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부님들 오늘 밤도 편안히 주무실 준비가 되셨는지 이 부자리에 뭉쳤는데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으셨을지 모르겠습니다. 대기의 머리를 대고도 마음만 또렷해지는 밤이 있지요. 새벽 옆에 문득 눈이 떠줘. 다시 잠들지 못하고 천장만 바라보신 밤도 있으셨을 겁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이 흘러가면 마음이 더 조급해집니다. 자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잠은 더 멀리 달아납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 하나에도 마음이 들쑤셔지지요. 바람이 창을 스치는 소리 어디선가 문 닫히는 소리 그런 작은 기척에도 마음이 깜빡 깨어납니다. 한 가지 생각이 또 다른 생각을 끌고와 머릿속이 도무지 가라앉지 않습니다. 낮에 있었던 일 며칠 전 들었던 말 한마디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몸도 예전 같지 않아. 마음이 무거우셨을 겁니다. 여기가 쑤시고 저기가 결려. 밤마다 그 자리를 만지며 한숨을 쉬셨을지 모릅니다. 잔여 걱정 손주 걱정에 마음 한구석이 늘 쉬려오시지요. 먼저 곁을 떠나신 그리운 분들 생각이 베개를 접신 밤도 있으셨을 겁니다. 사방이 적막하면 시계 초침 소리마저 크게 들려. 그 소리가 마음을 자꾸 두드립니다. 왜 나에게만 복이 오지 않는 것 같은지 왜 다른 분들은 잘 사시는 것 같은데 나만 이렇게 힘든 것 같은지 그런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그 마음 두 글자가 압니다. 부끄러운 일이 결코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보는 마음이지요. 그런데 버부님들 부처님께서는 이미 2500년 전에 소리에 끌려다니지 않고 마음을 쉬는 길을 음엄경에서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잠 못 드는 새벽 마음을 들쑤시던 그 소리들을 어떻게 다스리는지 부처님께서 손수 이어주셨습니다. 오늘 밤 그 길을 함께 천천히 걸어 보겠습니다. 다 이해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편안히 들으시면 됩니다. 오늘 부부님들과 나눌 말씀은 능엄경의 이근원통입니다. 어려운 말씀이 아닙니다. 이익은 원통이란 귀로 듣는 작용을 통해 마음의 고요한 본자리로 돌아가는 길을 말합니다. 소리를 좇아 바깥으로 달려가던 마음을 소리를 듣고 있는 그 자리로 가만히 되돌려 오는 것이지요. 그 자리는 본래부터 늘 고요합니다. 시끄러운 소리가 와도 젖지 않고 소리가 그쳐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잠에서 듣기만 해도 어찌 공덕이 되느냐? 그렇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까닭이 셋이 있습니다. 하나 마음이 모든 것을 짓는다 하였으니 좋은 말씀이 마음에 닿으면 그 자리에 좋은 결이 생깁니다. 둠 잠이 막 들려는 그 문턱에서는 마음 깊은 곳이 활짝 열립니다. 낮에 빗장이 풀려 말씀이 곧장 스며드는 때이지요. 셀 억지로 깨어들으려 애쓰지 않아도 잠결에 흘려 들을수록 말씀은 오히려 더 깊이 새겨집니다. 더구나 익은 원통은 본래 듣는 수행입니다. 따로 자리를 펴고 앉으실 것도 없습니다. 거부님들께서 지금 이 말씀을 들으며 잠드시는 이 자리가 곧 그대로 수행이 됩니다. 들으시는 동안 이미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놓으셔도 됩니다. 잠이 오면 잠드시고 또렷하면 그대로 들으시면 그뿐입니다. 잘하려 애쓰실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기억해 두실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이 가르침을 자면서 듣기만 해도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복독의 씨앗이 심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저 편안히 누워서 이 말씀을 들으면서 잠이 드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공덕이 쌓입니다. 그 씨앗은 봄날 흙 속에 묻힌 씨앗과 같습니다. 우리 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보이지요. 그러나 흙 속에서는 조용히 불의가 내리고 어느 날 문득 파란 싹이 올라옵니다. 어부님들 마음에 심긴 이 씨앗도 그러합니다. 오늘 밤 당장은 모르셔도 며칠 밤이 지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실 겁니다. 잠자리가 한결 편안해진 것을 알아차리실 겁니다. 서두르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 법원님들은 이미 수행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법원님들 이제 능엄경이라는 경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부터 천천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능험경은 부처님께서 제자 아난을 위해 설하신 병입니다. 아나는 부처님을 가장 가까이서 모신 제자였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들어외운 분이지요. 그런데 정작 마음에 찬 자리는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아나는 바깥에서 큰 어려움을 겪고 돌아옵니다. 그제야 부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엿줍니다. 도대체 제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괴물으셨습니다. 네 마음이 몸 안에 있느냐. 몸 밖에 있느냐. 눈 속에 숨어 있느냐 아니면 생각이 닿는 곳에 있느냐. 이렇게 일곱 번을 거듭 따져 물으셨습니다. 능엄경 제일권에 나오는 실처 진심 곧 마음 있는 자리를 일곱 번 물으신 대목입니다. 