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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2강-5 (2013. 10. 21.)
陳少卿 季任(一)
깨달음의 경지나, 설법의 경지나 사실은 무엇이라고 꼭 집어가지고 이것만이 그것이다. 라고 이렇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참 이것은, 불교만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불교만이...
아주 훤출히 깨달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요.
若確定本體하야, 만약 本體를 確定해서,
實有恁麽事인댄, 실로 이러한 있다. 라고 그렇게 한다면,
又却不是也(우각불시야)리라. 또한 도리어 옳지 아니할 것이다.
無有定法인데, 꼭 확정가지고 이것이다. 라고하면 그것은 틀린 것이지요.
불법에는 그러한 이치가 없으니까요. 왜 그런가 하면, 불법도 그러려니와 사물도 그러고, 경계도 사실은 꼭 이것이다. 라고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책을 가지고 있고, 책은 종이 한 장ㆍ한 장으로 이뤄진 것인데요. 이 종이가 어디 종이 입니까? 이 종이가 되기까지는 온갖 것이 다 동원이 되어있습니다.
특히 종이의 본질은 “나무” 그러잖아요.
“나무다.” 종이가 아닌 겁니다. 나무인겁니다. 나무가 어디 그냥 종이가 됩니까? 거기에는 김씨ㆍ이씨ㆍ박씨의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그럼 사람입니다. 종이 그대로가 사람이라고요. 어디그것 뿐인가요? 거기에는 저 푸른 하늘도, 흘러가는 구름도 내리는 빗줄기도 강도 바람도 냇물도 이 종이 한 장속에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동원이 되지 않았다면 종이가 있을 수가 없잖아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공장에서 기계를 돌리는 사람의 땀방울도 이 종이 한 장 속에 있습니다. 기계를 돌리는 사람의 땀방울이 없었다면 이 종이는 여기에 존재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공장의 직원의 땀방울이다.” 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모든 것이 이 우주 법계가 다 동원이, 하나ㆍ하나가 다 동원이 됐습니다. 그렇게 동원이 됐기 때문에 종이 한 장은 우주 법계 전체입니다. 無有定法이라고요. 이 세상에 고정된 법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은 물리학이 하도 발달해서 물질을 분석해가지고...
옛날에는 물질을 형성하고 있는 최소단위가 “원자ㆍ근원되는 입자”그랬습니다. “원자” 라고 그렇게 해서... 원자가 최소단위인줄 알았어요.
전부 원자 덩어리로 그렇게 알았는데 나중에, 또 과학이 발달하다 보니까 원자 속에는 수십 개ㆍ수천 개ㆍ수만 개의 다른 입자들이 또 있는 겁니다. 무슨 양성자니, 중성자니 무슨 온갖 입자들이 그 속에 다 있어서 육안으로 물론 분별이 안 되지요. 뭐라고 고정시켜서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한 사실들을 깨달은 사람들은 일찍이, 2600년 전에 벌써 저런 것을 다 보아서 그대로 이야기해 놓은 것 아닙니까? 불교이치는요? 참~~ 신기한 것입니다. 우리가 취미만 제대로 갖게 되면, 불법에 취미를 제대로 가지면, 이런 서장의 가르침이라든지 기타 경전의 가르침이 얼마나 신기하고 미묘한지 모릅니다. 밥 그까짓 것 몇 때 굶어도 아무 이상 없습니다.
우리가 취미를 제대로 못 가져서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이 좋은 가르침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거기에 맛을 제대로 못 느끼니까 뭐 부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내 생활은 생활이다. 이렇게 사는 것이지요.
불법이 바로 서려면 불법에 종사하는프로들. 출가한 프로들이 말하자면 본분에 충실 하는 것. 불법에 맛을 들이고, 불법에 취미를 느끼고, “하~~ 불법 좋다고ㆍ좋다고,”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리 뒤져보고 저리 분석하고 하는 것. 그래서 거기서 어떤 희열을 느끼고ㆍ맛을 느끼고ㆍ그래서 무릎을 탁~ 치기도하고, 여기서 뻥 소리 나고ㆍ저기서 뻥 소리 나고, 분위기가 이쯤 되면 불법은 저절로 세상에서 아주 빛이 될 것인데, 우리가 본분에 충실 못하고, 엉뚱한 일에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지요.
