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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690
3월5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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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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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yCxbKSHGZ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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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입니다!>
소작(小作)이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지주로부터 땅을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의 일정량을 바치며 생계를 이어가는 형태의 농사입니다. 일년내내 죽을 고생만 하고 손에 쥐는 것은 쥐꼬리만큼인 소작농들의 애환은 오랜 역사 소설의 주된 테마였습니다.
돈보스코를 연구하다보니 그분의 부모님 역시 소작농이었습니다. 구호대상인 극빈자 계급은 아니었지만, 아버지 프란치스코 보스코와 맘마 마르가리타는 남의 땅을 빌려 하루 온종일 뙤약볕에서 죽기살기로 일만 하던 소작농이었습니다.
부양해야 할 식구는 많은데, 농업이 기계화가 되기 훨씬 전이지, 돈보스코의 부모님들은 그야말로 하루 온종일 뼈빠지게 일만 하셨습니다.
돈보스코께서 유명인사가 된 이후, 알베르 뒤 보이라는 전기 작가가 근사하게 돈보스코 전기를 집필했었는데, 최종적으로 돈보스코에게 검열을 부탁했습니다. 돈보스코가 제일 먼저 수정한 대목이 있습니다.
“돈보스코의 가족은 꽤 넉넉한 농부였다.”라는 구절을 확인한 돈보스코는 빨간펜으로 찍찍 긋고, 이렇게 고쳤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농부였다.”
그만큼 소작농들의 삶은 고달팠고 힘겨웠습니다. 사실 소작인들 입장에서 지주들이 땅을 빌려준 것,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소작인들 가운데서 악한 소작인들이 있습니다.
대풍년, 다시 말해서 엄청난 소출을 거두었으면서도, 주인에게는 올해 농사가 흉년이라며 쥐꼬리만큼의 소출만을 보내는 악덕 소작인도 있습니다. 빨리 소출을 보내주라고 몇번을 이야기해도, 알았다 해놓고는, 죽어도 안보내는 진상 소작인도 있습니다.
더 지독한 소작인이 있습니다.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서 지주는 자신의 종을 보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아들까지 소출을 받아오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 악한 소작인들은 그 아들마저 매질하고 죽인후 포도밭 밖으로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 악한 소작인들은 바로 유다인들이요, 동시에 우리들이었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니 우리 모두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시면서, 단 한번뿐인 인생을 잘 좀 가꾸어보라고, 풍성한 결실을 거두어 보라고 임대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임대 기간이 결코 영속적이지 않고, 길어야 90년 100년입니다.
악한 소작인들처럼 분수 넘치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주인 행세를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언제나 나는 잠시 하느님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라는 사실을 잊지 알아야겠습니다.
종이면서 주인인 양 큰 소리 뻥뻥 치고 행세하다가 큰코 다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악한 소작농처럼 처신하다가는 하느님의 강력한 진노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겸손하게, 늘 신중하게, 늘 종이나 소작농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루 하루 살아갈 일입니다.
나를 내 삶의 주인이요 주인공으로 여기고, 가슴을 딱 펴고 당당하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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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a1fAN9K9ks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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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증, 상실감이나 우울증에서 벗어나는 법>
오늘 복음은 ‘못된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소작인들이 포도밭을 자기들의 것으로 삼기 위해 주인의 외아들을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하느님 아버지이시고 그 아드님이 유일한 상속자이십니다. 그러니 소작인들은 그 포도밭에서 일하여 자신의 것을 취하고 주인에게 도지만 조금 바치면 됩니다. 하지만 도지를 바치기 싫어 주인의 아들까지 살해합니다. 그런다고 포도밭이 자기 것이 되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우리도 자칫 이 세상의 것들을 ‘나의 것’으로 여기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특징은 불안과 상실감, 우울증을 크게 겪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을 앓는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그런 감정은 주인이 아닌데 주인 행세를 하려다 보니 겪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불안감, 상실감, 우울감 등은 자신이 그것들의 주인이라 믿지 않으면 좀처럼 나오기 어려운 감정입니다. 나의 것이기에 잃을 것을 두려워하여 불안을 느끼고 또 결국 잃고 나면 나의 것이었는데 잃었으니 상실감과 우울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그녀의 조각들’(2021)은 출산 중 아기를 잃은 아픔을 극복하려는 부부의 각자 다른 모습을 그려줍니다. 이 영화는 코르넬 문드럭초 감독과 그 아내가 겪었던 실화를 소재로 삼았습니다.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지 않고 가정분만을 고집하는 ‘마사’는 결국 출산일이 다가왔고 남편 ‘숀’은 급하게 조산사에게 연락해 보지만 마사를 담당하던 조산사는 다른 산모를 돌보고 있었기 때문에 ‘에바’라는 낯선 조산사가 마사의 출산을 돕게 됩니다.
에바의 능숙한 처치 끝에 아이는 무사히 세상 밖으로 나왔지만 이내 숨을 쉬지 못하고 위태로운 상황에 부닥칩니다. 에바는 아이에게 인공호흡을 하며 응급처치를 함과 동시에 남편 숀에게 구급차를 부르라고 지시하지만 이미 숨이 꺼져버린 아이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합니다.
