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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이 아위아(爾爲爾 我爲我)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이다는 뜻으로, 너는 너의 할 바를 하라, 나는 나의 할 바를 한다. 너는 너 할대로 하고 나는 나 할대로 한다. 너의 태도가 어떠하든지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말이다. 상관하지 않음으로 뜻이 높은 사람은 세상 풍속에 의해 동요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爾 : 너 이(爻/10)
爲 : 하 위(爪/8)
爾 : 너 이(爻/10)
我 : 나 아(戈/3)
爲 : 하 위(爪/8)
我 : 나 아(戈/3)
출전 : 맹자(孟子)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편(上篇)
이 성어는 맹자(孟子)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편 맨 끝장에 나오데, 맹자가 백이(伯夷)와 유하혜(柳下惠)의 인품을 비교하는 가운데 나온 말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맹자(孟子)께서 말하였다. 백이(伯夷)는 그(자신)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으며, 그의 친구가 아니면 벗하지 않았다.
孟子曰; 伯夷非其君不事, 非其友不友.
악(惡)한 사람의 조정(朝庭)에 나가지 않았으며, 악한 사람과 더불어 말하지도 않았다. 악한 사람의 조정에 나아가(벼슬) 악한 사람과 더불어 말하는 것을 마치 조회하는 의관을 입고 진흙탕이나 숯 더미에 앉은 것같이 여겼다.
不立於惡人之朝, 不與惡人言. 立於惡人之朝, 與惡人言, 如以朝衣朝冠坐於涂炭.
악한 것을 미워하는 마음을 미루어 보건데, 시골 사람과 함께 있을 때에 그 사람의 관(冠)이 바르지 않으면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서, 마치 자기 몸을 더럽힐 것같이 생각하였다.
推惡惡之心, 思與鄉人立, 其冠不正, 望望然去之, 若將浼焉.
이러므로 제후(諸侯)에게서 비록 좋은 말로 쓴 초빙하는 글이 오더라도 받지 않았다.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이 또한 나아가서 벼슬하는 것을 떳떳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是故諸侯雖有善其辭命而至者, 不受也. 不受也者, 是亦不屑就已.
유하혜(柳下惠)는 미천한 임금한테 벼슬하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았으며, 미관말직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柳下惠不羞污君, 不卑小官.
나아가서 벼슬을 하면 자기의 재능을 숨기지 않고, 반드시 도리에 맞게 일하였다. 버림을 받아도 원망하지 아니하고, 곤궁하여도 고민하지 않았다.
進不隱賢, 必以其道. 遺佚而不怨, 厄窮而不憫.
그러므로 말하기를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비록 내 곁에서 어깨를 드러내고 몸을 드러낸들, 네가 어찌 나를 더럽히겠는가‘고 하였다. 그러므로 태연하게 그들과 함께 하면서도, 그 자신의 올바름을 잃지 않았다.
故曰; 爾為爾, 我為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
그는 조정을 떠나려 하다가도 끌어 머물러 있게 하면 머물러 있었다. 끌어 머물러 있게 하여 머물러 있는 것은 역시 물러나는 것을 좋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故由由然與之偕而不自失焉, 援而止之而止. 援而止之而止者, 是亦不屑去已.
맹자(孟子)께서 말씀하셨다. '백이(伯夷)는 좁고, 유하혜(柳下惠)는 삼가지하지 않는다(不恭). 좁은 것과 불공(不恭)을 군자(君子)가 행할 바가 아니다.'
孟子曰; 伯夷隘, 柳下惠不恭. 隘與不恭, 君子不由也.
이위이 아위아(爾爲爾 我爲我)
사람은 거의 모두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다. 비록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우긴다.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해도 그것은 남의 이목이 두렵거나 다수결에 의한 것이거나 법이 강제할 경우다. 그러니 속으로 승복할 리 없다.
