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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연합회 서장(간화선 특강)
제2강 - 4부(2012. 10. 22.)
答 曾侍郎 天遊 (一) (二)
不敢以一言一字로 相欺니 苟欺公則是는 自欺耳니라
又記得호니 善財가 見最寂靜婆羅門하고 得誠語解脫하야
過去現在未來諸佛菩薩이 於阿耨菩提에 無己退하며 無現退하며
無當退하야 凡有所求를 莫不成滿은 皆由誠至所及也라
不敢以一言一字(불감이일언일자)로,
그렇다고 감히 한 말이나 한 글자로써
相欺(상기)니, 서로 속인 것은 없다. 조금도 내 진실에서 벗어난 바가 없다.
苟欺公則是(구기공즉시)는, 진실로 그대를 내가 조금이라도 속인다면
自欺耳(자기이)니라. 이것은 당신을 속이기 이 전에 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又記得(우기득)호니, 또 화엄경을 기억해보니
善財(선재)가 見最寂靜婆羅門(견최적정바라문)하고,
이것 약찬게를 외우다가 다른 것은, -大方廣佛 華嚴經. 그 일곱 자는 넉자 석자 떼어서 읽고, 다섯 자는 두자 석자 띄어서 읽도록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시 형식을 글로 읽을 때는 두자 석자. 그런데 약찬게도 그렇게 계속 읽다가 最寂靜婆羅聞者 나오면 最 寂靜婆羅聞者 이렇게 읽네요. 그것 참, 어디서 그렇게 그런 습관이 들었는지 저도 스님들 공부 할 때는 왕복서를 읽고, 신도님들하고 공부 할 때는 약찬게를 읽는데, 신도님들도 전부 最 寂靜婆羅聞者 이래요. 바른 형식으로 읽자면 最 寂靜, 最를 띄지 않고 最寂靜婆 羅聞者 ←이렇게 읽어야 되겠지요. 물리가 났는지 婆羅聞을 붙여서 읽네요. 最 寂靜婆羅聞者 ←이렇게 읽더라고요. 婆羅聞者를 떼어서 읽으면 이상하지요. 스님들도 다 그렇게 읽지요? 最 寂靜婆羅聞者. 스님들도 딱 그 한 구절만 그렇게 읽어요.
最寂靜婆羅門을 진행하고 그래 선지식. 53선지식 중에 바라문을 띄어서 읽습니다.
得誠語解脫(득성어해탈)하야, 그 사람에게는 誠語解脫을 얻었다.
이것 보십시오. 공부를 딴 데는 삼매. 또는 해탈. ←이렇게 표현합니다.
誠語解脫 = 해탈 중에서도 진실한 말의해탈. 진실한 말에 대한 해탈.
過去ㆍ現在ㆍ未來諸佛菩薩(과거현재미래제불보살)이
於阿耨菩提(어아뇩보리)에 無已退(무이퇴)하며,
과거 현재 모든 불보살들이 전부 阿耨菩提. 최상의 깨달음에서 이미 물러감이 없고,
無現退(무현퇴)하며 無當退(무당퇴)하야,
현재 물러감도 없고 앞으로 물러감도 없어서
凡有所求(범유소구)를, 구한 바를
莫不成滿(막불성만)은, 成滿치 아니함이 없으니, 다 성취해서 만족했다 이 말입니다.
皆由誠至所及也(개유성지소급야)라. 다 정성의 지극함에서 이른바 다.
所及. 이를 及자요. 이른다. 그렇지요. 뭘 하더라도 성의가 중요 합니다. 정성이 중요해요. 誠연구소가 있습니다. 정성 誠자. 정성 ←이 문제에 대해서 연구하는 단체도 있고 그래요. 유교에서는 이 誠자를 참 소중하게 생각하지요. 皆由誠至所及이라. 정성의 지극함에 이른바 다. 이른 바를 만난 것이다.
公이 旣與竹倚蒲團으로 爲侶라하니 不異善財가
見最靜寂婆羅門이며 又發雲門書할새 對諸聖하야 遙禮而後에
遣은 只要雲門으로 信許니 此는 誠至之劇也라 但相聽하라
只如此히 做工夫將來하면 於阿耨菩提에 成滿無疑矣리라
公이 旣與竹倚蒲團(기여죽의포단)으로, 공이 이미 竹倚蒲團.
