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 처음 연재를 시작한 제 스타디움 유랑기의 두 번째 ‘초대 손님’은 최근에 다녀온 필립스 스타디온(Philips Stadion)입니다. 바로 박지성 선수의 소속팀 PSV 에인트호번의 홈구장이죠. 실제로 가본 분들은 많지 않겠지만 박지성 덕분에 국내 축구 팬들에겐 널리 알려진 경기장입니다.
(2)필립스 스타디온 (Philips Stadion) ▲PSV 에인트호번(네덜란드)의 홈구장 ▲1911년 1월 15일 개장 ▲수용인원: 3만5000명
지난 7일 네덜란드 에인트호번 필립스 스타디온에서 열린 유로파리그 PSV-디나모 자그레브전에서 PSV 팬들이 응원을 펼치고 있다. 장민석 기자
이번 달 초에 네덜란드를 다녀왔습니다. 한국 축구의 영원한 수퍼스타 박지성을 만나기 위해서였죠. 박지성 선수는 왼발 부상으로 50여일 동안 치료와 재활을 하다가 지난 19일 팀 공식 훈련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박지성이 뛸 때만 해도 PSV 에인트호번은 선두를 질주했었죠. 특히 박지성 선수가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라이벌 아약스를 4대0으로 대파했던 9월 22일 경기가 압권이었습니다. 하지만 9월 28일 알크마르전에서 상대 선수에 왼발을 밟힌 이후 지금까지 그라운드에서 박지성 선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처음엔 필립 코퀴 PSV 감독도 “심한 부상이 아니다”라고 했지만, 예상 외로 부상은 길어졌습니다.
박지성 선수를 만난 건 지난 6일입니다. 에인트호번 중앙역에서 택시를 타고 교외에 있는 디 헤르트강(De Herdgang) 훈련장으로 향했습니다. 몇 분 타지도 않았는데 택시비는 2만원이 훌쩍 넘었습니다. 역시 유럽의 물가는 무섭습니다. 당시 박지성 선수는 한국을 다녀온 직후였습니다. 부상 치료와 휴식을 위해 한국을 찾은 그는 한의원에서 침까지 맞았다고 합니다. 왼발에 깁스를 한 그는 팀에 미안함을 표시했습니다. 정확한 진단이 나오지 않아 복귀시점이 불투명한 것이 초조하다고 했습니다. “조금 짜증이 나는 부상”이란 표현도 했는데 평소 감정을 절제해서 인터뷰에 임하는 박지성 선수의 성향을 볼 땐 매우 속상한 상황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왜 팀에 많이 미안했을까요? 그것은 PSV 에인트호번이 박지성 선수에겐 각별한 의미를 지닌 팀이기 때문입니다. 2002 한·일월드컵 포르투갈 전에서 한국을 16강으로 이끄는 결승골을 터뜨리고 거스 히딩크 감독의 품에 안겼던 박지성은 2003년 1월 히딩크 감독을 따라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습니다.
박지성이 처음 축구가 싫어졌던 필립스 스타디온
초반엔 매우 부진했습니다. 그러자 PSV 홈 팬들은 박지성을 향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박지성 선수는 “공을 받는 순간부터 다시 공을 동료에게 내주는 순간까지 야유는 계속됐다”고 그때를 회상했습니다. 교체를 위해 터치라인에 서기만 해도 ‘우~’ 하는 소리가 경기장에 메아리쳤다고 합니다. 그렇게 필립스 스타디온은 한국 축구 최고 스타 박지성에게 처음으로 “축구가 하기 싫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박지성 선수는 2004~2005시즌 들어 맹활약을 펼치며 홈 팬들의 야유를 환호로 바꿔놓았습니다. 2005년 AC밀란(이탈리아)과의 챔피언스리그 4강전 2차전에서 박지성이 선제골을 넣고 PSV 홈 팬들에게 더 환호하라고 손짓하는 모습은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장면입니다. 그리고 박지성은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눈에 들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했고, 7시즌 동안 수많은 영광을 누렸습니다.
PSV에인트호번의 스토어에 있는 박지성 열쇠고리. 장민석 기자
올 시즌을 앞두고 박지성 선수는 1년 임대로 8년 만에 친정팀 PSV에 복귀했습니다. 박지성은 “예나 지금이나 에인트호번이란 도시는 큰 변화가 없다”며 “홈 팬들을 다시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했습니다. 유럽 최대 전자(電子) 업체인 필립스의 공장이 많아 ‘필립스의 도시’로 불리는 에인트호번은 인구 72만(교외 포함)의 크지 않은 도시입니다.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서 기차를 타고 1시간 20분 정도 가면 에인트호번에 도착합니다. 중앙역을 나오면 오른쪽으로 경기장이 보입니다. 걸어서 넉넉잡아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유럽의 명문 스타디움이 대부분 시내 중심가에서 꽤 떨어진 경우가 많은데 반해 필립스 스타디온은 참 찾아가기 쉬운 곳이었습니다.
올 시즌 초반 필립스 스타디온에선 박지성의 응원가인 ‘위쑹 빠르크’가 8년 만에 다시 울려 퍼졌습니다. 현지에서 만난 PSV 팬들은 “우리 팀이 최고였던 2004~2005시즌을 함께한 박지성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PSV는 올 시즌 박지성과 함께 선두를 내달렸지만 박지성 부상 이후 부진을 거듭하며 리그 8위까지 떨어졌습니다. 누구보다 박지성의 복귀를 원하는 이들은 PSV 팬들입니다.