아나는 7번 모두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아내도 없고 밖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부님들 이 대목이 능원경의 출발입니다. 마음은 손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지금 작용하고 있습니다. 법원인들 이 대목을 다 헤아리려 애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저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잡기 어려운 물건이구나. 그 정도만 느끼시면 됩니다. 오늘 밤 이 이야기를 외우려 하지 마십시오. 흘러가는 강물처럼 귀에 담기시면 그것으로 넉넉합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난에 막힌 마음을 풀어주시려고 한 걸음 한 걸음 이끄셨습니다. 그러다 능원경 제옥권에 이르면 25의 성인이 차례로 나섭니다. 저마다 자기가 어떤 문을 통해 깨달음에 들었는지 부처님 앞에 아룹니다. 이것을 25원 통이라 부릅니다. 25 가지 두루 통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분은 코로 숨을 살피다가 들었습니다. 어떤 분은 혀로 맛을 보다가 또 어떤 분은 눈으로 빛을 보다가 마음 자리에 들었습니다. 길은 스타섯 갈래였습니다. 모두 옳은 길이었습니다. 다만 사람마다 시절마다 더 잘 맞는 길이 따로 있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길이 여럿이어도 정상은 하나인 것과 같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문수 보살에게 물으셨습니다. 이 사바세 사람들에게는 어느 문이 가장 알맞겠느냐. 문수보살은 지혜가 가장 밝은 보살입니다. 부처님 왼편에 서서 늘 어리석음을 베어내는 칼과 같은 지혜를 상징하는 분이지요. 문수보살은 25 갈래를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단 하나를 가려 뽑았습니다. 바로 귀로 듣는 문 곧 익은 원통이었습니다. 이근원통이라는 말은 어렵게 들리실 수 있습니다. 풀어드리겠습니다. 이 근은 듣는 귀를 말합니다. 원통은 막힘없이 두루 통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익은 원통은 듣는 작용을 통해 마음의 참 자리로 두루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어려운 말은 잊으셔도 좋습니다. 듣는 뒤로 마음에 들어간다. 이 한마디만 품으시면 됩니다. 문수보살이 왜 하필 듣는 문을 골랐을까요? 그것은 개솜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제 내 원경 제육권에 나오는 문수보살의 개소물 그대로 들려드리겠습니다. 이 사바세계에 참된 가르침의 본체는 청정함이 소리 들음에 있다. 2 한 9조를 다시 풀어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소리의 세상입니다. 눈을 감으면 빛은 사라집니다. 입을 다물면 맛은 끊어집니다. 그러나 소리는 다릅니다. 벽 너머에서도 들려옵니다. 어두운 밤에도 들려옵니다. 잠든 사이에도 끊이지 않고 들려옵니다. 그래서 듣는 문이 이 세상 사람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한결같습니다. 문수보살은 그 한결같음 속에 맑고 깨끗한 길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부부님들 지금 이 본문을 듣고 계신 그 귀가 바로 그문입니다. 따로 어디를 찾아 나서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 이 회사의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능원경 재사건에 나오는 종소리 문답입니다. 옛 어른들은 이것을 격종 험상이라 불렀습니다. 조물쳐서 듣는 성품을 시험하셨다는 뜻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아난과 여러 대중을 앞에 두고 곁에 있던 종을 한번 치게 하셨습니다. 그러고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소리를 듣느냐? 대중이 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들립니다. 종소리가 잦아들고 사방이 고요해졌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지금도 듣느냐? 대중이 답했습니다. 들리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좀을 치게 하시고 물으셨습니다. 지금은 듣느냐. 대중은 또 들립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종소리가 멋져. 대중은 또 들리지 않습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부드럽게 꾸짖으셨습니다. 너희는 어찌 이렇게 흔들리느냐 조물치면 들린다 하고 종이 뭍으면 듣는 것이 없다 하는구나. 그러나 잘 생각해 보아라. 소리는 왔다가 갔다. 그렇지만 너희의 듣는 성품은 어디로 갔느냐?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러했습니다. 소리는 오고 간다. 그러나 듣는 성품은 오고감이 없다. 종이 울릴 때만 듣는 성품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종이 멎었을 때 듣는 성품이 사라진 것도 아닙니다. 종이 뭍은 그 고요함은 바로 그 듣는 성품이 또렷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듣는 성품마저 사라졌다면 누가 그 고요함을 알았겠습니까? 고요한 줄을 아는 그것이 곧 사라지지 않는 듣는 선품입니다. 부처님께서 좀을 치셨다 멈추셨다 하신 때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종소리는 곧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온갖 생각과 같습니다. 새벽에 떠오르는 자녀 걱정도 종소리처럼 울렸다가 잦아듭니다.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도 종소리처럼 났다가 사라집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두려움도 그러합니다. 