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가운데 확신을 주시는 하나님
(창 40 : 9~23)
때가 이르러 2년이란 세월이 지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통해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바로는 자신의 꿈을 풀 애굽의 모든 점술가들을 다 불러보았습니다.
그리고 꿈을 해석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꿈을 푸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궁중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술 맡은 관원장입니다.
꼭 예전에 봤던 장면 같은 상황, 감옥에서 꿈을 꾸었을 때에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떡 맡은 관원장의 죽음, 자신은 요셉의 말 대로 신원이 회복되는 것을 다시 회상했습니다.
그래서 술 맡은 관원장은 왕에게 이 사실을 고백했고 왕은 그 꿈을 해석할 자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41장 14절을 보면, “이에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요셉을 부르매 그들이 급히 그를 옥에서 내 놓은지라 요셉이 곧 수염을 깎고 그의 옷을 갈아입고 바로에게 들어가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요셉은 감옥에 있을 때에 감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 갖은 발버둥을 쳤으나 빠져나가지 못했습니다.
내가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발버둥을 쳐보았자 이 발버둥 치는 것 때문에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발버둥 칠수록 더 나락에 빠집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빨리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옥의 문이 스스로 열리고, 요셉의 발로 걸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발버둥치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기도함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가야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을 보면, 베드로도 스스로 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잠을 잤습니다. 천사가 옆구리를 쳐서 그를 깨울 때까지 곤히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옥문을 나온 것은 베드로가 한 것은 하나도 없고, 천사가 가는 길만 따라 갈 때에 옥문이 열리고, 한참 가다보니 천사는 보이지 않고 사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장소에 다다른 것입니다.
요셉은 갇혀 있는 상황에서 열린 문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인생에 있어 치열함으로 살 수 없습니다.
열려야 문제가 해결 됩니다.
안에서 치고받는 다고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함을 얻을 때, 문제가 해결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기도하는 가운데 확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났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에게 꿈을 통해서 바로에게 보여준 꿈을 보여주시면서 해석까지 함께 해주셨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을 다 듣고, 깨달았던 요셉은 옥문을 달려 나가지 않고, 순서에 따라 왕을 만날 준비를 다하고 나갑니다.
전혀 급하지 않습니다.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옥문을 나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빌라델비아교회 성도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요한계시록 3장 8절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물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자가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에게 열린 문을 주셨다고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되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나올 때, 다시 감옥으로 되돌아갔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면 능히 닫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산길이며, 복된 길입니다.
영원히 열어두신 문임으로 다시 묶였던 지난날의 감옥으로, 좋지 않았던 상황으로, 가정환경으로, 되돌아갈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발버둥치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고 살지 않아야 합니다.
항상 기도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도로 문을 열고 영원히 닫히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전도를 할 때에 갖은 방법이나 도구, 사람들을 동원해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러가는 사람들이 충분한 기도를 통해서 전도에 임해야 합니다.
매주 한 요일을 정해놓고 토스트 전도를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토스트는 있을지 몰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습니다.
빵만 테이블 위에 놓여있고, 지나가는 차를 붙잡고 토스트를 전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하지만, 토스트를 전달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전도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버둥 친다’고 해서 전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에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는 불입니다.
그래서 불이 없는 전도는 아무런 영향력이 없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전도의 문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 3절의 말씀을 보면,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그러면 구름 같이 허다한 무리들이 주께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도를 위해 충분한 기도를 해야 합니다.
에스겔 1장 1절의 말씀을 보면,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것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 뵙게 된 것입니다.
요셉에게 감옥 문만 열렸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앞길도 열렸습니다.
요셉 앞에 열린 문은 가족의 미래에 대해 열리고, 민족의 앞날도 열렸습니다.
그에게 이 땅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축복의 문의 한 번에 열렸습니다.
그것이 바로에게 가는 길입니다.
왜 내 삶에 문이 가로 막고 있습니까?
기도함으로 그 문을 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걸어 나가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다 열린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발 강가에서 보여주셨던 하나님과의 관계, 하늘의 문을 여시고 보여주셨던 하나님의 모습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가정문제로 고민하십니까?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요셉은 형들과 아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사람입니다.
인간관계가 아주 좋지 못했습니다.
배다른 형들과 동생, 가족이라는 구성원 속에서도 차별과 험담과 폭력이 남무 했던 그의 삶에 가족은 치를 떨 정도로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니까? 가정문제가 해결됩니다.
평생 노예로 살다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을 알자 그 형들은 그 앞에서 부들부들 떱니다.
그 때, 요셉은 이전에 자신이 받았던 상처를 기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베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다고 그들 앞에서 고백합니다.
모든 관계의 문을 열수 있는 능력 어디에 있습니까?
기도에 있습니다.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나아져야 합니다.
그런데, 안에서만 발버둥치고 있으면, 결코 해결 받지 못합니다.
요셉과 같이 감옥에서 보낸 2년이란 시간이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시간보다 행복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세우시고 가족을 일으키시고, 사랑으로 품도록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무엇이 그 시작이었습니까? 감옥의 문을 열어주셨을 때입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님께서 여시면 닫을 자가 없습니다.
빌라델비아교회에게 주신 축복, 열린 문입니다.
내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내 삶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스스로 발버둥치지지 마시고, 그 발 강가에서 하늘 문을 여시고 하나님을 보여주신 그 하나님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은 다 안 된다 하더라도 기도하는 사람은 충분합니다.
그 어떤 문이라도 열어주실 하나님을 기대한다면, 때로는 내 앞에 닫힌 문이 있는 것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닫힌 문을 보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문을 여는 요셉과 같은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PS.
오늘 물어야 하는 바로 그 것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존감’을 회복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주관하고 있음을 알기에, 자신의 인생이 다른 사람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음을 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가 크거나 작은 것, 성장에 좋은 환경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단지 중요한 것은 지금 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 김병삼 목사의 ‘우리가 꿈꾸는 교회’에서 -
우리 주변에는 늘 “누구 때문에”, 혹은 “환경 때문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당히 피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살아 있는 사람, 자신의 삶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탓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서 호흡하지 않으면, 생명을 연장할 수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이루고자 하는 많은 일이 주님을 떠난다면 얼마나 허무할 수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 물어야 하는 일이 바로 그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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