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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대구강의 5 - 지옥의 하나님 8
06,05,01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들뢰즈의 '존재의 함성' !!
이왕 어렵게 가는 것 계속해서 어렵게 가겠는데, 교재 33페이지에 나오는 '존재의 함성' 이란 용어가 어디서 나온 것인고 하니, '알랭 바디우' 라는 철학자가 주장한 것인데, (그가 들뢰즈에 관해서 비판한 책제목으로서)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들뢰즈와 서로 상극을 이루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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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랭 바디우 - 1937년 모로코의 라바에서 출생하였으며, 현재 파리8대학과 파리 고등사범학교 E.N.S의 철학과 책임자로 재직하면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부동의 한 축을 형성하는 대철학자로서, 현대 프랑스 철학의 주된 경향인 반플라톤주의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아주 강력한 플라톤주의 진영을 이루고 있다. 그는 질 들뢰즈의 후배 교수였으나, 들뢰조와는 확연히 다른 철학적, 정치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들뢰즈-존재의 함성>은 과거의 서신 교환을 통해 들뢰즈와 논쟁을 벌이던 그가 사후의 들뢰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해당된다. 바디우는 이 책에서 들뢰즈 철학의 정수를 정리하고 그에 관한 거침없는 반박을 펼침으로써, 서신교환으로는 끝내 협의점에 이르지 못했던 문제들을 다시 해결코자 시도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의 사유가 집약된 대표적인 책 <존재와 시간> 외에 <주체의 이론>, <철학을 위한 선언>, <수와 수들>, <조건들>, <베케트-지칠 줄 모르는 욕망>, <철학자 아메드>, <모순의 이론> 등이 있다. [반디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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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의 철학 - 일자(一者) !!
이 들뢰즈의 철학은 스피노자에게서 나온 것인데, 그는 '일자(一者)'를 주장하는데, 이는 프로메데스의 신이기도 한데, 즉 '궁극적인, 하나밖에 없는' 이라는 말이다. 헬라 초기철학에서는 일자라는 고정된 개인관념이 있어야 다양성, 혹은 '다자(多者)'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고정된 일자를 두고 다양성을 말하는가? 그렇게 해야 다양성 안에 일관된 '의미의 틀'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모든 사건들이 무작정 이루어진다면,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올바르게 사는고 하니까, 자기 성질대로 사람들을 마구 때려죽이고 나쁜 짓을 하더라도 법에만 잡히지 않으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우발적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일관된 윤리가 그만 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시작해보면, 인간의 사상에는 항상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화이고 다른 하나는 법이라는 것이다. 초기철학에서 신화라는 것은 인간의 욕정, 즉 감정 위주라는 것이다. 전에도 이야기를 했는데, 사람의 감정이 순수한가? 아니면 이성이 순수한가?
◈ 법이 지향하는 것은? - 국가 !!
여기에 대해서 감정이 순수하다고 본 것은 신화 쪽이고, 반대로 인간의 정돈된 이성은, 즉 이 이성의 특징은 반성하고 회개(?)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아, 이것은 잘못되었어. 내 양심이 용납을 하지 않아" 라는 것인데, 왜냐하면 이 양심이 우리 속에 있는 법이니까 말이다.
물론 이러한 법대로 하는 것은, 올림푸스 신화에서 신과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신은 하나의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상 국가형태를 보존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형태를 유지하려면, 국가윤리가 있어야 하고, 개인적으로는 도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 서로 뒤바뀐 것 같은데?)
◈ 도덕과 윤리의 차이점은?
그러므로 도덕과 윤리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도덕은 범 사회적인 안정을 위한 것이라면, 윤리는 개인적인 양심의 변동사항을 스스로 균형 있게 잡아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윤리는 개인적이라면, 도덕은 타인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유한 집에서 자기 마음대로 자란 아이가 어른 앞에서 함부로 담배를 피우고 술 먹고 다리를 꼬고서 앉고 말이다. 자기 집에서는 그렇게 배웠다면 자기 집에서는 이런 행동이 문제가 없더라도, 즉 개인적인 윤리에서는 문제가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 "학생, 담배 불 좀 끄지" 라고 했다면, 그것은 도덕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도덕과 윤리의 차이점을 알지 싶은데, 이 도덕이 고정적이라면, 윤리는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도덕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해보면, 이 도덕이 고정적이라고 했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 도덕도 변한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이 도덕을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진화한다' 라고 하지만 말이다.
◈ 도덕은 나아지고 또 나아져야 !!
이렇게 도덕이 진화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예를 들어서, 빌레몬서에 '오네시모' 라는 노예가 나오는데, 그 당시 노예는 일종의 가구에 불과한데, 책장이나 찬장 말이다. 혹은 김치냉장고나 그릇과도 같다는 것이다. 다만 말이 통하는 김치 냉장고이고 약간 지성이 있는 그릇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은 오늘날 천부인권설이나 프랑스 혁명, 그리고 미국의 건국이념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맞지 않는 현상을 오늘날에는 "도덕이 달라졌다" 라고 하지 않고, "도덕이 더 나아졌다" 라고 하고 말이다.
제가 이렇게 '나아졌다' 라고 말했는데, 이렇게 더 나아지고 나아진다면, 그렇게 해서 이 사회는 결국 최고로 나은 궁극적인 사회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나아진다' 라는 것은 '선하다' 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것이, 이 사회가 선한 쪽으로 나아갈 때는 그 사회가 가능성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선의 반대가 악인데, 그렇게 되어서 이 사회가 악으로 치달아버리면 그야말로 절망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도덕에서 선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기초로 삼으려고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이렇게 '나아지고, 나아지고' 라는 것이, 즉 궁극적인 선에 의해서 미리 당겨져서 선을 지향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선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사회이든 간에 궁극적인 선의 사회에는 도달할 수가 없는데, 그러나 설령 그런 사회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지만 그곳으로 향한다는 그 자체가, 즉 그 사회가 추구하는 선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 이런, 인간이 개돼지만도 더 못해서야 !!
이것을 아주 투박한 말로 하면, "사회가 이런 꼬라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다. 그런 사회는 그야말로 짐승의 사회이고, 즉 인간이 개돼지만도 더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회가 궁극적이지는 않더라도 궁극적인 선을 지향하는 모양새는 갖추고 있어야, 그렇게 해야 이 사회가 지탱이 되고, 도덕이 살아있다고, 즉 선이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들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법의 진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화 쪽에서는 주장하는 것이, 그런 법 쪽의 주장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물론 법 쪽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이라도 숨이라도 좀 제대로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법, 법' 하지 말라는 것이다.)
◈ 추상화 화가는 당연히 아오지 탄광행 !!
예를 들어서, 북한에 있는 어느 화가가 날마다 추상화만 냅다 그려되니, 김정일 정권이 열을 받아서 그를 아오지 탄광으로 보내버리면, 그것이 사실 말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추상화를 그리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추상화를 보고 나서 자기의 잠자고 있던 욕정과 감정이 되살아나게 된다면, 도대체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의 도덕이 어떻게 되느냐는 말이다.