그 모든 생각이 물렸다 멋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자리는 한 번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습니다. 생각이 시끄러울 때도 생각이 잠잠할 때도 그 자리는 늘 깨어. 그 모두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버부님들 처음 들으시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얼른 와닿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좀 더 쉬운 말로 풀어드리겠습니다. 소리와 듣는 성품은 다른 것입니다. 소리는 손님과 같습니다. 듣는 선품은 손님을 맞이하는 빈방과 같습니다. 손님은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다시 나갑니다. 종소리라는 손님도 왔다가 갑니다. 시계 초침 소리도 바람 소리도 멀리 개짓는 소리도 다 손님입니다. 그러나 손님이 다 나가도 방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방은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손님이 많은 날도 손님이 한 사람도 없는 날도 방은 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새벽에 잠 못 드는 밤을 떠올려 보십시오. 작은 소리 하나에 마음이 들쑤셔집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리가 시끄러워집니다. 그것은 손님을 자꾸 따라나가는 일과 같습니다. 손님이 떠나면 방밖까지 쫓아나가 붙드는 셈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쉴 틈이 없습니다. 몸은 누워 있어도 마음은 밤새 문 밖을 서성입니다. 익은 원통은 그 반대입니다. 손님을 쫓아가지 않고 손님을 맞이하던 그 방에 가만히 머무는 일입니다. 소리를 따라가지 말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더 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나가던 발걸음을 그저 멈추는 것입니다. 자연의 모습으로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너는 허공을 떠올려 보십시오. 바람이 호봉을 지나갑니다. 새가 허봉을 가로질러 날아갑니다. 구름이 흘러가고 천둥이 울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도 허봉은 조금도 다치지 않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해서 허봉에 금이 가지 않습니다. 천둥이 쳤다 해서 허봉이 찢어지지 않습니다. 듣는 선품이 꼭 그러합니다. 온갖 소리가 지나가도 듣는 성품 그 자리는 늘 고요하고 온전합니다. 이번에는 곁에 있는 물건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방 안에서 라디오를 켜두셨다가 끄는 일을 떠올려 보십시오. 라디오가 켜져 있을 때는 노랫소리가 방을 채웁니다. 스위치를 내리면 그 소리가 뚝 그칩니다. 그런데 소리가 그친 그 자리에 무엇이 남습니까? 당의 고요가 남습니다. 그 고요는 라디오를 켜기 전에도 거기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끈 뒤에도 그대로 거기 있습니다. 듣는 상품이 바로 그 방의 고요와 같습니다. 소리가 있든 없든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노랫소리에 정신이 팔려 그 고요를 잊고 살아왔을 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잠이 들면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깊이 잠든 밤에도 큰 소리가 나면 우리는 놀라 깨어납니다. 곁에서 누가 가만히 이름을 부르면 잠결에도 알아듣습니다. 그것은 잠든 동안에도 듣는 성품이 꺼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부처님께서 능암경에서 거듭 이어주신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잠들어도 듣는 성품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부님들 그러니 오늘 밤 잠이 드시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법문이 흐르는 동안 듣는 성품은 깨어 그 말씀을 고스란히 마음 깊은 곳에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잠드는 일이 곧 듣는 수행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안 한 존자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겠습니다. 아나는 부처님 말씀을 누구보다 많이 외운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외운 것만으로는 마음의 참자리에 들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좀을 치고 멈추기를 거듭하시며 아난에 듣는 성품을 손수 짚어 주신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들은 말을 머리에 쌓는 것과 듣고 있는 자기 성품으로 돌아오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어부님들 우리도 지금 이 법문을 머리로 다 외우며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듣고 있는 이 자리에 가만히 머무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아난도 그 자리에서 비로소 눈을 떴습니다. 문수 보살 이야기도 한 번 더 새겨 보겠습니다. 문수보살은 25 갈래의 길을 다 옳다 하시면서도 이 세상 사람에게는 듣는 문이 가장 알맞다고 가려주셨습니다. 눈은 감으면 닫힙니다. 그러나 귀는 잠들어도 다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누워 잠들어가는 이 시간이 도리어 듣는 수행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문스보살의 밝은 지혜가 우리 같은 시니어 법원님들의 잠자리까지 비추고 있는 셈입니다. 