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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믿으라
말씀/마가복음 1:1-15
요절/마가복음 1:15, 찬송가/274장
마가복음은 마가가 AD48-58 사이에 쓴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사도베드로는 로마에서 복음을 전할 때, 옆에 통역관을 두었는데, 그가 바로 마가였습니다. 마가는 베드로를 통해 증거된 예수님의 행적을 글로 적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마가는 바울의 선교동역자였던 바나바의 조카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 장소였던 다락방이 그의 집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예수님이나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교여행 중간에 집으로 돌아가 버림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갈라서게 됩니다. 마가는 부잣집 아들로 자라서인지 어려움에 부딪치면 슬그머니 꽁무니를 뺐습니다. 막14장에 예수님께서 잡혀가실 때에 한 청년이 홑이불까지 벗어버리고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51-52), 이 청년이 바로 마가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후에 바나바의 충실한 선교동역자가 되었고, 또 베드로는 마가를 ‘내 아들 마가’(벧후5:13)라고 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를 골로새 교회의 감독으로 추천하며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마가가 쓴 마가복음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마가복음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고난을 이야기하는데 1/3 이상을 사용합니다. 그는 연약한 가운데 숱한 실패를 하였기에 오히려 예수님의 고난에 더 깊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교회를 세우고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마가는 약한 겁쟁이였지만 강하고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그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보다 먼저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복음입니다. 이런 그가 전하는 예수는 그의 삶을 전혀 새롭게 하신 분이십니다.
또 하나는, 마가복음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입니다. 마가복음은 복음서중에 가장 먼저 쓰여 졌습니다. 또 구약인용이 적기 때문에 이방인들을 위해 쓰여 졌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우리도 마가복음을 가장 많이 공부하고, 특히 수양회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했습니다. 실제로 마가복음에 구약인용은 겉으로 많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치 빵 위에 얹은 치즈가 녹아내리며 스며들 듯이 구약의 말씀들이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되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늘 구약성경을 끼고 살았던 유대인들에게는 너무나도 쉽고 당연한 메시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낯설고 힘듭니다. 그래서 우리 편에서는 오히려 어느 복음서보다 마가복음이 어렵다고 여겨집니다. 반면에 공부하면 할수록 마가복음에 녹아 스며들어있는 복음의 맛을 깊이 누릴 수 있습니다. 마가의 인생을 바꾼 것처럼, 마가복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변화의 시작이 되길 바랍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마가는 다른 복음서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곧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여호와를 모욕하는 메시지요, 또 로마에게는 황제 숭배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아주 위험한 메시지였습니다. 한마디로 이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가장 심지가 약했던 마가에게서 이 말씀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런 마가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해줄까요? 마가를 볼 때에, 강하고 담대한 사람만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고난 강심장만이 목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 그리스도의 복음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강하고 담대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변화된 그 사람이 곧 목자요, 선교사요, 복음의 전파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서 약한 자를 변화시키셔서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이 변화가 마가복음을 통해서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은 본래 ‘유앙겔리온’으로 ‘기쁜 소식, 좋은 소식’이라는 당시 일반적인 말입니다. 이 때문에 복음을 들으면 기분이 좋고 살맛이 납니다. 그럼 내 인생에 있어서 기쁜 소식, 좋은 소식, 곧 복음은 무엇입니까? 어떤 분은 대학 입학이 자신의 인생에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과중한 리포트와 시험으로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결혼이 자신의 인생에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회사가 지방에 있어, 주말 부부로 사느라 복음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좋은 소식은 상황에 따라 오락가락 합니다. 좋았다 나빴다. 안 좋았다. 조금 좋았다 하며 흔들립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도 같이 흔들립니다. 그러나 마가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세상의 이런 좋은 소식과 다른 절대적인 기쁜 소식임을 말합니다. 왜 복음이 기쁜 소식입니까?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돈이 없다는 소식을 들을 때 슬픕니다. 또 우리는 몸과 마음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을 때, 슬픕니다. 그러나 정말 슬픈 소식은 죽음입니다. 우리에게 죽음보다 더 슬픈 소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사람이 죄 때문에 죽고, 죄 때문에 지옥 형벌을 받습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죽음에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십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그 복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복음인가? 하는 것을 먼저 결론부터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작’은 ‘입문’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은 ‘복음의 입문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알기 원하면 마가복음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제대로 복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입문서’라고 하면 무시할 수 있는데, 그러나 기초가 중요하고 입문이 중요합니다. 여기서부터 복음이 쌓여지면 그 복음이 나를 바꿉니다. 마가는 이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습니다. 줄이면 ‘예수 복음’입니다. 즉 마가복음은 마가가 전하는 ‘예수 복음’입니다.
