이다 13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5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17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답: 하나님은 공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시고 피조물들에게 필요를 항상 공급하신다.
성경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시 7:11)이시며, 악은 그분과 함께 하지 못한다(시 5:4). 요한일서 1:5이 가르치는 것처럼, “하나님은 빛이시며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현대어)다. 실제로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약 1:13, 합 1:13 비교)하신다.
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많은 신이 그들의 힘을 따르고 숭배하게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면서도 오직 공의와 사랑으로만 당신의 권능을 행사하신다. 모세가 하나님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여 달라고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출 33:18, 19)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교훈> 하나님은 온전히 선하시고 의로우시며 악과 연관이 없다. 세상 신은 그들의 힘을 따르고 숭배하게 하지만, 그분은 오직 공의와 사랑으로 권능을 행사하신다.
<부가설명> 성경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선악 간의 대쟁투를 중심으로 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책이다. 문제는 선악에 대한 사람의 이해가 문제다. 사람은 선악이라고 할 때 어김없이 도덕적 상태로 달려간다. 윤리적인 문제, 사회법적인 문제 등등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선악관은 인간의 도덕성에 달려있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존재성에 달려있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막3:4). 이 구절은 예수님의 선악관 초점이 어디 있는지 나타나 있다. 선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 악을 행하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이 말하는 선의 초점은 생명이 있는 것이고 악은 생명이 없는 것이다. 세상은 악한 세대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다. 사탄이 세상을 다스린다(눅4:5,6). 사탄은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이다(히2:14).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해골이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셨다. 그것이 이 세상을 보는 하나님의 눈이다. 생명과 사랑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심히 마른 해골들을(겔37:2) 살리려고 하신다. 아직 은혜의 기회가 있을 때 이 사랑을 받아들이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면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공의다.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러면 살아난다(요5:25). 듣지 않고 살아나지 않으면 그냥 마른 뼈 상태로 남아 있으니 그것을 처리하기 위하여 불태울 수밖에 없다. 그것이 불 못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이 사랑과 공의이다. 아멘.
<영감의 교훈> 의롭고 선한 율법 -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율법에 구현되어있는 의의 큰 원칙이 사람에게 알려진다.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며, 완전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나타내므로 그 율법에 순종할 때 이루어지는 품성도 거룩하여진다. 그리스도는 그런 품성의 완전한 모본이다. 그분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요 15:10, 8:29)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그분과 같이 되어야 한다”(각 시대의 대쟁투, 469).
<기도> 온전히 선하신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영광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악과 허물이 많은 죄인이 잘못을 주님 앞에 겸손히 고백하며 간구하오니 부족한 종일지라도 주님의 영광과 선한 길로 인도해 주옵소서.
2월 4일(화) 변함없으신 하나님
말라기 3:6과 야고보서 1:17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
[말3: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약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답: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말 3:6)라고 선언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읽고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든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 구절의 전후 문맥을 보면 여기서 하나님께서 변함없다고 확증하신 것은 당신의 변함없는 성품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절의 뒷부분은 하나님이 관계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말한다.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그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 3:7)라고 선포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과 상호적인 관계 가운데 있지만, 그러한 모든 상호작용과 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은 변함없으시다. 야고보도 이에 대해 모든 선하고 온전한 선물이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약 1:17)고 확인한다. 악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이 외의 여러 구절에서도 성경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을 반복해서 가르친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변하지 않으심을 일관되게 가르친다. 동시에 하나님은 당신의 피조물과 친밀하고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실제로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되 항상 사랑과 공의로 대하신다.
디모데후서 2:13, 디도서 1:2, 히브리서 6:17, 18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딛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히6:17,18]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을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18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자신을 부인할 수 없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약속은 깨질 수 없다.
*답: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시는 신실한(미쁜) 분이시다.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기꺼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의심 없이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미래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가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
<교훈> 하나님이 변함없다는 것은 그분의 성품이 변함없음을 말하며 관계적으로는 변하기도 한다. 그분은 항상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기에 언제나 신뢰할 수 있다.
<부가설명> 하나님은 주위와 환경에 따라서 사랑이 아니거나 공의를 굽히거나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변함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과 성품이 변함없다는 말이다. 그런 하나님을 인간이 자기 생각으로 해석하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일을 저지를 때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공의가 그들에게 징책으로 나타난다. 그 징책도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에게서 얼굴을 숨기신다. 그러면 그에게 재앙이 닥친다. 그 재앙은 스스로 청한 것이지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 아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이 없으면 그대로 사망의 세력잡은 자가 그 권세를 휘두를 것이므로 안전할 존재가 없다. 이렇게 보호하시는 손길을 은혜라고 표현한다. 이 손길을 거둘 때가 온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는 보호의 손길을 거두었다. 그때 불 뱀이 그들을 물었다(민21:4~9). 우리가 이 사망의 세상에 아직도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변하지 않았게 때문이다. 끝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불평으로 은혜의 손길을 거절하는 삶을 살지 않아야 할 것이다.