오늘 밤 이렇게 누워 법문을 듣는 일이 곧 문수보살이 일려주신 그 길을 걷는 일입니다. 물 위에 이는 물결을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바람이 불면 물 위에 찬물결이 일어납니다. 큰 바람이면 큰 물결이 작은 바람이면 잔잔한 물결이 일어납니다. 물결은 쉴 새 없이 모습을 바꿉니다. 그러나 물 그 자체는 물결 때문에 한 방울도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물결이 잃어도 물은 끝내 젖지 않는 자기 성질 그대로입니다. 소리는 물결과 같고 듣는 성품은 물과 같습니다. 새벽에 마음의 물결이 거세게 일더라도 그의 물결을 알아보는 잔잔한 물 같은 자리는 늘 그 아래에 있습니다. 거부님들 여기까지 들으시며 마음이 조금 분주해지셨다면 이제 그 분주함도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지금 이 순간에도 바깥에서는 작은 소리들이 오고 갈 것입니다. 시계 소리가 들릴 수도 있고 멀리 바람 소리가 스칠 수도 있습니다. 그 소리를 따라가지 마십시오. 없애려고도 하지 마십시오. 소리는 손님처럼 왔다가 알아서 떠나갑니다. 편안히 호흡하시면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자리에 그저 기대어 보십시오. 숨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도 굳이 고치려 하지 마십시오. 들숨도 날숨도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베개에 닿은 머리의 무게도 이불 속 몸의 따스함도 그대로 두십시오. 소리는 오고 가도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부부님의 그 자리는 늘 고요합니다. 그 고요한 자리에 몸을 맡기시고 천천히 더 깊이 가라앉으셔도 좋습니다. 무엇 하나 붙들지 마시고 그저 듣는 그 자리에 편안히 머무십시오. 어부님들 한 가지 가만히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새벽에 문득 눈이 떠진 그 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밤 가장 먼저 무엇이 시작되었습니까? 아마도 어떤 소리였을 것입니다. 시계 초침 소리 멀리 지나가는 찻소리 옆방에서 들려오는 작은 기처 그리고 그 소리를 따라 마음이 생며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소리 하나에 생각 하나가 따라붙습니다. 그 생각에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몹니다. 어느새 마음은 지나간 일과 오지 않은 내일 사이를 정신없이 오갑니다. 그렇게 마음이 들끓다 보면 잠은 저만치 달아나 버립니다. 거부님들 잠을 못 이루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소리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리를 자꾸만 쫓아가는 마음 그 좇는 마음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소리를 죙는 마음이 곧 들끓는 마음입니다. 조끼를 멈추면 마음은 본래 자리로 돌아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좋은 소리가 들리면 그리로 마음이 달려갑니다.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면 그것을 밀어내려 또 마음이 애를 씁니다. 다이어가고 밀어내고 다시 달려가고 또 밀어내고 마음은 한순간도 가만히 있을 틈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밤이 깊어도 마음은 쉴 줄을 모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지친 마음을 쉬게 하는 길을 능험경에서 아주 분명하게 밝혀드셨습니다. 오늘 그 말씀을 천천히 함께 들어보겠습니다. 능험경 제육권에는 관세음 보살께서 당신이 깨달음에 드신 길을 부처님 앞에서 아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것을 흔히 이근원 통장이라 부릅니다. 비로소 도엘 두루통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자리에서 관세음 보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듣는 가운데 흐름에 들어가 대상을 잊었습니다. 옛말로는 인류망소라 합니다. 참된 흐름 속으로 들어가 바깥의 소리 대상을 잊었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움직임과 고요함 두 모습이 분명히 생기지 않았습니다. 옛말로는 동정 이상 묘연 불생이라 합니다. 시끄러움과 조용함 그 두 모습이 마음의 또렷이 사라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어부님들 이 말씀을 한 자락씩 풀어보겠습니다. 관세음 보살께서는 소리를 더 잘 들으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바깥으로 달려가는 그 드름을 거두어 안으로 거꾸로 돌이키셨습니다. 그러자 시끄러운 소리가 와도 마음이 따라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요한 적막이 와도 마음이 그것을 붙들지 않았습니다. 시끄러움도 고요함도 모두 오고 가는 손님일 뿐이었습니다. 그 손님들을 맞이하고 보내는 빈방 그 빈방 같은 듣는 성품은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 자리를 찾으셨기에 관세연 보살께서는 위로는 부처님의 마음과 통하고 아래로는 모든 중생의 마음과 통하게 되셨습니다. 우리가 괴로울 때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영 보살께서 그 소리를 들으신다는 것도 바로 이 듣는 성품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종소리 이야기에서도 같은 이치를 보셨지요. 종이 울릴 때만 듣는 선풍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종이 멎었다 하여 그 성품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소리가 없으면 소리 없음을 듣고 있을 따름입니다. 