북조선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은 사실상 유교국가라고 볼 수가 있는데, 즉 유교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유교국가에서 추상화가 등장하고 다다이즘(dadaism)과 같은 감상주의가 등장하게 되면 국가 정체성이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라에 혼란이 오는데,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던 것들이 다 무너지게 되면, 국가에 대공황 상태가 벌어지게 되는데, 그러면 국가 자체가 무너지게 된다는 것이다.
◈ 우리교회의 정체성 - 오직 십자가 복음만이 !!
그것은 우리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우리교회의 정체성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복음에 대해서 다른 것을 섞어버리는 것을 반대한다" 라는 것인데, 우리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은 오로지 그것 하나만 바라보고 나오는 것이지, 그에 비하면 다른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십자가의 복음 말고 또 다른 것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우리교회 교인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러나 가끔씩은, 디오니소스(dionysus) 축제로 !!
사실 기존 조직체라고 하면, 이런 것은 하나쯤 있어야 하는데, 하지만 인간은 이런 모든 것을 법으로 묶어버리면 융통성이 없어지는데, 그러니 때로는 술과 여자와 마약과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소위 '디오니소스(dionysus)의 축제' 같은 것 말이다. 이것이 나중에는 타고라스의 종교로 바뀌게 되고 말이다. (디오니소스는 로마신화에서는 바커스(Bacchus)라고도 하며 술의 신으로, 다산을 상징함)
그런데 인간에는 이런 감정 말고 사상이 있는데, 이 사상은 둘로 나뉘어지는데, 그래서 이것을 고정된 일자(一者)로 묶어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일자 안에는 선이 있고, 이렇게 고정된 선이 있을 때 고정된 의미의 틀이 있게 되고, 이런 의미의 틀을 구축할 때 국가는 사상적으로 안정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 들뢰즈 - 모든 것은 신이 그 이름을 통해서 !!
이러한 스피노자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누구인고 하니까, '들뢰즈' 라는 철학자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신이 그 이름을 통해서, 우리에게 갖가지 속성을 보여주는 양태로서 표현하는 것이 이 세상의 전부이다" 라고 말이다.
다시 한번 적어보면, 물론 조금 다른 의미가 있지만 쉽게 하기 위해서 각색해서 말하겠는데, 여기에 이렇게 신이 있는데, 이 신은 이름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는데, 즉 신이라는 실체는 이름을 통해서 자기 본성을 드러내고, 이 본성이 여러 가지 양태를 만드는데, 즉 여러 가지 실존(실재)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철학(신학)이 주장하는 것은, 이 본성이 이름을 통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이름 이외에는 본성이 없다는 말이다. 이 본성에서 양태가 나오는데, 그리고 이 양태의 주제가 표현인데, 다시 말해서, 스피노자는 계시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왜 계시를 반대하는고 하니, 신께서 계시를 한다고 하면, 신의 계시가 안 된 다른 자연상태는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 스피노자 - 인간은 신의 다양한 파편 중에 하나 !!
스피노자가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을 계시했다면, 그 계시가 끝이라고 하면, 그렇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이방민족들의 모든 존재와 일반적인, 즉 해바라기나 돌이나 천둥이나 번개와 같은 일반 자연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름을 가지고 하는 것을 유일한 계시라고 보지 않고, '표현'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다양한 표현을 주셨는데, 이런 다양한 표현 중에 하나가 우리 자신이 신의 본질을 보여주는데, 사실 신의 본성에서 본질이 나오는데, 신의 본질에서 나온 우리 자신이, 신에 의해서 본질이 들어있는, 즉 신이 표현한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이다. (아이쿠, 헛갈려) 이것은 우리 자신 안에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존재케 하는 힘이 신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곧 우리는 신의 다양한 파편 중에 하나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의 주장이라는 것이다.
◈ 스피노자 - 너무 교회에 묶이지 말라 !!
스피노자가 이렇게 설득력 있게 주장한 이유는, 너무 교회나 성령에 의해서 묶이지 말고 그 바깥에도 얼마든지 신이 활동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놓치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돌맹이가 왜 있는지를 설명해주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신적인 관계를 가지고 말이다.
◈ 들뢰즈 - 존재가 아니라 사건 !!
들뢰즈는 이런 스피노자의 주장에 동의를 하는데, 사실 이 들뢰즈의 철학이 스피노자에서 나왔다고 해도 말이 되는데, 여기서 들뢰즈는 주장하기를, 스피노자가 언급한 '표현'의 문제에 있어서, 이 표현이라는 것이 나타날 때 곧 사건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들뢰즈의 특징인데, 즉 존재가 아니라 사건이라는 것이다.
◈ 알랭 바디우 - 일자(一者)는 것은 없다 !!
여기에 대해서 '알랭 바디우' 라는 사람이 주장하기를, 이 양반은 들뢰즈에 반대하는 입장인데, 그가 말하기를, 일자(一者)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존재라는 것은 '셈'을 하는데 의미가 있는데, 왜 사람들이 '하나, 둘, 셋, 넷...' 이런 식으로 숫자를 헤아리는데, 그 중에서 '하나' 라는 것은, 다수를 안정되게 만들기 위해서 첫 출발하는 분류점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 둘, 셋' 이지, '둘, 둘, 셋' 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둘도 둘이 아니라, 하나 하나가 더해져서 둘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숫자를 헤아릴 때도 사실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하나...' 라는, 이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 둘, 셋...'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 라는 것도, 사람들이 다수의 세계에 대해서 정리정돈하기 위해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즉 불안정한 다수를 안정된 하나로 묶기 위해서 하나로 정리하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하나'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곤란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알랭 바디우의 생각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가 없을 때는 어떻게 했는가? 이 세상에서는 모든 존재가 하나에서 묶이게 되는데, 그런데 이 하나라고 생각하던 것이 그만 굴러서 그만 두 개로 부셔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하나가 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하나로 묶는 것은 심리적 안정을 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데, 그런데 그만 의자가 부러져서 두 개로 되었다면, 이렇게 두 조각이 나게 되면,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두 개가 되면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좀 어려워도 계속 '고' 하겠습니다.)
그것을 두고 '초과' 라고 하는데, 자기는 하나로 보았는데 뭔가 두 개가 되었을 때는 불안정을 느끼는데, 그것은 단순히 의자가 부러졌기 때문에 불안정한 것이 아니라, 문제는 그 의자가 박살이 나던지 말던지 왜 '내'가 불안해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의자' 라는 존재를 바라보는 동시에 '나' 라는 존재가 '의자' 라는 존재에 의존되는 하나로서 '나'가 이렇게 서있다는 것이다.
◈ 인간은 '하나'가 깨지면 왜 불안해하는가?