우리나라에서는 방석을 깔고, 그것을 “좌복” 이라고 해서 그것을 깔고 좌선하는데, 여기는 竹倚 = 대로 만든 의자. 또는 蒲團. 이것은 蒲라고 하는 것은 풀인데, 그 풀로 만든 말하자면 방석 같은 것인데 덩어리입니다. 그것이 중국에서 아마 그 어떤 천으로 쓰는 것 보다는, 천을 가지고 하는 것 보다는 아마, 천이 귀해서 그런지 어쩐지 모르지만 아무튼 좌선하는데 필요한 도구지요. 아무튼 우리로 치면 지금 좌복입니다.
爲侶(위려)라하니, 竹倚蒲團으로 벗을 삼는다. 라고 하니
不異善財(불이선재)가 見(견최정적바라문)이며,
선재동자가 最靜寂婆羅門을 친견한 것과 다르지 아니합니다. 선재동자가 53선지식을 친견한 것과 당신도 그대로 지금 똑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又發雲門書(우발운문서)할새, 또 편지에, 雲門 = 대혜스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대혜스님을 때로는 묘희. 때로는 운문 등등, 자신을 그렇게 운문 암에서 살았다고 해서, 운문 암에서 살 때는 운문. 그렇게 말하고요. 또 금정산에 산다고 “금정”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나에게 편지를 보낼 때, 보냄에.
對諸聖(대제성)하야 遙禮而後(요례이후)에 遣(견)은,
저 앞에서(2-3)도 있었지요? 여러 성인을 대해서 멀리 예배한 뒤에 편지를 보낸 것은,
只要雲門(지요운문)으로 信許(신허)니,
다만 要컨대 雲門으로 하여금 믿기를 요한 것이다. ‘제발 좀 내 마음을 대혜스님께서 믿어줬으면’ 하는 그런 뜻에서 했을 것 아니냐? 이 것이지요.
此(차)는 誠至之劇也(성지지극야)라. 정성이 지극한 중에서도,
劇 = 지극한. 정성의 지극함 중에서도 제일 지극한 것이다.
但相廳(단상청)하라. 다만 들으십시오.
只如此(지여차)히, 다만 이와 같이
做工夫將來(주공부장래)하면,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간다면
於阿耨菩提(어아뇩보리)에 成滿無疑矣(성만무의의)리라.
阿耨菩提. 최상의 깨달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성취함에 있어 하나도 의심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대혜스님께서 증 시랑에게 보내는 답장, 첫 장이 끝났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편지,
又 (二)
公이 處身富貴호대 而不爲富貴에 所折困하니
非夙植般若種智면 焉能如是리요 但恐中忘此意하고
爲利根聰明에 所障하야 以有所得心이 在前頓放故로
不能於古人直截徑要處에 一刀兩段하야 直下休歇하나니
此病은 非獨賢士大夫라 久參衲子도 亦然하야 多不肯退步하야
就省力處做工夫하고 只以聰明意識計較思量으로 向外馳求하며
乍聞知識의 向聰明意識思量計較外하야 示以本分草料하야는
多是當面蹉過하고 將謂從上古德이 有實法與人이라하나니
如趙州放下著과 雲門須彌山之類가 是也라하니라.
公(공)이 處身富貴(처신부귀)호대 而不爲富貴(이불위부귀)에
所折困(소절곤)하니, 그대가 몸이 부귀에 처해있다.
侍郞(시랑)벼슬, 장관이나 차관쯤 되면, 그 당시 중국천하에서 장ㆍ차관정도 하면 대단한 부귀를 누리겠지요. 不爲富貴에 所折困이라.
그런 영화를 누리면서도 그 富貴에 折困하는 바가 되지 않는다. 끄달리지 않는다. 그 부귀 누린다고 요즘 돈 좀 있는 스님들도 온갖 자기의 그 어떤 능력을 누린다고 많이 하지요? 세속인이야 말할 것 있습니까? 집이다ㆍ차다ㆍ옷이다. 그냥 명품으로 휘감고, 그런 사람들 부지기수지요. 그것을 정말 折困한다. 그 부귀에 끄달리고 부귀에 꺾여 困하는 바가 되는 것이지요.