경기장 곳곳에 전설의 이름이
이젠 본격적으로 경기장 얘기를 해볼까요? 마침 박지성의 인터뷰가 있고 다음날인 7일 오후 PSV와 디나모 자그레브(크로아티아)의 UEFA 유로파리그 경기가 있어 필립스 스타디온을 찾았습니다. 숙소와 워낙 가까웠던 터라 오전엔 경기장의 메가 스토어를 들렀습니다. 오전 10시에 문을 연 PSV의 스토어는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박지성 관련 기념품은 많지 않았습니다. 작년 여름 런던에 갔을 때 들른 QPR(퀸스파크 레인저스)의 스토어와는 조금 비교가 됐습니다. 시즌 개막 전 맨유의 스타를 데려온 QPR은 박지성 마케팅을 대대적으로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박지성의 백넘버 7번이 박힌 유니폼이 마네킹에 입혀져 있고, 박지성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도 걸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PSV의 스토어에선 박지성의 얼굴이 있는 열쇠고리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점원인 리카르도씨에게 물어보니 “판매되는 유니폼 3장 중 한 장이 박지성 유니폼”이라고 합니다. 박지성이 빨리 복귀해서 더 많은 현지 팬들이 박지성의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길 바라봅니다.
유명 스타디움엔 꼭 있는 동상이 여기도 있습니다. 정문을 바라본 상태에서 오른편에 있는 동상은 PSV에서 18년을 뛴 윌리 판 데르 쿠이렌(67)을 기념한 것입니다. 현재 PSV의 스카우트로 일하는 그는 네덜란드 리그 통산 득점 1위(311골) 기록을 보유한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입니다. 왼쪽 동상은 코엔 딜런(1926~1990)입니다. 그는 1956~1957시즌 PSV에서 뛰며 한 시즌 네덜란드 리그 최다골(43골) 기록을 세웠습니다.
필립스 스타디온 안의 호나우두 사진. 기자회견장의 이름이 호나우두다. 호나우두는 PSV에서 두 시즌을 뛰며 127골을 넣었다. 장민석 기자
이 밖에도 PSV를 거쳐 간 스타는 많습니다. 경기장 안 기자회견을 하는 곳의 이름은 월드컵 통산 최다골(15골)의 주인공 호나우두(브라질·37)의 풀네임인 ‘호나우두 루이스 나사리우 다 리마’입니다. 호나우두는 1994년부터 두 시즌을 PSV에서 뛰며 54골을 터뜨렸습니다. 연회장 한 곳엔 호마리우(47)의 이름이 붙어 있었습니다. 1994 미국월드컵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이끈 호마리우는 PSV에서 5시즌을 뛰며 127골을 넣었습니다. 루크 닐리스(46·벨기에)와 뤼트 판 니스텔로이(37·네덜란드)의 이름이 붙은 방도 있었습니다. PSV에서 네 차례 리그 우승을 이끈 코퀴(43) 감독의 선수 시절 사진도 경기장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레전드’ 대접은 확실한 PSV입니다. 한국 축구도 배울 만한 부분입니다.
다시 한번 ‘위숭 빠르크’가 불릴 그날을 기다리며
그날 오후 7시 유로파 리그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렸습니다. 그동안 많은 축구장을 다녀봤지만 필립스 스타디온은 정말 축구 보기 좋은 전용구장이었습니다. 관중석과 피치의 거리가 워낙 짧아 생동감 있는 관전이 가능했습니다. 3만5000명의 수용 인원도 좋아 보입니다. K리그가 펼쳐지는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 대구스타디움, 광주월드컵경기장 등은 리그와 팀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큰 것이 사실입니다. 필립스 스타디온을 보며 한국 실정에 맞는 축구전용구장이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날은 네덜란드 리그 경기가 아닌 탓에 2만여명의 팬만 필립스 스타디온을 찾았지만, 응원의 열기는 절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본부석 기준으로 오른쪽 골대 뒤쪽의 팬들은 줄곧 서서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PSV를 성원했습니다. 경기 중반 네덜란드 팬들의 악명을 느꼈습니다. 앞에서 박지성 선수의 경우를 썼듯이 현지 팬들은 자신의 팀 선수라도 부진하면 가차없이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이날은 멤피스 데파이가 표적이 됐습니다.
필립스 스타디온 앞에 있는 윌리 판 데르 쿠이렌의 동상. 그는 네덜란드 리그 통산 득점 1위(311골)의 주인공이다. 장민석 기자
데파이가 무리한 돌파를 몇 차례 시도하자 바로 야유가 나왔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꿋꿋이 버텨낸 박지성 선수가 대단해 보이는 순간이었습니다. 경기는 2대0, PSV의 기분 좋은 승리로 끝났습니다. 박지성 선수를 못 봐 아쉬웠지만 PSV 팬들의 우렁찬 응원가를 들으며 가뿐한 발걸음으로 경기장을 나설 수 있습니다. 근데 목은 정말 칼칼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축구장 기자석에서 마음껏 흡연을 할 수 있거든요. 현지 기자들이 옆에서 하도 담배를 피워대서 간접흡연이 아니라 실제 한두 개비는 피고 나온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신나는 축구의 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