아이의 사망 이후 마사와 숀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를 각기 다른 방법으로 극복하려 합니다. 숀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원인을 외부에서 찾기 시작했고 가장 탓하기 좋은 요인은 조산사인 에바였습니다. 숀은 아이의 죽음에 대한 책임으로 에바에 대한 법정 소송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마사는 그러기를 원치 않습니다. 애초부터 자연분만하자고 한 것은 자신이었고, 그래서 아이의 죽음을 누군가의 탓으로 돌리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이 상실감을 잊기 위해 그녀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하지만 아이의 죽음에 너무도 무심한 것 같은 모습에 숀은 화를 냅니다. 숀은 그러는 중에 변호사와 불륜에 빠지고, 마사도 그런 남편이 싫어 클럽을 전전하다 비슷한 상황으로 갑니다. 둘은 그렇게 끝납니다.
이 영화에서 아기의 죽음에 대한 상실감을 두 부부는 남의 탓을 하거나 쾌락적인 삶으로 극복하려 했습니다. 결과는 좋던 부부관계의 종식이었습니다. 도대체 상실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요?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아 남의 탓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 안에서 정신없는 삶으로 잊어야 할까요?
근본적인 것부터 해결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왜 상실감이 일어나는가?’
신앙인이었다면 결국 ‘주님의 것을 주님께서 도로 가져가시니 다만 주님을 찬미할지어다.’라고 하며 극복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이 아닌 이상 아이는 분명 나의 것이었고 그 아이를 잃은 책임을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전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 탓을 자신에게 돌리든, 남에게 돌리든 정상적인 삶으로는 돌아올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잃을 것 같은 불안함이나 상실에서 오는 슬픔 등은 내가 그것을 가질 자격이 애초부터 없었음을 깨달으면 됩니다. 피조물은 피조물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종이 주인의 것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더 쉽게 말하면 자녀가 부모의 것을 소유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자녀는 자신이 자녀임을 알기에 자신의 것을 잃는다고 상실감에 빠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모를 걱정합니다.
저도 아버지가 세발자전거를 사 주셨을 때 매우 기뻤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그것을 타고 놀다가 손잡이 달린 자전거 머리를 부러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때 자전거를 잃은 슬픔은 없었습니다. 그것을 받았을 때 잃을까 봐 두려워하지도 않았었습니다. 다만 어린 나이에도 아버지가 마음 아파하실까 봐 걱정하였습니다. 아버지가 나에게 준 자전거이지만 자녀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못합니다. 받았지만 여전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것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또 전자시계를 선물해주신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깡패를 만나서 시계를 빼앗겼습니다. 아버지가 주신 것이라 그것은 안 된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그것을 빼앗긴 것보다 아버지가 아파하실까 봐 더 걱정하였습니다. 물론 부모님은 아무 말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빼앗기기 전까지는 그것을 잃을 두려움은 갖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잃었을 때는 그것을 잃은 상실감보다는 내가 그것을 잃어서 그것 때문에 마음 아파할 부모의 마음에 더 신경이 쓰였습니다.
이렇듯 부모를 둔 자녀는 모든 것이 부모의 것이기에 불안함이나 상실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부모로 인정하지 못하면 항상 불안하고 또 잃으면 그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하느님을 주님, 혹은 아버지로 인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세상 살아가면서 불안이나 상실감, 우울감을 겪지 않게 하고 싶다면 자녀에게 참 주님, 참 부모가 누구인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춘기가 지나 성인이 되면 자기 것은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라 여깁니다. 그러면 고통의 삶이 시작됩니다. 무언가 잃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참 창조자, 참 주님, 참 부모를 믿고 고백하게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봉헌’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어머니 생신에 맞추어 그동안 모은 적은 돈으로 형들과 함께 어머니에게 작은 덧버선을 선물한 적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그 덕분으로 불안함과 상실감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포도밭 소작인들은 마치 에덴의 아담과 하와처럼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기 싫어서 도지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내는 교무금과 봉헌금은 바로 주님이 나의 주인님이시고 나의 아버지이심을 인정하는 전례와도 같은 행위입니다. 되도록 우리 자신도 십 분의 일을 봉헌하며 내가 어떤 처지인지 알고, 우리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 불안함과 상실감, 우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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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3-43.45-46 : 저 자는 상속자다. 자, 저 자를 죽이자!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을 일구고 울타리를 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소작인들이 했어야 할 일들을 직접 하였다. 소작인들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니다. 주어진 것을 잘 지키기만 했어도 되었다. 모든 것이 다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왔을 때, 율법을 주셨고 도시를 세워주셨으며 성전을 마련해 주셨고 제단을 준비해 주셨다.그러고는 “멀리 떠나셨다.”(33절) 하느님께서는 끈기 있게 그들을 기다려 주셨다.