그럼 마가가 전하는 ‘예수 복음’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2,3절을 보십시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마가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구약에 대한 직접인용이 적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구약을 잘 모르는 이방인들을 위한 복음서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겉으로가 아니라, 버터가 녹아 내리듯이 잘 보이지 않게 구약을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구약을 직접 인용한 것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구약의 말씀이 앞으로 전개될 ‘예수 복음’의 특징이나 성격을 이해하는 일종의 방향타(키 워드)가 되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인용한 사40:3절은 ‘광야에서 길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떤 길인가 하는 것이 그 앞인 40:1,2절에 등장합니다. 이사야가 전하는 구원의 메시지는 남 유다가 망하고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이 돌아오는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길에는 아라비아 사막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길을 준비한다는 것은 곧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자들이 이제 돌아오는 그 길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와 같이 그 길을 준비하는 것이 세례요한의 사명이라고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례요한이 준비한 그 길로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을 돌아오게 하는 것이 메시아의 사역입니다. 즉 예수님의 사역은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여러 가지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마가복음적 표현으로 하면, 포로로 끌려갔던 자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구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애굽에서 포로로 살던 자들을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구원하신 출애굽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여정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예표입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제2의 출애굽입니다. 즉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포로된 자들을 구원하는 제2의 출애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로된 자들입니까? 우리가 바벨론에 억류되어 있습니까? “나는 아닌데요,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인데요.”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 세상의 포로요, 물질의 포로요, 욕망의 포로요, 염려의 포로요, 두려움의 포로요, 죄의 포로입니다. 무엇보다 사망권세의 포로입니다. 이를 깨달을 때, 우리는 예수님이 내게 있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에 대한 이해는 마가의 표현대로라면 입문도 못한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을 통한 제 2의 출애굽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를 출애굽시켜 줄 분으로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 2의 출애굽이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세례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돌아오는 길을 준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가 한 일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포로에서 돌아오는, 제 2의 출애굽의 방식은 다른 것이 아니라, 회개입니다. 새로운 구원, 새로운 삶을 향한 변화의 시작은 나의 결심이나 결단이 아니라 ‘회개로부터’ 라는 것입니다. ‘예수 복음’은 회개로부터 옵니다.
세례요한이 전파한 회개의 메시지에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회개하라고 하면 다들 자기 죄를 자복하는 일이 일어날까요? 전혀 아닙니다. “너나 회개하세요.” 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당시에 메시아를 기다리는 마음이 다들 간절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풀어 오른 풍성에 살짝 바늘을 갖다 대기만 해도 팡! 터지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다들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받아들이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다들 회개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회개가 대세입니다.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마치 코비디 상황에서 마스크 쓰지 않고 돌아다니는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회개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심지어 꼭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여깁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것만이 회복의 길이요, 회개가 새 출애굽을 위해 준비하는 것이라는 것은 구약(레26:38, 43)의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베드로는 회개하고 돌이키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이를 것이라고 했습니다(행3:19).
세례요한은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함으로 전국구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연인이 아니라 구약의 선지자인 엘리야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왕하 1:8). 곧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모습을 하고 다닌 것입니다. 엘리야가 와서 주의 길을 준비한다는 말씀이 있기에, 엘리야 퍼포먼스를 한 것입니다. 종말에 엘리야가 등장할 것이라고 한 말라기 선지자의 예언대로(말4:5) 엘리야 모습을 한 세례요한의 등장은 곧 종말이 다가왔다는 징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빨리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출애굽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의 뒤에 오시는 분을 자신과 비교하며 소개합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신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당시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일에 속하였습니다. 종말을 알리는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급도 그 앞에서는 종노릇도 감히 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한 분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얼마나 대단한 분이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그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런데 겔39:28절에 “전에는 내가 그들이 사로잡혀 여러 나라에 이르게 하였거니와 후에는 내가 그들을 모아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한 사람도 이방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내가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인 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30절에 “내가 다시는 내 얼굴을 그들에게 가리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내 영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쏟았음이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것은 자기 땅으로 돌아오는 날인 새 출애굽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세례 요한 뒤에 오시는 그 분이 행하십니다. 그 분으로 인해 자기 백성이 돌아옵니다. 그 분으로 인해 성령을 받을 것이며, 새 출애굽이 일어날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그 분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지만, 곧 바로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그런즉 자기 백성을 돌아오게 하고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분은 곧 예수님이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오는 것을 예수님이 보셨습니다. 하늘이벤트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갈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비둘기 같이 강림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아 사역을 감당할 힘과 능력과 지혜를 위로부터 덧입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짧은 말씀 속에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정보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이 직접 선포하며 인정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것이 시편 2:7절에 나옵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그리고 이어지는 구절은 하나님의 아들은 이방 나라들을 정복하여 땅 끝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왕이되심을 선포합니다(시 2:8-9). 이 말씀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또 당 끝까지 이르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십니다. 이 왕을 여호와께서 직접 세우십니다(6).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메시아, 그리스도라 부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이 예수님은 여호와께 기름부음을 받으신 왕이시오,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이십니다.