엉뚱한 데 시간 보내니까 불법은, 그 좋은 불법. 그 다이아몬드보다 천 배ㆍ만 배 값나가는 것을 옆에다 두고도 ‘내몰라.’ 하고 그냥 적당히 그저 반야심경이나 천수경이나 적당히 외우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반야심경ㆍ천수경ㆍ시식 문ㆍ불공 문, 그것만 알면 끝이잖아요. 그것만 하면 밥벌이는 되니까요. 더 이상 안 나가는 겁니다. 더 이상 공부하려고 안 해요.
事不獲已하야 因迷悟取捨故로 說道理有若干이나
爲未至於妙者하야 方便語耳라 其實本體는 亦無若干이니
請公은 只恁麽用心하야 日用二六時中에 不得執生死佛道하야
是有며 不得撥生死佛道하야 歸無하고 但只看狗子도
還有佛性也無잇가 趙州云無언정 切不可向意根下卜度하며
不可向言語上作活計하며 又不得向開口處承當하며
又不得向擊石火閃電光處會니라
狗子도 還有佛性也無잇가 無라함을 但只如此叅이언정
亦不得將心待悟待休歇이어다 若將心待悟待休歇인댄
轉沒交涉矣리라
事不獲已(사불획이)하야, 일이 부득이해서,
不獲이나, 부득이나 같은 뜻입니다. 일이 부득이해서
因迷悟取捨故(인미오취사고)로, 迷悟取捨를 因한 까닭에
說道理有若干(설도리유약간)이나,
도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 있어, 다소 있으나
爲未至於妙者(위미지어묘자)하야,
妙에 = 미묘한 도리에, 불법의 미묘한 도리에 이르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方便語耳(방편어이)라.
방편으로 말할 따름이다.ㆍ방편으로 말할 따름이다.
其實本體(기실본체)는, 그 실로 본체는
亦無若干(역무약간)이니,
本體 = 우리마음 자리에는 또한 약간도 없어, 조금도 없음이니,
請公(청공)은, 청컨대 그대는
只恁麽用心(지임마용심)하야, 다만 이렇게 用心해서,
日用二六時中(일용이륙시중)에, 일상 二六時중에
不得執生死佛道(부득집생사불도)하야, 生死佛道를 집착해서
是有(시유)며, 있다고도 하지 말며ㆍ있다고도 하지 말며,
생사니 불도니 이 모두를 꼭 집착해가지고 ‘불도가 있다.ㆍ생사가 있다.’ 이렇게 집착하지 말라. 또
不得撥生死佛道(부득발생사불도)하야,
生死佛道를 撥. ←이것은 ‘부정해서’그런 말입니다. 쓸어버릴 撥자. 쓸어질 撥자니까요. 생사와 불도를 부정해서
歸無(귀무)하고, 없는 데로 돌리지도 말라. 없다고도 하지 말라.
생사니 불도니 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없다고 해서도 안 맞고, 있다고 해서도 안 맞는 겁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실 그래요.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그냥 곰곰이 생각으로ㆍ사량 분별로, 우리의 능력은 일단은 거기까지입니다. 사량 분별이 우리의 능력이니까요. 사량 분별로 가만히 생각해보면 생사니 불도니 하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있다고도 하지 말고, 없다고도 하지 말라.
但只看(단지간), 다만 살펴보라. 유심히 보라.
看자가 뭐지요? 눈 目(목)위에다 손 手(수) 얹었지요? 저 멀리 잘 안 보일 때, 눈 썹 위에다 손 얹고 유심히 볼 때 看자입니다. 유심히 볼 看자. 그리고 화두를 들어도 이 看자를 우리가 이해하면 화두 드는데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몰라요. 그냥 대충, 대충대충 그저 생각나면 들고, 생각 안 나면 안 들고, 저~ 기 누가 사람 있으면 역광이 일어나서 잘 안 보이잖아요.