밭 임자는 “소출을 받아 오라고”(34절) 자기 종들, 즉 예언자들을 보냈다. 소출은 행실로 드러나는 복종심을 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토록 세심한 보살핌을 받고 나서도 게으름을 피워 소출을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찾아온 종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밭 임자에게 용서를 청해야 했지만 그들은 성을 내고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주인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계속 종들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인은 아들을 보낸다.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37절) 이 말은 글자 그대로 소작인들이 그렇게 할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주님은 소작인들이 아들을 죽일 줄 알고 있었다. 소작인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듣든, 또는 듣지 않든”(에제 2,5)이라며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다. 그들이 당신의 종들에게는 완고하게 굴었을지라도 아들의 존귀함에는 경의를 표했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소작인들은 어떻게 했는가? 자기들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청할 시간이 있었지만, 예전에 저지른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다.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하고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38-39절)고 한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하고 소리치며, 주님을 도성 밖에서 십자가에 못 박기도 하였다. 그들은 율법이라는 상속재산을 차지하지 못하였고 스스로에게 죽음을 선고하고 말았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40절)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41절)고 대답한다.그 대답으로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하였다. 주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으로 이것을 암시하셨다. “집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동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42-43절)
그리스도께서 ‘돌’로 불리시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분께서 놓으신 기초는 튼튼하여 그분 위에 서 있는 이는 거짓스런 속임수에 넘어가거나 박해의 폭풍에 흔들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사악한 자들은 그분 안에서 완전하게 파멸하기 때문이다. 돌과 부딪히는 것은 산산조각 나지만 돌은 멀쩡하다. 돌 위에 떨어지면 스스로 부서지고 만다. 그들의 파멸은 돌의 힘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떨어진 그들의 잘못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에게 하는 이야기인 줄 알고 예수님을 죽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46절) 그 군중들에게 변을 당할까 두려워 한 것이지만 그 군중들도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하고 외칠 사람들이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참으로 주님의 일을 올바로 따르고 있는 소작인의 삶을 살고 있는가? 반성하며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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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무엇을 먹을까 하여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물 몇 병과 음료수, 그리고 여러 그릇에 담긴 밑반찬과 김치가 있습니다. 허기져서 그런지 먹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짜증이 확 밀려옵니다. 그런데 냉장고 속에 있는 것은 본디 나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이들이 혼자 지내는 사제를 위하여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고, 나누어 준 소중한 사랑입니다. 오랜 시간 나의 냉장고에 나의 공간에 있었다고 하여 그것이 나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나 봅니다.
처음부터 나의 것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사람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말처럼 본디부터 나의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고 사용하였기에 나의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삽니다. 그래서 감사해 하지도 나누지도 못합니다. 나누고 비우기는커녕 다른 사람의 것들을 빼앗으려 발버둥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자 누군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험담하고 짓밟고 죽이며 살아갑니다. 본디부터 내 것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에서 포도밭은 주인의 것이지 소작인의 것이 아닙니다. 포도밭의 소출 또한 소작인들의 것이 아니라 주인의 것입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자 주인을 무시하고 종들을 박해하고 주인의 아들을 죽입니다. 첫 악행을 저지르고 그들이 부끄러워하였다면 살인이라는 더 큰 악행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감사해 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가지고 있습니까? 가진 것이 없다고 불평하며, 다른 이보다 덜 가졌다고 시기하며 악행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감사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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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마태 21,33-36)
1)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운 일”은 ‘밭 임자’가 혼자서 한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소작인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그 포도밭에 대해서 소작인들은 어떤 권리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인간들이 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간들은 천지창조 때에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세상은 ‘만드신 분’의 것입니다. ‘밭 임자’가 소작인들에게 맡긴 일은, 포도밭을 관리하고, 포도를 수확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밭 임자’는 소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소작인들에게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셨지만, 인간들에게 관리를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잘 관리해서 얻는 이익과 행복을 인간들에게 그냥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2)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라는 말은, ‘밭 임자’가 실제로 멀리 떠났다는 뜻이 아니라 포도밭을 관리하고 포도를 수확하는 과정에서의 세부사항은 전적으로 소작인들에게 맡겼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고, 그 ‘자유 의지’를 존중해 주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 인생의 주인이시지만,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자유 의지’의 자유는 ‘선택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맡기신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잘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창세 2,15.19) 이 세상의 온갖 피조물들을 만드신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그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은 것은 인간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지배권을 주셨음을 뜻합니다.(창세 1,26.28) 물론 주인으로서 가지는 지배권이 아니라 관리자로서 가지는 지배권입니다. 그때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과 열매를 따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 하나만 정해 주셨는데, 그 규칙을 지켜서 살든지 안 지키고 죽든지 그것을 선택하는 자유 의지는 그대로 두셨습니다.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밭 임자’가 소작인들에게 정해 준 규칙은 제 때에 주인 몫의 소출을 내는 것뿐인데, 그 규칙을 지키면 포도밭을 계속 관리할 수 있고, 안 지키면 빼앗기게 됩니다. 선택은 소작인들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3) 소작인들이 주인 몫의 소출을 내기를 거부하고 종들을 죽인 이야기는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당시 예언자들의 주 임무는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회개하라는 말이 듣기 싫어서, 또 회개하기를 거부해서 예언자들을 박해했고 죽였습니다. (구약시대 역사를 보면, 인간들은 아쉬운 때에는 하느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했다가 그 상황이 지나가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마치 자기들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랬다가 또 어떤 고난을 겪게 되면 하느님께 잘못했다고 빌면서 도와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된 것이 구약시대 역사입니다. 오늘날에도 인간들의 모습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마태 21,37-40)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마태 21,43)
1)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배척했으며 결국 죽였습니다. 그들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고, 또 하느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한다는 생각으로 그런 것이긴 한데, 그래도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느님께 반역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구세주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그것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기는(잃는) 것과 같습니다.
2) 비유에는 ‘소작인’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소작인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7) 비유에서 ‘주인 몫의 소출을 주인에게 내는 일’은 성실한 회개와 신앙생활을 뜻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면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자녀답게 살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하느님 나라를 상속받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자기 스스로 상속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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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성인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성인은 신학교에 갔지만 2번이나 신학교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성적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의 인품을 잘 알고 있었던 본당 신부님의 도움으로 다시 신학교에 들어갔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비안네 신부님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에 정신이 팔린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였습니다. 세상의 기쁨에 취해있던 사람들이 복음의 기쁨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신부님께 고백성사를 보기 위해서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시골동네인 아르스에 기차역이 생겼습니다. 동료들로부터 질시를 받고, 모함을 받았지만 신부님은 성인품에 오르셨고, 사제들의 주보성인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는 요셉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죽이지 않고 이스마엘의 상인들에게 팔았고,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갔습니다. 요셉 역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되었습니다.그러나 창세기를 읽어보면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모퉁이의 머릿돌’로 만들어 주십니다. 요셉은 성실하였고, 정직하였고, 꿈의 해몽을 잘하였습니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성공하였습니다. 요셉을 죽이려고 했던 형들,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넘겼던 형들은 요셉에게 곡식을 구걸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안배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형들의 잘못을 기꺼이 용서해 주었습니다. 가족들을 이집트로 데려와서 함께 살았습니다.