쉽게 말해서, 여기 꿀차가 한 병 있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로 있으면 편한데, 그런데 만약에 그것이 그만 깨져서 여러 개의 유리파편으로 나누어지게 된다면, '내'가 그것을 쳐다보면서 "어, 꿀차가 어디 있지?" 라고 하면서, 즉 그렇게 찾고자 하는 '내'가 불안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상을 하나로 함으로 말미암아서 그 하나에 묶이고 싶은데, 그런데 갑자기 그 하나가 여러 개로 나눠지니 말이다. (마치 '내'가 여러 개로 나눠진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자기가 불안하다는 것은, 그것이 자기에게 뭔가 손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떤 존재자인가를 깨닫게 하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사건인고 하니, 사실 '나'도 다양한 존재로 깨질 수 있지만 자꾸만 의도적으로 '내'가 하나라고, 즉 이렇게 하나의 이근호라고 묶어내려는 그 마음가짐이 어떤 대상을 볼 때도 역시 하나, 하나, 하나로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하나 이상인데, 그런데 존재는 어디에 묶인다구요? 존재는 반드시 하나에 묶이는데, 그런데 이 '나'는 하나 이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존재가 항상 '나'에 대해서 초과분이 나오는데, 이것을 '존재의 초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가 하나 이상의 존재의 초과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어디서 알게 하는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주어진 사건들'을 통해서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이 알랭 바디우에게는 존재보다는 사건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 사건을 '하나'로 묶으면 어떻게 되는가?
이렇게 존재보다 사건들이 중요한데, 그런데 우리는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를 않고, "이 사건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사건, 저 사건은 나에게 의미가 없는 사건" 이라고, 이런 식으로 사건을 자꾸만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 땅콩 김미현 !! 대한민국, 으라차 자차 !!
오늘 아침에 땅콩 김미현이 LPGA에서 우승을 해서 3만인가 4만 달러를 왕창 땄는데, 그런데 그것이 아프리카의 우간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우간다 정규방송에는 그것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간다에서는 왜 김미현이 LPGA에서 우승한 것이 방송에 나오지 않는가? 그쪽에는 자기들 나름대로의 하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우간다 사람들의 나름대로의 그 하나가, 우리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히려 우간다 사람들을 보고서, "김미현이 얼마나 골프를 잘 치는데, 그것도 모르고 말이야" 라고 하면서 비웃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난 월드컵에서 4강에 들었는데, 그래서 "대한민국, 으라차 자차" 라고 응원도 하고 하면서 엄청 난리를 피웠는데, 그런데 만약 브라질이 4강에 들었다면, 우리들 같이 그렇게 했겠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4등밖에 못했다고 핀잔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자기들은 우승을 해야지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4강 안에 들었다고 하니, 자기들은 존재의 초과분도 모르고 아예 4강으로 테두리를 쳤다는 것이다. "나는 4강으로 만족해. 다음대회에서도 4강을 해야될 걸" 라고 하면서 말이다. (말이 좀 이상한데?)
◈ 알랭 바디우 - 신은 인간의 사유에 불과 !!
그러니까 알랭 바디우가 하는 말이, "이 인간들아, 왜 자꾸만 존재로부터 출발하느냐?" 라는 것이다. 즉 일자(一者)로부터 말이다. 모든 철학에서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곧 신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신을 하나의 대상으로 본다는 말인데, 즉 자기가 그 하나의 고정된 대상을 믿는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고정된 대상이 하나인 것처럼 자기를 하나의 절대적 대상으로 묶어내기 위한 일종의 사유적(思惟的) 수법에, 즉 머리 속의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 포이에르바하는?)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발전이라는 것도 없고, 진보라는 것도 없고, 그냥 무차별적으로 떠돌아다니고 왔다갔다하는 사건들만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거기서 우리의 본성상 그 사건을 '나를 위한 하나'로 자꾸만 묶어내는 식으로 그 사건에 의미를 준다는 것이다. 의미를 말이다. 그런데 그 의미는 자기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아니라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른 사건을 하나로 묶어서 의미를 주고 말이다.
◈ 만나와 알랭 바디우의 만남 !!
여러분은 이런 (피곤한) 이야기가 성경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교재에 '만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이 있는데, 여기 85페이지에 나오는데, 우리는 신명기 8장에 나오는 만나를 보고는, 이 만나를 안다고 하는데, 그러나 이 만나를 알랭 바디우가 말한 사건과 한번 대비를 시켜보라는 것이다.
(신 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신 8: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신 8:3)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이러한 '만나사건'을 주시면,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마음대로 이 만나를 대한다는 것이다. 알랭 바디우의 철학이 여기에 멋드러지게 적용되는데, 이 '만나' 라는 사건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중요한 것은, 이 만나를 주워먹는 사람들은 자기 생존을, 즉 자기 몸뚱아리 하나 살리려고 새벽부터 나와서 허겁지겁 이 만나를 줍는데, 물론 어떤 사람은 욕심을 내어서 만나의 한계성을 뛰어넘으려고 하고 말이다.
◈ 성경해석은 아는 만큼 계속해서 확장 !!
성경해석이 어느 특정해석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확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이다. 성경해석은 자기 실존과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자기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아는 만큼 계속해서 넓혀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나사건을 일으켰을 때는 의미가 있는데, 이것이 알랭 바디우의 이론에 의하면, 신이 일을 해도 반드시 의미가 있지, 즉 의미가 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도 역시 사건을 모아도 그냥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두고 모으고 말이다. 이해가 되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사건을 일으키는 하나님도 무의미하게 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라는 말이다.
◈ 죄를 모르면 만나도 몰라 !!
그런데 이 의미가, 즉 만나라는 사건과 이 만나를 주워먹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건이 서로 어떻게 되는가?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의 진짜 의미는 모르고 '배고프다' 라는 것으로 만나를 포섭하니까, 만나는 이들에게 양식이 되어버리는데, 그러나 신명기 8장에 의하면 이 만나는 양식이 아니라 말씀인데 말이다. 즉 복음이라는 것인데, 이것이 요한복음 6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요 6:30) 저희가 묻되 그러면 우리로 보고 당신을 믿게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요 6: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저희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요 6: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그 당시 민중들이 예수님에게 만나를 달라고 하니까, 예수님은 자기가 줄 수 있는 것은 과거의 그런 만나가 아니라 자신의 살과 피라는 것이다. 그들은 양식으로 이 만나를 알고 있지만, 그러나 그 만나를 깨트려보면 그 안에 장차 오실 메시야의 살과 피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양식 수준의 만나에서 예수님의 살과 피로 옮겨오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렇게 인간들이 만나를 양식으로 바꾸면서 까지 살고자 하는 몸부림(?),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자기의 살과 피를 찢기고 흘려야만 했던, 그 원인을 제공한 '죄' 라는 것을 아는 경우에만, 비로소 만나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고, 미워하는 자는 얻는다" 라고 했고 말이다.
(요 12:25)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 왜 인간들은 만나를 양식으로 보았는가?
