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venir d'enfance(어린 시절의 추억) - Richard Clayderman
오늘아침 황금연못을 보니 내가 살았던 이웃동내인 서울 만리동 골목길이 나와서
문득 내 어린시절의 추억이 가득한 청파동을 떠올렸다
당시 내가 살던곳은 신광여고옆에서 효창국민학교가는 골목길에서 여러집을 이사하며
살았지만 다 그근처였다. 그러던중 6학년초에 아버지는 신광여관뒤 작은언덕에 있는
정원이 넓고 커다란 일본식 집을 사서 다시 지으셨는데 그동안 우리는 신광여고 바로뒤
ㄷ형 한옥집에 잠시 세들어 살았었다. 그집은 안쪽 주인네 방3개를 제외하고도 방이 6개정도 됐고
모두 세들어사는 사람이 있었다. 아들이름이 신천이라 우리는 그집을 신천이네 집이라 불렀다.
신천이는 당시 중3이고 나는 6학년이었지만 그냥 신천이라 이름불렀고 그도 싫어하지 않아
신천이와 나는 자주 돌아다녔다. 신천이의 동생은 신순이라는 여자아이였고 나와 같이
효창국교 6학년이었지만 나는 신순이보다는 신천이와 더친했다.
그집 안주인인 신천이 엄마는 교회 전도사였고 그분은 안수로 병을 잘고친다고 소문나서
그집에는 병을 고치려는 말기 환자가 많이 묶고있었고 늘 찬송가 소리로 시끄러웠다
신천이엄마는 환자이마에 성령수라 부르는 물을 바르고 깔고 앉아 믿어믿어를 강요하였고
환자는 다죽어가는 목소리로 믿습니다를 복창하였다. 그해 여름방학 신천이는 신문배달을 하러
다녔는데 나를 데리고 가서 신문을 나눠들게 하였는데 어린 나에겐 그신문뭉치가 아주 무거웠지만
거역하지 못하고 따라다녔다.
신천이네 집 대문안쪽에 공동수도가 있었고 그옆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어느무더운 여름날밤
신천이가 그방에 가자하여 같이 갔는데 신천이는 피곤하다며 방에 불을 끄고 누웠고 나는 앉아 있었다.
그런데 잠시후 우리 옆방 아주머니와 그집딸이 그곳에 들어왔고 아주머니는 딸을 목욕시켰다.
아주머니는 함경도가 고향으로 1.4후퇴때 어린딸을 데리고 월남하셨고 당시 48세정도에 늘 한복을
입으셨고 외모가 상당히 고우셨는데 평안도가 고향인 나의 아버지와 가끔 대화를 하시는걸 본적이 있다.
딸은 여상을 갓졸업하여 은행에 다니는 모범생의 외모였다. 신천이는 문풍지에 구멍을 뚫고 그누나의
목욕장면을 숨어서 보았던 것이다. 어느날 나는 신천이가 사는 주인방앞에서 신천아 놀자하고 불렀는데
잠시후 당시 신광여고 3학년인 누나가 나와서 신천이가 니친구냐 하더니 방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그후 그집 큰아들이 장가를 들어 새색시를 데리고 인사를 왔는데 큰아들이 나를 나무랐던 그누나의
가슴을 발로 걷어차는 모습을 보았다. 아마 그누나가 새언니를 반대했던것 같았다
그리고 무더웠던 여름도 지나가고 9월말경 우리는 새로 짓는 집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화곡동으로 이사하게 되어 짧지만 강렬한 추억을 남긴 청파동 한옥집에서의 생활도 막을 내렸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雪)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최승자-
몇년전 청파동의 추억을 찾아 그동내를 가본적이 있는데 신광여고는 옛모습대로 있다
내가 살던 골목길 양옆의 건물은 바뀌었지만 골목의 형상은 그대로이다
4학년 무렵 우리가 살았던 집자리 - 다다미가 있어서 다다미집이라고 불렀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고양입니다 초등학교때 신광여고에 단체로 가서 강당에서 지금생각하니 다큐멘터리 ㅂ는 기억이납니다 어릴때 놀이터가 효창공원이었지요
지금도 초등동창들은 남영동에서 모임을 하지요 만리시장은 지금도 거의 똑같아요 아직도 청파동에사는 지인들 만나러 가끔 갑니다
반갑습니다. 청파동이 고향이신가 봅니다 저는 한남동에서 태어났지만 어린시절 대부분을 청파동에서 보내서
청파동이 고향이라 생각합니다. 효창공원 뒤 만리동에 가서 병아리를 사다가 닭장을 짓고 길렀던 추억도 있습니다.