본당 공동체에서 수도자, 보좌신부님들과 어렵게 지내는 본당 신부님이 더러 있습니다. 성격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사목의 방향이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도자도, 보좌신부님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가기도 합니다. 문득 오늘 복음에 나오는 포도원 소작인이 생각납니다. 본당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주교님을 통해서 본당신부에게 맡겨주신 포도원입니다. 본당에 파견된 수도자와 보좌신부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라고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비록 실수를 한다고 할지라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고, 받아주면 좋겠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하느님이심을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4곳의 본당에서 지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본당 신부님들께서는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성실함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따뜻함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강론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성실한 포도원 소작인은 아니었음에 부끄럽습니다.
아름다운 글을 읽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매일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는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결석을 많이 하는 학생들의 집을 방문하였던 선생님이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난 아침에 혼자 밥을 먹는데 시간이 되면 함께 밥을 먹자고 하였습니다. 한 학생이 학교에 갔습니다. 선생님은 학생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하였습니다. 학생은 학교에서 자신을 위해 기다려주는 분이 있다는 것이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한 선생님이 제안을 하였고, 한 학생이 응답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백여 명의 학생이 아침을 먹으러 학교에 온다고 합니다. 세상은 분명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톨릭평화신문 미주지사라는 포도원의 소작인입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좋은 지면으로 독자들과 만나는 것이 제게 주어진 업무입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이웃들과의 만남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포도원의 소작인이라는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내가 만나는 모든 이가 주님께서 보내신 천사라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우리들의 구원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보다 앞서서 예수님을 닮은 길을 걸어갔던 요셉을 닮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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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이동훈 프란치스코 신부님]
<진정한 발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있는가? 현대 사회는 ‘소유’와 ‘소비’와 ‘향락’에 삶의 의미를 두는 것 같다. 더 많이 소유해 풍족한 삶을 누리는 것을 ‘발전’ 또는 ‘진보’라고 말하며 이것을 사회의 기본 가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소유와 소비를 삶의 목표로 삼는 개인과 사회는 타인과 사회에 대하여 적대적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더 많이 소유하고 소비하기 위하여 다른 이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하고, 이기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 다른 이들보다 더 큰 힘을 소유할 때 더 많이 소유할 수 있고, 더 많이 소비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원 소작인들은 도조를 받으러 온 종들과 그 아들마저 죽였다. 제 것도 아닌 포도원을 가로채기 위한 욕심으로 끔찍한 살인마저 서슴지 않은 것이다.
소작인들의 끔찍한 행동은 오늘날에도 발전과 진보라는 미명하에 인간 상호간의 경쟁뿐 아니라 자연 세계에 대한 착취와 파괴로 자행되고 있다.
포도원 주인이 소작인에게 포도원을 도지로 주었듯이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 세상을 맡겨주셨다.(창세 1,26 28 참조) 그런데 인간은 제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 칭하고 만물의 주인인 양 마음대로 자원을 고갈시키고, 동식물을 멸종시키고 환경을 오염시키며 세상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진정한 발전이란 경제적 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발전에서 어느 누구도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고 천명하고 있다.(회칙 「민족들의 발전」 14항,`17항 등)
이 사순절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삶의 의미로 두고 있는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우리의 수단과 방법은 적절한지 우리 삶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복음의 소작인들, 또는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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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강동진 알로이시오 신부님]
<포도원과 도조>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도원을 맡기시며 잘 경작한 후 도조를 성실히 내라 하셨습니다. 포도원은 하느님 나라를 의미하며 도조를 내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고 계명을 지키는 경건한 삶으로 온갖 덕행과 선행의 결실을 맺어 다시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 특히 지도자들인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이 의무를 소홀히 하게 됩니다. 백성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고, 율법을 형식적으로만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여 하느님께 돌려드릴 것을 제대로 돌려드리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빼앗기게 되었고 “도조를 잘 내는 백성”, 곧 신약의 새로운 백성들에게 포도원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포도원을 물려받아 경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라고 그것을 뺏기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도 갖가지 선행의 결실을 통해 도조를 성실히 내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도조를 성실히 내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매일 매일 하느님께 바칠 것을 정성껏 바치고 있는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매일 매일 성실한 신앙의 결실을 맺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는 오늘 어떤 결실을 하느님께 도조로 바치려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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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오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사랑받는 아들의 죽음”입니다. 제1독서에서 야곱은 늘그막에 얻은 아들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는데, 그의 형제들이 요셉을 질투하여 죽이려 합니다.
마침 유다의 중재로 목숨을 건지기는 하지만 요셉은 이집트로 팔려 가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요셉 덕분에 이스라엘과 그의 가족들이 목숨을 구하게 된다는 사실을 압니다.
오늘 복음에서 인용하는 시편 118(117)편의 구절처럼,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마저 당신의 일로 바꾸시는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을 발견하게 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당신을 내버리고 죽이겠지만, 당신을 통하여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임을 밝히십니다.
