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휴학계획서
나의 대학생활 3년은 가벼운 책읽기와 아주 자그마한 인연들을 소중히 가꾸는 일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남들처럼 성적에 치열하게 매달려 본 적도 없고,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맹렬하게 뛰어 본 적도 없다. 하지만 매 순간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했고, 2000년 2학기를 휴학하며 작성한 휴학계획서를 ALIA(Ajou Love In Action) 홈페이지에 올리며 나의 인도행을 위한 분주한 생활은 시작되었다.
휴학계획서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설립하신 '사랑의 선교회(Missionaries of Charity)'의 자원 봉사자가 되기 위해 너른 인도 대륙, 캘커타에 자리한 '마더 하우스'에 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고, 그 곳은 사랑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곳, 기쁨의 도시이기를 바랬다. 또한 여자로서, 수도자로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해 살다간 그녀의 삶이 유난히 향그럽게 느껴졌다. 그녀에 관한 책과 기사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사업들을 나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커져만 갔다. 도대체 왜 그녀는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고, 어떻게 노벨 평화상이라는 큰 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다른 친구들이 기말고사를 마칠 무렵 나의 손에는 아르바이트를 통해 마련된 80만원짜리 항공권과 몇 백 달러의 여비가 쥐여져 있었지만 걱정거리가 더 많은 막막한 나날들이었다. 난생 처음 그것도 혼자 떠나는 해외여행, 영어 실력도 변변찮은데다가 번번이 실종사고가 일어나며 전염병이 창궐하다고 알려진 인도라니... 친구들, 부모님께서는 간이 배밖에 나온 나의 이런 행동을 대단하다고, 한심하다고, 여러 이야기를 공중에 뿌리셨지만.. 1월 13일 오전 8시 50분. 나는 홍콩을 경유하여 뭄바이에 도착하는 대한항공 603기(이 비행기에 홍콩스타 여명이 함께 탔었다는 이야기는 못하겠다. ^^;; 그 잘 생긴 얼굴에서 빛이 나더라는 이야기는 차마 못하겠다. )에 몸을 싣고 한반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사실 그 때 나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죽어도 캘커타에서 죽으리라' 라는 비장한 각오를 다지고 있었다.
.. Where is MOTHER HOUSE?
뭄바이에서 기차를 타고 33시간만(?) 달리면 캘커타에 도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여행은 예상치 못한 사건, 사고들로 가득했다. 인도라는 나라는 생각보다 훨씬 난감하고 생소했다. 그 덕분에 나는 330시간 후가 되어서야 겨우 캘커타에 도착할 수 있었다. 330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잔타 석굴 벽화들과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고, 엘로라의 거대한 석굴 사원에서 섹시한 자태의 불상들을 어루만지고, 현재 지진복구 사업으로 부산한 구자라트주에 위치한 인도 제일의 바로다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의 작업실을 살며시 엿보고 있었다.
1월 27일 드디어 캘커타 배낭족들의 아지트 서더스트리트에 도착했다. 새벽 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한국인 자원봉사자들을 따라 가려고 새벽 4시부터 뜬 눈으로 기다리고 있었지만 만나지 못했고, 나 스스로 새벽 5시의 캄캄한 길을 찾아 마더 하우스까지 가야만 했다. 확실하게 정해진 사실은 없고, 이젠 도움을 줄 사람도 기대할 수 없다. 여행이란 그런 것. 일단 부딪쳐 보는거다.
..안띠,안띠! -싸움에서 나눔으로.
오전 8시 햇살이 밝게 비치면 삼삼오오 짝을 이룬 사람들이 프렘단 작은 문을 밀고 들어간다. "나마스떼~!" "굿 모닝, 안띠(aunt, 환자들은 여자 자원 봉사자를 이렇게 부른다.)~!" 환자들을 껴안고 구르며, 소리를 지르며, 큰소리로 웃으며 뻑쩍찌근한 인사로 하루의 일을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육체적·정신적으로 건강상태가 좋지 않으나 회복될 가능성이 있는 120여 병자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 프렘단(Prem Dan, 사랑의 선물)은 마더 테레사 수녀님께서 설립하신 사랑의 선교회의 산하기관으로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집인 깔리가트, 나병환자들의 공동체인 산티 나가르, 의지할 곳 없는 버려진 어린이들을 위한 시슈바반 등의 여러기관들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이 기관들은 원장 수녀님과 함께 봉사하시는 수녀님들 그리고 소수의 고용된 인력과 전세계에서 몰려든 자원 봉사자들의 손길로 돌보아지는 기적의 산물들이다.