그렇다면 여기에서 뒤따라 나오는 질문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인간들은 만나게 담긴,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서 자기 생존에 집착해서 양식을 구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그것은 바로 니가 잘 알잖아"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나 우리들이나 모두 다 똑같은 몸뚱이리를 가지고 있기에 말이다. 그러니 특별히 묻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질문을 "사람이 배가 고파서 만나를 먹었는데, 그것이 뭐가 문제입니까?" 라고 해야하는데, 그래서 만나를 내려주신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그것을 스피노자 방식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양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우리도 역시 살려주셔야 하나님의 속성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스피노자가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넘어가 버리는데, 사실 대부분 철학자들의 결론이 무엇인고 하니까, 죽는 것도 신의 뜻이니 신의 뜻에 맡겨야 한다고 하는데, 즉 종교를 대체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 왜 내가 남이 아닌가? 그리고 왜 남은 내가 아닌가?
알랭 바디우의 철학을 제가 방금 이야기했는데, 결국에 사람이란 것은 "내가 남이 아니다" 라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다는 것이다. 레비나스의 '이웃의 얼굴' 이라는 책을 보면, 좀 어려운 책인데, "왜 나는 남이 아니고, 왜 남은 내가 아닌가?" 라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고독을 느끼기에 그런 소리를 하는데, 그러므로 인간은 알 수 있는 신의 사건에 의해서 자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적으로 최초로 해명한 사람이 케에르케고르인데, 실존주의 철학자로서 '단독자'의 의미를 주장한 인물 말이다. 아마 칼 바르트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사람들이 의심을 하고 비판도 하는 것이다. (바르트 본인 스스로는 안셀무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는데??)
◈ 도대체 '나' 란 누구인가?
지금까지 강의한 것을 다시 정리해보면, 인간이라는 것은 날아오는 사건을 자기 임의대로, 자기에게 의미가 되는 쪽으로 묶어내는데, 그래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나' 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해명이 안 되는 것이 있는데, 그렇게 사건을 독자적으로 묶는 '나'는 도대체 누구의 지시에 따라서, 왜 다른 사람과 그렇게 차이가 나도록 묶어져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차이가 나도록 하는 것이 누구냐고 할 때, 이때 스피노자가 하는 말이 "신이 스스로 자기 본성을 드러낸 것이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왜 저 사람과 '내'가 다른고 하니, 신은 자기의 역량 따라서 다르게 다르게 '내'가 변형, 혹은 변태(?), 즉 변형된 양태가 되도록 하는데, 그것은 바로 다양성 속에서 신의 충만함을 느끼기 위해서 그렇게 의도적으로 차이나게 차이나게 했다는 것이다. 그 차이의 신학(?)이 바로 들뢰즈의 주장이고 말이다. (아이코, 헤드 빙빙)
◈ 포스트모더니즘 - 들뢰즈에게 물어봐 !!
들뢰즈 이전까지는 사람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느냐를 살펴보았는데, 그러나 들뢰즈 이후로는 공통점이 아닌 차이점에 대해서, 즉 그 차이에 따라서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미가 '나'만의 의미를 가지지 위해서는 '나'만의 차이점을 가져야 하는데, 그 차이점이 바로 '나'로 하여금 '나'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개선위주로 나가는 것을 두고서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구조주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치매 시어머니와 그 며느리 이야기 !!
이런 철학들이 현대인들의 마음에 확 다가오는 이유가, '유교' 라는 통합적인 법 체제를 깨는 힘으로 다가오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서, 어느 여교사의 이야기인데, 시댁에서 엄청난 재산도 물려주고 아이도 돌봐주고 맞벌이 일을 하는데 전혀 부담이 되지 않도록 모든 편의를 다 봐주었는데, 그래서 이 며느리가 큰 소리를 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어머니가 그만 치매에 걸렸다면 당연히 돌보아주는 것이, 그것이 유교를 떠나서 기본적인 인간의 상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철학의 중요성이 등장하는데, 누군가가 도와줄 때는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모든 것을 다 삼켜버리는데, 그런데 반대로 그 도와주는 사람이 약간의 도움을 요청할 때나 짐이 된다 싶으면 매몰차게 끊어버리는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도 그러했는데, 그런데 과거에는 억지로 라도 막아주는 게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윤리적 전통과 시선들이고, 그리고 사회적인 규범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런 차이점들이 다 깨어지고 난 뒤에는, "도와줄 때는 고맙게 받지만, 반대로 저에게 도와달라고 강제로 요청하는 것은 거부하겠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말한 그 여교사 며느리는 퇴근시간에 되어도 집에 가지 않고, 밤 10시가 넘어서 가자마자 씻고 잠이 들 그때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보기 싫어서 말이다. 물론 자기도 그 시어머니를 돌보아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나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하고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 인간에게 주어진 슬픔의 역량 !!
이것을 스피노자는 설명하기를, 신께서는 우리에게 슬픔의 역량을 주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역량'은 내제적인 힘을 의미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것은 잠재태인데, 나중에는 현실태가 되고 말이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슬픈 역량은 있지만 기쁜 역량은 없는데, 그것은 신에게만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신이 왔을 때, 인간은 이것을 슬프게 받아들이는데, 그런데 이런 슬픔과 슬픔 가운데서 이렇게 신이 자기에게 주는데, 이것을 '분여(分與)' 라고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은사라고 이야기하고 말이다. 즉 신이 자기의 속성을 우리에게 분여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
◈ '지옥의 하나님' 책 - 은사를 한번 따져보자 !!
신학에서 보통 '은사론' 이라고 할 때, 이 은사론의 논리적 구조가 우리 교재인 '지옥의 하나님' 이란 책에 다 나와있는데, 흔히 있는 신학서적에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다고 하는 것을 한번 따져본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 은사를 몇 %를 주었는지, 그리고 주었다면 왜 사람들마다 다 다른지, 그리고 그것을 준 이유가 무엇인지 말이다. 그리고 분여를 했다면, 그것들끼리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말이다.
이렇게 분여를, 즉 은사를 받았으면 그 안에 공통적인 요소들이 있을 텐데, 그것을 '공통개념' 이라고 하는데, 이 공통개념이 신의 속성과 합치되는데, 인간이 서로서로 분리되기 때문에 슬픈데, 왜냐하면, 왜 자기 허락도 없이 이런 사건들이 일어나느냐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다니엘이 사자굴에 갇히는 것도 그러한데, 하필이면 왜 자기를 사자굴에 들여보내느냐는 것이다.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왜 그 수많은 처녀들 가운데서 자기가 처녀로서 임신을 해야하는,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모두가 슬픈데, 그런데 이러한 슬픔과 슬픔 사이에서 대화를 하게 되면, 즉 그렇게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 "아하, 신의 뜻이 그렇군요"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통개념이 생기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공통개념이라는 것은, A 라는 사람에도 신의 속성이 있고, B 라는 사람에게도 신의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의 속성들끼리 모여서 대화를 하게 되면 공통개념이 성립하게 되고, 그리고 이 공통개념에 의해서 국가와 교회라는 조직 등이 펼쳐진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말이다.
◈ 왜 ! 왜 ! 왜 !
