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가..."
온 몸에 검은천을 두르고 있던 남자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이곳은 험준하기로 유명한 태백산의 거의 꼭대기였고 남자의 앞에
는 엄청나게 커다란 바위 하나가 군데군데 이끼가 끼인채로 놓여져있었다. 그 주변은 온통 안개가 쳐져있었으며 산세와 어울
리지 않게 은밀한 분위기가 풍겨지고 있었다.
남자는 바위앞으로 걸어가더니 잠시 눈을 감고 한 손을 바위에 갖다댄 후 눈을 감자, 그 커다란 바위가 여러갈래로 쪼개지며
스르륵 성인 한 명이 지나갈 정도로 갈라지는 것이었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뜨고는 안으로 빠르게 달음질쳤다. 사내가 사라지
자 바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고 그 주변은 안개가 더욱 심해져 한 치 분간도 못할 정도로 사라졌다.
"이, 이런 말도 안되는...!"
태겸이 너무나 당황스럽고 어이없는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심하게 말을 더듬자 단이황은 한번 피식 웃고는 입을 다물었다. 이
미 정신이 나간 듯, 태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넋나간 표정을 지었다. 그때 단이황이 다시 한 번 말했다.
"포기하시오."
"...?!"
"솔직히 3성장군을 소환할 줄은 정말 몰랐소. 하지만 나도 천부인의 힘을 지닌 자. 3성장군의 성력으로는 나를 어찌할 수 없소.
그러니 이만 물러나주길 바라오."
그러나 태겸은 아무런 대꾸없이 계속해서 중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단이황은 포기한 듯, 등을 돌려 지하실의 출구를 찾기 위
해 걷기 시작했다. 그 때, 뒤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확 뿜어져나왔다. 단이황이 고개를 돌리자 태겸의 양 팔과 서 있던 주변에
아까 보았던 것과 비슷한 도형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단이황의 안색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게 변하며
굳은 얼굴로 소리쳤다.
"그만두시오! 당신이 지금 어떤 짓을 하고있는지 알고 하는 것이오!"
그러나 단이황의 말이 이미 들리지 않는 듯, 태겸은 초점없는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단이
황은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미친 짓이다! 저 상태로 또다시 성장소환을... 게다가 아까와는 차원이 틀려!'
지금 태겸은 또다시 성장소환을 하려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의 성장소환은 곧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원래 성장소환은 6등급에서 1등급까지 있었고 보통 4,5,6등급의 성장들은 전투중에서 간단한 보좌정도를 돕는 정도의 역할만
하는 것이었고 3등급부터의 성장들은 전문적 전투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3등급부터의 성장소환은 많은 정신력과 마력을 소
모하는 것으로 3등급은 일반적으로 수인, 2등급부터는 수인과 주문을 외워야만 소환할 수가 있었다. 그런데 아까 태겸은 3등급
성장을 소환하는 것만으로도 심각한 상처를 입었는데 지금 그는...
"주문을 멈추시오!"
단이황은 말리려고 다가가보려 했지만 이내 다시 멈추었다. 아까 태겸이 중얼거렸던 것이 충격때문이 아니라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 것이라면 이제 거의 소환준비가 끝나갈 것이고 만약 2등급 정도의 성장이 소환된다면 지금 자신의 힘으로 막기에는 거
의 불가능이었다.
'하지만 만약 태겸이 2등급 성장을 소환하고 쓰러진다면 소환술자가 없는 상태에서의 성장이 폭주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
면 이 마을, 아니 이 일대가 전부... 사라지게 돼!'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단이황은 결심한 듯 태겸에게 다가가보려 했다. 그 때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치며 단이황의 몸이 바람
에 밀려 주르륵 태겸의 반대쪽 벽까지 밀려나가 쿵 하고 부딪혔다. 생각보다 몸의 부담이 큰 것 같았다. 이제 태겸의 몸은 빛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도 않았고 심상치않은 기운이 온 몸으로 느껴져왔다. 그리고 잠시 후...
"왔다!!"
"쿠아아앙!"
"음, 그런가."
"네, 그렇습니다. 이제 거의 결착 단계에 이르렀다고 봐도..."
검은 천을 두른 남자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누군가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보고를 들은 사람은 은빛 머리칼을 지닌 남자
였고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잘 어울렸다. 남자는 머리가 아픈 듯 턱을 괴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자넨 누가 이긴다고 보는가?"
