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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을 읽었습니다.
이 책들을 읽으면서 '아~ 세상을 이렇게도 볼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철학은 세계관(世界觀)에 관한 학문이며, 세계관은 세계를 보는 관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철학에 대해 조금 더 알기위해 전 세계 젊은이들 여론조사에서 철학으로 가장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마르크스를 선택하고 책을 골랐습니다.
유물론과 자본론을 찾아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처럼 엄청난 분량이라 감히 엄두를 내지못하고 대화식으로 풀어쓴 임승수 선생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을 주문해서 읽었습니다.
학생과 선생님의 대화식 글이라 금방 읽히고 이해도 쉽습니다.
1강부터 12강까지를 읽으면서 나름 밑줄친 부분들을 포스팅했습니다.
들어가는 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세계관이란 세계를 보는 관점을 일컫는 단어입니다.
중세 서양 사람들은 기독교의 관점으로 세계를 보았습니다. 모든 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지요. 그러니 그림도 기독교 일색일 수밖에요. 십자군 전쟁도 하나님 뜻이고 마녀사냥도 하나님 뜻임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만사 오케이! 이것이 세계관, 즉 철학의 위력입니다.
현대 자본주의는 '돈' 중심 세계관이 대세입니다. 중세 서양에서는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가 중요했다면 지금은 돈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돈이 되면 좋은 일이고,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한 일이 되지요.
현대사회에 대해 '철학이 없다'고들 말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역사상 그 어떤 사회보다도 '돈'을 숭배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습니다.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숭배하던 사회가 그랬듯, 맹목적으로 '돈'을 숭배하는 사회가 과연 바람직할까요?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그 답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1강 첫 머리에 관점에 따라서 사건의 성격이 확연하게 바뀌는 극명한 사례. 콜럼버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만약 콜럼버스가 1492년에 중남미가 아닌 조선에 왔다면, 우리는 콜럼버스에게 '발견'된 건가요?
두 문명이 우연히 그 시기에 처음으로 만난 것일 뿐이지요.
'발견'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오만한 관점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두 문명의 만남은 중남미 선주민(先住民)에게는 재앙이었습니다.
첫 만남 이후 150년이 지나자 7,000~9,000만명의 인구가 350만명으로 급감했다고 합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중남미에서 히틀러의 나치 정권 정도로는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종청소'를 자행했지요.
콜럼버스는 그중에서도 단연히 악질적이었습니다. 선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귀금속을 채굴해오라고 하고, 책임량을 채우지 못하면 손목을 잘랐습니다. 반항하면 코와 귀를 자르고 개가 물어뜯도록 했다더군요.
콜럼버스가 '발견'한 아이티 섬에는 당시 30만 명의 선주민이 살았는데, 불과 몇 년 후에는 단 500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신대륙의 발견'이란, 중남미 선주민의 관점에서는 외세의 침략과 대학살이었던 거지요.
첫댓글 넘 소름 끼칩니다. 그 자손들은 조상의 악업을 알고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