그러므로 스피노자에 의하면, 신이 곧 바로 국가를 만든 것이 아니라, 신이 먼저 인간을 만들어놓고는, 이 인간들에게 고난과 역경과 아픔과 고생과 경험을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거기에서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자기 실존에서 바깥으로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왜', '누가' 라고 말이다. 즉 "신이시여, 왜 하필이면 저에게 이런 사고가 일어나서 장애자가 되게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왜' 라고 질문하는 순간부터 자기에게 갇혀있던 이러한 사고방식들이 자기를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벗어나게 되면 신께서 벌린 사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왜' 라는 질문을 자기 혼자서 하게 되면 고독한데, 계속 슬프다는 말이다.
그런데 똑같은 장애자들끼리 만났는데, 다른 장애자가 하는 말이, "저는 이렇게 다리가 부러지고 했지만 아직 멀쩡한 두 팔이 있고, 그래서 컴퓨터 관련 회사에 취직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라고 하면, 그를 통해서 "아하, 나도 이렇게 장애자가 된 것은 신이 뜻이 있구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공통개념이라고 한다는 말이다.
◈ 이 공통개념 안에서, 슬픔이 기쁨으로 - 안중근 !!
인간이 이러한 공통개념을 가질 때 이것이 신의 속성에 합당한데, 이 공통개념이 왜 중요한고 하니까, 바로 이러한 공통개념 안에서, 조금 전에 말한 슬픔과 소극적인 역량이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기쁨의 역량으로 바뀌게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안중근인데, 자기는 국가라는 공통개념 안에서 목숨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어떻게? 자발적으로 말이다. 어떤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말이다. "신께서는 왜 일본이 우리를 압제하도록 하십니까?" 라고 하면서 슬펐던 '내'가, 일본 군화발에 짓밟히는 자기 동족을 바라보면서 동정심이 발휘되면서, "신께서 왜 나에게 저런 일이 비참한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가? 아하, 나에게는 사명이 있구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 사명이 무엇인고 하니까, 자기 동족을 자기 역량을 발휘해서, 즉 공통개념을 만들어서 거기서 도출되는 것이 어떠한고 하니, 기쁨으로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역량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신께서 의도하고 노렸던 전략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께서 의도적으로 고난을 주심으로 말미암아 신을 뜻을 알게 해서, 이렇게 신의 뜻을 안 상태에서 자발적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능동적으로 활동하게 한다면, 이 슬픔과 기쁨의 역량조차도 신이 베풀어주신 신의 속성의 분여, 즉 나누어준 결과라는 것이다.
◈ 스피노자 - 성경만이 전부가 아니다 !!
그러니 이것은 무지무지한 낙관론인데, 스피노자는 이것을 주장하면서 기존교회를 의식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교회의 목사라고 하는 니놈들이 제 아무리 성경을 따지고 또 따져보아도 내가 만든 철학보다는 한 수 아래이다. 왜 그렇게 레벨이 낮은고 하니, 목사 니들은 성경 그것이 신의 계시인 줄 알지만, 그러나 성경 말고 다른 세상 사람들이 표출하고 있는 표현도 신의 표현으로 주워담을 줄 아는 융통성이 니들에게는 결여되어있기에, 나보다도 신에 대해서 더 모르는 수준 낮은 놈들이다" 라는 것이다.
◈ 통합측 - 옳소이다 !!
그러니 이런 스피노자를 제대로 공부한 사람들은 교회에 나오겠는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너무 수준이 낮아서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신학자들은 어떠한 반응을 일으키겠는가? 스피노자를 공격할까요, 아니면 배우려고 할까요? 놀랍게도 한 수 배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성경을 포기했다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통합측이고 감리교이고 기장측이라는 말이다.
* 질문 - ???
* 답변 - 이 '지옥의 하나님' 이란 책의 절반 가까이 데카르트를 공격하는 것인데, 데카르트는 사유와 연장이라고 해서, 신의 속성 가운데 사유가 있고 연장이 있다고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그것이 아니라, 신이 일자(一者)라고 한다면 신의 속성을 둘로 나누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본질, 즉 실체를 두고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인데 말이다. 즉 신이 일자라면 속성도 역시 하나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의 본질을 표현을 그렇게 한 것뿐인데, 왜 그것을 두고 따로 따로 각각의 실체로 보느냐고, 그렇게 데카르트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자연에 있는 모든 사건과 변화를, 그렇게 자연의 모든 존재를 하나로 묶어서 보는데, 그것이 철학자의 사명인데, 그렇게 해야 비로소 인간은 사는 보람과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자기가 놓친 것이 있다면 불안한데, 알랭 바디우의 주장처럼, 사람은 뭔가 묶어내지 않으면 자기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나는 이것은 아는데, 저것은 잘 모르겠다" 라고 하면, 상대방이 "저런, 바보 같이. 그것도 제대로 모르나"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에이시, 나는 바보가 아니다" 라고 반박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신도 아니면서 신 행세를 하는 인간 !!
이것을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인간은 자기가 신도 아닌 주제에 마치 자기가 신이 된 것처럼 신 행세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부적으로 붕괴의 조짐이 일어나는 것인데, 즉 내부적 분열이라는 것이다. 프로이드는 이것을 두고 인간은 처음부터 분열이 되었다고 주장했고 말이다.
이것은 라캉도 마찬가지인데, 인간은 자기가 절대자도 아니면서, 그것을 '실재계' 라고 하는데, 자기는 그런 절대세계도 모르면서 자기가 절대세계에 있다고 간주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신체에 한계가 있는데, 즉 한계와 신체 사이에 분열이 있는데, 그 분열을 메우기 위해서 허상, 즉 시뮬레이션을 만드는데, 이것이 곧 '상징계' 라는 것이다. 즉 이 세상의 모든 윤리와 도덕과 법을 그렇게 본다는 말이다.
◈ 알랭 바디우 - 하나의 사건으로 묶자 !!
사실상 이렇게 일치가 되지 않는데, 그런데 스피노자는 일치시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알랭 바디우는 말하기를, "신을 그렇게 억지로 일치시킬 이유도 없는데, 왜 스피노자 당신은 그렇게 일치했다고 우기는가?" 라는 것이다. 일치시키지 않고 그냥 하나의 사건으로 묶어버리면 되는데, 즉 "나는 사건을 하나로 묶어낸다. 그런데 왜 묶느냐고 따지지 마라. 묶는 것이 원래 인간의 모습이다"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 들뢰즈 - 새로운 사건도 하나로 묶어야 하나?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들뢰즈는 말하기를, "물론 기존의 사건은 그렇게 묶으면 되는데, 그런데 새로운 사건마저도 그렇게 묶어버리면 너무나도 이기주의가 아닌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이기적으로, 즉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여기서 실례를 하나 들어본다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미국은 미국대로 신의 뜻이라고 하면 되고, 또한 이라크는 이라크대로 신의 뜻이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국 철학자들이 정치이론으로 나가게 되는데, 그래서 하는 말이, 왜 그렇게 힘들게 묶으려고 하냐는 것이다. 차라리 스피노자처럼 "모든 것이 다 신의 뜻입니다" 라고 하면 끝나는데 말이다. 이것이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와 유사한 점이 매우 많은데, 사실 모든 철학이 이들 학파에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 철학공부가 왜 성경말씀을 보는데 필요한가?