당신을 통하여 모두가 구원을 얻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야말로 포도밭 주인의 상속자임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소출을 내는 민족, 당신을 따르는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에 넘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행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결코 막지 못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을 정화하신 직후 벌어진 일입니다. 이렇게 복음서 이야기는 그 절정, 곧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대목에 이르게 됩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죽음이 지니는 참된 의미가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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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포도밭의 사랑의 노래’를 들려줍니다. 포도밭 주인(하느님)은 당신의 포도밭(이스라엘 백성)을 소작인(백성의 지도자)들에게 맡깁니다. 그리고 주인은 당신의 종(예언자)들을 여러 차례 보내지만 소작인들을 그 종들을 학대합니다.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돌로 쳐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지만, 그마저도 포도밭 밖으로 끌어내어 죽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얼마나 신뢰하고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실감나게 해 주는 노래입니다. 그 신뢰와 사랑이 너무도 커서 아들의 목숨까지도 건네주어 버리는 무방비의 신뢰와 사랑의 노래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이 신뢰와 사랑의 노래는 애절한 그 신뢰와 사랑이 거절당하고, 배반당하고, 끝내는 목숨까지 살육당하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가슴 아픈 노래입니다.
이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에 우리는 얼컥 눈물이 젖습니다. 한편, 이 노래는 그 큰 사랑과 신뢰를 거부해버리고 마는, 나약한 우리 인간의 배신 이야기입니다. 또한 고귀한 사랑과 신뢰마저도 한갓 우리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짓부숴버리고 마는, 배은망덕의 패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사제들과 원로들을 고발하며 꾸짖으십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꾀와 작태를 비웃으시며, 하느님의 깊은 섭리와 계획을 밝히고 계십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리돌이 되었다’는 성경말씀의 인용을 통해, 비록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겠지만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시대가 펼치신다는 역설의 신비를 가르쳐줍니다.
당신께서는 버려진 돌이셨지만, 머릿돌이 되시어 새로운 집인 새로운 백성을 세우셨음을 말해줍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한정적으로 구원의 역사가 보장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생각은 파기되고,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인 교회공동체에 보편적 구원이 사명으로 맡겨졌음을 드러냅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포도원 주인의 믿음과 사랑을 보게 됩니다. 도조를 받으러 보낸 종들이 두 번씩이나 무참히 맞고 죽는 배신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아들을 보내주시기까지 베풀어지는 믿음과 사랑입니다.
그것은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마저도 죽음을 당하지만, 끝까지 포도원을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무한한 신뢰와 사랑입니다. 이는 아무리 인간의 죄가 크다 하여도 인간의 죄를 뛰어넘는 하느님 계획의 초월성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참으로,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입니다.”(마태 21,42)
사실, 도조를 바치지 않고 못된 일을 저지른 소작인들, 그들은 일상의 삶 속에서 잘못과 죄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소작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끊임없이 주시는 포도밭 주인에게 여전히 우리의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완고한 우리들의 자아상 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느님을 밀쳐내고, 그분의 권리를 강탈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탐욕으로 인해 주인의 아들마저도 죽이고 마는, 악한 마음과 배은망덕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지금 당장에 주시는 회개의 때를 잘 붙잡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에 따라 좋은 결실을 맺고, 그 풍성한 소출을 도조로 바쳐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바로 오늘이 그분의 신뢰와 사랑에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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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태 21,42)
주님!
당신께서 제게 하신 일, 놀랍기만 합니다.
도망칠수록 더 강한 사랑의 철창으로 꼭 가두시고,
제 안에 꿈틀거리는 반역을 멈추게 하십니다.
거부되고 버려지고 넘어져도 오히려 그를 통해 구원의 섭리로 이끄시고,
감춰둔 사랑의 신비를 보여주십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제 머리 위에 당신 사랑을 두고,
당신께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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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마태21,38)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포도밭의 주인은 '하느님'이십니다. 포도밭의 소작인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고, 주인이 보낸 종들은 많은 '예언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보내어진 주인의 아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칠죄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는 그 자체로도 죄가 되는 동시에 또 다른 죄를 낳게 하는 일곱 개의 '죄의 뿌리'를 말합니다.
일곱 가지 죄의 뿌리는 이렇습니다. 곧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칠죄종 중에서 질투(시기)와 탐욕(욕심)이 얼마나 무서운 죄를 만들어 내는지에 대한 분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기 꿈쟁이가 오는구나. 자, 이제 저 녀석을 죽여서 아무 구덩이에나 던져 놓고, 사나운 짐승이 잡아먹었다고 이야기하자."(창세37,19-20)
야곱이 늘그막에 얻은 아들 요셉을 다른 어느 아들보다 더 사랑하자, 그의 형들이 이를 시기하여 동생 요셉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집트 상인들에게 은전 스무 닢에 팔아넘깁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인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탐욕이 낳는 죄의 모습입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탐욕이 파견된 많은 예언자들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파견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까지도 죽이는 무서운 죄를 만들어 냅니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제가 어머님 기일이었는데, 어제 제가 알고 있는 박성여(글라라/92세) 수녀님께서 선종하셨고, 배둔공소 신자 가족인 우해섭 형제님도 돌아가셨습니다.
'공수래공수거', 곧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는 인생이라는 것을 나보다 앞서 떠나가는 이들의 죽음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합니다.
넘 시기 하지도, 넘 욕심 부리지도 맙시다!