듣는 상품은 소리가 와도 그 자리요. 소리가 가도 그 자리입니다. 잠이 들어도 꺼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잠결에도 큰 소리에 문득 깨어날 수 있습니다. 듣는 성품이 한순간도 자리를 비운 적이 없다는 산 증거이지요. 이 거꾸로 돌이키는 일을 옛 어른들은 반문문자성이라 부르셨습니다. 어려운 말 같지만 뜻은 단순합니다. 소리를 바깥으로 쫓아가지 말고 듣는 자격을 거꾸로 돌이켜 듣고 있는 그 성품 자체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거부님들 이 대목도 굳이 다 헤아리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저 이 한 가지만 마음에 담아 두십시오. 우리는 늘 소리를 따라 바깥으로 달려 나갑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 있는 자리 그 자리는 한 번도 바깥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새벽에 그 소리들을 듣고 있는 무언가가 지금도 여기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듣는 성품입니다. 소리는 끊임없이 바뀌어도 듣고 있는 그 성품은 늘 한결같습니다. 여기에 참으로 묘한 이치가 하나 숨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얻으려면 힘껏 애써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듣는 성품은 그렇지 않습니다. 더 잘 들으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마음은 도리어 바깥 소리에 매달려 시끄러워집니다. 들으려는 그 애승을 가만히 내려놓을 때 비로소 듣는 성품이 저절로 드러납니다. 소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리를 붙잡으려 하면 마음이 그 소리에 묶입니다. 그런데 소리를 붙잡지 않고 그저 오고 가게 내버려 두면 마음은 저절로 가라앉습니다. 잠 또한 그러합니다. 자려고 안간힘을 쓰면 잠은 멀어집니다. 자려는 마음마저 내려놓고 그저 듣고만 있을 때 잠은 소리 없이 찾아옵니다. 이것이 능원경이 이어주는 묘한 길입니다. 애쓰지 않음으로써 이루고 붙잡지 않음으로써 얻습니다. 참으로 거꾸로 된 듯하지만 가만히 곱씹어 보면 우리 삶의 깊은 이치가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어부님들 이 역사를 한 번 더 새겨보겠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 우리는 흔히 어서 자야 한다고 마음을 다그칩니다. 그런데 그 다그치는 마음이 도리어 잠을 쫓아냅니다. 마치 모래를 꽉 쥐면 손가락 사이로 더 빠르게 새어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손바닥을 가만히 펴두면 모래는 도리어 손안에 머뭅니다. 잠도 그러고 마음의 고요도 그러합니다. 붙잡으려는 손을 펴십시오. 들으려는 애숨을 내려놓으십시오. 그저 듣고만 계실 때 고요는 손님처럼 조용히 찾아와 머뭅니다. 물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잔잔한 물 위로 바람이 불면 물결이 입니다. 물결이 크게 익으면 물 전체가 출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물의 봄바탕은 한 번도 젖지 않았습니다. 물은 본래 전는 성질이 없습니다. 물결은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물 그 자체는 늘 고요합니다. 우리 마음도 꼭 이와 같습니다. 소리와 생각은 물결처럼 일어났다. 쓰러지지만 그것을 가만히 비추어 보는 듣는 성품은 늘 젖지 않은 채 고요합니다. 새벽의 물결이 아무리 거세어도 물의 봄바탕은 닫히지 않습니다. 텅 빈 방 하나를 떠올려 보셔도 좋습니다. 누가 찾아와 한참을 머물다 떠나가고 또 다른 이가 와서 머물다 갑니다. 드나드는 발길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하는 방은 어디로도 가지 않습니다. 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사람이 북적인다 하여 방이 흔들리지 않고 다 떠나 적막하다 하여 방이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새벽의 온갖 소리는 그렇게 드나드는 발길이요. 그 소리를 말없이 품는 듣는 성품은 텅 빈 그 방입니다. 오는 일을 붙잡으려 애쓰지 않고 떠나는 일을 야속해 하지도 않을 때 방은 비로소 가장 편안합니다. 옛 일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 선종일 해능대사라는 큰 어른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한절의 깃발이 바람에 컬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두 스님이 다투었습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 하였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였습니다. 둘은 좀처럼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때 해능대사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한마디에 두 스님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부부님들 이 품범 문답이 우리에게 일려주는 바가 깊습니다. 바깥의 소리가 우리를 흔드는 것이 아닙니다. 깃발이 깃발에 일을 하듯 소리는 소리에 일을 할 뿐입니다. 흔들리는 것은 그것을 쫓아가는 우리 마음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좁기를 멈추면 깃발이 펄럭여도 마음은 고요하고 새벽 소리가 들려와도 잠은 깨지지 않습니다. 