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자주 잃어버리곤 하는 그녀지만 단 한 번도 저를 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스무 여남은 살의 풋풋한 그녀를 처음 만난 후 저는 오늘도 그녀와 함께 있습니다. 여러 번 강산이 바뀌었으나 저를 버리지 못하고 뚱뚱한 필통 한구석에 넣어 다니지요.
제가 한낱 한 뼘 정도의 보잘것없는 물건이긴 하지만 한때는 현생 육상동물 중 가장 몸집이 큰 육중한 동물의 한 부분에 속해 있었답니다. 저의 조상들은 큰 덩치에 힘이 세지만 약자들을 함부로 공격하진 않았지요. 지구상의 어느 동물이든 힘센 것으로 말하자면 수컷들이지요. 저의 모태는 암컷일 수도 있지만 대체로 수컷에서 생겨난 것이 튼튼하고 쓸모도 많다고 합니다. 쭈글쭈글한 거대한 몸피에 날개처럼 펄럭이는 귀,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기다란 코 양옆에 강력한 무기처럼 제가 떡하니 버티고 있었지요.
사실 본래 이름은 앞니인데 사람들은 저를‘상아’라고 부르더군요. 두 개의 상아색 엄니는 눈 부신 태양 아래 빛났고 불같은 기세로 광활한 대지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거대한 몸집에서 분리된 상아의 특성이 지나치게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 공예 소재로 많이 다루어진다고 해요. 이렇다 보니 밀렵꾼이 코끼리를 마구잡이로 죽여 예전에 비해 그 수가 엄청나게 줄어들었다고 해요. 코끼리도 살아남아야 할 터이니 상아 없이 성장하는 코끼리도 많다고 합니다. 인간으로부터 살아남을 본능의 대응책이겠지요.
커다란 코끼리 엄니에서 분리되어 나온 제가 언제 어떤 연유로 주인의 필통에 안착하게 되었는지는 저는 잘 모릅니다. 제 몸의 일부는 다양한 모습으로 어느 곳에선가 나름대로 기능을 하고 있을 거예요. 최고급 피아노 건반으로 자리매김한 시절엔 제 몸값이 상당했습니다. 지금쯤 어느 유명한 공연장에서 피아니스트의 유연한 손길에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고 있겠지요.
사람들은 저를 도장이라는 수단으로 많이 사용하더군요. 여러 종류의 문서에도 쓸모가 있어요. 사람들의 생김새가 다 다르듯 저의 모습도 크고 작고 길고 짧고 다양하답니다. 사람들이 제 친구들에게 붙여준 이름도 제각기 다르답니다. 자그만 서랍장 문을 한번 열어보아요. 세월 속에 묻혀 잊힌 도장 한두 개씩은 거기 있을 거예요. 어떤 것은 보잘것없이 낡아 있겠고 또 어떤 것은 쓰임새가 적어 새것인양 또렷하게 남아있겠지요. 기억하시지요. 제 친구의 얼굴에 새빨간 인주를 묻혀 생애 처음 장만한 집문서에‘우리 집’이라고 당당하게 쾅 찍던 날을요. 그러고는 서랍 깊숙이 꼭꼭 숨겨 두었을 거예요.
살면서 불도장 찍히는 일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게 주인님의 생각입니다. 도장을 쉬이 대하면 마음고생 하는 경우를 더러 보았습니다. 집을 사기도 하고, 집을 날리기도 해요. 부부간 마음에 흠이 생겨 헤어짐의 서류에 사정없이 콱 찍기도 한답니다. 증명서 발급이나 은행 관련 일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해결하는 요즘 젊은이들은 도장의 쓸모를 실감하지 못할 거예요.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는 징표지요. 디지털 세상에서 저의 존재 가치가 사라져 가지만, 여전히 회사나 관공서에서는 소중한 존재로 군림을 한답니다.
지금은 주인님 필통 안에서 조용히 있지만, 그녀가 직장에 다닐 때만 해도 상아 도장인 제가 대단한 힘을 발휘했습니다. 모든 문서와 전표에는 제가 찍혀야 했어요. 주인님이 일 처리를 했다는 증표의 증거이지요. 결제인, 사무인이라는 이름을 두고 하필이면 저에게 '마무인'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붙여 불렀던 이유는 한때 주인님 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은 잔재이지요. 사소한 일에는 저의 쓸모가 그리 없겠지만 그래도 큰일을 해결해야 할 일엔 여전히 제가 힘을 발휘한다는데 위안을 받지요. 존재의 쓸모가 아직은 남아있습니다.
청명한 가을 초입의 아침이었지요. 지인에게 보증을 서주고 한 푼어치의 돈도 만져보지 못한 억울한 고객이 깡 소주 세 병을 냅다 마시고 주인님이 일하는 곳에 불쑥 나타나 횡설수설 행패를 부렸지 뭡니까. 신문지엔 날카로운 도구를 숨기고서 말입니다. 몹쓸 무기를 든 온전치 못한 사람 앞에선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저의 주인도 만삭의 배를 감싸 안고서 몸을 숨겨야 했어요. 그때 주인님 뱃속에는 귀여운 아기가 숨을 할딱이고 있었지요. 그 와중에도 주인은 마치 아기를 지켜줄 화신처럼 저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답니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게 어디 있겠어요. 제가 소중한 생명을 지켜준 셈이지요.
쌩쌩할 줄만 알았던 주인님의 몸에 변화가 왔어요. 몸속 깊이 기생하던 몹쓸 덩어리는 잦은 현기증을 일으켰고, 아슬아슬한 나락에 이르러서야 싹둑 잘려나갔습니다. 다행한 일입니다. 건강을 잃게 되면 열정도 식는다는 걸 주인님도 알았겠지요. 직장을 퇴사하고 나오던 마지막 날, 그렇게 강해 보이던 주인이 상아 도장인 저를 손에 꼭 쥔 채 눈물을 글썽이며 문을 나서더군요.
한 뼘도 채 안 되는 보잘것없는 물건이 뭐 그리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저를 행운의 애장품으로 여기는 주인에겐 더없이 소중하답니다. 제가 그녀에겐 가장 오래된 애장품이고 첫 직장 때의 정을 잊지 못해 여태껏 소중히 여기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오래된 물건 하나에도 치유력이 있다잖아요. 그녀는 저를 부적처럼 간직하고 다닙니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땐 뽀얀 얼굴에 앳되고 상냥한 아가씨였지요. 요즘엔 좀 어리바리 하지만 오히려 수더분한 그녀를 좋아합니다.
나의 분신과 친구들은 이제 뿔뿔이 흩어져 더러는 어떤 부잣집 장롱 속 깊숙이 있을 것이고 또 어떤 분신은 저처럼 주인의 필통 속에서 자질구레한 필기도구들과 살을 맞대며 살아가기도 하지요. 필기도구와는 거리가 먼데 주인은 저를 정이라는 명분으로 복작대는 필통 속에 넣어 다닙니다.
그녀가 글을 쓰기 시작했답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겐 필기도구가 들어갈 필통이 필요하잖아요. 이런 까닭에 상아도장인 저는 필통 속에서 오랜 세월 그녀와 함께할 것입니다. 걸음마가 좀 느리더라도 마지막까지 기력을 다하라고 용기를 주겠습니다. 길이 막혔다고 툴툴대거나 서두르지 말고 거북이처럼 묵묵히 가라고 말입니다.
뚱뚱한 필통 한구석에 제가 있는 한 주인은 갓 입사한 그때의 초심을 잃지 않을 겁니다. 행운의 화신인 제가 묵묵히 그녀를 지켜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