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주파수 202111
사물– 서성이는 것들에 대해
안규보
사물을 떠올린다. 사물은 생각보다 빠르고 구체적이다. 밋밋한 내 인생의 몇 안 되는 클라이맥스에는 소리치는 어머니나 헐떡대던 남자의 표정보다 그 뒤에 있던 사물이 기억에 더 남아있다. 며칠을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쉽게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에도 사물은 나를 보고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불현듯 나는 내가 잡다하고 사랑스러운 것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초코케이크, 노트, 사진, 향수, 장난감, 감, 잠자리, 머리핀, 타로카드, 볼펜. 이 단어 중에 한두 개쯤은 마음의 그물에 걸리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사물은 당첨 확률이 높은 로또 같아서 그렇게 걸린 무엇인가는 위대한 작품으로 재탄생되기도 한다. 그렇게 작품이 된 사물은 누군가의 감정으로 전이되고 확산되어 영생의 삶을 살기도 한다. 글을 창작하는 처지에 있는 나도 사물에 빌붙어있는 셈이다. 나만 녀석들을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녀석들에게 잘 보여야 할 것 같다. 나야 눈 두 개에, 입 하나뿐이지만 녀석들의 눈과 입은 헤아릴 수 없으니 언제 어디서 말을 걸지 모르기 때문이다. ‘너 그렇게 살지마’ 라고.
가끔 침묵을 고수하는 녀석들도 있다. ‘새벽배송 프레시백’이 그렇다. 첫 배송 때 녀석은 뿌듯해하며 한여름 더위로부터 신선식품의 적정온도를 지켜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나는 그 쇼핑몰에서 더이상 식료품을 사지 않는다. 프레시백은 아무렇게나 접힌 채 캣타워 위에 올라가 있다. 그 안에는 오래된 사과와 버려야 할 니트 옷가지가 쑤셔박혀 있다. 그리곤 침묵이다. 세탁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울 때마다 마주치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허리가 굽은 할아버지처럼 그저 지긋이 바라볼 뿐이다. 나는 우리 집에서 그 녀석이 제일 무섭다.
사물은 때로 사람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욕실에 빈 샴푸나 바디 샤워통이 그대로 쌓인 걸 보면 내가 얼마나 칠칠치 못한지 알게 된다. 내 한 몸 씻고 빠져나가면 그뿐인 인간. 남아있는 것을 돌볼 줄 모르고, 머물렀던 자리를 말끔히 갈무리하는 법도 모르는 칠칠이.
그런 사람에겐 의례 물건이 바리바리 따라온다. 차마 보고 싶다 말은 못 하고 버리지 못하는 것으로 대신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너무 소중해 뭐라도 채우고 싶은 똥강아지다. 레이저 포인터를 쫓듯 그대들과의 시간을 쫓는다. 잡히는 것이 없다. 애꿎은 물건을 산다. 그러면 손에 잡힌다. 삶의 방, 여기저기 그렇게 늘어놓는다. 나에게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돌볼 줄 모르고, 머물렀던 자리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떠나갈 용기도 없어서 매번 물건들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언제 어른 될래’ 라고
내가 누군가의 사물이 되는 경우도 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나에겐 친구가 있다. 우리는 10년 넘게 서울 강북에서 함께 살았다. 그녀가 자리 잡은 돈암동에 내가 따라와 자리를 잡았고, 내가 삼선동으로 옮기면서 그녀도 쌍문동으로 시집을 갔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 친구가 선물했던 쌀통과 청소기는 10년 넘게 나와 함께 하고 있다. 그야말로 쌀통과 청소기 같은 친구다. 그녀는 올 11월에 서울을 떠난다. 대학교 때 먼저 취직한 그녀가 서울로 가버렸을 때도, 호주로 훌쩍 워킹홀리데이를 떠났을 때도, 결혼했을 때도 나는 한 번도 그녀의 이사를 실감했던 적이 없었다. 그녀의 공간을 채우고 있는 사물들은 언제든 나를 따스하게 맞아주었으니까. 그러나 나의 사물이 멈춰있는 동안, 그녀의 사물은 변화하고 있었다. 그녀는 레이저 포인터를 쫓지 않았다. 대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남아있는 시간을 위해 사물을 사들였고, 떠나야 할 때는 과감히 버렸다.
그녀의 이사가 결정된 뒤, 나는 내가 그녀의 사물이 되었음을 실감했다. 내가 멈춰있던 지난 5년 동안 서서히 사물이 되었다. 그녀는 나를 어르고, 타이르고, 안타까워하다가, 가만히 강북의 한 켠에 놓아두고 일어섰다. 그녀에게 당부하고 싶다. 부디 나를 양지바른 곳에 놓아 주길, 그리고 내가 항상 그리워하고 있음을 기억해주길.
내 책상 위에는 그 친구가 호주에서 사다 준 타로카드가 한 장 서 있다. THE SUN. 근엄한 표정을 한 고양이가 비스듬히 옆을 바라보고 있다. 그 곁에는 사기로 만든 거북이, 고양이, 봉제 유니콘이, 그 뒤로는 ‘행복해져라’ 라고 쓴 캘리그래피 액자가 있다. 글자에 마음을 담은 것은 아버지다. 사물에 마음을 담은 것은 나였다. 매일 숨어 담배를 피울 때마다 새벽배송 프레시백은 나를 걱정하지도 질책하지도 않는다. 그냥 놓여 있을 뿐이다. 욕실의 빈 바디 샴푸통은 나를 원망하지 않는다. 쓴 적이 없는 오색 마커펜도, 노트도 그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알면서도 나는 매일 새벽배송 프레시백의 눈치를 보며 담배를 피울 것이고, 샴푸 통을 보면 미안함이 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내가 그것을 바라든, 바라지 않든.
안규보 | 써보고, 해보고, 살아가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