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의 참전으로 눈 앞에서 좌절된 통일의 꿈.
또 다시 고달픈 피난길에 오르다.... 1.4 후퇴...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통과
북진을 계속하여 압록강변까지 도달하여 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중공 지원군은 1950년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 전쟁에 개입했다.
이 공세에 평양 흥남에서 철수했고 3,8 선 이북을 중공군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후 북한군과 중공군이 공세로 서울 방어가 어렵게 되자1951년 1월 4일
서울은 두번째로 버리게 되었다.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의 흥남철수작전
1950년 11월 중공군의 전면공세로 인해 철수로가 차단된 국군 수도사단,
제 3사단과 미군 제 3사단, 제 7사단, 해병 제 1사단은 흥남에 직결해
미 제 10군단의 지휘아래 철수를 시작했다.
메러디스빅토리아호 선장의 결단에 따라 선적했던 무기를 전부
배에서 내리고 피난민 1만 4천여명을 태워 남쪽으로의 철수에 성공하였다.
세계전쟁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진행된 이 해상철수에는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과
각종 장비와 물자들이 포함되었다.
장진호 전투.
동부전선의 중공군이 미 해병대를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이 대규모 개입으로 전황이 급변하자 작전회의를 열고
북진계획을 재검토하였다.
알몬드 소장은 모든 부대를 함흥~ 흥남 작전기지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미 제 1해병사단은 영하 30도가 넘는 추위와 폭설속에서
2주간(1950, 11,27~12~ 11)에 40km가 넘는 협곡지대를
중공군의 강력한 포위망을 돌파하여 함흥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중공군의 함흥지역 진출은 2주간이나 지연되었고,
국군과 유엔군의 흥남철수작전이 가능하게 되었다.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
유엔군 측의 휴전제의를 거부해 오던 공산군 측은 전쟁에서
더 이상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1951년 6월 23일 휴전협상을 제의 하였다.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시작되었으며 새로운 전쟁 양상을 띠게 되었다.
양측은 대규모 공세작전보다는 38도선 부근에서 유리한 지역 확보를 위한
소규모 전투만을 벌이게 됨으로써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백마고지 육탄 3용사.
1952년 10월 12일 국군 제 9사단 30연대 1대대 1중대 소대장 강승우 중위는
오규봉, 안영권 하사와 함께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를 돌진하여 수류탄으로
이를 폭파시키고 산화함으로써 중부전선의 중요 고지인 백마고지를
탈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1953년 7월 27일에 기나긴 전쟁은 휴전이라는 정전협정에 서명하게 되었다.
첫댓글 흥남철수작전 영화에서도 본 장면이 생각납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세 편으로 나누어서 사진과 설명으로 자세히 올려주셔서
감사히 봅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주말 행복하게 보내세요.
나라가 힘이 없으니 두동강이 났습니다.
강대국의 정치논리로요.....
비극중에 비극이지요..
그나마 국민들이 열심히 일궈서
선진국 대열에 선것이 뿌듯합니다.
아직도 세편이 남았습니다.
유엔참전실, 해외파병실. 강한국군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