너는 너이고(爾爲爾) 나는 나(我爲我)라는 성어는 너는 너 할대로 하고 나는 나 할대로 한다는 뜻이다. 너의 태도가 어떠하든지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라는 오불관언(吾不關焉), 아무리 너 자신을 알라고 성인이 가르쳐도 막무가내(莫無可奈)인 것을 가리킨다. 너 이(爾)는 너 여(汝)와 마찬가지로 이인칭 대명사다.
공자(孔子) 이후의 아성(亞聖)이라 일컬어지는 맹자(孟子)의 책 '맹자'에 나온다. 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편의 끝부분에 있는 내용을 보자.
노(魯)나라의 대부였던 유하혜(柳下惠)가 한 말로 되어 있다. 유하혜는 공자를 꾸짖었던 흉포한 도척(盜跖)의 형이지만 여자를 품고서도 흐트러지지 않았다는 좌회불란(坐懷不亂)의 주인공이다.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는 더러운 임금이라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사소한 관직이라도 낮게 생각지 않았다. 자기를 내버려도 원망하지 않았고, 곤궁한 상황에 처해도 근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아무리 내 옆에서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더라도 어떻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라 했다.
남이 무례한 태도를 짓더라도 상관하지 않았던 유하혜를 두고 뜻을 굽히고 몸을 욕되게 했지만 행동이 사려 깊었다며 공자는 높이 평가한다. 이에 비해 맹자는 화합은 인정하면서도 부도덕한 상황에 대한 대응엔 다소 박하게 평가한다.
이위이 아위아(爾爲爾 我爲我)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맹자와 닮은 꼴은 돈키호테?
춘추전국시대의 맹자와 닮은 인물을 서양문학에서 찾는다면 누구일까? 나는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의 주인공 돈키호테가 맹자와 꽤나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돈키호테'는 17세기경 스페인의 라만차 마을에 살던 한 시골 신사의 모험을 다룬 소설이다. 주인공인 돈키호테는 당시 유행하던 중세의 기사 이야기에 매혹되어 실제로 기사 수업을 하기 위해 모험을 결심한다. 애마 로시난테를 타고 시종인 산초와 함께 다니던 어느 날, 풍차를 보고 거인이라 여기고 산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돌격을 외친다. 풍차의 날개에 받쳐 공격에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풍차의 정체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이후 기사로 변신한 친구와 결투에서 패배한 뒤에서야 돈키호테는 비로소 무기를 내려놓고 이성을 되찾게 된다.
맹자는 전쟁으로 인해 살상이 만연하던 춘추전국시대에 성선(性善)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는 제자와 함께 주위의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철학과 정책을 알리고 성선의 세계를 일구고자 했다. 제후들의 거듭된 무관심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맹자는 자신의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는 현실에서 소외당할 때도 하늘과 성인(聖人)의 힘에 의지하면서 자신의 타당성을 굳게 믿었고, 다른 한편으로 아래로부터 혁명을 긍정하면서 현실 변혁의 가능성을 보았다.
돈키호테와 맹자의 공통점은 시대가 걸어가고 있는 방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데에 있다. 참의 세계가 저 어딘가에 있다고 분명히 믿고 있는 것이다. 또 두 사람은 여러 위기에 부딪치지만 자신의 오류와 실패를 시인하지 않는다. 현실이 주술과 마술에 걸려 있다고 보거나 현상의 사람이 소체(小體)의 욕망에 빠져 있다고 보았다.