지금은 충청도에서 살지만 항상 그리운 곳입니다
청파동을 아는가!
아니요
저는 몰라요
신천이란 선배와 동무를 먹었던
그산님께서
남들보다 세상을 좀 더
일찍 알아 갔을 것같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ㆍ
윤슬하여님은 닉에서 물위에 반짝이는 햇빛을 뜻하는 윤슬이 생각납니다
저는 어릴때 형이란 단어를 몰랐고 친형들한텐 언니라 부르고 아래위 두세살정도는
서로 다 이름을 불렀었습니다. 신천이한테 3년 일찍 이상한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저도 보면서
세운상가랑 을지로에 대한 공부를했네요
담주는 제가 짜잔하고 등장합니다 ㅎㅎ
황금으로.ㅎㅎ
반갑습니다. 제가 좀 둔해서 그런데 다음주 TV 황금연못에 출연하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세운상가와 을지로를 다녀오신 글을 올리신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산님의 추억의 동네는 청파동이군요.
제 추억의 요람은 서대문 로터리 부근입니다.
제 마음이 울적할 때 저 어릴 적 살던 그 동네에 가끔 갑니다.
한 달 여 전에도 갔다 왔어요.
서울역사박물관 주차장에 차 대놓고 서대문 로터리 일대를 눈물 까지 글썽이며 돌아다니다 왔어요. ^^
그리고 기독교에서의 치유의 능력, 저는 체험했습니다.
제 허리가 이유 없이 악! 소리가 날 정도의 통증과 함께 구부릴 수가 없는 증세가 종종 나타났었는데
지난 3월 교회 수요 예배 후 교구 모임 때 갑자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오더니 제 척추의 어느 마디를 누가 돌려 맞추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뒤 허리가 씻은 듯이 나았습니다.
그 뒤 8개월이 경과하도록 전혀 안 아파요.
저는 그때 우리 하나님이 제 허리를 만져주셨음을 확신합니다.
그산님 오늘도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반갑습니다. 고향이 서대문인근이신가 봅니다
어릴쩍 추억이 담긴 곳 가까이 사시니 부럽기도 합니다
사실 의학적으로 포기한 병도 신앙이나 정신적인 힘으로 나앗다는 뉴스도 들 은적이
있기에 가능성이 있다봅니다. 척추통증을 신앙의 힘으로 완치하셨다니 정말 신앙이 깊으신것 같습니다
저는 4살때 유아영세를 받았고 어릴때 부터 성당에 다녔지만 지금은 게으르고 귀찮아져서 안나가고 있습니다
그산님 글 처음 읽었을때
차분함 정다움 뭉클함이 그대로 다시 떠오릅니다 오늘 춥습니다 노래자랑 재방보면서
햇볕 쪼우기 합니다, 늘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몸부림님 오랜만에 뵙는것 같습니다
저는 몸부림님하면 잘생긴 얼굴에 건장한 체격을 지녀 슈퍼맨이
떠오르고 유머와 해학이 담긴 글을 자주 봅니다 ^^
어릴 때의 몇 가지 기억들이..
우리가 살아가는데 좋은 토양이 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네요.
청파동의 추억은 아마 영원히 기억하고 계실 듯합니다.
가슴이 짠한 글 잘 읽었습니다.
반갑습니다. 어릴때 살던 동내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니 허무하실것 같습니다
제가 살았던 청파동의 집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골목길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 있어
옛추억을 떠올릴수 있었습니다.
우와..
청파동.. 오랫동안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동네이지요.
이 카페에도, 효창초등학교 출신이
몇명 있습니다.
아마도, 그산님도, 혹시 효창초등학교 출신일까요 ?