"주님, 세상을 떠난 수도자 박성여(글라라)의 영혼과 우해섭(요셉)의 영혼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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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의 것>
마태오 21,33-43.45-4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유를 들어 보아라. 어떤 밭 임자가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웠다.’ 그리고 소작인들에게 내주고 멀리 떠났다. 포도 철이 가까워지자 그는 자기 몫의 소출을 받아 오라고 소작인들에게 종들을 보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그들을 붙잡아 하나는 매질하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였다. 주인이 다시 처음보다 더 많은 종을 보냈지만, 소작인들은 그들에게도 같은 짓을 하였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아들을 보자,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이 와서 그 소작인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그렇게 악한 자들은 가차 없이 없애 버리고,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 하고 그들이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에게서 하느님의 나라를 빼앗아, 그 소출을 내는 민족에게 주실 것이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이 비유들을 듣고서 자기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군중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나의 것>
나의 것
나에게로 왔으니
나에게서 가야 하는 것
나의 것
내가 붙잡을수록 악해지고
내가 놓아줄수록 선해지는 것
나의 것
내가 매달리면 나를 죽이고
내가 풀어주면 나를 살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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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우리의 입 안에서는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바로 세균 전쟁입니다. 실제로 200종이 넘는 세균이 우리의 구강 내 공간에 서식하고 있다고 하지요. 양치하면 세균이 완전히 사라지면서 입안이 깨끗해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라지지 않고 많은 세균이 대부분 그대로 있습니다.
하지만 해를 끼치는 세균은 아주 미세하고 대다수는 일종의 ‘치안경찰’로서 잇몸과 치아 건강을 증진합니다. 만약 이 전투가 없다면 우리의 치아는 머지않아 몽땅 빠져버리고 말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도 잘 모르지만, 제게 도움을 주는 세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균만 제게 도움을 주고 있을까요? 이 밖에도 내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많이 사용하는 스마트폰을 생각해보십시오. 이제는 거의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의 스마트폰을 직접 만들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이의 노력으로 만든 이 스마트폰으로 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힘은 주님의 도움입니다. 숨을 쉬고 활동을 하고 잠을 자며 쉬는 것 모두가 주님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감사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를 잘 보면, 포도밭 주인이 얼마나 자비로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소작인을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맡긴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포도밭을 일구어 울타리를 둘러치고 포도 확을 파고 탑을 세우는 일은 원래 소작인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스스로 합니다. 이렇게 소작인들은 주인에게 큰 은혜를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주인이 잘해주면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 있느냐면서 사람들의 비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소작인들은 포도밭을 가꾸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포도밭을 빼앗기 위해서 주인의 아들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참 못된 소작인들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이 비유 말씀을 통해 묵상하게 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많은 것을 얻습니다. 그 모든 것이 주님께서 주신 커다란 도움이며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도움에 걸맞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고 있을까요? 오히려 주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말과 행동을 반복해서 짓고 있지 않나요? 우리가 행하는 모든 악은 결국 하느님께 행하는 것이 됩니다. 참 못된 하느님 자녀의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못된 소작인이 아닌 착한 소작인의 모습으로 하느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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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써나가는 세 권의 책>
사람은 누구나 평생 세 권의 책을 쓴다고 합니다. 제1권은 과거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이 책은 이미 집필이 완료돼 책장에 꽂혀있습니다. 제2권은 현재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이 책은 지금의 몸짓과 언어 하나하나가 그대로 기록됩니다. 제3권은 미래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그렇다면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책은 어떤 책일까요? 제2권인 현재라는 이름의 책입니다. 아마 1권과 3권은 부록이라고 생각해도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재를 얼마나 충실하게 사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생각납니다. ‘과거는 시효가 지난 수표이고, 미래는 약속 어음일 뿐이다. 그러나 현재는 당장 사용이 가능한 현찰이다.’ 현재라는 이름의 책을 멋지게 작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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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언제나 당당하게>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이고, 우리는 그 밭의 일꾼입니다. 일꾼은 열성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일꾼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고 주인이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어 그 열매를 주인께 바쳐드려야 합니다. 만약 일꾼이 주인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한다면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일꾼으로서 자격을 잃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않는다면 이미 하느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느님께서 주신 포도밭에서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하느님의 훌륭한 일꾼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여도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해야 할 일을 했으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일꾼은 일꾼입니다. 주인을 꿈꿀 수 있을지언정 주인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에 앞서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해야 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서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롭지 못한 삶을 지적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이 두려워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왜 군중이 두려웠을까요? 자기들이 의롭게 살았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의인은 아무도 겁내지 않는 법입니다. 그러나 “도둑이 제 발 저린다.” 는 옛말이 있듯이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 한 것은 곧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말해주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당당하셨습니다. 바리사이나 수석 사제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하시는 일이 하늘 아버지의 뜻에 의합하고 당신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요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주신 아버지의 뜻만을 추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안에 머무는 만큼 당당히 가실 길을 가야만 하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으신 그 길을 당당히 걷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신상옥씨의 ‘내 발을 씻기신 예수님’을 묵상합니다.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참된 삶을 보여주셨네.
가시밭길 걸어갔던 생애,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네.
죽음 앞둔 그분은 나의 발을 씻으셨다네.
내 영원히 잊지 못할 사랑,
그 모습, 바로 내가 해야 할 소명.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이 아파하는 곳으로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당신 손길 필요한 곳에
먼 훗날 당신 앞에 나설 때
나를 안아주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길, 기쁨으로 걸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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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하나?>
-신뢰, 꿈, 시야, 한결같음-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요즘 작년에 이어 계속되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묻게 되는 절박한 공통적 질문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이미 어제 오늘 말씀을 보면서 택한 강론 제목입니다. 복음의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의 주인공이 예수님과 제1독서 ‘이집트로 팔려가는 요셉’의 이야기에서 착안했습니다.