부귀 심으로 '밤낮 볼일 다본다' 이 뜻이지요.
그래서 사실 부귀한 사람이요? 발심해서 불교 공부하는 사람은 참 귀합니다. 옛날에는 더러 이런 이가 있었는데, 근래에는 더욱 없습니다. 벼슬 높고 부귀한 사람이 불교를 깊이 공부한다는 사람을 제가 보질 못했습니다. 그냥 불자라고 하기에 명패를 건 사람은 더러 있어도, 불교에 심취해가지고 아~~ 정말 불교가 좋다고 이렇게 깊이깊이 공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富貴에 折困하는 바가 되지 않습니다. 그랬으니
非夙植般若種智(비숙식반야종지)면,
숙세에 般若種智를 심은 것이 아니면
焉能如是(언능여시)리요? 어찌 능히 이와 같으리오? 과거 생에 이 불법에 인연을 깊이 심었다. 그러니까 금생에 부귀를 누릴 때에, 그 부귀에 끄달리지 아니하고ㆍ부귀에 끄달리지 아니하고 정말 발심해서 공부하려고 하니까 아~~ 참, 대단한 것이지요. 그것 어렵습니다. 우리 솔직하게 출가해서 정신적으로 수행한다고 하면서도 계속 추구하는 것이 뭐지요? 부귀공명입니다. 부귀공명만 추구하는 겁니다.
但恐中忘此意(단공중망차의)하고,
다만 염려되는 것은ㆍ다만 염려되는 것은 공부하는 가운데, 中자는 그런 뜻입니다. 此意忘하고 = 이 공부하고자 하는 이 뜻을 잊어버리고
爲利根聰明(위이근총명)에 所障(소장)하야, 利根聰明.
이 사람은 상당히, 과거시험 봐서 말하자면 합격한 사람이니까, 고등고시 패스한 사람이니까 보통영리한 사람이 아니지요. 보통 총명한 사람이 아닙니다. 利根聰明의 장애되는바가 돼서, 대혜스님은 이것을 염려 합니다.
그래서 世智辯聰(세지변총). 세상 지혜가 뛰어난 사람들은 불법을 깊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는 것이고, 또 北鬱單越(북울단월)에 태어나면 공부하기가 어렵다 하는 것도 그것은 부귀공명을 누리는 것을 실득하는 것입니다.
부귀공명을 누리는 사람이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고, 또 머리 총명한 사람이 제대로 불교 공부하는 사람이 어렵다. 그래서
以有所得心(이유소득심)이 在全頓放故(재전돈방고)로,
조금 그 총명한 머리로 이리저리 그냥 경전도 살펴보고 거기엔 ‘아 이거구나ㆍ불법이 이거구나,’ 라고 그만 얻은 바가 조금 있을 것 같으면 그것이 앞에 딱 가로놓여 있습니다. 가로놓여 있는 겁니다. 항상 그것이 장애가 되는 것이지요.
不能於古人直截徑要處(불능어고인직절경요처)에,
능히 고인들이 바로 꺾어서 질러가는 그 요긴한 곳에
一刀兩段(일도양단)하야 直下에 休歇(직하휴헐)하나니,
一刀兩段. 한 칼로 딱 잘라가지고 直下에 쉬어버리는 것. 확실하게 쉬어버리는 것. ‘거기에 제대로 이르지 못할까?’ 그것이 염려가 된다. 하는 것입니다. 총명한 사람이니까요. 부귀한데서 이미 벗어나는 건 좋아, 그것은 훌륭한 근기야, 그런데 당신에게 장애가 될 만한 꺼리가 또 총명한데 있어, 그것을 내가 염려한다.