"제 생각에는 백중지세일거라 봅니다. 허나..."
"허나...?"
"제대로 싸운다면 역시 신 님이 이기시겠지요."
"흠, 그래. 그렇겠지. 하지만 아직 그 분은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돈지조차 모르고계시니..."
검은 옷의 남자는 계속해서 듣고만 있었고 은빛 머리의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지 눈을 감고 있었다.
"외람되지만 질문 하나 올리겠습니다."
"그래, 뭐지?"
"혹 백랑(白狼)님은 다른 생각을 가지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은빛머리의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흑륜(黑綸)의 천휘. 내 밑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 중 내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인 것 같군."
천휘라 불린 자는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하지만 그건 거의 일어날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백랑은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다.
"자네는 아직 잘 모르는군."
"무엇을 말입니까...?"
"세상에는 말이지, 일어날 수도 아니,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난다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구원을 바라고
행복을 원하지. 물론 자네도... 나도... 그 분도..."
"아아... 이것은...!"
단이황은 이것이 꿈이기를 간절히 바랬다. 방금 소환된 충격으로 불어닥친 돌풍때문에 그는 온 몸이 저릿저릿했으며 일어설
기운조차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각한 사람도 있었다.
"태, 태겸!"
단이황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태겸은 두 팔이 사라지고 없었으며 양 어깨에서 피가 콸콸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정신력을
너무 많이 쓴 탓인지 기절한 것 같았으며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지고 있었다. 아까 양 팔에 도형이 그려진 것은 태겸의 정신력
이 모자라서 스스로 양 팔을 소환의 제물로 바친 것 같았다.
'바보같은 짓을...! 하지만 이제 어쩐단말인가.'
빛이 점점 사그라지며 성장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아까와는 달리 몸집은 일반 성인과 비슷한 정도의 크기였으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없어져가는 의식을 억지로 붙잡으며 단이황은 칼로 몸을 지탱해가며 그 곳을 바라
보았다. 이윽고 빛의 완전히 사라지고 성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나를 부른 것이 누구인가?"
웅웅거리는 소음과 함께 지하실에 성장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태겸이 신음을 하며 대답했다.
"나... 나입니다... 내가 당신을..."
"허, 상태가 말이 아니로군. 저 자가 그렇게나 강한것인가?"
"아, 아니.. 이것은 당신을 소환하기 위해... 양 팔을 제물로... 그래서 이렇게..."
그러자 성장의 눈썹이 찌푸려지며 약간 화난 투의 목소리가 울렸다.
"소환하는 데 이 지경이라니...! 그렇다면 저 자도 별볼일없는 자겠군. 난 상대와 내가 백중지세가 아니라면 전투를 하지도, 원
하지도 않는다."
"그, 그렇지 않습니다... 저.. 저자는 처.. 천부인의 힘을..."
그 말을 들은 성장의 눈썹이 더욱 찌푸려지며 아까보다 더욱 큰 목소리가 지하실 전체에 울렸다.
"말도 안되는 소리!! 천부인의 힘을 끌어냈다면 네가 날 소환할 시간도 없이 너는 죽었을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너도 천부인의
힘을 쓸 수 있다는 것이냐? 대답해보거라!"
"그... 그건 아니..."
그 말을 힙겹게 마치자 태겸은 입을 다물었다. 아마 다시 기절한 것 같았다.
"미친 놈이로군."
성장은 아직도 분이 덜 풀린 듯, 욕설을 내뱉고는 단이황을 쳐다보았다.
"너. 정말 천부인의 힘을 끌어낼 수 있는것인가?"
"못한다."
성장은 크게 분노한 듯, 큰 소리로 고함을 쳤다. 일반적인 외침이 아니라 무슨 힘이 깃들어져 있었던 듯, 온 몸이 쥐어짜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단이황은 피를 울컥 하고 한움큼 토해냈다. 다시 조금 진정한 듯 성장은 아까보다는 부드러운 눈길로 단이
황을 쳐다보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저 미친 놈이 팔을 버려가면서까지 나를 소환했으니 그만한 보답을 해 주어야겠다. 하지만 난 나와 비슷한 실력의 상
대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아. 그렇다고 너를 살려두기는 저 녀석에게 미안하니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그걸 네 녀석이 해내면
너를 살려주겠다."
'제... 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