그렇다면 과연 이러한 철학공부가 성경말씀을 보는데 왜 필요한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잘못되고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성경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 즉 성경해석이 문제라는 것이다.
들뢰즈나 알랭 바디우가 우리 자신의 세계를 잘 드러내어 보여주었는데, 그런데 이런 것을 무시하고, 즉 우리 자신의 세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성경해석을 바로 해버리면, 자기 행동을 변명하는 식으로, 즉 자기 핑계에 지나지 않는 성경해석을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입맛에 맞는 성경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 철학자들은 왜 예수님을 외면하는가?
그러므로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나 목사의 경우에, "그런 것이 전혀 아니올시다" 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할 사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이러한 철학자들의 특징이 예수님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스피노자도 그러한데, 물론 이런 역량들이 지성으로 몰린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조금 언급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즉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하는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성경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목사는 이렇게 교인들에게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라고 알려주면 되지 않느냐고 하는데, 하지만 이미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존재를 묶어내기 위해서 절대자인 신을 찾는 입장에서 말이다.
사실 이런 알랭 바디우의 주장에 대해서 반박의 여지가 없는데, 우리는 사건을 자기 존재위주로 묶어내는데, 이렇게 '나' 위주로 묶어내기 위해서는 '나' 라는 대상이 일자(一者)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 둘, 셋' 이렇게 헤아릴 수 있다는 것인데, 그렇게 셀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숫자는 하나, 둘, 셋이지만 신은 하나라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 하나가 될 때 안정감을 갖는데, 즉 뒤죽박죽 뒤섞여있는 것은 싫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 라는 존재는 하나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 묶어내기 위해서 외부의 모든 사건을 자기 중심으로 묶어내는 하나로 분간시키기에 말이다.
◈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
그렇게 신을 이야기하다보면, 결국 예수님을 이야기해도 기존의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의 개념에다가 흡수통합 시켜버리고, 즉 예수님을 잘라 없애버린다는 말이다. 그래서 제가 주장하는 것이, 예수님을 없애지 않는 방법이 무엇인고 하니,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을 출발점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기존의 신학은 어떠한고 하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성이 중심이었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은 어떻게 신이 되었는가?" 라는 것에 관심을 집중시켰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일으킨 사건의 의미를, 즉 살과 피라는 사건의 의미를 기존의 삼위일체 신학자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는가?
◈ 신학자들 - 십자가 사건마저도 예수님의 존재성 파악에 !!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어디에다가 흡수통합 시키는고 하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하나님 맞잖아" 라고 하면서, 즉 이 십자가 사건을 하나님의 신성(神聖)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십자가 사건이 그만 사라져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들이 저에게 공격하는 것이, "이근호 당신이 주장하는 그 십자가를 아는데, 결국 우리도 예수님과 하나님을 인정하니까, 너무 일방적으로 그렇게 당신만이 십자가를 아는 것처럼 십자가 사건을 가지고 얼쩡대지 마라. 그런 꼴은 보기 싫으니 말이다" 라는 것이다.
기존의 신학은 인간들이 알고 있던 신의 개념 속에다가 "아하, 신은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었구먼. 하나, 둘, 셋" 이라고 하면서, 이 세 분을 집어넣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리고서는 자물쇠로 채워버리고 말이다. 이미 신의 개념을 아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아는 신의 개념은 다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절대자로 군림하기 위한 하나의 핑계거리로 삼위일체를 모셔다 놓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자기가 그 어떤 일을 해도 신의 뜻이라는 말이다.
◈ 신의 역할 - 슬픔이 기쁨의 역량이 되게 !!
이것이 바로 조금 전에 했던 스피노자의 '분여론' 인데, 속성이 역량, 즉 힘이 되는데, 여기에는 슬픈 역량이 있는데, 이것이 신이 은사로 주신 신의 뜻을 알 때는 슬픈 역량에서 기쁜 역량으로 자발적으로 바뀌게 되는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신의 본성대로 봉사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곧 스피노자의 철학인데, 이것과 오늘날 은사론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기존 교회에서 주장하는 성령론과 도대체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제가 이 책(?)을 보면서 속이 시원했던 것이, 기존 한국교회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론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논리적으로 전개하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아주 어렵지만 말이다.
그러니 이제는 신학자들의 주장보다는 스피노자를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 신학자들이 스피노자를 전혀 뛰어넘지를 못하니 말이다. 비록 신학을 강조하고 또 신학을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철학자들 앞에 모두 엎드려 있다는 것이다.
◈ 삼위일체 - 하나로 묶어 의미를 찾기 위해서 !!
이렇게 신학자들이 철학자들 앞에 엎드려 있다는 말은, 기존 교인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해도, 그것을 십자가의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을 자기가 믿을 신들 중에서 또 하나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신의 영역에 다 집어넣어서, 그렇게 해서 삼위를 몽땅 하나로 묶어내는, 즉 삼위가 일체가 되는, 그렇게 묶어내어서 자기에게 의미를 찾는, 그런 것을 장려해주는 식의 결과가 될 뿐이라는 말이다.
◈ 이근호 - 성경전체에서 십자가 의미를 끄집어내어야 !!
누군가가 "그렇다면 이근호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한다면, 저는 이 '지옥의 하나님' 이라는 책을 공부하면서, 성경전체의 그 하나하나 속에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말한 십자가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다른 능력으로 구원받을 길이 없다고 한, 바로 그 능력이라는 말이다.
사실상 예수님이 신성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고, 유대인들도 메시야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은 그 어떤 인간이라도 어리석게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정말이지 어리석은 일이고 말이다. 무모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떤 개인의 존재를 받아드리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그러나 십자가 사건에서 능력이 나온다는 것은, 더욱이 계속해서 그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성경은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미 終 !!
* 질문 - 과거 고린도 교회나 다른 교회에서 십자가 사건이 터트려졌고, 지금도 역시 터지는데, 그것을 글로 쓰면 성경이 됩니까? 그리고 그 십자가 사건 속에서 의미를 깨닫게 된다면 어떻게 됩니까?
* 답변 - 십자가 사건의 연속성으로 십자가가 터트려지고, 그것은 교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 우주 전체에서 터트려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을 기록해도 그것은 성경이 되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요한 계시록 22장에 나오는데, 누구든지 예언의 말씀에서 더하든지 제하여 버리면 생명나무와 거룩한 성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계 22:18)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계 22:19)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여기서 요한계시록을 잠시 살펴보면, 1장은 "나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라고 했는데, 7절에서 말이다. 이렇게 분명히 십자가로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8절에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라고 하는데, 즉 십자가의 연속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를 통해서 공격에 들어가는데, 그리고 요한계시록 마지막에는 "이것 이외에 다른 것은 안 된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무엇인고 하니, 성경은 이미 종결이 되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십자가 사건을 증거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자면,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렇게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성경은 이미 마감이 되었다는 것이다.
