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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3월 25일 토요일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
제1독서 : 이사 7,10-14; 8,10ㄷ
제2독서 : 히브 10,4-10
복 음 : 루카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영화를 보면 주연 배우만 있지 않습니다.
만약 주연 배우 1명만으로 만들어진 영화라면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화에는 조연도 필요하고, ‘지나가는 행인 1’과 같은 엑스트라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화의 내용이 풍성해집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연의 역할도 또 조연의 역할도, 엑스트라의 역할도 모두 필요합니다.
물론 나의 세계 안에서는 자신이 늘 주연이지만,
함께 사는 세상 안에서는 어떤 역할이든 모두 소중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늘 주연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자기 뜻과 다르면 틀렸다면서 잘못된 사람으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하고 화풀이하듯이 하느님을 떠나겠다는 말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선 최고의 연출자이신 하느님의 뜻을 알아야 합니다.
영화에서도 감독의 뜻을 제대로 알아야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뜻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면 그 영화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감독의 뜻은 전혀 알지 못하면서 자기 뜻대로만 하겠다면, 그 영화는 망칠 수밖에 없습니다.
감독은 아무리 그 배우가 최고의 배우라고 한들, 그 영화에서 배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알고, 따라야 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 뜻에 맞춰서 흘러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미국 소설가 이디스 워튼은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을 말했습니다.
촛불이 되거나,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주연급의 촛불도 빛을 퍼뜨릴 수 있지만, 조연급의 거울도 빛을 퍼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 안에서 어떤 삶이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하며 그 뜻을 따를 때, 커다란 작품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탄생 예고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믿음에 찬 순명, 그 순명으로 큰 시련을 겪으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모님께서는 순명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성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주연의 삶을 사시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하느님의 뜻이 어떤지만을 살펴보시고 그 뜻을 향해 나아가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 세상에 구원의 빛이 퍼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자기 역할을 다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과 반대되는 주연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뜻에 철저하게 순명하는 조연이 더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12 제자를 선발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발 기준에 ‘충성도’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어떤 제자는 옷을 벗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겼습니다.
예수님께서 바위라고 칭찬하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고난의 현장에 남자 제자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베로니카는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울며 예수님 고난의 길에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 드리고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했던 것도 마리아입니다.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찾아갔던 것도 마리아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처음으로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난 것도 마리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에게 참된 평화를 주셨습니다.
마리아에게 첫 번째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렸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마리아를 ‘막달라 마리아’라고 부릅니다. 위대한 마리아라는 뜻입니다.
오늘의 교회에도 위대한 마리아들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위대한 마리아의 원형입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바다의 별, 우리의 어머니, 천상의 모후, 정의의 어머니’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의 생애는 ‘고통의 바다.’였습니다.
어린 아들을 성전에 봉헌했을 때 시메온으로부터 가슴이 찢어지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 어린아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어린 아들을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는 길에 잃어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미쳤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을 보았고, 죽은 아들을 가슴에 묻어야 했습니다.
성모님은 그런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뜻을 보았고,
인류를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며
자신의 몸이 구원 사업의 도구가 되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잔치의 즐거움이 계속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게 하였습니다.
예수님 또한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아시고, 아직 때가 되지 않았지만,
혼인잔치를 더 풍요롭게 하셨습니다.
성모님은 혼인잔치에 손님으로만 간 것이 아니라,
그 잔치에 부족함이 없는지를 살피시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성모님의 그런 마음을 본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헤아리는 마음,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마음,
자신의 고통보다는 사도들을 추스르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처럼 해야 할 일을 분별하여,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열린 마음으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위대한 마리아’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인은 아무런 고통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고통 중에 세상을 원망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런 고통 속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은 고통 중에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는 겸손을 알게 하고,
겸손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게 합니다.
“천주의 성모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기뻐하시오.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함께 계십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입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기쁨에 찬 인사말을 전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오늘 복음은 가브리엘 천사와의 세 번의 대화를 통해
마리아께서 어떻게 자신의 신원과 소명을 알아듣고 응답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대화는 천사의 인사말에 대한 마리아의 당황,
곧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함입니다(루카 1,29).