마14장에는 대제사장이 예수님을 심문하면서 묻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14:61) 이것을 보면, ‘찬송 받을 이의 아들’이 곧 ‘하나님의 아들’ 이요, 그 분은 곧 ‘그리스도’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나의 아들’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당시로서는 예수님이 곧 메시아, 구원자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정체를 선포하시며 알려주셨습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자칭, 재림의 주다. 예수다 라고 하는 이단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이럴 때 일수록 복음이 무엇인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신 구원자,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만이 그 능력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포로에서 또 모든 얽매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줄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시편 2편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은 온 세상을 정복하시는 왕이십니다.
특히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시며 그리스도 사역을 시작하는 예수님을 향해서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42:1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는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영을 받습니다. 또 사42:2-4절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님의 종은 세상에 정의를 세우는 분이십니다. 섬들, 즉 온 세상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힘으로 정복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는 정의와 자비의 메시아이십니다.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이방인들도 위하는 메시아이십니다. 여기에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아 이해와 충돌이 있습니다.
그들만 충돌합니까? 우리도 이 예수님과 충돌할 때가 있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것은 좋은데,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 때론 힘듭니다.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 싶은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면 힘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꿈을 이루어주는 메시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대로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고난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을 가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왜 로마를 타도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지는 않고, 고난의 종의 길을 가는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그러나 기차가 레일 위를 달려야 하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길을 끝까지 가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내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이루어 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길을 가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원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성령은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을 계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있었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이를 통해서 마가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새 출애굽이 발생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광야는 시험의 장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그렇지만 광야 시험에 실패한 이스라엘과 달리 예수님은 이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그때 들짐승이 함께 했다고 했습니다. 사 11:6-8절에는 구원의 그 날에는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논다고 했습니다. 특히 사 11:11절 “그 날에 주께서 다시 그의 손을 펴사 그의 남은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이 돌아오는 새 출애굽 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묘사는 예수와 함께 새 출애굽이 일어날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마가는 곳곳에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15절을 읽겠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때가 찼다’는 것은 ‘때가 되었다’는 것이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도 아직은 틈이 있습니다. 그 짧은 틈에 가까이 온 하나님의 나라를 영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 시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제 막을 내리는 옛 시대는 하나님 나라와 대조되는 시대로 사탄이 왕 노릇하는 시대입니다. 욕망의 포로, 죄와 죽음의 포로가 되어 사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제 새로운 구원의 시대, 해방의 시대, 새 출애굽의 시대가 이르렀습니다.
이 새로운 시대를 누리려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돌이키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지 않습니다. 지금 회개하지 않으면 포로된 자에서 돌아오는 새 출애굽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시작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유대인들처럼 예수를 반대하고 죽이게 됩니다. 지금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사탄의 나라에 속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려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회개하면 도덕적인 회개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삶의 의미와 방향과 목적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바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겉으로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에게 두신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불신합니다. 이 때문에 마음이 늘 불안하고 상황에 따라 요동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자세를 바로 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치 않고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음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동시적인 것입니다(행20:21). 사람들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면 세상 잔재미도 못 즐기고 무슨 재미로 살 것인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세상 재미와는 비교가 안 되는 영적인 재미가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고, 사단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생명력이 넘치는 힘찬 인생을 살 수 있고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무엇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선포하십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예수님이 선포하시는 복음은 세상의 포로, 욕망의 포로, 죄와 사망의 포로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메시아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음으로, 이 복음의 능력, 이 복음의 감동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마가가 전하는 이 예수님, 메시아 그리스도를 통해서 포로에서 해방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