신광여고도, 아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갑습니다. 청파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셨나 봅니다
저는 효창 48회이고 70년초 졸업했고 우리 4형제 모두 효창을 나왔습니다
제가 졸업하고 몇년후 효창은 폐교되고 지금은 숙명여대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산
맞아요.
반갑습니다.
우리도 형제가 많은데, 거의
효창 출신이지요.
청파동에서 오랫동안, 살았고,
그후에 효창동으로 이사갔습니다.
숙대앞에
에이원이라는 아이스크림 집과
또 언덕길 중간쯤에는
카니발이라는 찻집이 있었는데..
거기 많이 갔습니다.
진정 반가워요..
효창구장도 있고
밤색 교복의 신광여고 여직도 고가도로 넘어갈땐 운동장이 보이는 ㅎㅍ
전에 읽은 글에서 보니 지존님은 수색쪽이 고향이고 지금도 그근방에서 사시니
부럽습니다. 저는 30살에 서울을 떠나 40년가까이 지방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산 네 수색옆 상암동이 고향이에요
지금은 독립군으로 파주에 있지만오
ㅎㅎㅎ
작은 이야기 같지만
그당시 생활상이 생생하여
역사적 가치 있는 글이라 생각도 하게 됩니다.
제가 중학교 1차 시험을 용산에서 봤는데
낙방하고 2차는 종로쪽으로 진출했는데 역시 낙방하고
다음해에는 뺑뺑이시대가 되어 서울 진입이 불가했지요.
아쉽게도 청파동 효창운동장시대를 열지 못하고
한참후 청파동 인근 중림동에서 1212를 만나게 되니
그나마 아쉬움 덜어지는군요..ㅎ
반갑습니다. 가을이오면님은 충남이 고향이시라 기억되는데
서울에서 중학교 시험을 보셨군요. 서울은 69년 졸업이 뺑뺑이 1회이고
저는 2회입니다. 고등학교는 시험마지막회가 됩니다.
1212를 중림동에서 맞이하셨다니 서울에서 학창생활 또는 군생활을 하신것 같습니다
@그산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우리나이로는 7살이지만
만 5세에 입학했는데 ..동기들 중에는 서너살 많은 용띠 뱀띠도 꽤 있읍니다..ㅎ
1212때 서울역뒤 중림동에 직장사무실이 있어서
집이 방배동이었던 저는 제3한강교로 몇시간을 걸어 귀가했고
그뒤에 격렬해진 서울역앞 시위현장이라든가 광주사무소를 통해 전해듣는
518소식이 거의 실시간으로 .직접 눈으로 내지는 유선으로 상당부분 파악할 수 있었나 봅니다.
입대는 그뒤 26살에 했고요..
홍제동에서 용산,종로로 중학시험 보러 다녔는데
67,68,69년 ...121사태도 있어 움칫 했었고 ..푸에블로..이수근 간첩사건등
그때나 저때나 격동기였군요
@가을이오면 그러시군요. 군대를 상당히 늦게 가신것 같습니다
저는 1212때 보병 8사단에서 비상대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평화로운 시대인데도
갈수록 국제정세가 안좋아지는것 같습니다
네~~잘 보았어요
반갑습니다. 늘 짧고 한결같은 댓글에서 많은 뜻이 읽혀집니다
만리동
윗쪽 중림동 꼭대기
아련한 어린시절
생각나네요
반갑습니다. 중림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셨나 봅니다
20살 무렵 중림동근처 이명래고약에 가서 고름치료를 한적이 있습니다
추억의 글이 너무 생생하여 그 산님의 기억 회로가 상당히 건강하게 작동한다는 ㅎㅎ
인생에서 가장 선명하게 다가오는 유년시절 그 시절 들춰 내어 작가로 성공한 분도 많지요 글 쓰기의 첫 발판이 되기 때문이지요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녔던 한 순간 그 시절 .. 꿈이 였나 싶을 만큼 오래 살았다 싶습니다.
반갑습니다
어린시절의 추억들은 생생한데 바로전의 기억들은 단어도 생각이 잘안나서 치매초기가 의심될 정도입니다
저는 어려운 소설보다는 생장기를 담담하게 회상하는 소설들이 읽기도 편하고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