<영감의 교훈> 영원한 본성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 그분의 본성과 그분의 율법은 사랑이다. 이것은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미래에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의 행하심이 예로부터 그러’하시며,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시는 분은 변치 않으신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합 3:6; 사 57:15; 약 1:17). 창조력의 현현 하나하나는 모두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다. 하나님의 통치권에는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완전한 축복이 포함되어 있다”(부조와 선지자, 33).
<기도> 모든 것이 바뀌는 시간 속에서도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이 세상의 사랑과 관계, 그 모든 것이 유한하지만 언제나 우리를 향하신 사랑과 공의에 감사합니다. 변하는 세상 속에서 주님을 굳게 의지하오니 믿음을 붙잡아 주옵소서.
2월 5일(수)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시다니
하나님이 뉘우치실 수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이 결코 변하지 않음을 보았다. 그러나 어떤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뉘우치”거나 “후회”하신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있어서 뉘우침은 자신이 무언가 잘못했음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뉘우치”신다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출애굽기 32:14을 읽고 예레미야 18:4-10과 비교해 보라. 하나님이 “돌이키”신다는 표현은 어떤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출32: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렘18:4~10]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답: 회개할 때 그들에게 숨긴 얼굴을 다시 그들에게 돌려 은혜를 베푸신다는 뜻.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은 사람의 회개나 중보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심판을 돌이키시는 분으로 묘사된다. 하나님은 사람이 악에서 돌이키면 당신이 계획하신 심판을 돌이키겠다고 약속하신다. 인간의 회개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지 않는 것은 성경 전반에 등장하는 익숙한 주제이다.
민수기 23:19과 사무엘상 15:29을 읽어 보라. 이 구절은 하나님이 “후회하”시거나 “돌이키”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민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삼상15:29]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답: 하나님은 정의와 사랑을 돌이키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그들에게 얼굴을 숨기시던 것을 돌이키신다. 그것이 바로 정의와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삼상 15:29)으시며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결코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의미가 아니며 다른 구절과 전후 맥락을 살피며 읽으면, 이 말씀은 하나님의 “후회”나 “돌이키심”은 사람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진리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은 항상 약속을 지키시며, 인간의 회개에 대한 응답으로 행사를 바꾸실 때는 항상 당신의 선하심과 말씀을 따라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이 회개에 대한 응답으로 심판을 돌이키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 선하고 의로우며 사랑하시고 자비하시기 때문이다.
<교훈> 하나님은 사람 같이 돌이키거나 후회하지 않으신다. 사람이 회개할 때 그분이 심판을 돌이키시는 것은 당신의 말씀과 사랑하시고 자비하신 성품 때문이다.
<부가설명> 인생의 길은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셨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시37:23).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20:24). 이 말씀대로 사람이 가야 할 생명의 길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셨다. 위 두 구절은 이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생명 길을 걸어야 한다. 사람이 이 길을 걷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든지 이 길로 돌아오도록 사랑과 공의로 일하신다. 그것이 때로는 징계가 되고 고통이 된다. 그래도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얼굴을 숨기시고 돌보지 않으실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때가 지나기 전에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도 돌이키신다. 그리고 기뻐하신다. 하나님의 후회는 하나님이 정한 그 길을 사람이 떠날 때 안타까워하시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것을 후회하게 하지 말자.
<영감의 교훈>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 -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 같지 아니하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삼상 15:29). 인간의 후회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하고 하나님의 후회는 환경과 관계의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응함으로 하나님께 대한 관계를 변화시킬 수도 있고, 또 자신의 행위로써 자신을 은총 받을 수 없는 곳에 둘 수도 있다”(부조와 선지자, 630).
<기도> 돌아보면 후회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한 것은 서투른 걸음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으로 오늘 주님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간구하오니 부족한 종을 주님의 자비와 사랑 앞에 두시고, 영원한 소망으로 채워주옵소서.
2월 6일(목) 사랑과 정의를 굳게 붙잡고
성경은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의 언약을 이행하시며 인애를 베푸시”(신 7:9)는 분이라고 일관되게 가르친다. 그분의 선하심과 사랑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에 의해 가장 잘 나타났다(롬 3:25, 26, 롬 5:8 참조).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100:5, 시 89:2 비교). 하나님은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며, 그 자녀들에게 좋은 것만 선물로 주신다(약 1:17, 눅 11:11-13 비교). 사실, 그분은 자신을 대적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좋은 것으로 주신다.