해명제사께서 일러주신 그 마음 자리가 내 범경이 말하는 듣는 성품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소리를 좋지 않고 듣는 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을 거듭하면 마음깊은 곳에서 조용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변화를 네 가지로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첫째 무언가를 움켜쥐려는 버릇이 차츰 옅어집니다. 소리든 생각이든 덜 좁게 되고 좋지 않으니 마음의 매듭이 적어집니다. 매드비 풀리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집니다. 둘째 자비로운 마음이 절로 자라납니다. 내 마음이 고요해지면 남의 허물보다 남의 아픔이 먼저 보입니다. 고요한 마음에는 남을 품을 자리가 넉넉히 생깁니다. 셋째 복이 저절로 기뒨이다. 들끓던 마음이 가라앉으면 그 편한 자리로 좋은 인연이 조용히 모여듭니다. 억지로 구하지 않아도 잔잔한 물가에 새들이 모이듯 그렇게 깃듭니다. 넷째 마음의 깊은 표만이 머뭇뭉니다. 흔들리지 않는 자리를 한번 맛본 사람은 작은 일을 쉬 무너지지 않습니다. 바깥 세상이 시끄러워도 안으로는 늘 기댈 자리가 있습니다. 어부님들 한 가지 꼭 기억해 두실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법원님들의 마음 깊은 곳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 법문을 들으며 잠드시는 동안 소리를 쫓지 않고 듣는 자리에 머무는 그 연습이 마음 깊은 곳에 조용히 새겨지고 있습니다. 애써 외우지 않으셔도 그저 듣고 계신 것만으로 그러합니다. 그 변화가 어떻게 펼쳐지는지 시간을 따라 그려 보겠습니다. 이래쯤 지나면 새벽에 눈이 떠져도 예전처럼 마음이 곧장 들끓지 않습니다. 소리가 들려와도 아 소리가 들리는구나 하고 한 박자 가만히 멈추게 됩니다. 그 한 박자의 멈춤이 곧 수행의 첫 열매입니다. 한 달쯤 지나면 잠자리에 누웠을 때 생각의 꼬리가 한결 짧아집니다. 자료에 쓰지 않아도 스르르 잠드는 밤이 늘어납니다. 잠자리가 더는 두렵지 않게 됩니다. 두 달쯤 지나면 나 동안에도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 것을 느끼십니다. 누가 거친 말을 건네도 그 말을 곧장 쫓아가지 않고 그저 듣고 흘려보내게 됩니다. 석 달쯤 지나면 주위 분들이 먼저 알아봅니다. 요즘 얼굴이 참 편안해 보이십니다 하는 말을 듣게 되실 것입니다. 아내 고요가 밖으로 배어 나오는 까닭입니다. 그렇게 한 해가 흐르면 흔들리지 않는 그 고요한 자리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시끄러움이 와도 고요함이 와도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는 자리에 머무는 일이 숨쉬듯 자연스러워집니다. 이 변화는 무엇을 억지로 더해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줬던 마음을 내려놓아 본래 있던 고요를 되찾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마시고 그저 매일 밤 이 자리로 돌아오시면 됩니다. 꼭 며칠 해 보고 별다른 느낌이 없다 하여 실망하지 마십시오. 씨앗을 땅에 묻은 다음 날 싹이 트지 않는다고 하여 그 씨앗이 죽은 것은 아닙니다. 흙 속에서 보이지 않길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 반드시 있습니다. 듣는 자리로 돌아오는 이 연습도 꼭 그러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조용히 보리가 자라고 있습니다. 부부님들 이 좋은 가르침을 혼자만 품고 계시기에는 아깝습니다. 곁에 잠 못이루는 가족이 있거든. 마음 무거운 이웃이 있거든. 능험 경예 이 듣는 성품 이야기를 가만히 들려 주십시오. 그것 또한 더없이 훌륭한 벚꽃이 입니다. 버부님들 이제 다시 호흡기 집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 소리가 거부님들의 귀에 와닿고 있을 것입니다. 그 소리를 쫓아가려 하지 마십시오. 좋지도 말고 밀어내지도 마십시오. 그저 소리가 오고 가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계십시오.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십시오. 소리도 생각도 일어났다. 사라지는 물결일 뿐입니다. 그것을 듣고 있는 자리는 지금도 고요합니다. 그 고요한 자리에 가만히 기대어 모든 것을 그저 내버려 두십시오. 버부님들 여기까지 듣고 계신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라앉으셨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 삶 속에서 듣는 성품을 길러가는 길을 함께 짚어 보겠습니다. 다 랭귀어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누워서 한 가지씩 휘어 들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능엄경의 익은 원통은 어려운 산속의 수행이 아니라 바로 우리 산림살이 속에서 익혀가는 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제물이 없어도 누구나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2를 무죄 칠 시 곧 재물 없이 하는 일곱 가지 보시라고 합니다. 능험경에 듣는 수행과도 깊이 이어져 있으니 하나씩 마음에 담아 보십시오. 베푼다는 것은 결국 마음의 문을 여는 일이고 마음의 문이 열리면 듣는 성품도 함께 맑아집니다. 첫째는 한시입니다. 부드러운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일입니다. 새벽에 잠 못 이루어 마음이 굳어 있던 분도 아침에 거울 앞에서 입꼬리를 사용이 올려 보십시오. 그 부드러운 얼굴 하나가 곁에 있는 분의 마음을 풀어 줍니다. 굳은 표정은 굳은 소리를 부르고 환한 얼굴은 환한 말을 부릅니다. 표정이 부드러우면 그 사람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집니다. 듣는 선품이 맑아지면 얼굴도 절로 맑아집니다. 베풀었다는 생각조차 내려놓고 그저 편안한 얼굴로 하루를 여시면 됩니다. 둘째는 어이쉬입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는 일입니다. 능엄경의 가르침이 귀로 듣는 길인 것
처럼 내가 건네는 말 한마디도 누군가의 귀로 들어가.
