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냥이 엄마
민병식
점심시간이 한 시간 밖에 안 되니 밥 먹고 커피 한 잔 하기도 빠듯하다. 그래서 식사 후에 회사 바로 옆에 있는 휴게 공간인 정자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정자는 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명당인데 대부분의 시간이 사람보다는 고양이의 것이다. 햇볕이 잘 드는 담장 아래는 늘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다. 한 녀석은 갈색 줄무늬의 늙은 고양이고 다른 하나는 검정색 줄무늬의 이제 막 새끼를 벗어난 어린 고양이다. 둘은 늘 붙어 다니는데 볕이 풍성한 날이면 둘이 서로를 품고 정자의 나무 의자 위에 올라가 낮잠을 즐기는 평화스러운 모습을 연출한다.
사진 민병식
회사 직원 중에 동물을 좋아하는 여직원이 있는데 다른 직원들은 그녀를 ‘냥이 엄마’이라고 부른다. 그녀에게는 매일 출퇴근 시마다 반복하는 습관 같은 일이 있었는데 아침, 저녁 퇴근 시간에 정자에 들러 고양이들의 끼니를 챙겨주는 것이다. 사람이 지나가다 불러도 오지 않는 고양이, 늙은 고양이는 사람이 다가가면 겨우 몸을 일으켜 느릿느릿 피하곤 했고 어린 고양이는 의심에 가득 찬 눈빛을 보이곤 몸을 돌려 자동차 밑으로 숨거나 재빠르게 사라지곤 했다. '냥이 엄마'는 고양이 두 마리를 위해 따로 살 수 있도록 집을 두 개나 만들어 주었고 각각의 밥그릇 물그릇도 준비해 주었다. 그런 정성에도 불구하고 늙은 고양이는 아예 밥그릇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어린 고양이는 어디서 나타났는지도 모르는 다른 고양이 패거리에게 밥을 빼앗기기 일쑤였다. 여직원은 사무실에서 틈만 나면 고양이 걱정과 고양이를 버리는 사람들을 성토하곤 했다. 정자의 고양이들은 지난날 누군가의 집에서 길러지던 고양이가 틀림없어 보였지만 지금은 버려진 고양이 들이었고, 회사 사람들은 고양이에게 애정을 쏟는 그녀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사진 네이버
어느 날 '냥이엄마'가 하루 월차를 낸단다. 도통 먹이를 먹지 않아 아플 것이라고 추정되는 늙은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진료를 받기 위함이란다. 어렵게 그 녀석을 포획하여 진료를 받은 결과 위암이란다. 고양이가 위암에 걸린다는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들었는데 그 고양이는 병원에 입원한 지 일주일만에 죽고 말았다. 의사는 방법이 없다고 안락사를 제안하였지만 고양이 엄마는 자신의 사비를 들여서라도 끝까지 치료해주고 싶었단다. 그로부터 6개월 정도 지나 정기 인사발령이 있었고 '냥이 엄마' 자신의 가족이 있는 지방으로 자원을 하여 가게 되었는데 남아있던 어린 고양이를 데리고 갔다. 자신이 직접 돌보고 키울 것이란다. 한동안 야생에 노출되어 있어서 인간과의 생활에 어려움이 있겠지만 끝까지 돌보아주고 싶단다. 그렇게 그녀는 어린 고양이를 데리고 떠났고 정자는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또 다른 고양이의 차지가 되었다.
사람들은 강아지, 고양이, 거북이, 심지어는 파충류까지 갖가지 동물을 키운다. 그들을 반려동물이라 명명하고 사랑을 쏟아붓는다. 인격을 갖춘 존재로까지 여기며 이름을 붙여주고, 먹이를 주고 옷을 입혀 공원에서 거리에서 산책을 한다. 그리고 가족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그들의 엄마, 아빠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날, 좋았던 관계가 갑자기 냉혹해지기도 한다. ‘애완’할 조건이 달라지면 서슴없이 관계를 파기해 버리는 거다. 아프거나 말썽을 핀다는 이유로 또 재미없다는 이유로 마치 어린아이들이 한참을 가지고 놀다가 싫증 나면 ‘휙’ 하고 던져버리는 장난감처럼 여겨진다. 더 큰 문제는 버려진 동물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는데 있다. 눈여겨 살펴보지 않아도 거리와 골목에 버려진 고양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있다. 흔히 ‘길냥이’라고 부르는 버려지고 유기된 고양이의 개체 수는 점점 늘고 있는데 그들은 버려진 존재가 되고부터는 혹독한 생존의 현장과 맞닥뜨리게 된다. 어떤 못된 인간은 그들이 잘 다니는 곳에 독극물을 섞은 먹이를 놓아두기도 하고, 갖가지 무기를 사용하여 공격하기도 하며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빵빵' 소리를 내는 자동차도 목숨을 위협한다. 한때는 누군가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그들은 결국 영문도 모른 채 길에서 노숙의 처지가 되어 돌아다닌다. 인간은 그들의 생명을 존중해야 맞다. 우리 인간 또한 생명을 지닌 동물 중 하나가 아닌가. 아무리 말 못하는 동물일지라도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생명을 가벼이 여긴다면 인간으로서의 자격 미달이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동물들이 야성화가 되고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인간의 주위를 떠돌고 있는 것은 바로 인간의 비정함을 지적하는 모습인 것이고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옳고 그름에 대해 배웠고, 베풀고 살아야 한다는 것, 양보하고 협동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배웠다. 그러함에도 '나도 먹고살기 어렵고 힘들다'는 세상살이를 핑계로 돌아보아야 할 것들에 대해 모른 척하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잘 먹고 잘살고 좋은 것을 갖고 싶고 풍족한 삶을 영위하고픈 욕구가 있고 역시 그 범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범인임은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이는 부와 명예를 또 어떤 이는 학식과 그에 따른 높은 지위를 삶의 바로미터로 삼을 것인데 어떤 욕심도 없이 무념무상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는 아주 옛날의 덕망 높은 선비 같은 극소수의 사람이나 고승 같은 도를 닦는 분 이외에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의할 점이 있다. 잘못된 방법으로 욕구를 실현하려고 하면 탐욕이 되는데 인간다움을 잃어버리는 경우라면 동물보다도 못한 사람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점심시간이 끝나간다. 이제 회사로 들어가서 일을 해야 할 시간, 고양이 엄마가 떠나간 후로도 정자는 여전히 고양이와 인간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남았고, 회사 직원들은 그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떠나간 고양이를 대신하고 있는 또 다른 고양이들에게 아침저녁으로 밥과 물을 챙겨주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안전하게 있는지 신경 쓰는 사이가 되었다. 제법 이제 고양이들도 우리를 경계하지 않는다. 고양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와 의자 위로 올라오더니 엎드린다. 그 누구도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다는 듯 살짝 웃는 표정으로 낮잠을 청한다. 모처럼 따사로운 봄날 오후, 고양이를 자신의 가족같이 돌보고 대해준 '냥이 엄마'의 사랑 가득했던 마음을 추억하면서 경제 불황으로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이 시대, 사람이든 동물이든 누구나가 서로를 위하고 함께 사는 공존의 마음이 가득한 세상이 되어 나보다 어려운 처지의 대상에게 조금 더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서는 순간 파란 하늘 사이로 냥이 엄마의 미소를 닮은 예쁜 구름이 두둥실 떠가고 있다.
사진 네이버
첫댓글 정성 어린 고운 글에 머무르다 갑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건필하소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