창세기의 요셉이 흡사 수난당하는 예수님의 예표처럼 생각됩니다. 다음 이어지는 요셉의 이야기의 결말은 해피엔드로 끝나고 예수님 역시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해피엔드로 끝나는 말그대로 궁극엔 ‘하느님의 승리’로 끝나는 두분의 인생 여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웁니다. 본격적 가르침에 앞서 몇가지 예화를 나눕니다.
1.3월5-8일 까지 역사적 이라크 사목 방문 여정에 오르게 된 교황님의 메시지가 감동적이었습니다. 문득 1968년 아시아 순례 여정에 올랐던 토마스 머튼이 연상되기도 했습니다.
“나는 형제애와 화해를 찾아 평화의 순례자로 왔습니다. 친애하는 이라크의 형제자매들이여, 여러분에게 평화가 있기를! 며칠동안 나는 마침내 여러분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를, 여러분의 얼굴을 보기를, 아주 오래되고 특별한 문명의 요람이었던 여러분의 땅을 방문하기를 갈망해 왔습니다.”
흡사 교황님의 3박4일 이라크 방문 여정이 교황님의 삶의 여정을, 평화의 여정을 압축한듯 보입니다.
2.어제 면담고백성사차 방문했던 마리 레몽 수녀님의 전달 말씀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여주에 노수녀님들 귀는 거의 들리지 않아, 매달 보내주는 신부님의 강론집을 그렇게 기다리고 좋아합니다. 어제도 ‘고맙다’는 인사 전해달라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듣는 순간 아무리 나이들어 노화로 신체 기능은 떨어져도 결코 늙지 않는 하느님 찾는 열정의 영혼임을 깨닫습니다. 영혼 깊이 각인된 살아있는, 결코 늙지 않는 하느님 향한 ‘그리움’임을 깨닫습니다. 아니 세월 흘러 죽음에, 하느님께 가까워질수록 더 간절해지고 절실해 지는 주님 향한 그리움에 열정같습니다.
3.놀랍고도 신비로운 실화입니다. 국내 수족관에서 부화해 제주에서 방류된 푸른바다거북이 석달간 약 3850km 거리를 이동해 거북이들의 고향, 주 서식지인 베트남 해안까지 간 사실이 확인되었답니다. 또 한 경우는 국내 번식 여름철새인 ‘벙어리뻐꾸기’의 월동경로가 확인되었다합니다.
필리핀을 거쳐 인도네시아 동부 인도네시아 동부까지 하루 43km, 109일 동안 무려 4691km 걸려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기사였습니다. 말그대로 목숨을 건 사투死鬪와도 같은 새들의 이동 여정임을 봅니다. 하느님 심어주신 본능 깊이 각인된 고향 찾는 동물들의 DNA처럼 우리 영혼 깊이 각인된 본향인 하느님 찾는 영혼의 DNA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생 하느님 찾는 여정중인 우리들에게 오늘 예수님과 요셉의 인생 여정은 우리에게 좋은 가르침을, 깨우침을 줍니다.
첫째는 신뢰입니다.
예수님이나 요셉의 자질중 우선적인 것은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절대적 신뢰였습니다. 백절불굴의 인생여정을 가능하게 한 두분 삶의 원동력은 이런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이고 항구한 신뢰였습니다.
둘째는 꿈입니다.
꿈있어야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만이 꿈을 꿉니다. 꿈을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요, 꿈이 사라진 곳 바로 거기가 죽음이요 지옥입니다. 인간 품위를 지켜주는 것도 꿈입니다. 몸은 노쇠해가도 하느님 찾는 꿈은 날로 생생해야 할 것입니다. 요셉은 꿈장이라 불릴 정도로 늘 하느님을 꿈꾸는 사람이었고, 예수님 또한 평생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하느님 나라를 실현하며 살았던 분입니다.
셋째는 시야입니다.
두분은 결코 꽉막힌 우물안 개구리가, 자폐의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늘 하느님을 꿈꿨던 참으로 깊고 넓은 영적 시야를 지녔던 분들입니다. 영적고공비행靈的高空飛行의 여정처럼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 넓고 깊은 영적시야를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수난과 죽음 넘어 부활에 까지 열려 있었던 예수님의 영적 시야였고, 이집트에서의 성공으로 금의귀향錦衣歸鄕까지 내다봤을 요셉의 영적 시야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또한 절대적 주님 신뢰에 대한 은총의 선물이겠습니다.
넷째는 한결같음입니다.
두분은 결코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았습니다. 결코 좌절挫折하지도 않았고 절망絶望하지도 않았고 끝까지 기다리고 인내忍耐하며 하느님의 꿈을 실현시켰습니다. 또 삶의 여정에서 오는 온갖 시련중에도 한결같이 제자리에 충실하셨으니 하느님 섭리의 은총이 늘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의 온갖 고초를 한결같이 견뎌내며 승리의 여정을 살았던 요셉이요, 오늘 복음에서처럼 예수님께서도 온갖 박해와 수난을 묵묵히 견뎌냈기에 부활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의 입을 빌려 초대 교회 신자들의 시편에 근거한 다음 고백은 예수님과 요셉뿐 아니라 파스카의 신비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승리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의 절정이자 결론이요 평생 화두로 삼아 묵상할 구절입니다.