그 마음에 새겨집니다. 고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오늘도 평안하시지요. 이런 말은 듣는 분의 마음을 가만히
거친. 번. 거친. 애는 심쉬입니다. 진심을 담아 사람을 대
만듭니다. 한 번 입밖에 나간 말은. 끝까지 들어준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다들 말
마음을 쓰십시오. 그분의 마음은 절반이 풀립니다. 중고를 보태려 애쓰지
식는 씨앗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고는 좋은 말을. 건넸다는 생각마저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애는 심쉬입니다. 진심을 담아 사람을 대하는. 일입니다. eSIM시는 듣는 수행과 가장 가까이. 닿아 있습니다.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은 곧 남의. 듣는 성품을 닦는 분은. 뜻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다들 말은 많이. 하고 듣기는 어려워합니다. 넷째는 안시입니다. 부드
풀어놓을 때 끊지 않고 끝까지. 해나가 외로운. 분에게는 첫 마디 말보다 큰 위로가 됩니다. 곁에 계신 노고부를. 그분의 마음은 절반이. 풀립니다. 중고를 보태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그분의 마음은 절반이. 풀립니다. 중고를 보태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분의 마음은 절반이 풀립니다. 중고를 보태려 애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들어 드리는 그. 자리에 이미 큰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들어 드리는 그 자리에 이미 큰 위로가 담겨 있습니다. 듣는 성품을 닦는 분은 사람의 말도 잘 들어줍니다. 말을 들어주는 그 자리가 바로 자비가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넷째는 안시입니다.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는 일입니다. 말없이 바라보는 따뜻한 눈빛 해나가 외로운 분에게는 첫 마디 말보다 큰 위로가 됩니다. 곁에 계신 노고부를 떠올려 보십시오. 긴 세월 말이 줄어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까? 눈빛은 소리가 없지만 그 안에 담긴 정은 어떤 말보다 깊이 전해집니다. 그 부드러운 눈빛이 곧 보시입니다. 보냈다는 생각도 내려놓고 그저 따뜻하게 바라보
아 주십시오 다섯째는 셋이 입니다 몸으로 거드는 일입니다 무거운 짐을 같이 들어 드리고 넘어진 분께 손을 내미는 작은 행동입니다 큰일이 아니어도 됩니다
문을 잡아드리는 일 떨어진 물건을 주워드리는 일 그 작은 몸짓
하나하나가 다 보시입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마음을 담아 하시면 됩니다 거들어 드렸다는 생각
은 그 자리에 두고 가볍게 돌아서십시오 여섯째는 상좌시입니다
자리를 양보하는 일입니다 더 힘든 분 더 지친 분께 편한 자리를 내어 드리는 마음입니다 내가 먼저 앉으려는 마음을 한 걸음 뒤로 물리는
것 그 작은 양보가 마음의 그릇을 넓혀줍니다 먼저 가지려는 마음이 줄
어들면 새벽에 자꾸 무언가를 줬던 마음도 함께 가라앉습니다 자리를 내어 드리고도 내어 주었다는 자취를 남기지 않으면 그 마음이 가장 가볍습니다
이 곡제는 방사시입니다 편안한 곳을 내어 드리는 일입니다 하룻밤 쉬어갈 자리 잠시 머
물 그늘을 내어 주는 마음입니다 손님이 오고 가도 빈방은 그대로이듯 내어 주어도 줄지 않는 것이 마음 자리입니다 베풀어도 베풀었다는 자취가 남지 않을 때 그
보시가 가장 맑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본래 그 빈방을 닮아 무엇이 오고 가도 본
고요합니다. 거부님들 여기까지가. 부처님께서 일려주신 일곱 가지입니다. 이제 우리. 같은 시니어 법원님들이 오늘 밤부터 해 보실 수 있는 다섯 가지를 능원경 듣는 수행에 맞춰 말씀드리겠습니다. 8질 매일. 밤 잠들기 전에 관세음 보살의 명호를 일곱 번 조용히 부르십시오 소리 내어. 부르셔도 좋고 입속으로만 가만히 부르셔도 좋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부르고 난. 뒤 그 소리를 따라가지 마시고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자리로 가만히 돌아오십시오. 소리는 일어났다. 사라지지만 듣고 있던 그 성품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 고요한. 자리에 머문 칠 잠이 드시면 됩니다. 푸른 횟수를. 헤아리는 일 마음 쓰지 마시고 부르고 나서 듣는 자리로 돌아오는 그 결을 익히십시오. 아홉째 손주에게. 잔소리 대신 따뜻한 한마디를 들려주십시오. 공부해라. 그러면. 못 쓴다. 이런 말.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늘 너를 주원한단다. 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아이들의 귀에. 들어간 그 말은 평생 마음 깊은 곳에 남습니다. 잔소리는 흘러가. 버리지만 주건의 말은 씨앗처럼 숨깁니다. 무엇을 들려주느냐가. 곧 무엇을 식느냐입니다. 그러고는 좋은. 말을 들려주었다는 그 생각마저 가만히 내려놓으십시오. 열질 낮에. 잠깐 짬을 내어 새소리나 바람 소리에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무슨 새인지. 