(계 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그 다음에 자기가 깨닫는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했는데, 그것은 사실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깨닫는 것은 성경에 전혀 포함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참으로 미안스럽지만 말이다. 즉 이근호가 몇월 몇일에 무엇 무엇을 깨닫는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 질문 - 그러나 요한계시록이 정경으로 채택되기 이전에는 그런 기준이 없었지 않습니까?
* 답변 - 그때는 사도가 살아있어서 사도를 통해서 이야기했는데, 즉 사도가 곧 성경이라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바로 이 '나' 라는 문제로 돌아와 버리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과는 달리 바깥에서 놀게 된다는 것이다. '나' 라는 의미가 말이다. 지난번에도 이와 같은 질문을 받았지 싶은데, 제가 십자가 사건의 취지를 한번 말해볼 테니까 본인들의 생각과 같은지 한번 비교해보라는 것이다.
'내'가 만약 십자가 사건을 알았다고 했을 때, 즉 이 십자가 사건을 아는 '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근호 목사님 말씀대로 사건을 계속 일으키는데, 그런데 '계속' 이란 말은 무한대로 가게 되니까, 그러면 '내' 나이가 40이 되고 50이 되어도 계속해서 십자가 사건이 마구 터질 것인데, 그러면 40대에 본 성경해석과 50대에 본 성경해석이, 물론 더 추가해서는 안 되지만, 그러나 추가될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질문 같은데, 아닌가?
* 질문 - 십자가가 성경의 중심사상이니까, 즉 성경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니까, 그것이 의미를 추가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교회 교회마다 사건을 터트리면서 예수님을 드러내시는데, 그러면 지금 현재도 그러한 일을 하시는데, 그것들이 기록된다고 하도 왜 성경말씀이 되지 않는지요?
* 답변 - 하나님이 십자가을 터트리면서 일을 하시는 것은 성경 안에서 하는 것이기에 별 문제가 안 되는데, 그러나 그것이 기록이 되어버리면 추가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요한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때가 되면 지금도 일어나는 일들을 그 마지막 때에 다 집어넣어 놓았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요한계시록으로 성경이 마감되어도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요한계시록 안에 이미 다 들어있는, 마치 설계도 원판과도 같으니 말이다. 그러니 원판을 더 추가할 필요는 없고, 다만 그 원판을 적용하는 일들만 남아있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천년 만년이 지난다고 해도 모두 그 안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그 어떤 인간이라도 그 일을 방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할 놈은 구원하고, 십자가를 믿지 않을 놈은 그런 놈들대로 처리하고 말이다.
그렇게 분리하는 작업인데, 그러므로 신학을 공부한 목사의 입장에서는 분리를 하면 되는데, 그런데 오히려 포섭을 하고 설득을 하려고 하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아무튼 분리를 하는데, 스피노자나 알랭 바디우처럼 된 사람 같으면, 분리작업을 통해서 그런 사람에게는 '아니올시다' 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저는 예수님이 하늘에 계심을 믿습니다" 라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는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했는데, 왜 당신은 예수님이 하늘에 계신 것을 믿지요?" 라고 하면, 상대방에서, "그것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라고 하면, 이제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사의 임무가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은 항상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이야기를 스피노자 식으로 하면 안 되고, 성경해석을 통해서, 즉 우리 교재에 나오는 '존재의 함성'과 같은 것을 통해서 이야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 다시, 존재의 함성 !!
이제 교재 33페이지를 한번 보자. 여기에 '존재의 함성'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알랭 바디우가 들뢰즈의 철학을 비꼬기 위해서 사용한 말인데, 들뢰즈는 존재의 함성인데, 즉 존재가 울부짖는 것이란 말이다. 알랭 바디우는, 그것은 들뢰즈가 존재가 울부짖는 것에 현혹이 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들뢰즈는 아이가 우니까, "아가야, 젖주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알랭 바디우는 그런 식으로 하지 말고, 아이가 울면 배가 고파서 그런지, 아니면 어디가 아파서 그런지, 그렇게 살피고 난 뒤에 젖을 주든지 병원에 데리고 가든지 해야 하는데, 그런데 "울어, 도와줄 게", "또 울어, 또 도와줄 게" 라는 식으로 철학이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존재가 여기 저기에서 함성을 지르고 있는데,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시속 160km를 달리는 것도 일종의 "나, 여기 있다" 라는 존재의 함성인데, 광주의 어느 집사님은 사돈을 옆에 태우고 180km를 두어 시간 달리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사돈을 긴장시켰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과속을 하는 것은 익숙해진 자기의 존재의 함성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존재는 그 어떤 형태로든지 울부짖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알랭 바디우에 의하면, 그것을 달래주는 식으로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부르짖는 것은 자기가 사건들을 자기 마음에 맞게 묶어내는 것에 불과한데, 그것을 언제까지 달래줄 것이냐는 말이다. 알랭 바디우의 이런 개념이 이해가 되죠?
여기서 우리 교재 33페이지 '존재의 함성' 부분이 나오는, 열왕기 18장을 한번 보자.
(왕상 18: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여기에 보면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라고 되어있는데, 이 대목에서 성경을 다시 한번 찾아보면, 예레미야 2장을 보자.
(렘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지금 열왕기상은 엘리야 시대인데, 그런데 훨씬 후대인 예레미야 시대에도 보면 여전히 바알이 등장하는데, 그렇게 엘리야에게 850명이나 놈들이 죽임을 당하고 해도 그 바알을 섬기는 놈들은 결단코 사라지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신약에 나오는데, 곧 우상숭배인데, 이렇게 인간은 이 땅에 소산에 묶여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소유인데, 이 땅에서 뭔가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자기 인생의 최고가치라고 여기고, 그것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는 것이다.
(골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 맨 땅이 아닌 약속의 땅 !!
그런데 예레미야에 의하면, 땅의 것이 그렇게 좋은 줄은 알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 하나님께 있어서 최고의 영광이고 이스라엘을 남겨둔 이상(理想)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 하나님의 거룩을 보여주는 것, 언약에 대한 위력을 증거하는 것이 말이다. 이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 대한 소산인데,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지워버리고, 그냥 '땅' 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할 때, 예수님의 세계를 제거해버리고, 예수님을 믿기는 믿는데 현재 있는 자기의 세계를 잘되게 하기 위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따로 만들어놓은 그런 예수님의 세계를 무시하고, 자기가 정들고 자기가 기대를 걸고 있는 그런 자기의 세계에 힘을 몰아넣어 줄 때, 그럴 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을 골로새서에서는 '우상숭배' 라고 하는데, 이것이 바알의 특징인데, 이 예레미야는 1장부터 계속해서 바알과 여호와에 대한 대결구조가 예레미야 끝까지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결국 한 쪽이 망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망했지 결코 바알이 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바알은 마지막 심판 때에 주님과 그 천사들에 의해서 눌림을 당하게 되는데, 즉 사람의 힘으로는 이 바알을 몰아낼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바알은 마치 토네이도처럼 !!