둘째 대화는 천사의 아기 잉태 예고와 그 아기의 신원과 소명에 대한 마리아의 물음,
곧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라는 물음입니다.
셋째 대화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
곧, “주님의 종이오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응답입니다.
이 대화를 통하여 마리아의 깨달음은 세 가지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지금 이 일을 하시고자 하는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성령이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감싸고,
거룩한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하는 이 일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 하시는 일”임을 깨달음입니다.
둘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신의 신원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주님의 여종”임을 깨달음입니다.
셋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는 ‘아기 잉태’를 원하신다는 것이며,
바로 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임을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소명에 마리아께서는 어떻게 응답하였을까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의 사랑을 허용하는 일,
곧 그분께서 당신의 사랑을 내 안에서 이루시도록 나 자신을 그분께 허용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랑을 수락하고, 그분의 사명을 수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름하여,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예”(피앗)라는 동의, 곧 받아들임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은총이 나에게 파고들도록 자신을 그분께 승복하는 일이었습니다.
곧 당신께서 원하신 바를 내 안에서 하시도록 자신을 하느님의 뜻에 승복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화답송에서처럼
“주님, 당신 뜻을 따르려 이 몸이 대령했나이다.”(시편 39,8)라고 말하는 것이요,
제2독서에서처럼 “하느님, 저는 당신의 뜻을 이루려고 왔습니다.”(히브 10,9)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름하여,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천사의 인사말을 들어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성모님은 바로 그 크신 사랑을 받아들인 사랑의 감실, 거룩한 성전이 되셨습니다.
이제 마리아의 소명은 구세주의 구원 은총을 입은
우리 모두의 소명이요, 교회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이요, 그 사랑을 믿고 따르는 일이요,
먼저 받은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실상 필요한 한 가지는 임이 나를 사랑하도록 허용하는 일, 임의 사랑에 나를 승복하는 일,
임이 온전히 나를 사랑하도록 나를 온전히 내어주는 일, 사랑에 앞서 사랑을 받아들이는 일,
하여, 받아들인 그 사랑으로 사랑하기, 임으로 임을 사랑하기입니다.
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내 안에 사랑이 있다는 사실, 사랑하는 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아주는 이가 있다는 이 사실이 그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우리는 참으로 기쁘고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주님의 탄생 예고 대축일이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의 응답을 통해 사람이 되시는 위대한 사실을 오늘 복음은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다는 것은 곧 인간의 차원이 하느님의 차원으로 들어 올려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느님과 같이 되게 하려고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은 이제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룰 수 있게 하였고,
그 마리아의 자세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모범이 된다.
예수님의 탄생 예고가 이어지고 있다.
복음에서는 가브리엘 천사가 등장하는데,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28절)
이런 인사는 남자가 들은 것이 아니라 오직 마리아에게만 주어진 인사였다.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새로운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28절)
주님께서는 그냥 마리아를 보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남의 신비를 통해 마리아에게로 내려오시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천사를 바라보던 그 자리에서 하늘의 심판관을 몸에 받아 모시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느님께서는 한 처녀를 당신의 어머니로 만드셨고, 당신 여종을 어머니로 삼으셨다.
온 세상도 하느님을 품지 못하지만, 하느님은 온전히 그 품에 오시어 사람이 되셨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1절)
천사는 마리아에게 하느님께서 그녀 안에서 행하시는
거룩한 신비를 드러내줄 아기에 대하여 말한다.
마리아는 처녀로서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 아기는 하느님의 아들이자 사람의 아들이 되실 분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그분이 하시는 일을 의미한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세상을 다시 창조하실 분이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절)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
이 물음은 동정 잉태라는 신비에 대한 깊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천사는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어 잉태하리라고 한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35절)
마리아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물 위를 감돌며 창조를 이루시는 성령이시다(창세 1,2 참조).
마리아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써 아들이신 말씀을 잉태하시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웃에게 낳아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잉태한다는 것은,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한다.
나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올바로 따를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매 순간 주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끊고 자신을 버리는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십자가이다.