가려내려 애쓰지 마십시오 그저 소리가. 오고 가는 것을 듣고만 계십시오 그러다보면 소리를. 듣고 있는 그 자리가 늘 고요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바람이 지나가도. 허봉은 흔들리지 않듯 소리가 오고 가도 듣는 성품은 그대로입니다. 이것이 낮에. 하는 짧은 익은 원통 수행입니다. 한두 호흡이면. 충분하니 그 작은 틈을 가볍게 누려 보십시오. 열한째 먼저 곁을 떠나신 이웃을 위해 하루 한번 조용히 축원하십시오. 거창한 의식이 아니어도 됩니다. 부디 편안한 곳에 머무소서. 이 한마디를 마음으로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그 축원의 마음은 떠나신 분께도 닿고 보내는 내 마음도 함께 맑혀줍니다. 구름이 가려도 달이 사라지지 않듯 몸은 떠나도 그 인연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리움이 밀려오거든. 그 그리움까지 주건에 실어 보내 드리십시오. 12질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매일 밤 있으면 권문을 끝까지 들으며 잠드는 일 그 자체를 익은 원통 수행으로 삼으십시오. 능엄경에 익은 원통은 다름 아닌 듣는 수행입니다. 고부님들께서 지금 이렇게 누워 소리를 좋지 않고 그저 흘러가게 두면서 이 말씀을 들으며 잠드시는 이 자리가 바로 부처님께서 일러주신 그 수행 자리입니다. 따로 절에 가시지 않아도 따로 시간을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매일 밤 이 법문을 켜 놓고 주무시는 것만으로 어부님들은 매일 밤 수행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 잠이 오면 잠드셔도 됩니다. 듣다가 끊겨도 괜찮습니다. 잠든 뒤에도 듣는 성품은 사라지지 않으니 그 자리가 밤새 법문과 함께 머뭇뭒니다. 어렵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저 매일 밤 이 자리에 누워 듣기만 하시면 그것이 곧 평생의 수행이 됩니다. 이 열두가지를 다 하려고 마음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은 그저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면 됩니다. 무엇을 베풀든 베풀었다는 그 생각만 가만히 내려놓으시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베풀었다는 생각이 없는 도시가 강물처럼 자취 없이 흐르는 가장 맑은 도시입니다. 부부님들 혹시 이런 의문이 드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베풀었다는 생각을 내려놓으라 하시는데 그러면 좋은 일을 하고도 뿌듯해 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뿌듯한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그 마음을 오래 붙들고 내가 베풀었다는 생각을 자꾸 되새기면 그것이 또 하나의 짐이 됩니다. 소리가 일어났다 사라지게 두듯 그 뿌듯함도 떠올랐다. 흘러가게 두시면 됩니다. 붙잡지 않을 뿐 억지로 밀어낼 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자취를 남기지 않는 모 씨가 오래 머무는 복으로 익어갑니다. 어렵게 헤아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저 한 일은 한 일대로 두고 다음 호흡으로 넘어가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여기서 한 분의 어른을 떠올려 보고 싶습니다. 가까운 시절 고대 산에 하남 선사라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스님은 한번 오대산에 드신 뒤로 무려 27패 또한 산문 밖으로 한 발도 나서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세상이 시끄럽고 바깥이 어지러워도 스님은 바깥 소리를 좇아 나가지 않고 오직 안으로 안으로 고요히 들으며 정진하셨습니다. 누군가 왜 세상에 나오지 않으십니까? 물으면 스님은 차라리 한 마리 하기 되어 천고의 울지언정 봄날의 꾀꼬리처럼 부질없는 소리를 따라가지는 않겠노라 하셨다고 전합니다. 그 깊은 산속에서 스님은 무엇을 들으셨겠습니까? 바깥의 시끄러운 소리가 아니라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고요한 선풍 자체를 들으셨습니다. 이 하남 선사의 산이 바로 듣는 수행의 본보기입니다. 바깥 소리에 끌려 나가지 않고 듣는 성품 그 자리로 거듭 돌아오는 일 우리는 산속에 들어갈 수 없지만 매일 밤 이부자리가 곧 우리의 오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대개 머리를 누이는 그 순간 거부님들도 산문을 닫고 안으로 드신 것입니다. 거부님들 혹시 이런 생각도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작은 일들이 무슨 큰 공덕이 되겠는가 그 마음 충분히 헤아립니다. 그러나 떠올려 보십시오. 큰 강물도 처음에는 산골짜기의 작은 물방울 하나에서 시작됩니다. 부드러운 얼굴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끝까지 들어주는 마음 하나가 모이고 모이면 어느새 그 흐름이 부부님의 삶 전체를 적십니다. 발소임 사고 다발 지역입니다. 주의하십시오. 듣는 상품을 닦는 일도 그와 같아서 매일 밤 조금씩 쌓여갑니다. 오늘 밤에 한 소음이 한 달 뒤에 고요한 새벽을 만들어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