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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4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지혜 2,1ㄱ.12-22
복 음 : 요한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지금 2만 원을 받는 것과 한 달 뒤 3만 원을 받는 것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보십시오.
아마 지금 당장 받을 2만 원을 선호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달이나 기다리는 것보다는
적은 액수라도 지금 당장 받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비교는 어떨까요?
1년 뒤에 2만 원과 13개월 뒤 3만 원을 받는 것 중에는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3만 원을 선택하실 것입니다.
1년이나 1년 하고 한 달 더 기다리는 것은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한 달 더 기다리면 1만 원이 더 생긴다고 하니, 이를 선택합니다.
이 두 상황은 똑같이 만 원과 1개월이라는 차이를 다루고 있습니다.
만약 첫 번째 상황에서 지금 당장 받는 2만 원을 선택했다면,
두 번째 상황에서도 1년 뒤의 2만 원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선택을 합니다.
지금의 한 달은 미래의 한 달보다 훨씬 더 큰 차이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간이지만 이렇게 다른 시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누리는 시간과 남이 누리는 시간 역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어떻게 시간을 맞이하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시간을 사랑의 실천에 두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죽이는 시간이 아닌, 살리는 시간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자기 뜻만을 펼치는 시간이 아닌, 주님 뜻을 실천하는 시간이 되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일을 뒤로 미룰 시간은 없습니다.
그보다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할 시간뿐입니다.
후회와 좌절보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기보다
오로지 지금 주님 사랑에 집중하고 실천해야 할 시간을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있다면서, 율법을 어기고 있다면서 예수님을 공공의 적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표징과 그분의 말씀에 조금이라도 집중했다면
제거하려는 마음을 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 뜻만을 펼치려고 하고 있으니,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기의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고 있으니,
사람을 살리는 시간이 아닌 죽이는 시간을 만들어갑니다.
이런 시간 안에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은 사라지고 맙니다.
우리는 시간을 어떻게 만들고 있을까요?
사람을 살리는 시간인지 아니면 죽이는 시간인가요?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는 자기 뜻만 펼치는 시간인가요?
아니면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사랑을 실천하는 주님 뜻을 펼치는 시간인가요?
주님 뜻을 펼치는 사람만이 어떤 순간에서도 함께하는 사람이고
하느님 나라의 큰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토론토 예수성심 성당으로 ‘사순특강과 신문홍보’를 다녀왔습니다.
며칠 여유가 있었는데 오타와에 있는 공동체에서 ‘미사와 사순특강’을 부탁하였습니다.
토론토에서는 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꽃동네 피정의 집에서도 ‘미사와 고백성사’를 부탁하였습니다. 차로 2시간 걸리는 거리입니다.
보통은 남는 시간이면 미술관도 가고, 시내 구경을 갔었는데
이번에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를 맞이해서 주님께서 제게 ‘은총’을 주셨습니다.
오타와에서는 허리까지 올라온 눈을 보았습니다.
늦은 시간 사순특강을 듣기 위해서 오신 30여분의 교우들을 보았습니다.
왕복 10시간이 넘는 거리였지만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사목하는 성당은 130년 역사를 지녔다고 합니다.
지역에서 ‘음악회’를 신청할 정도로 성당은 넓고, 크고, 아름다웠습니다.
미사 전에 반주자는 아름다운 성가를 연주하였습니다.
제가 도움을 주러 갔지만 오히려 저는 교우들의 열성과 아름다운 성전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꽃동네 피정의 집에서는 아이티에서 사목하다 피정 때문에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께 대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끌러드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던 것처럼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의 헌신과 열정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왕복 10시간 차량 봉사를 하는 형제님의 노고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며, 가는 길에 묵주기도를 하고, 복음을 읽고, 꽃동네 찬양 팀의 성가를 들었습니다.
어쩌면 지루할 수 있는 여정이었는데 차 안이 마치 피정의 집 같았습니다.
차창 밖에는 하얀 눈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300킬로미터 이상 직진으로 펼쳐진 도로는 마치 천국으로 가는 길 같았습니다.
이민 생활의 애환을 듣기도 하였고, 성당에 있었던 사제들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교우들은 사제의 영성과 인품 때문에 사제를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사제서품을 받았기 때문에,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허물이 있어도, 다소 고집이 있어도,
행정의 미숙함이 있어도 존경하고, 존중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처의 눈에는 부처가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가 보인다는 말처럼
신심이 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교우들은 그럼에도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럴수록 사제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가 신발 끈을 풀지 못할 만큼 영적으로 깊은 분들을 만났습니다.
사제들의 모임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신부님께서 신발을 벗었는데 냄새가 심했습니다.
다른 신부님들은 코를 막기도 하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님의 말이 분위기를 따뜻하게 바꾸었습니다.