그러면 빛을 가리고 유심히 보면 잘 보이거든요. 이것이 그럴 看자입니다. 이 看자가 상형문자니까요.
狗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잇가?
趙州云無(조주운무)언정,
개가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조주가 말하기를, 無라고 한 것을 看할지언정, 육안으로 보듯이, 사물을 유심히 바라보듯이 그렇게 無자를 봐라. 看자가 이 뜻입니다.
이것이 화두 드는 正行입니다. 화두의 正行.
趙州云 無언정
切不可向意根下卜度(절불가향의근하복탁)하며,
여기 몇 가지, 화두 드는데 다른 길을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몇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無자 십종 병이니 하는 등등, 이야기가 있는데 여기 몇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간절히 意根下를 향해서 卜度하지 말라. 卜度 = 사량한다 이 말입니다. 헤아릴 度자입니다. 헤아리지 말라. 우리의식으로, 다시 말해서 우리의식으로 이러 궁리하고 저리 궁리하고 그렇게 하지 말라. 이 겁니다. 無? 하면 거기서 딱 끊어져 버려야 됩니다.
옷 갈아입으려고 여기 1억짜리 수표를 금방 놨는데 없어져 버렸어요.
‘수표 어디 갔지?’그러면서 그냥 아무 생각도 없는 겁니다. 자기 혼자 있었으니까... 자기 혼자 있었는데...
분명히 여기다 놨는데 없어졌다.
정말 하늘이 무너질 노릇 아닙니까? 거기에 무슨 생각이 나겠습니까?
바람이 분 적도 없고, 문이 열렸다 닫힌 적도 없고, 누가 왔던 적도 없고, 그저 단 몇 초상간입니다. 그저 1ㆍ2 초 상간에 안 보인다. 이 겁니다.
그와 같이 의심이 잦아들어야 됩니다. 無? 이럴까? 저럴까? 사량卜度하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누가 왔었나? 바람이 불었나? 고양이가 왔었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수표를 찾으려고 하는 그런 것. 비유하자면 사량卜度이라는 말이 그런 것입니다. 그것을 제일 경계했습니다. 無? 하면 의심이 딱 끊어져야 됩니다. 생각이 딱 끊어져서 無? 無~~~~~ 가 아닙니다. 無? 숨을 싹 들이키는 겁니다. 숨을 딱 안으로ㆍ호흡을 딱 안으로 無? 이렇게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 화두가 조금 화두에 젖어드는 그 길을 찾을 수가 있지,
無~~~~~ 無라~~~~~ 이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의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형식이지만 無? 왜? 無? 이렇게 돼야 됩니다. 아이 부처님은,
有情無情이 皆有佛成(유정무정개유불성)이라고 했는데, 다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이 시대의 부처님인 조주스님은 없다고 했으니까 ‘없어? 이것 환장할 노릇이네. 숨이 막히네.’ 숨이 막힌 줄도 몰라야 됩니다. 이 상태를 계속 유지해가는 겁니다. 이러한 정신 상태를 계속 유지해가야 됩니다. 거기에 뭐 배가 고프느니, 밥을 먹었느니ㆍ말았느니, 잠을 잤느니ㆍ안 잤느니, 누가 왔느니ㆍ갔느니, 무슨 그런 것이 붙을 수가 있습니까?
그런 사량 분별이 붙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망상이 붙을 수가 없는 겁니다. 선방에서 제대로 화두를 하려면요? 그런 상태를 최소한도 한 철은 유지해야 됩니다. 그래도 그것이 공부가 정상적으로 된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겨우 한 60점짜리 턱걸이정도 될까?ㆍ말까? 그 다음에
不可向言語上作活計(불가향언어상작활계)하며,
言語上을 향해서 活計를 짓지 말라. 言語위에다 살아가는 계산ㆍ살아가는 방법을 짓지 말라.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주스님이 無라고 했다.ㆍ부처님은 불성이 다 있다고 했다.’이런 것을 가지고 논리적으로 자꾸 이리 꿰어 맞춰보고 저리 꿰어 맞춰보는 것. 그것이 活計입니다. 活計를 짓지 말며,
又不得向開口處承當(우부득향개구처승당)하며,
또 開口處를 향해서 承當. 알려고 하지 말라.