너는 너, 나는 나 – 갈등을 이기는 방법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에서 돈키호테와 산초라는 두 인물을 통해 인간의 이상적인 측면과 현실적인 측면을 잘 포착하고 있다. 이 덕분에 '돈키호테'는 진정으로 인간을 그린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맹자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그는 '맹자'에서 대체(大體, 큰 몸)와 소체(小體, 작은 몸)를 통해서 사람이 도덕적 이상으로 향하는 측면과 감각적 쾌락으로 빠지는 측면을 잘 대비시키고 있다. 사실 맹자의 공로는 성선의 발견도 있지만, 대체와 소체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인간의 이중성의 설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돈키호테는 이 세계 어딘가에 기사가 실재하고 또 그 기사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모험을 떠났다. 맹자는 어떻게 성선을 향한 모험을 떠날 수 있었을까? '맹자'에 보면 맹자에 결코 뒤지지 않을 꿈과 모험을 가진 인물(묵자, 유하혜 등)을 만날 수 있다. 맹자도 그 인물의 모험에 질투를 느꼈지만 그의 가치를 깎아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맹자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학자라면 사회 참여를 두고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세상의 문제를 풀 식견을 가진 선인(善人)이 있고 그 선인을 알아주는 명군(明君)이 있으면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선인이 명군을 만나지 못하고 악인(惡人) 또는 암군(暗君)을 만난다는 데에 있다. 악인과 암군이 전부 사라지면 세상을 바꿀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선인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그들이 건재해 있다는 것이다. 이상의 현실화가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마냥 기다릴 수도 없다. 수많은 사람이 고통으로 신음하는데 모른 척하고 지내기에는 양심에 걸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악인과 암군의 조정에 참여해서 사사건건 말썽을 일으키며 위험을 스스로 만들 필요도 없지 않은가?
맹자는 이런 갈등의 상황을 헤쳐 나간 대표적인 인물로 고죽국의 왕자 백이(伯夷)와 노(魯)나라의 현인 유하혜(柳下惠)를 꼽았다. 백이는 악인과의 어떠한 거래도 일절 하지 않았으며 벼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말하는 것조차 달가워하지 않았다. 한편 유하혜는 더러운 군주가 하찮은 관직을 제의하더라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백이가 갈등 상황에서 자신의 원칙만을 내세우면 된다고 쳐도, 유하혜는 자신에게 주어진 갈등을 어떤 방식으로 이겨낼 수 있었을까?
그의 말이 걸작이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아무리 내 옆에서 옷을 훌러덩 벗고 알몸 쇼를 벌이더라도 네가 나를 어떻게 더럽힐 수 있겠는가(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 여기서 ‘나’는 나를 마주한 상대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는 절대 자아를 선언하고 있다.
인용문 중 앞부분을 다른 지역 말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니는 니고 내는 내다”, “니랑 내랑 무슨 상관이고?”, “니캉 내캉 무슨 일인데?” 전근대인치고 참으로 오만하고 방자하기가 이를 데가 없는 자세이다. 현실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으며 큰소리치는 것이라면 맹자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텐데 유하혜도 결코 맹자에게 뒤지지 않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맹자도 유하혜의 기개를 감당하지 못하고 사람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꾸짖었다.
모험의 길을 떠나자!
맹자는 유하혜가 걸어가려는 길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길을 일반화시키기 어려웠기 때문에 유하혜의 길과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리라. 맹자는 사람이 소체와 대체의 두 길에서 어디로 갈 것인지 묻고 있다. 맹자의 길은 분명하게 이미 결정되어 있다. 그는 성선의 기치를 내걸며 소체의 욕망을 누르고 대체의 길을 따라가려고 했다.
맹자가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던 어느 날 세자 시절의 등(滕)나라 문공을 만난 적이 있었다. 등나라는 주위에 강대국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늘 비상 탈출구를 찾던 터였다. 세자는 맹자에게 도움을 청했고 맹자는 성선의 나라를 세우면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세자는 맹자의 제안이 실현 가능하다고 보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 모든 사람들이 전부 소체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대체, 앞으로!”를 외치는 맹자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돈키호테가 풍차를 거인으로 보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모습과 참으로 겹쳐지지 않는가? 산초는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돈키호테를 만류했다. 산초의 눈에는 풍차는 풍차일 뿐 거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맹자가 “대체, 앞으로!”를 외쳤을 때 등나라의 세자 역시 거부했다. 맹자가 말하는 그 길이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도 없고 맹자의 뜻에 따라 산다고 해서 성인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뛰어들었던 것처럼 맹자도 대체를 향해서 뛰어들었다. 그리고 맹자는 그 길로 뛰어들 때 이전 선배들이 했던 말들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성간(成覵: 제나라의 용사): “성인도 사나이이고 나도 사나이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저들을 두려워하겠습니까(彼丈夫也, 我丈夫也. 吾何畏彼哉)?” 안연(顔淵: 요절한 공자의 애제자): “성인 순임금은 어떤 사람이고 나는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기만 한다면 저와 같아질 것이다(舜何人也? 予何人也? 有爲者亦若是).”