“오늘 일을 많이 하셨나 봅니다.”
하루 종일 신자들과 만나면서 열심히 일을 했기에
발에서 냄새가 난다고 이해하시는 신부님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과연 어떤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을까요?”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 하느님께
어떤 다리를 놓아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부정과 비난의 다리는 분노와 미움을 키우게 됩니다.
칭찬과 긍정의 다리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보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웃들에게 비난과 부정의 다리가 있다면 그것을 치워버리고
칭찬과 격려, 긍정과 사랑의 다리를 놓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뜻으로 세상을 보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신앙의 눈, 믿음의 눈,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 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 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 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태어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이제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을 다니신다.
그리고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 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겁내고 계시리라 생각했는데,
축제 때 드러내 놓고 말씀하시자 군중은 놀란다.
사람들이 기를 쓰고 그분을 잡으려 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26절) 하고 말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2,23)
또 헤로데가 메시아가 태어날 곳이 어디냐고 묻자
메시아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의 증언을 증거로 제시하였다.(마태 2,6 참조)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고 하신다.
그러시면서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 하셨다.
즉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께서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다른 모든 만물이 알지 못하는 아버지를 그분 홀로 아시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하기로 된 때를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잘 알고 있는가?
오상선 바오로 신부
드라마들을 보면, 항상 악역이 있고 선량한 주인공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악인의 술수나 모함 때문에
온갖 오해와 박해를 받거나 위기에 처하게 되지요.
시청자들은 한결같이 악인을 보며 저런 나쁜 놈(년)이 있나 흥분하며
마치 자신이 주인공인 것처럼 불쌍한 주인공 편이 되며 함께 울고 웃습니다.
대분분의 결말은 해피앤딩이지요.
그제서야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뻐합니다.
이렇듯 사람들 마음 안에는 늘 의인의 피가 흐르고 있고,
악인을 선천적으로 싫어하고 거부하는 경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이런 악인들이 꼭 있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악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벗님 여러분은 참으로 의인인가요? 여러분 주위에 진짜 못되먹은 악인이 있나요?
의인은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지혜 2,12.16.18)
하느님이 의로운 분이시기에 하느님의 자녀는 의인일 수밖에 없고,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지혜 2,13) 온유하고 인내로운 사람입니다.(지혜 2,19)
그래서 의인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할 줄 압니다."(지혜 2,22)
반면, 악인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실 원래부터 악인은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다 하느님의 모상에 따라 창조된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원래의 자기 모습을
어떤 이유에서든 상실하거나 왜곡된 사람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7,29)
당신을 믿으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죽이려고까지 하는 유다인들을 피해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가십니다. 그러다가 초막절 축제 때가 되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요한 7,10)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지요.
당신을 두고 메시아니, 아니니 갑론을박을 벌이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신"(요한 7,28) "나는 그분을 안다"는 내용 안에
저 엄청난 고백, 아니 선포가 들어 있습니다.
사실 "안다"는 말은 예루살렘 주민들의 대화에서 먼저 등장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요한 7,27)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생각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자렛 출신에 마리아와 요셉의 외아들이며
지금은 집을 떠나 돌아다니는 방랑 설교자로서 식자층도 못 되는
제도권 밖의 사람들에게 스승이라 불리는 치료사"라는 정도의 정보는
굳이 감출 필요 없이 드러난 사실이니까요.
그러니 그들이 영 헛다리를 짚고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 역사와 사실에 기인하기 때문에
인간 예수에 대해서는 대략 그림이 나온다고 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 앎의 한계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지혜 2,22),
지혜서 저자는 의인에 대한 악인들의 음모를 적나라하게 나열한 뒤,
결국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지혜 2,21)고 확정합니다.
예루살렘 주민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앞에 두고
믿음과 의혹 사이 어디쯤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습니다.
아직 "그분의 때가 오지 않았기 때문"(요한 7,30)에
지혜서에 나열된 악행을 적극적으로 자행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건 불신과 적대감이 아직 행동으로 표출되지 않은 단계일 뿐,
예수님이 오시기로 되어 있는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이심을 믿을
이유보다 믿지말아야 할 이유에 더 집착하는 그들의 저울은 이미 기울었다고 보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는 시점에서 예수님이 "큰 소리로" 하느님 아버지를 안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도 성전이라는 공적인 특수 장소에서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예수님의 앎은,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요한 7,29)에 참됩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아드님의 오심, 아드님과 하나이신 아버지의 보내심은,
소위 인간 조직 안의 파견 근무나 소임 이동처럼
한 개체가 다른 개체에게 일정한 권한을 위임하고
공간적 장소적으로 이동시키는 것과는 다릅니다.