“집짓는 이들이 내 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118.22-23)
이어지는 시편도 참 좋습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구절로 하루하루 이렇게 승리의 기쁨, 파스카의 기쁨을 고백하며 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날은 주께서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자, 춤들을 추자.
주여, 우리를 살려 주소서
아아 주여, 우리를 잘 살게 해 주소서.”(시편118,24-25)
새삼 예수님과 하나된 우리 하나하나가 수도공동체의 모퉁이의 머릿돌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섭리에 대한 절대적 신뢰, 하느님을 꿈꾸는 삶, 깊고 넓은 영적시야를 지니고 한결같이 살아갈 때 승리의 여정에 모퉁이의 머릿돌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승리의 인생 여정을 살아가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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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모든 사건 안에 하느님의 큰 섭리가 감추어져 있음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 주셨네."(영성체송)
오늘 미사의 복음 환호송과 영성체송이 복음 속 비유를 요약함과 동시에 예수님의 운명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인은 마침내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마태 21,37)
소출을 받아 오라고 앞서 보낸 종들은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의미합니다. 악한 소작인들에게 학대 받고 죽임까지 당한 종들은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스러진 참 예언자들을 가리키지요. 그럼에도 주인은(하느님은) "마침내" 외아들을 보내십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당신 모상을 나누어 받은 사람이란 존재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으신 까닭이겠지요.
"그를 붙잡아 포도밭 밖으로 던져 죽여 버렸다."(마태 21,39)
포도밭 주인이 보낸 아들의 운명은 예수님께서 받아안으실 운명입니다. 불보듯 뻔한 비극적 결말을 아시면서 어떻게 하느님은 성자를 보내시고, 왜 예수님은 이 계획에 순종하신 걸까요?
그 답은 오늘 제1독서 안에 들어 있습니다.
"이들이 요셉을 이집트로 데리고 갔다."(창세 37,28)
오늘 창세기의 대목은 평온한 마음으로 읽어나가기에 너무 험악합니다. 아버지 야곱의 편애를 받던 요셉이 시기와 질투에 눈이 먼 이복 형제들에 의해 광야에서 구덩이에 던져지고 죽음까지 당할 위험에 처합니다. 그 와중에 요셉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이집트에 종으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지요.
"땅에 기근을 불러일으키시고 모든 양식을 끊으셨을 때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린 요셉이었다. ... 그러자 이스라엘이 이집트로 와 함족의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시편 105,16-17.23)
어떤 사건 앞에서 우리는 그저 한 단면밖에 보지 못합니다. 그나마도 어떨 땐 왜곡해서 보기까지 하지요. 한 사건 안에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잇는 하느님의 뜻이 들어 있지만, 우리의 시야는 평면적이고 한정적이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에게 그처럼 처절히 버림받은 요셉은 하느님의 보살핌으로 이집트에서 재상 자리에 오르고, 결국 야곱 집안을 기근에서 구합니다. 그리고 "사백삼십 년 후"(탈출 12,40 참조)에 무수히 번성한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민족적 정체성의 근간이 될 엄청난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한 형제들 안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건에도 하느님의 놀라운 구원 역사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외아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 과연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을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 답은 예수님의 비유에 대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들어 있습니다.
"제때에 소출을 바치는 다른 소작인들에게 포도밭을 내줄 것입니다."(마태 21,41)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분께 치욕스런 죽음을 안긴 십자가 사건은 도리어 구원의 지평을 온 세상으로 확장시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의 임금을 넘어서 온 세상의 임금, 그리스도왕이 되시지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서 이루시는 구원의 섭리를 우리는 속속들이 알지 못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유한하고 우매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인생길의 희로애락, 길흉화복, 생로병사의 온갖 파도를 맞으면서, 겸손히 주님의 섭리를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몫일 겁니다.
벗님! 구원의 그날까지, 주님 얼굴 뵈옵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그날까지,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닙니다. 지레 겁먹지 말고 미리 절망하지 말고 시간과 공간을 주인이신 주님께 피신처를 두고 그분만 믿고 나아갑시다. 주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시면서도 작고 보잘것없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원을 섭리하는 분이시니까요. 믿음으로 그 섭리 안을 걸어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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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zW0JINEjWR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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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마태 21, 37)
우리의 존중을
되돌아보게 된다.
존중에서
멀어지면
사랑에서도
멀어진다.
존중에 빚을
진 사람들이다.
참된
존중은 결핍과
부족함도 은총이
되게 한다.
우리를 향한
존중으로
탄생과
십자가가
주어졌다.
구원을
이해하는
방식은 바로
존중이다.
하느님께서는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시다.
존중으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사랑을 늘
가르쳐주신다.
기다림도
존중이고
걸어가는
이 여정도
존중이다.
구원의
방식은
언제나
존중의
방식이다.
존중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관계이다.
존중은
모든 관계를
떠 받드는
받침돌이다.
우리의
폭력성과
살인의 욕구를
치유해주는
존중이다.
사순시기는
다시 존중으로
돌아갈 때이다.
생명과 생명은
존중으로
연결되어 있다.
존중은
다양성과
함께 살아가는
말씀의 반석이
된다.
말씀이
존중이 되시어
여기 이곳에
오셨다.
존중이
사람이 되셨다.
하느님의 시간은
존중의 시간이다.
참된 존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구원의 핵심이며
여정의 전체가
되는 것은
존중이다.
모든 것은
존중 받고
존중 하는
사랑이다.
심오한 진리란
다름아닌
존중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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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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