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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문에 블랙아웃(Blackout)이 상식용어가 돼버렸다. 순환정전을 뜻하는 ‘롤링 블랙아웃(Rolling Blackout)’이라는 전문용어도 친숙한 단어가 됐다. 그런데 ‘블랙아웃’이라는 용어는 이외에도 여러 뜻이 있다. 사람에게도 자주 쓰인다. 늘 술을 대중없이 마시는 ‘모주망태’에게는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이른바 ‘필름이 끊긴다’고 하는 ‘단기 기억상실’이 그것이다.
블랙아웃의 뜻은 무척 많다. 대규모 정전사태 이외에도 △조종사가 전투기를 급상승시킬 때 일어나는 일시적 시각장애△공습에 대비한 등화관제(燈火管制) △전시의 보도관제(報道管制) △본격적인 핵공격에 앞서 적의 미사일기지에 미사일을 쏟아 부어 적 방공(防空)체제를 무력화시키는 것 △연극무대를 어둡게 한 상태에서 무대 장치나 장면을 바꾸는 암전 △TV 브라운관이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 등을 뜻한다. 한국인에게 가장 일반적인 것은 술꾼이 고주망태로 술을 먹어서 필름이 끊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뇌는 왜 블랙아웃을 경험할까?
술을 마시면 대뇌도 알코올의 영향을 받는다. 대뇌 옆 부분인 측두엽(側頭葉)의 해마 부위가 기억의 입력ㆍ 저장ㆍ 출력을 담당하는 데 이중 입력과정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필름 절단 사고’. 의학계에선 알코올의 독소가 직접 뇌세포를 파괴하기 보다는 신경세포들간의 신호 전달 메커니즘에 이상이 생겨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필름이 끊길 때 뇌의 다른 부분은 정상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술자리의 다른 사람은 필름 절단 사고를 알아채지 못한다. 뇌가 저장된 정보를 꺼내고 사용하는 것에는 이상이 없기 때문에 집에는 무사히 갈 수도 있다. 또 기억이 아예 입력되지 않았으므로 최면요법사가 최면을 걸어도 ‘그때’를 기억할 수 없다. 의학적으로 정확히 말하면 ‘단기 기억상실’이 아니라 ‘단기 기억 입력 이상’이 더 맞다.
블랙아웃은 선천적으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발생 ‘0순위’다. 또 술을 자주 마시면 뇌가 술에 취하는 것을 늦게 알기 때문에 만취할 가능성이 높아져 필름이 잘 끊어진다. ‘술꾼’ 중엔 유전적으로 필름이 안 끊기는 사람도 있다.
필름이 끊긴다고 곧 알코올 중독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술을 마실 때마다 필름이 끊겨 가정 직장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기는데도 계속 술을 마신다면 알코올 중독. 필름이 계속 끊기면 술을 마시지 않아도 필름이 끊기는 ‘베르니케 뇌증’에 걸릴 수 있다. 이 병 환자는 비타민 B1 부족으로 보행 장애, 안구운동 장애, 혼수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증세는 ‘인간 광우병’으로 알려진 변형 크로이츠펠트 야코프병(v-CJD)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MBC PD수첩이 ‘인간광우병’으로 보도했던 아레사 빈슨의 사인은 베르니케 뇌증이었다. 다만 알코올 중독 때문이 아니라 위 수술 후유중으로 비타민 B1의 소화에 장애가 생긴 경우다.
술만 마시면 필름이 끊긴다면 알코올 중독을 의심하고 술을 끊는 수밖에 없다. 술을 많이 마시면서 필름만 안 끊기는 비법은 없다. 애주가라면 평소 엽산과 시아민이 풍부한 채소류를 비롯해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중요하다. 운동을 하면 해마의 세포들이 자라나 기억력이 향상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필름이 자주 끊긴다면 술을 멀리하고 운동을 하라는 이야기이지, 이 경우에도 운동 뒤 폭주를 하면 ‘만사도로아미타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