그렇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치고 공부 열심히ㆍ깊이 있게 하는 사람 참 드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이야기하지만 머리둔한 것이, 저도 참 둔재거든요. 둔한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둔하지 아니하면 오늘 이렇게 이때까지 계속 옥편 들고 씨름하고, 사전 들고 씨름하고, 열 번 스무 번 찾았던 단어 또 찾고, 아마 그렇게 안할 겁니다. 계속 씨름하는 그것이 정진인데요. 그것 둔한 덕에 하는 겁니다. 영리한 사람들은 그렇게 공부 안 합니다. 아니하고 딴 길로 가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혹시 둔하면, 스스로 둔하다고 생각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영리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면 그것은 더 다행입니다. 사실은 금상첨화지요. 영리한 사람이 잘 안 하니까 아우성이지요. 그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좋지요.
此病(차병)은, 이러한 병은
非獨賢士大夫(비독현사대부)라. 홀로 어진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久參衲子(구참납자)도 亦然(역연)하야,
구참납자도 또한 그런 병에 걸려있다 이 말입니다.
多不肯退步(다불긍퇴보)하야, 흔히 기꺼이 退步해서
就省力處做工夫(취생력처주공부)하고,
省力處에 힘이 덜리는 곳, 힘을 여러 번 쓰다보면 힘이 덜 들어요. 운전 배워 보면 그렇지요. 처음에는 힘 줘서 운전한다고 집에 돌아오면 팔이 얼마나 아픕니까? 그런데 나중에 익숙하면 팔은 묵직해도 잡담하고, 곳곳에 온갖 것 쳐다보고 그것이 힘이 덜리는 것이지요. 힘을 안 써도 운전이 되는 것하고, 이 참선공부도 똑 같습니다. 省力處做工夫하고, 퇴보를 해가지고 자기가 ‘아~ 나는 부족하다ㆍ부족하다.’ 자꾸 이렇게 생각을 해서 힘 덜리는 곳에서 공부를 짓지 아니하고, 이 말입니다. 아니 不자.
只以聰明意識計較思量(지이총명의식계교사량)으로,
다만 총명한 의식과 그 의식으로 계교하고 사량하는 것으로써
向外馳求(향외치구)하며, 밖을 향해서 내달린다 이 말입니다. 밖을 향해서 내달리면서 구하고 = 向外馳求
乍聞知識(사문지식)의, 잠깐 선지식의
向聰明意識思量計較外(향총명의식사량계교외)하야,
총명ㆍ의식ㆍ사량ㆍ계교. 밖을 향해서, 선지식은 지식을 논하자고 하는 가문이 아니니까요. 이 선불교라고 하는 것은 무슨 지식이다ㆍ총명이다ㆍ많이 안다. 이것은 아무 쓸모없는 것으로 보는 그런 종파고, 그런 공부기 때문에 선지식법문도 역시 그래요. 그것하고 아무상관 없습니다.
그래 그것을 밖을 향해가지고서 예를 들어서
示以本分草料(시이분본초료)하야는,
本分草料로써 보이는 것을 듣고는 本分草料. 本分이 뭡니까? 마음자리라고 합시다. 본분사로써, 첫 시간에 그것 말씀드렸습니다. 선불교는 본분사를 밝히는 일이다ㆍ마음을 밝히는 일이다ㆍ마음도리 하나 깨닫는 일이다. 그럼 本分草料라고 하는 것은 그 마음도리를 깨닫는 양식입니다. 草料는 꼴입니다. 꼴 = 풀. 소나 말이 먹는 식물이지요. 말하자면 본분도 = 우리 마음자리도 마음자리가 그것을 먹고 눈을 뜰 識재료가 있어요. 먹을 꺼리가 있다고요. 마음이 먹을 꺼리가 있다고요. 야~ 대단하잖아요. 마음이 먹을 꺼리가 있다. 本分草料 = 본분의 양식. 본분의 양식이 있어요ㆍ마음의 양식이 있어요. 보통 우리가 말하는 마음의 양식 정도가아니라 그것은 그야말로 본분의 양식. 그것을 선지식이 보이는 겁니다.
그것을 드러내는, 예를 들어서 ‘무엇이 본분양식일까?’우리가 드러내고,
“방하착ㆍ수미산이다.” 이것을 다 본분양식입니다. 이것 제대로 먹어서 삼키면 본분의 눈을 확~ 뜨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것을 보이는 것을 듣고는
多是當面蹉過(다시당면차과)하고, 當面. 그 자리에서 미끄러져버려요.