우리는 ‘전근대인’ 하면 성인(聖人)과 전통의 절대적 가치에 눌려서 모든 일에 “예예” 하면서 고개를 수그리며 순종하는 인간상을 떠올리기가 쉽다. 또 제 주견이 없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성간과 안연을 보면 거룩한 존재인 성인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성인이 무슨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깜빡 죽지도 않는다. 그들은 성인을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초월적 존재로 보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와 성인 사이에는 뛰어넘어야 할 간격이 없는 것이다.
요즘 사춘기의 중학교 2학년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시절이 있었겠지만, 10대 중반이 되고 사춘기가 오면 자기만의 주관이 생겨 어른들이 하라는 것과 반대되는 것만 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성간과 안연의 주장은 사춘기 소년의 반항 같은 괜한 트집이 아니다. 그들은 그 어떤 권위에도 굴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뚜렷한 주견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성인의 가치는 받아들였다. 맹자는 다소 불손하기만 한 유하혜보다는 불손하지만 주견을 가진 성간과 안연과 뜻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돈키호테와 맹자를 겹쳐서 바라보니 맹자가 얼마나 인간의 본연에 다가가려고 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성선(性善)을 인간의 향기로 보았고, 그것을 맡기 위해서 모험에 찬 여행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맹자는 골목에 숨어서 성선을 외쳤던 것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둘러싸인 시장에서 성선을 외쳤던 것이다.
이는 돈키호테가 보이는 것만을 믿는 톨레도의 장사꾼에게 “중요한 것은 보지 않고 믿어야 한다는 거요(돈키호테 1권 4장)”라고 하는 것과 같다. 두 사람에게 이상(理想)은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으므로, 느끼는 만큼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이었다.
▶️ 爾(너 이)는 상형문자로 尔(이)는 통자(通字), 尔(이)는 간자(簡字), 厼(이), 尒(이), 尓(이)는 동자(同字)이다. 爾(이)는 실을 가락옷에 잘 감을 때 쓰는 물레를 본떴다. 그래서 爾(이)는 너희의 뜻으로 ①너 ②성(姓)의 하나 ③어조사(語助辭) ④같이 ⑤그(其) ⑥뿐 ⑦이(此) ⑧그러하다 ⑨가깝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지나간 얼마 동안의 아주 가까운 때를 이래(爾來), 그 뒤를 예스럽게 이르는 말을 이후(爾後), 너의 간절한 뜻이라는 뜻으로 품계가 낮은 벼슬아치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비답에 쓰는 말을 이간(爾懇), 구차한 모양을 요이(聊爾), 벌레나 무엇이 움찔움찔 움직임 또는 무지하고 하찮음이나 사람들이 수선거려 움직임을 준이(蠢爾), 빙그레 웃는 모양을 완이(莞爾), 급작스러움 또는 성질이나 언행이 신중하지 않고 소홀함을 솔이(率爾), 왈칵 일어남을 발이(勃爾), 몹시 작음을 촬이(撮爾), 네 각담 아니면 내 쇠뿔 부러지랴는 뜻으로 자기 잘못으로 입은 손해를 공연히 남에게 들씌우려고 억지로 트집을 잡는 말을 이장절각(爾牆折角), 사물이 우연히 잘 들어 맞음을 이르는 말을 우이득중(偶爾得中),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자신에게로 돌아감을 이르는 말을 출이반이(出爾反爾) 등에 쓰인다.
