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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고구려 토론방 스크랩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
사람이 하늘이다 추천 0 조회 1,472 13.02.28 16:39 댓글 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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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2.28 20:20

    첫댓글 단동이 서안평이라는건 정말 억지군요. 바다가 면해 있어 서안평이 기록에 맞게 저곳이라면 파림좌기는 북안평인가요? 장문의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13.03.01 22:34

    안녕하세요. 좀 긴 글인데 잘 읽었다니 감사합니다. 서안평은 고구려 역사에 아주 중요한 곳이지요.
    그런데 『요사지리지』'서문'에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는 기록이 있습니다. 요나라가 새로운 주를 설치할 때 한나라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지명을 쓴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지요. 이로 인하여 요나라 시대에 수많은 지명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상경임황부를 한나라 서안평으로 기록한 것도 지명이동의 결과로 보입니다. 『요사지리지』를 읽을 때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 작성자 13.03.01 22:51

    “상경임황부는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의 땅이다. 신나라 왕망은 북안평이라 했다(上京臨潢府漢遼東郡西安平之地新莽曰北安平)” 『요사지리지』‘상경도’
    요나라 상경임황부(파림좌기)는 한나라 시절에는 부여의 수도부근 입니다. 그곳이 한나라 서안평일 수는 없지요. 한나라 서안평에 살던 포로들이 상경임황부로 끌려갔다는 정도로 이해하심이 좋을 듯 합니다.

  • 작성자 13.03.01 22:13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서안평에 대한 기록이 세 군데 나옵니다.
    ① 제6대 태조대왕 : “(146년) 가을 8월에 왕은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의 서안평현을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秋八月 王遣將 襲漢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太守妻子)”
    ② 제11대 동천왕 : “16년(242)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의 서안평을 격파하였다(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③ 제15대 미천왕 : “12년(311)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하였다(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 작성자 13.03.01 22:26

    위 세번의 사건 중 김부식은 ① 번은 한나라 요동 서안평이라 하였고, ②③번은 그냥 요동 서안평이라 기록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장소이지요. ① 번의 태조대왕시절에는 고구려가 하북성 요동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의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은 현 하북성 석가장시 부근의 안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곳이 대방지역이므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은 것입니다. ②③은 고구려가 '발기의 난' 이후 하북성 요동을 완전히 상실했을 때의 일 입니다. 이때의 서안평이 난하하류의 요동 서안평으로 왕망이 북안평으로 부른 곳으로 보고 있습니다.

  • 13.03.02 00:04

    답변 정말 감사합니다. 인용을 잘해주셔서 이해가 잘되네요. 대단하십니다^^

  • 13.02.28 20:27

    교과서의 요동과 압록강까지의 거리, 요동에서 평양까지의 거리는 많이 짧죠? 당군의 진격로와 고구려의 방어선상에 위치한 성들의 위치하고 좀 차이가 있는것 같습니다. 나중에는 고구려의 방어선상의 성들의 위치들도 예로 삼으셔서 집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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