모두 다 거의, 거의 다가 마음에 따라서 거의 다가 그 앞에서 미끄러져버려요. 뭔 소식인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안하고 지나가 버려요. 또 거기서 사량 분별로 당신 지식가지고 이리 꿰어 맞추고 저리 꿰어 맞추고 그것 다 엉터리지요. 그리고는
將謂從上古德(장위종상고덕)이, 장차 이르기를 옛날 고덕들이
有實法與人(유실법여인)이라하나니, 실다운 법으로서 사람에게 준 것이 있다. 그렇게만 그냥 치부해버리고 만다.
如趙州放下着(여조주방하착)과, 조주스님의 “내려놓아라.”
“한 물건도 가져오지 아니했을 때 어떻습니까?” 하니까
조주스님이 “내려놓아라.” 라고 하는 放下着.
雲門須彌山之類(운문수미산지류)가, 운문스님의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 했을 때 허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했을 때, “수미산이다.” 라고 하는 그 운문스님의 법문. 그 종류가
是也(시야)라하니라. 이것이다. 뭐라고요?
本分草料 = 우리본분 = 마음자리가 먹고서 눈을 뜨는 양식이다. 이런 뜻입니다.
여기까지만 해도 우리가 참선불교, 특히 간화선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이 전이가 된 택입니다. 스님들 평소에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구체적으로 이 선 지침서. 그래서 “서장 강의는 간화선 강의다.” 제가 그런 표현을 썼는데요. 말하자면 아주 선의 제일가는 지침서. 그 중에도 간화선의 제일 지침서라고 하는 이런 지침서에 근거한 지도 방법. 그 겁니다. 사전적인 해석은 여기서 할 겨를도 없고, 또 하지 않겠습니다. 암두스님. 훌륭한 선지식이지요. 그 스님의 법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巖頭가 曰卻物이 爲上이요 逐物이 爲下라하며
又曰 大統綱宗은 要須識句니 甚麽是句오 百不思時를
喚作正句라하며 亦云居頂이라하며 亦云得住라하며
亦云歷歷이라하며 亦云惺惺이라하며 亦云恁麽時라하나니
將恁麽時하야 等破一切是非니 纔恁麽면 便不恁麽라
是句도 亦剗이며 非句도 亦剗이니 如一團火相似하야 觸著便燒라
有甚麽向傍處리요 今時士大夫가 多以思量計較로 爲窟宅하야
聞恁麽說話하면 便道호대 莫落空否아하나니 喩似舟未翻에
先自跳下水去라 此는 深可憐愍이로다
巖頭曰(암두왈)
卻物(각물)이 爲上(위상)이요 遂物(축물)이 爲下(위하)라하며,
사물을 물리치는 것은 아주 上이 되고, 사물에 쫓아가는 것은 下가 된다.
그렇지요. 어떤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것. 그것이 却物이지요. 물리칠 却자. 어떤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그 사람은 大人이지요. 그런데 경계에 끄달리면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지요. 爲下라. 라고 했고,
又曰(우왈), 또 말씀하시기를
大統綱宗(대통강종)은 要須識句(요수식구)니, 그랬습니다.
大 統 綱 宗. 아주 크게 통솔하다. 이 統자는 대통령할 때 쓰는 글자지요?
말하자면 전체를 통괄하는 그런 綱宗. 벼리 綱자 아닙니까? 벼리는 뭡니까?
그물을 관리하는데 좌지우지할 수 있는 부분을 綱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으뜸가는 것. 그것을 한 마디로 묶어서 大 統 綱 宗. 그래요. 가장 으뜸가는 것.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크고 중요하고 으뜸이 되는 종자도 마루 宗. 큰 건물이든 작은 건물이든 제일 위에 부분을 우리가 “마루” 그렇게 하는데요. 모든 건물은 위에 마루가 있음으로 해서 건물이 형성됩니다. 그런 宗자입니다. 우리 宗師니ㆍ宗旨니ㆍ宗正이니 하는 뜻이 전부 그런 의미입니다. 으뜸가는 것. 으뜸.