어제 설교시간에 이런 예화를 들었는데, 목욕탕 안에 있는 큰 선풍기 앞에서 대화를 해보면 글자가 다 깨어져서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현재 이 세상은 바알의 세상이기 때문에, 그 악의 폭풍 속에서 우리가 아무리 자기 착함의 영역을 만들려고 해도, 그 악의 폭풍이 다 휩쓸고 지나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서 이상적인 교회를 만들고 행복한 가정을 꾸며보겠다는 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부질없는 짓인데, 악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백 날 공부해도 나오지 않는데, 엘리야와 예레미야와 같은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스피노자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선지자들은 시건(철)이 없어서 자기가 마음에 슬픈 역정을 느끼는 데로만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야기한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언자 자체를 보통 우리 인간들로 봐서, "아, 얼마나 인생살이가 고달팠으면 저런 한스러운 소리를 할까" 라고 말이다.
이것은 스피노자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신학자들이 다 그렇게 보는데, 심지어 예수님도 그런 각도로 본다는 것이다. "아, 예수님이 얼마나 속이 상하고 화가 났으면 저런 이야기를 하실까" 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고통과 그분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가 예언이 된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언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은 모르고, 그냥 자기의 화풀이나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로만 여긴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나, 예레미야나, 인간이나 모두 다 샘 샘 !!
그렇다면 예레미야하고 우리 인간하고 차이가 있는가, 없는가? 스피노자나 알랭 바디우도 역시 그러한데, 그들이 왜 그렇게 주장하는고 하니, 그들은 예레미야와 보통 인간을 전혀 차이를 두지 않는데, 즉 똑같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차이를 두게 되면, 그 간격을 메울 만한 철학적 높이가 없다는 것이다. 철학적 브릿지(다리)가 말이다.
이렇게 철학은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라는 데서 출발하는데, 특수인간을 인정하지 않고 그 어떠한 특별대우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이라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존재로부터 출발을 하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뭐라고 하는가? 이 땅은 바알이라고, 즉 우상숭배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인자하심이 나왔으니, 즉 이 십자가을 통한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레미야가 우리에게 나타나서 그렇게 공격을 해댄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레미야를 보면서 십자가 사건을 발췌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33페이지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이 도대체 어떻게 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열왕기상 18장을 보자.
(왕상 18:26) 저희가 그 받은 송아지를 취하여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가로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저희가 그 쌓은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왕상 18:27) 오정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저희를 조롱하여 가로되 큰 소리로 부르라 저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행하는지 혹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왕상 18:28) 이에 저희가 큰 소리로 부르고 그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하더라
(왕상 18:29) 이같이 하여 오정이 지났으나 저희가 오히려 진언을 하여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를지라도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고 아무 돌아보는 자도 없더라
여러분은 이런 성경구절을 읽으면 어떤 의문점이 들어요? 여기에 보면, 바알 선지자들이 제 아무리 소리를 치고 부르짖어도 아무런 응답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을 엘리야만이 알았는가? 바알 선지자들은 제외하더라도 말이다. 백성들과 민중들도 훤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일반 민중들은 엘리야의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바알 선지자들을 따라다니는가? 백이면 백, 모두다 그렇게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좀 깊이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렇게 무식하고 능력이 없는, 그런 바알신 같으면 외면할 만도 한데, 어느 정도 점검을 해보고 아니라고 하면 믿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갓바위가 능력이 없다면 가지 않으면 그만인데, 그런데 또 그렇게 고생을 해가면서 갓바위에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 바알은 민중들의 분신 !!
여기 나오는 바알 이라는 신은, 누가 만들었는고 하니 바로 민중 자기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왜 만들었는가? 민중들은 바보가 아닌데, 민중들은 이 땅에 속하는데, 이 땅은 봄이 되면 새싹이 돋고 겨울이 되면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땅의 속성과 가장 걸맞는, 가장 입맛에 가장 딱 맞아떨어지는, 그러한 사상과 교리와 진리체계를 민중들이 만들고, 그것이 전통이 되어서 민중종교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가 만들었는가? 불신자들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복음이 제대로 증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 쫓아내고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복음을 전하는데 쫓겨나느냐는 것이다. 대구에 있는 동신교회, 동부교회, 범어교회, 그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거기에 복음이 있는가? 그런데 왜 그렇게 부흥이 잘 되는가? (물론 복음이 아니기에 그렇지만 말이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가? 소위 탑돌이를 하는데, 이 탑돌이를 목사가 교인들에게 억지로 주입시키는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동신교회에서 아파트 탑돌이를 했다고 하는데, "이 아파트를 우리교회(?)에 주시옵소서" 라고 말이다. 그렇게 하면 교인들이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안정감을 얻는지 모른다는 말이다. (이거, 여리고성 작전 아닌가? 무너지면 재개발하면 되고 말이다.)
스피노자나 알랭 바디우가 뭐라고 했는가? "사람은 하나로 묶어낼 때 안정감을 느낀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에 자기가 살아있는 보람을 느끼고 가치를 느낀다는 것이다. 아파트를 한 바퀴 돌면서, "아, 나에게 하나님이 전도하라고 사명감을 주었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사명감을 찾을 때 인간은 보람을 느낀다는 것이다.
◈ 아, 나도 탑돌이 한번 해봤으면 !!
이것이 불교에서의 탑돌이와 뭐가 다른가? 탑을 한바퀴 돌아보라는 것이다. 얼마나 마음에 안정감을 느끼는지 말이다. 산밑에 내려가면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질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교회에서도 한번쯤은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은데 말이다. (사실 장로님이나 교인들의 눈치는 별로 안 보이는데, 다만 주일학생들 때문에...)
단 한가지 사건, 이 십자가 사건만을 빼놓고,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다 인간들의 행위에서, 즉 인간들이 다 만들어내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너무나 정겨우니 말이다. 그렇게 하면 보람도 있고 기분이 너무 좋다는 것이다. 무슨 '뽕'도 아니고 말이다.
◈ 믿음 - 보이지도, 증거도, 흔적도, 반복도 안 되는 것을 믿어야 !!
그러나 믿음은 무엇인가? 다른 그 어떤 사건들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십자가 사건을 믿는다는 것이다. 즉 그분의 피로 말미암아서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다고 해주신다는 말이다. 이러한 놀라운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을 수 없는 가운데 믿었던 그 믿음이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기적이라는 말밖에는 다른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증거물도 없고, 흔적도 없고, 되풀이해서 할 대상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복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다만 그 십자가의 피가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 피의 증인으로서 그 어떤 환난 속에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봉사이고,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이 십자가을 질 때 제자들이 다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삶을 추구했고 예수님을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또 다시 찾아오셔서 십자가에서 박히신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시면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라고 했을 때, 그제야 비소로 그들은 주님의 주님되심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에게도 그러한 자국들을 날마다 보여주셔서 이 세상이 멸망의 대상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7,11,19 오후 3시 40분에 쫑
아, 나도 하고 싶다 탑돌이 !!
주여, 우리 원당에 이쁜 교회당 하나 주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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