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일백열여섯 번째
배부른 돼지, 배고픈 소크라테스
과거에는 여럿이 음식점에 가서 주문할라치면 ‘통일’을 외쳤습니다. 주문하기도 쉽고 음식점 주인도 좋아했습니다.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우선이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사불란해야 했습니다. 흑백론黑白論, 이원론에 젖어 있던 우리는 흑이 아니면 백, 선이 아니면 악이었습니다. 이 오래된 논리는 지금도 여전히 생명력이 있어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지고 있습니다. 각기 입맛에 따라 먹고 싶은 것을 주문합니다. 우린 어려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를 배웠습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최대한으로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고 행복을 얻도록 하는 행동이 도덕적으로 옳다는 것입니다. 개인보다는 공동체가 우선이었던 시절에는 그게 맞았을 겁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으로 행복을 측정할 것인가? 물건을 살 때나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으면서 가성비價性比를 따집니다. 이 또한 사람마다 평가가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고, 육체와 영혼은 서로 다른 존재라고 여겨 육체적이라고 하면 왠지 천하고 부정적으로 들립니다. 천재적인 철학가 존 스튜어트 밀은 이성과 지성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단지 육체적인 쾌락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쾌락을 가져다준다는 뜻에서 “만족한 돼지가 되는 것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좋고, 만족한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정말 그런가요?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제 삶은 돼지 쪽이나 바보 쪽을 택하지 않나요?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질보다는 양을 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쪽은 선하고, 다른 쪽은 선하지 않은 건가요? 둘 사이를 오가며 사는 게 우리네 일상인 듯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