그것은 뭐냐? 뭘 로 가능하냐? 要須識句다. 句를 알아야 한다.
요컨대 모름지기 句를 알아야 된다. 글귀문자. 이 禪家에서ㆍ禪門에서 句 할 때는 이것은 그냥 글句가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화두를 句라고도 하고, 또 그야말로 本分草料, 본분의 양식을 句라고도 표현 할 수가 있습니다. 요컨대 句를 알아야 된다. 어렵지요. 예를 들어서 ‘수미산, 그 높은데’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甚麽是句(삼마시구)오? 무엇이 句냐? 무엇이 구냐? 무엇이 글구냐?
예를 들어서 방하착ㆍ수미산이 구라고 했습니다. 일단 그래요.
百不思時(백불사시)를 換作正句(환작정구)라하며,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그 소식 = 百不思時.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 소식을 正句라고한다. 바른 句라고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수미산을 제대로 참구하면 그것은 百不思時입니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 순간이 되는 겁니다. 그 자리가 되는 겁니다. 그것을 換作正句라.
바른 正句라 한다. 또
亦云居頂(역운거정)이라하며, 居頂. 이마에 머문 것. 이마에 머문 것이라 한다. 가장 높은 데 머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요. 우리 선불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제일 높은 자리에 있다.” 뭐냐? 화두를 들었으니까요. 화두에 깊이 몰입했으니까요. 그것이 居頂입니다. 그것이 正句입니다. 그 때는 百不思時라. 거기는 아무것도 생각이 붙을 수가 없는 자리.
수미산이 그렇고ㆍ방하착이 그렇습니다.
亦云得住(역운득주)라하며, 비로소 머물 곳을 얻었다. 得住 = 머물 곳을 얻었다. 공부인은요? 화두 제대로 챙겼을 때 그 때 비로소 거기에 그 사람이 살 자리입니다. 뭐 좋은 사찰ㆍ좋은 집ㆍ좋은 방ㆍ좋은 위치에 사는 것을 산다고 하지 않고, 화두 안 놓치고 화두에 깊이 몰입했을 때 그 사람 제대로 사는 사람이다. 得住. 야~ 참, 좋은 표현이지요.
亦云歷歷(역운력력)이라하며, 수미산ㆍ방하착을 여기서 우리가 소개 받았으니까 수미산은 좋다 말입니다. 거기 하나 亦云惺惺(역운성성)이라하며, 성성하게 들고 있어요. 역력해요. 그 다음에 惺惺입니다. 분명한 것을 歷歷이라하고 惺惺. 이것은 아주 초롱초롱하게 깨어 있는 것. 화두가 제대로 들릴 때 그 때가 아주 역력해요. 그것이 성성한 자리입니다.
亦云恁麽時(역운임마시)라하나니, 이러한 때, 이 때다. 바로 이러한 때,
바로 정법이 살아있는 때. 활발발한 그런 마음자리ㆍ불성자리가 살아있는 것이라 한다. 한 마디ㆍ한 마디가 다 아주 뜻이 참 깊어요.
將恁麽時(장임마시)하야, 이러한 때를 가져서
等破一切是非(등파일체시비)니, 거기에 무슨 시비가 붙겠습니까?
수미산. 일체 사량 분별이 다 끊어져버렸습니다. ???분별이 다 끊어져버렸습니다. 그렇다고 조느냐? 조는 것이 아닙니다. 성성적적하고 역력성성해요. 일체 시비가 다 等破. 모두가 다 깨뜨려진 그 자리.
纔恁麽(재임마)면, 이거냐? 막 이것이다.
纔恁麽 = 막 이것이다. 라고 하면 병든 겁니다. 이것이 아닙니다.
이것이다. 할 때 거기는 벌써 티가 붙었습니다. 뭔가 이끼가 껴요.
그런 것 아무것도 끼어지지 않을 때 그러니까
纔恁麽면 便不恁麽(변불임마)라.
막 이것이다 해서 곧 이것이 아니다. 이러한 것이 아니다.