▶️ 爲(할 위)는 ❶상형문자로 为(위), 為(위)는 통자(通字), 为(위)는 간자(簡字)이다.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양을 본떴다. 전(轉)하여 하다, 이루다, 만들다, 다스리다의 뜻으로 삼고 다시 전(轉)하여 남을 위하다, 나라를 위하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爲자는 '~을 하다'나 '~을 위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爲자는 원숭이가 발톱을 쳐들고 할퀴려는 모습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爲자를 보면 본래는 코끼리와 손이 함께 그려졌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코끼리를 조련시킨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爲자의 본래 의미는 '길들이다'였다. 하지만 후에 코끼리에게 무언가를 하게 시킨다는 의미가 확대되면서 '~을 하다'나 ~을 위하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爲(위)는 ①하다 ②위하다 ③다스리다 ④되다, 이루어지다 ⑤생각하다 ⑥삼다 ⑦배우다 ⑧가장(假裝)하다 ⑨속하다 ⑩있다 ⑪행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사(徙),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들 거(擧), 옮길 이(移), 다닐 행(行), 구를 전(轉)이 있다. 용례로는 나라를 위함을 위국(爲國), 백성을 위한다는 위민(爲民), 다른 것에 앞서 우선하는 일이라는 위선(爲先), 힘을 다함을 위력(爲力), 첫번을 삼아 시작함을 위시(爲始),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생업을 삼음 또는 사업을 경영함을 위업(爲業), 사람의 됨됨이를 위인(爲人), 정치를 행함을 위정(爲政), 주되는 것으로 삼는 것을 위주(爲主), 예정임 또는 작정임을 위계(爲計), 진실한 즐거움을 위락(爲樂), 어떤 것을 첫 자리나 으뜸으로 함을 위수(爲首), 기준으로 삼음을 위준(爲準), 나라를 위한 기도를 위축(爲祝), 부모를 위함을 위친(爲親), 자기를 이롭게 하려다가 도리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이르는 말을 위총구작(爲叢驅雀), 치부致富하려면 자연히 어질지 못한 일을 하게 된다는 말을 위부불인(爲富不仁), 바퀴도 되고 탄환도 된다는 뜻으로 하늘의 뜻대로 맡겨 둠을 이르는 말을 위륜위탄(爲輪爲彈), 겉으로는 그것을 위하는 체하면서 실상은 다른 것을 위함 곧 속과 겉이 다름을 일컫는 말을 위초비위조(爲楚非爲趙), 되거나 안 되거나 좌우 간 또는 하든지 아니 하든지를 일컫는 말을 위불위간(爲不爲間), 선을 행함이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말을 위선최락(爲善最樂),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된다는 뜻으로 죽임을 당하는 것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위어육(爲魚肉), 어떤 사람을 위해 벼슬자리를 새로이 마련함이나 남을 위해 정성껏 꾀함을 일컫는 말을 위인설관(爲人設官), 자손을 위하여 계획을 함 또는 그 계획을 일컫는 말을 위자손계(爲子孫計), 가난을 면하지 못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위귀소소(爲鬼所笑), 자기가 정한 법을 자기가 범하여 벌을 당함을 일컫는 말을 위법자폐(爲法自弊), 화가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으로 어떤 불행한 일이라도 끊임없는 노력과 강인한 의지로 힘쓰면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말을 전화위복(轉禍爲福), 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라는 뜻으로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만들어 강압으로 인정하게 됨 또는 윗사람을 농락하여 권세를 마음대로 함을 이르는 말을 지록위마(指鹿爲馬),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이루기 힘든 일도 끊임없는 노력과 끈기 있는 인내로 성공하고야 만다는 뜻을 이르는 말을 마부위침(磨斧爲針), 강남의 귤을 강북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는 뜻으로 사람도 환경에 따라 기질이 변한다는 말을 귤화위지(橘化爲枳), 손이 도리어 주인 행세를 한다는 뜻으로 주객이 전도됨을 이르는 말을 객반위주(客反爲主), 인공을 가하지 않은 그대로의 자연 또는 그런 이상적인 경지를 일컫는 말을 무위자연(無爲自然), 티끌이 모여 태산이 된다는 뜻으로 작은 것도 모이면 큰 것이 됨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진적위산(塵積爲山), 하는 일 없이 헛되이 먹기만 함 또는 게으르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일컫는 말을 무위도식(無爲徒食) 등에 쓰인다.