이 십자가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마리아와 같이 말씀을 잉태하고 그 말씀을 낳아줄 수 있을 것이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38절)
마리아는 하느님께 순종함으로써 하와의 불복종을 되돌려 놓는다.
그리하여 한 천사였던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첫 번째 처녀의 타락이
다른 천사의 말을 받아들인 이 처녀 마리아의 믿음으로 극복되고 있다.
마리아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평범한 한 시골 처녀였다.
우리와 같은 한 사람이고 평범한 삶을 사는 인간이었다.
그 마리아가 그렇게 하느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마리아와 같이 고백하고 실천해야 한다.
• • •
1) 여기에도 신비가 있다.
창세기에서 악마는 동정이었던 하와에게 먼저 말을 건 다음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 말은 그들에게 죽음을 건네기 위한 말이었다.
동정잉태의 사건에서는 거룩한 천사가 마리아에게 먼저 말하였고 다음에 요셉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죄와 죽음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고,
뒤의 사건에서는 구원을 위해 여자가 선택되었다.
앞의 사건에서는 여자로 말미암아 남자가 넘어졌고,
뒤의 사건은 동정녀로 말미암아 남자가 일어섰다.
그래서 천사는 요셉에게 그렇게 말한 것이다.
순명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일상적으로 합리적인 말을 하면 알아듣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습니다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을 하면 그에 따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지만 상식에 어긋나고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이해하기 어렵지만,
하느님의 뜻으로 믿고 따르는 때도 있습니다.
신앙의 선조인 아브라함은 일가친척을 떠나
낯선 곳으로 향했고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키는 역할을 했던 모세도
처음에는 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의 도구로 충실했습니다.
기드온은 하느님을 믿고 불과 삼백 명으로 십오만 병사에 대항하여 싸웠습니다.
요셉은 임신한 약혼자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라는 꿈의 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1,30).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되지 않는 이 말씀에 결국은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1,38).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바로 이것을 순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구원의 역사는 순명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따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순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시고 인간의 협력과 동의로 구원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세상은 바로 마리아의 믿음과 믿음에 따르는 순명으로 인하여
구세주의 탄생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풍습을 생각하면 약혼한 처녀가 부모도 모르고 약혼자도 모르게
임신하여 배가 불러온다는 것은 돌에 맞아 죽어야 할 처지가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응답은 죽음을 각오한 대답이었습니다.
죽음을 각오한 순명은 인간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바칠 것을 다 바친 것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하느님의 뜻 앞에서는
미루지 않는 결단을 내려 협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1,37).
하지만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의 자유의지에 따른 복종 없이 천명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이현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자유의지를 가진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있는 자리가 어디이든 주님의 뜻에 기꺼이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자리에 하느님께서 분명히 역사하십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당신이 쉼을 원하시면 저는 사랑으로 쉬겠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일하라고 명을 내리시면 저는 일을 하면서 죽고 싶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일상 안에서 언제든 주님의 말씀에 순명할 수 있는 믿음을 더해주시기를 희망합니다.
순간순간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것을 용기 있게 선택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손안에 있는 연장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연장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도구, 연장이 되는 기쁨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1,35). 하였습니다.
바로 그 성령께서 오늘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높으신 분의 힘이
우리를 덮어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합니다.
@@
‘어머니,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어머님
인간으로 볼 때 당신처럼 불행한 사람이
인류 역사상 또 있겠습니까?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여, .......’
천상의 이 말을 듣고 나서
당신의 역사는 얼마나 파란이 많았습니까?
남편 요셉에 대한 걱정,
말구유에서 아들의 해산,
이집트로 피난,
마침내 십자가 곁에서
외아들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당신에게
그보다 더한 십자가가 있었겠습니까?
성총을 충만히 받는다는 것이란
반드시 지상의 행복이나 평화를 받는 것이 아님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육신의 안락은 물론
정신적 안락을 의미하는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총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지상에서 고통을.
십자가를 찾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
원죄 없이 잉태한 당신이
여인 중에 총복을 받으신 당신이.
누구보다 가혹한 십자가를 져야 했고
누구보다 처참한 고통을 받았거늘
그 누가 십자가 없이 천국을 바라리오!