그러면 是句(시구)도, 옳은 글 구도, 좋다고 하는 글 구도
亦剗(역잔)이며, 거기에 부정당하는 깎을 剗자입니다. 부정당하는, 붙을 수 없다.
非句(비구)도 亦剗(역잔)이니, 제대로 화두를 들고 있을 때는 수미산ㆍ방하착 마저도 없어요. 오롯이 惺惺寂寂(성성적적)한 그 자리. 의심하는 疑團(의단)덩어리. 의심덩어리만 있지, 거기는 방하착도 없고 수미산도 없습니다.
누가 방하착가지고 화두를 들었어요. 들다보니까 방하착 마저도 없는 그 자리. 거기는 是句니ㆍ非句니ㆍ좋은 화두니ㆍ나쁜 화두니ㆍ옳은 화두니ㆍ옳지 않은 화두니 하는 것이 다 부정 당한다. 亦剗이라. 예컨대 뭐와 같으냐?
如一團火相似(여일단화상사)하야, 한 덩어리의 불덩어리와 같다.
觸着便燒(촉착변소)라. 닿기만 하면, 큰 불덩어리 활활 타오르는 용광로라서 거기는 닿기만 하면 곧 타 버려요.
有甚麽向傍處(유삼마향방처)리요? 무슨 거기에 그 곁에 얼러댈 것이 있겠어요? 무슨 부처인들 조사인들 화엄경인들 법화경인들 금강경인들 그 부근에 어찌 설왕설래할 그런 상황이 되겠느냐? 이 말입니다.
有甚麽向傍處리요? 그 옆에 얼러댈 수가 없다 이 것이지요.
어떤 고준한 무슨 이론도 거기엔 붙을 수가 없는 자리입니다. 그렇지요.
수미산 하나 딱 들고, 그야말로 완전 疑團獨露(의단독로)가 딱 되면, 그런 상황이라면 거기에 무슨 화엄경이고ㆍ법화경이고ㆍ공자ㆍ맹자ㆍ석가ㆍ달마든 얼러댈 상황이 안 되는 것이지요.
今時士大夫(금시사대부)가, 요즘 사대부들이
多以思量計較(다이사량계교)로, 이 생각 저 생각하고, 이것배우고 저것배우고, 배운 것은 많고 아는 것은 많아서 그걸 가지고서,
爲窟宅(위굴택)하야, 자기 살 집을 삼아서
聞恁麽說話(문임마설화)하면, 이런 이야기, 내가 말하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便道(변도)호대, 곧 말하기를
莫落空否(막락공부)아하나니, “그 사람 공에 떨어진 것이 아니냐?ㆍ공에 떨어진 것이 아니냐?” 라고 이렇게 여긴다. 이 말입니다. 일체 시비가 다 끊어지고 사량 분별이 다 끊어지고 銀山鐵壁(은산철벽)이 돼버린 그런 진짜 공부가 제 궤도에 올랐는데 그 자리를 가지고 사량 분별로써 살림살이로 삼는 사람들을 “공에 떨어진 것이 아니냐?”이렇게 여긴다. 이겁니다.
喩(유), 비유컨대
似舟未飜(사주미번)에, 배가 뒤집혀지기도 전에
先自跳下水去(선자도하수거)라. 먼저 스스로 물로 빠져가는 것과 같다.
배가 넘어진 뒤에 저절로 물로 빠질 텐데, 넘어지기도 전에 배가 움적움적하니까 그만 물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과 같다.
此(차)는 深可憐愍(심가연민)이로다. 이것은 심히 가히 불쌍한 일이로다.
선법문은 이렇게 아주 박력있고, 우리 경전에서 공부하던 것하고 또 다른
아주 멋진 그런 법문들입니다. 참~~ 대혜스님 같은 분은 아주 선교도 아주 뛰어 나고 머리 총명하고 하나도 안 까먹고, 거기다가 수많은 깨달음을 경험하면서 완전한 그런 어떤 경지에 이르렀고, 이러한 완벽한 선지식. 그야말로 모든 분야에서 완벽한 선지식이다 보니까 ‘이런 내용이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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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