마태복음 5:43-48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예수님의 이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마5:43~48]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답: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대우하시는 정신으로 다른 사람을 대우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5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한 사랑으로 묘사한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 심지어 당신을 대적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신다. 그분의 사랑은 완전하고, 따라서 완벽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는 인간의 어떤 합리적인 기대도 뛰어넘지만, 결코 정의를 무시하거나 어기지 않으며 오히려 사랑과 정의를 함께 가져온다(시 85:10). 성경도 이같이 우리에게 권고한다.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다른 번역본은 “사랑과 정의를 굳게 붙잡으”(호 12:6, ESV)라고 표현한다(눅 11:42 비교).
결국 하나님께서 완전한 정의를 이루실 것이다. 로마서 2:5은 말한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날 것이며 마침내 구속받은 자들이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계 15:3, 4, 계 19:1, 2 비교)라고 노래할 것이다.
<교훈> 하나님 사랑과 자비는 완전하며 어떤 합리적 기대도 훌쩍 뛰어넘어 원수마저도 사랑하지만, 정의를 무시하거나 어기지 않으며 사랑과 공의를 함께 가져온다.
<부가설명> 하나님의 사랑은 감성적인 것이 아니다. 원칙이다. 생명의 원칙이다.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그 생명의 본질이 사랑 자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때때로 냉정하다. 또 고통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랑인데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고통이 동반한다.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이다. 그것은 하나님 사랑의 고통이다. 그 사랑은 사탄의 꾀임에 잠깐 넘어간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하신 냉정함이다. 베드로가 많이 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베드로를 바른 길에 들어서게 하는 사랑과 공의가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을 말할 때 남녀의 사랑을 먼저 떠올리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모성애를 떠올릴 수도 있다. 남녀간의 사랑은 대단히 정서적일 수 있다. 모성애는 많은 고통이 동반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성애에 비겨서 표현하기도 했다(사49:15).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 엄청난 고통으로 나타낸 그 사랑 때문에 생명을 얻는 은총을 누리는 것이다. 오, 아버지여!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정부의 원칙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구주의 교훈과 완전히 일치된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유익을 위하여 또한 당신의 심판을 받는 대상의 유익을 위하여 악인에게 벌을 내리신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정부의 율법과 당신의 품성과 공의로움에 일치되게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의 증거들을 사람들 주위에 두르시고 당신의 율법을 깨닫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로 그들을 따라오게 하신다”(각 시대의 대쟁투, 541).
<기도> 자비하고 공의로운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과 구원되심을 감사합니다. 때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기도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손을 굳게 잡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저의 중심을 잡아주셔서 세상의 어떤 유혹도 흔들지 못하게 하옵소서.
2월 7일(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정로의 계단 1장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읽어 보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분의 성품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과 긍휼을 반포하셨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출 33:18)하고 기도하였을 때에 주께서 대답하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출 33:19)리라고 하셨다. 이것은 곧 주의 영광이다. 주께서 모세의 앞을 지나시며 반포하셨다.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출 34:6, 7). 그가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욘 4:2)신 것은 그가 ‘인애를 기뻐하’(미 7:18)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무수한 증거로써 우리의 마음을 당신에게 붙들어 매셨다. 천연계의 사물을 통하여 또는 사람이 그 마음으로 체험해 알 수 있는 그윽하고 부드러운 인간적 결연(結緣)을 통하여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려 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것도 그 사랑을 나타내기에는 충분치 못하다. 이러한 모든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善)의 대적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공포심으로 대하고 또 하나님을 가혹하고 용서하지 않는 이로 생각하게 되었다. 사탄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엄혹하게 처단하시는 자 - 엄격한 법관이나 각박하고 인색한 고리 대금업자 - 와 같은 분으로 생각하게 한다. 또한 사탄은 조물주는 사람들의 허물과 잘못을 찾아내어 저들에게 벌을 주려고 질투하는 눈으로 항상 주목하는 자처럼 보여준다. 예수께서 인류 가운데 거하시려고 오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이같은 어두움을 걷어 내기 위함이었다"(정로의 계단, 10).
함께하는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의 영광이 그분의 선하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품이 아닌, 순전히 권능만을 강조하는 영광의 신학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는가?
*답: 사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지 못하면 넘어지게 된다(롬11:22).
2. 당신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행동이나, 세상의 악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주변에서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그 질문을 어떻게 해결했으며,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문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는가? 다음 주 교과를 참조하라.
*답: 예수님을 잘 이해하도록 말씀을 증거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3. 선하신 하나님께서 왜 세상에 있는 수많은 악을 그대로 허용하시는지 생각해 보라. 대쟁투의 실체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악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답: 아담 안에서 그의 모든 후손이 죽은 자가 되어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옛사람인 것을 깨달으면 세상의 상태를 올바른 눈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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