-배문한 신부-
주님의 뜻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주님의 성탄 대축일(12월 25일)에서 거꾸로 아홉 달이 되는 오늘,
교회는 성모 마리아가 하느님께서 보낸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성자를 잉태할 것을 기별받은 일을 경축한다.
이것이 주님의 탄생예고 대축일(3월 25일)이며, 다른 말로는 聖母領報 대 축일이다.
出産이 있으면 당연히 受胎가 있어야 하는 법,
그렇다고 오늘의 대축일이 9개월 정도의 임신기간이라는 인간적인 계산에서
그 첫날을 단순히 축하하자는 의미는 아닌 것 같다.
성모 마리아 신심이 남달리 강했던 동방교회가
이미 550년경부터 3월 25일을 성모영보대축일로 지낸 것을 보면,
오늘 축일의 의미가 대단히 컸디는 짐작이 간다.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인간과 세상의 구원은 이미 천지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계획이다.
우리는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이 구원계획의 수행 또한
하느님께서 스스로 주도하셨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때가 왔을 무렵,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의 몸에서 나게 하셨다.(갈라 4,4 참조) 이 사건을 오늘 복음이 보도하고 있다.
여섯 달 전에 즈카리야를 찾아가 세례자 요한의 수태를 알렸던 가브리엘 천사가
이번에는 마리아에게 가서 그녀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의 어머니로 간택되었음을 전한다.
이 전갈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28절)는
마리아에 대한 천사의 인사 말씀으로 시작되었다.
당황한 마리아가 곰곰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천사의 전갈이 이어졌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이제 아기를 가져 아들을 낳을 터이니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30-31절)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성취를 위해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음이 선포되는 순간이었다.
하느님 편에서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처녀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요셉과 약혼만 했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마리아는 당황함 속에서도 침착하게 그 가능성에 대하여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천사는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가진 엘리사벳의 경우를 설명하고,
마리아가 하느님 아들의 어머니가 되는 일에 ‘성령 하느님’이 굳센 보증이 될 것임을 약속한다.
흔히 약속이나 계약을 할 때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큼직한 인감도장이 찍힌 서류도 없고 보증서도 없다.
오직 ‘성령 하느님’이 그 보증이다. 이제 결정은 마리아에게 달렸다.
그러나 마리아는 모든 것을 믿음과 순명으로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6)하고 대답하였다.
이는 단순한 대답이 아니다.
이는 마리아가 자신을 깡그리 바쳐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며,
온 인류를 들어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맞아들이는 일이다.
이로써 마리아의 역할은 분명해졌다.
마리아가 바로 하느님의 구원협조자(coredemptrix)로 간택된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는 일,
하느님 스스로가 인간이 됨에 있어 인간을 협조자로 선택했다는 것,
이는 하느님 神性(divinitas)에 우리 人間性(humanitas)이 참여함이며,
동시에 하느님의 신성이 인성을 취하심이다.
따라서 오늘은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全 인류가 함께 기뻐할 수 있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도 마리아처럼 당당히
“Ecce ancila Domoni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fiat mihi secundum verbum tuum!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즉 “fiat voluntas tus! 주님의 뜻이 저에게 이루어 지소서!” 하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리라.
이는 결코 소극적인 관망이 아니라 적극적인 수용임을 알아야 한다.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에 아들 예수님 또한 복되시나이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님,
이제 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이 땅 위에서 얼마나 많은 언어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입으로 바쳐지는 기도인가?
누구든지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그 옛날 천사와 마리아의 만남 안으로 들어가 이 만남을 다시금 살아 숨 쉬게 한다.
누구든지 이 기도를 바치는 사람은 천사와 함께 인류구원의 시작과 성취를 기뻐하게 되며,
동시에 성모 마리아의 믿음과 순명을 자신의 것으로 확인 할 수 있게 된다.
이 기도는 마리아와 함께 至高의 하느님께 드리는 믿음과 순명의 誓願이다.
누구든지 이 기도를 묵주에 실어 바치는 사람은, 비록 자신이 죄인이라 할지라도
손에서 손으로 자손만대에 이 서원을 물려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