開口處. 조사스님이 “없다.” 라고 하면, “없다.” 라고 한거기에 무슨 ‘법문이 있는가?’ 거기에 무슨 ‘도리가 있는가?’이것은 의심으로 몰아가는데 뜻이 있는 것이지, 그것이 무슨 도리인지 알고ㆍ달고 그것 문제 아닙니다.
화두참선은 아는 것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아는 것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르니까 의심하는 것이다.’ 이렇게 요즘 간화선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들어보면 그렇게 해요. 100번 알아도 우리 의식이 하나로 통일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開口處承當이라고 하는 말은 어떤 이론위에서 알려고 하지 말라. 말에서 알려고 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又不得向擊石火閃電光處會(우부득향격석화섬전광처회)니라.
또 擊石火閃電光.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돌이 부딪치고 그러면 불이 번쩍 나지요? 그리고 번갯불이 번쩍하는 그런 곳을 향해서 알지 말라.
그래 순식간에 예를 들어서, 조사가 법문을 하는데 주장자를 내려친다든지, 할을 한다든지, 바로 그런 소식이지요. 손가락을 든다든지, 바로 그런데서 뭔가 알려고 하지 말라. 오랫동안 참선하다 보면 하도 답답하니까 그런 어떤 뭘 하나 ‘건져볼까?’ 조사스님들이, 또는 조실스님들이 큰 법문 하면 거기서 뭔가 하나 ‘건져볼까?’하는 그런 생각을,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겁니다.
狗子도 還有佛性也無잇가? 無라함을
但只如此叅(단지여차참)이언정,
다만 이와 같이 참구할지언정
亦不得將心待悟待休歇(역부득장심대오대휴흘)이어다.
또한 마음을 가져서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마음을 가져서 쉬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그것 다 망상입니다. 화두 하는 본 모습은 아니라고요.
화두를 드는 본 모습은 딱 그냥 잘라져야 됩니다. 숨이 꽉 막혀버려야 됩니다. 無? 하면서 꽉 막혀버려야 됩니다. 그 순간이 계속 지속돼야 됩니다.
若將心待悟待休歇(약장심대오대휴흘)인댄,
만약 마음을 가져서 깨닫기를 기다리거나 休歇, 쉬기를 기다릴진댄,
轉沒交涉矣(전몰교섭의)리라.
더욱 더 交涉함이 없을 것이다. 이 화두참선하고는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뭐 깨닫기를 기다리느니, 깨달으려고 하는 마음도 이것이 다 망상이고ㆍ쉬기를 기다리는 마음도 전부 망상이고ㆍ무슨 큰 법문에서 한건 건져보려고 하는 것도 망상이고ㆍ말을 이론적으로, 또 교리적으로 이리저리 풀려고 하는 것도 망상이고ㆍ또 생각으로 이리 헤아려보고 저리 헤아려보고 = 意根下卜度. 이리 헤아려보고 저리 헤아려보는 그것도 또한 망상입니다.
그저 이 화두의 본색은, 화두의 본색은 딱 그냥 無? 하면 無에 꽂혀서 더 이상 아무것도 마음에 남아있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그것이 화두를 정상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호흡을 예의주시하면서 마음 챙기는 것하고는 전혀 판이하게 다른 공부입니다. 그런데 이것하고 같이 얼렁뚱땅 꿰어 맞춰가지고 “같은 것이다.” 라고 비슷하게 그렇게 꿰어 맞추는 그런 사람들도 있고, 말세가 되니까 아주 여러 가지로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데요.
우리가 서장을 공부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화두참선공부를 하고 안 하고 보다도, 스님들은 모두 말하자면 신도님들을 지도하는 입장에 있기 때문에, 화두 선에 대한 본령을 정확하게 알고는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간화선의 그런 제 일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이 서장을 공부하는 이유다.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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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삼보에 귀의합니다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