완전히 하나시기에 서로를 완벽히 알고 온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와 아들이
세상 구원이라는 계획을 위해 자신을 서로에게 모조리 내주고 텅 비어버린 신비,
흡사 죽음같은 비움의 상태가 육화이며 강생이니,
우리 경험의 틀로는 가히 짐작조차 어렵겠지요.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커집니다.
아마도 그건 육화, 강생에 이어 십자가 구속이라는
남은 잔을 채우는 소명에 온전히 동의하신 까닭이겠지요.
또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인 이상 더는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누구에게도 숨길 필요가 없으니 그리 당당하실 수 있으신 것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감히 피조물이 하느님을 안다고요?
사실 진정으로 그러고 싶지만, 천상에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처럼 온전한 앎은 불가능하겠지요.
우리가 하느님을 다 알 수는 없음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하느님을 더 깊이 알 수 없다는 인간적 한계를
고통스럽게 절감하며 몸부림치고 눈물지을 때,
바로 그때 앎이 곧 사랑이 됩니다.
그토록 진심으로 당신을 찾는 이를 하느님께서 모른 체 하실 리 없으시니까요.
그리고 지식으로 차오르는 "앎"이 아니라
사랑으로 깨닫는 "앎"을 존재 가득 채워주실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
혹시 "나는 그분을 안다"는 이 고백이
외침은커녕 입 안에서, 목구멍에서만 맴돌고 있다면,
아니 아직 뱃속에서조차 형성이 안 되었다면,
각자 자신의 앎이 어디에서 멈추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 눈을 멀게 하고 시야를 흐리게 하는 것이
이기심과 탐욕인지, 죄의식과 두려움인지, 무관심과 게으름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혹시 자신이 인격신인 하느님과의 관계를 미꾸라지처럼 피하면서
그저 단순한 "종교 장신구주의자" 정도로
성당 건물만 오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면 좋을 듯합니다.
어쩌면 오늘 예수님께서 던지신 "나는 그분을 안다"는 초대가
우리 신앙 인생을 재점검할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진정 "은총의 때"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면 알수록 나는 의인이 되고,
모르면 모를수록 악인이 될 위험은 많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아는 하느님의 귀한 아들딸 되시길 축원합니다.
박재찬 안셀모 신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까?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는 예수님은 외적이고 습관적이며 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예수님의 본성도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아십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사랑으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예수님, 책에 나오는 예수님,
남들이 말하는 예수님을 넘어 진정 우리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일치의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제가 청원자 때 수도원에서 본 영화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제목은 “에마논”입니다. 영화 제목이 왜 ‘에마논’일까요?
그것은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입니다.
영화는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영화 설정 자체가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세상 완성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신학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 하더라도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다만, 한 꼬마 아이가 그분을 알아보게 되는데,
그 아이가 이름을 묻자 경찰에게 끌려가는 주인공이
자동차 뒷유리창에 “no name”이라고 적습니다.
그런데 차창 밖에서 보면 이것이 “emanon”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이는 그를 “에마논”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고자 한 메시지는
결국 우리의 선입견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예루살렘 주민들 역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유다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하느님이 누구신지도 알고 있는데 모른다고 하니 화가 난 것입니다.
자매 형제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유다인들처럼,
내가 아는 예수님에, 갇혀 진정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요?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예수님께 화를 내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원망을 쏟은 적은 없는지요?
유다인들처럼 내가 아는 하느님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그 틀에 다른 이들을 끼워 맞추려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릇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식별이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하지만,
진정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지 않으면,
그 식별도 그릇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에마논”이란 영화에서 이름을 묻자,
주인공은 자신을 “no name, 이름이 없다고 소개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어디죠?
그렇죠. 구약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묻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 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을 ”야훼“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절대적이고 필연적 존재이며
모든 있는 피조물의 원천이신 하느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영화에서는 no name이라고 했을까요?
아마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예수님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신비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분,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일 겁니다.
나아가 우리 곁에 다가오셨지만, 우리가 정해놓은 것들 때문에
진정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삶,
그리고 그분의 죽음의 신비에 동참하고 관상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그분이 누구인지
온몸과 온 마음으로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하고 관상하며
그분처럼 온전히 하느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이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상하는 … 진정한 이유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불붙기 시작하면,
우리의 상상력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정되고 불완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새 생명의 씨, 173)
사순시기의 중반을 보내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특별히 이 사순시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과 생생한 사랑의 관계를 믿음으로 맺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심을 믿고,
그분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 안에 점점 충만해질 때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의심도, 판단도, 편견도, 집착도 없는
온전한 일치 영이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할 때 우리는 제대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또한 제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로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머리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름 없으신 그분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 곁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더 큰 사랑에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며,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조금 나를 힘들게 한다고
그렇게 힘들어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원망하고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요?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더 큰 사랑 안에서
영적인 자유로움으로 충만한 날 되시길 빕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