▶️ 我(나 아)는 ❶회의문자로 手(수)와 창 과(戈; 창, 무기)部를 합(合)한 글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옛 모양은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武器)인 듯하다. 나중에 발음(發音)이 같으므로 나, 자기의 뜻으로 쓰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我자는 ‘나’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我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달린 창을 그린 것이다. 이것은 서유기(西遊記)에서 저팔계가 가지고 다니던 삼지창과도 같다. 我자는 이렇게 삼지창을 그린 것이지만 일찍이 ‘나’를 뜻하는 1인칭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갑골문이 만들어졌던 은상(殷商) 시기에도 我자를 ‘나’라는 뜻으로 사용한 것을 보면 본래의 의미는 일찌감치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我자가 왜 ‘나’를 뜻하게 됐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석은 없다. 다만 서로 같은 무기를 들고 싸웠다는 의미에서 ‘나’나 ‘우리’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는 추측만이 있을 뿐이다. 한자에는 余(나 여)나 吾(나 오), 朕(나 짐)자처럼 본래는 ‘나’와는 관계없던 글자들이 시기에 따라 자신을 뜻하는 글자로 쓰였었기 때문에 我자도 그러한 예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我(아)는 ①나 ②우리 ③외고집(자기의 생각을 굽히지 아니하는 일) ④나의 ⑤아집을 부리다 ⑥굶주리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나 오(吾),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저 피(彼)이다. 용례로는 소아에 집착함을 아집(我執), 나의 뜻을 아의(我意), 우리 나라를 아국(我國), 우리 여러 사람이나 우리들을 아등(我等), 우리 나라를 아방(我邦), 자기 의견에만 집착하는 잘못된 견해를 아견(我見), 우리 편 군대나 운동 경기 등에서 우리 편을 아군(我軍), 자기를 자랑하고 남을 업신여기는 번뇌를 아만(我慢), 나에게 애착하는 번뇌를 아애(我愛), 자기의 이익을 아리(我利), 참 나가 있는 것으로 아는 잘못된 생각을 아상(我想), 자기 혼자만의 욕심을 아욕(我慾),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을 자아(自我), 육체적인 나를 소아(小我), 남과 구별된 개인로서의 자아를 개아(個我), 저편과 우리편 또는 남과 자기를 피아(彼我), 스스로를 잊고 있음을 몰아(沒我), 어떤 사물에 마음을 빼앗겨 자기 자신을 잊음을 망아(忘我), 바깥 사물과 나를 물아(物我), 나 밖의 모든 것을 비아(非我), 자기의 존재를 인정하는 자아를 실아(實我),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행동함을 위아(爲我), 오직 내가 제일이라는 유아(唯我), 남이 자기를 따름을 응아(應我), 다른 사람과 자기를 인아(人我), 자기 논에만 물을 끌어 넣는다는 뜻으로 자기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함을 아전인수(我田引水), 내가 부를 노래를 사돈이 부른다는 속담의 한역으로 책망을 들을 사람이 도리어 큰소리를 침을 이르는 말을 아가사창(我歌査唱), 자신도 돌보지 못하는 형편이라는 뜻으로 후손이나 남을 걱정할 여력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아궁불열(我躬不閱), 이 세상에 나보다 존귀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유아독존(唯我獨尊), 자신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흠뻑 취함을 무아도취(無我陶醉),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사상을 자아주의(自我主義), 남 잡이가 제 잡이로 남을 해하려 하다가 도리어 자기가 해를 입는 다는 뜻의 속담을 착타착아(捉他捉我), 상대방인 저쪽은 그르고 나는 올바름을 피곡아직(彼曲我直),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에 대하여 스스로 하는 비판을 자아비판(自我批判)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