"가난한 사람들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을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음식에 대해 불평한다면 우리도 같은 것을 먹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이같은 정신에서 세탁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호의도, 정전에 대비해 발전기를 기증하고 싶다는 제안도 모두 거절했다. 그래서 우리는 직접 환자들의 침대시트와 옷, 기저귀를 매일 빨아야만 했다. 초록빛 바닷물이 아닌 뜨거운 비눗물에 손을 담그고 더러운 배설물, 전염성이 강한 병균이 묻어있는 옷가지들과 씨름하는 일은 교만하고 안이한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내가 만난 사랑의 달인들 앞에서 난 어설픈 신출내기에 불과했다. 눈치 느리고 둔한 나에게 1달이라는 시간은 그들의 맛깔스런 봉사서비스를 배우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담요를 내리다 계단에서 굴렀고, 할머니께 큰 고기를 덩어리째 떠먹여 음식물을 모두 뱉아내고 식사를 못하시게 했으며, 일을 다 보시기도 전에 휴대용 변기를 빼내려고 시도한 탓에 엉덩이에 생채기를 내는 등 실수 연발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시간들 속에서 어느 순간 그 모든 일들을 즐거워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힘겹게 나와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힘과 젊음을 약한 자들에게 기쁘게 나누어주고 있었다.
..그녀가 한 일
한국에 돌아오니 나의 생각이 너무 달라져 있었다. 다른 모든 것들은 신기할 정도로 제자리에서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기간 동안에 일어났던 일들을 묻는 변하지 않은 그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아무도 나를 기다려주지 않고,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곳을 헤매며 목적지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어떤 게임보다 재미있었다. 나는 더 무모하고 대책없이 살기로 결심했다. 조금 더 힘들고 어렵지만 나 스스로 나서기만 하면 충분히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 돌아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양의 물질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에게 공급되어 최고의 가치를 발휘하게 만드는 참된 경영을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더 하우스에서는 매일 새벽 미사를 마치고 나면 자원 봉사자들을 위해 빵 한 덩어리와 따뜻한 차 한잔, 자그마한 바나나 하나를 나누어주었다. 그 간소한 양식의 힘으로 모두는 먼길을 지나 병든 사람들의 보금자리로 걸어 들어가 빨래를 하고, 밥을 먹여 주고, 어깨를 맞대고 서로의 체온을 나누었다. 피부색이 다르고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그들의 머리에는 이가 득실거리고 온몸은 전염성이 있는 병균들로 뒤덮여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들을 안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이 생각과 숨결을 지닌 인간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에 와서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내가 그들을 안은 것만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나를 안고 있었다는 것이다. 언어가 피부색이 사상과 종교가 다르지만 우리는 손을 잡고 하나가 되어 일하며 겸손하게 낮아져 있었다. 테레사 수녀님께서 하신 일은 끊임없이 진심을 나누어주신 것이 아닐까? 세계는 그 사랑에 감동받아 그녀를 눈여겨 지켜 본 것이 아닐까? 인도에서 전세계의 모든 이들이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진심을 나눌 수 있도록 큰 잔치판을 벌이고 우리를 초대하신 것은 아닐까?
나는 캘커타에서 배웠다. 추악하고 이기적인 욕망은 사랑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 것임을..
LOVE GOING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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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친구 유향이의 글입니다.
그녀는 지금 인도에서 돌아와 또다시 바쁘게 무언가를
뚝딱뚝딱 만들고 있을 것입니다.
그녀는. 삶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또 그것을 즐길 줄 아는 여성입니다.
저는 제 친구가 자랑스럽습니다.
친구의 허락도 받지 않고 퍼다 올립니다.
그러나 그녀는 허락해 줄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