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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과 정서를 읽으며 정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글을 많이 읽으며 서로 토론한다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개혁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III.6. 은혜로운 정서는 복음적인 겸손을 수반한다
Gracious affections are attended with evangelical humiliation
III장의 제목은 거룩한 신앙적 정서들의 표지로 되어있지만, 실제 신앙적 정서의 표지는 6-11과에서 다루어진다. 그러므로 표지론은 겸손을 다루는 본 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에드워즈는 겸손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 상당히 많은 분량을 이곳에 할애하였다. 물론, 겸손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야할 여러가지 덕목 중의 하나이지만, 그가 그리스도인의 표지로서 겸손을 특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그리스도인과 유사 그리스도인의 차이가 이 덕목에서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실제로 당시의 거짓 그리스도인의 위선을 상당히 깊게 분석하고 이것을 적나라하게 펼쳤다. 이것을 읽은 독자들이 땀이 날 정도로 그의 통찰과 고발은 날카롭다. 그가 이렇게 철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자신이 복음적 겸손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전적으로 무능하고, 혐오할 만하고, 추악한가를 깨달을 때 비로소 겸손해진다. 즉,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설 때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달으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겸손한 마음과 태도를 가질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 속에서 사는 사람은 인간의 위선이 전부 눈에 들어온다. 이것이 에드워즈가 가진 날카로운 통찰력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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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의 문제 제기:
에드워즈가 다룬 여러가지 양태의 위선은 모두 그가 당시 교인들의 삶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것을 볼 때에 18세기 중엽의 미국인은 오늘날의 한국인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고까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이들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이 부분은 수치문화(체면문화)로 말미암아 쉽게 위선으로 흐를 수 있는 문화적 겸손에 익숙한 한국사람들이 깊이 고민해야 할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개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진정한 자기의식(자긍심)이 부족하다. (정리자는 문화적 겸손에서 오는 위선을 모두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문화든지 일정량의 위선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진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자는, 문화적 겸손을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모든 거짓을 버려야 하며 진짜로 겸손해져야 한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거짓이며 무엇이 진실인지를 구분하기가 매우 어렵다.)
이들 대부분은 자기의식을 자신의 존재에서 찾기 보다는, 자신이 속해 있는 단체(대형교회, 유명한 목사 교회, 독특한 교회 – 일반교회를 비판하고 무시하는 이단, 동우회, 클럽)에서나 재산, 혹은 명성에서 찾는다. 따라서 이들은 신앙을 갖게 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전적으로 가증하다는 의식이 결여되어 있으므로 복음적 겸손을 갖기가 어렵다. 큰 교회 교인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또한 대부분의 이단은 자기 단체 만에 구원이 있다고 하거나, 자기 단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구원이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대단한 (집단적) 자기의식을 가진다. 그러나 그 집단에 속해 있을 때만 유효했던 그들의 자기의식으로 인해, 이들이 집단을 빠져나오게 되면 심한 정체성 위기를 갖는다.
이들의 특징은, 속은 매우 교만하지만, 겉으로는 매우 겸손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섬긴다, 끝까지 사랑한다, 무익한 종 등의 용어를 자주 사용하므로, 자신이 실제로 겸손하다고 착각하게 된다. 이들 중에서는 인간적으로 겸손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왜냐하면 단체에서 그렇게 훈련을 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원을 자기들 마음대로 사용하기 위해 회원을 절대 복종하는 겸손한 자로 훈련시킨다. 이들은 단체를 떠나서는 존재하지 못하므로 단체에 대한 결속력과 충성심이 매우 강하다. 이런 것을 통해 그들의 자부심이 자란다. 따라서 단체 내에서의 개인은 겸손하지만, 단체 외에서는 (영적으로는) 매우 교만하다는 이중적 의식을 가진다. 자신을 복음적 엘리트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들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나는 …년 간을 주와 복음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고…”.
그러나 실상 인간은 그의 죄악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아무도 주와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나이가 먹을수록 죄만 많아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백은 다음과 같아야 한다: “나는 …년 묵은 죄인입니다”(고 박윤선 박사) 이들은 주와 복음을 위해 몸을 바친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기 의”만 키운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복음적 겸손이 자랄 수 있는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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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법적 겸손과 복음적 겸손의 차이
- 율법적인 겸손은 성령님의 일반적인 감화를 통해서 나온다. 성령께서는 자연적(본성적)인 양심을 도우심으로써 그러한 율법적인 겸손을 갖게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너무 교만해져서 사회가 쉽게 망가진다. 하나님께서는 사회를 보존하시기 위해 죄인들에게 율법적인 겸손을 허락하신다)
• 그러나 복음적인 겸손은 성령님의 특별한 감화로부터 나오는 초자연적인 것이다.
- 율법적인 겸손은 사람이 진정한 믿음은 없을지라도 하나님, 또는 신들의 위대하심과 두려운 위엄과 같은 하나님의 완전함을 어느정도 의식할 때 나오게 된다.
• 그러나 복음적인 겸손은 하나님의 도덕적 품격의 말할 수 없이 뛰어난 아름다움을 깨닫는 데서 나온다.
- 율법적 겸손 속에는 하나님의 두려운 위대함과 완전함에 대한 깨달음이 있고, 하나님의 율법의 엄격성에 대한 의식이 있다. 자신이 엄청난 죄인이고, 큰 죄책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합당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이것은 특히 심판날에 그들이 완전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문제는 그들은 죄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정말 흉측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한다. 죄의 혐오스러움도 알지 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도덕적 완전하심을 온전히 발견할 때에만 알 수 있다.
- 율법적인 겸손을 통해서도 양심은 깨우침을 받는다. 그로 인하여 심판 날에 모든 자의 양심이 완전하게 깨우침을 받을 것이다. 이들은 결코 진정한 겸손을 가질 수가 없다.
2) 믿음과 겸손의 관계
a) 겸손이란 자신이 은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임을 믿는 것이다
복음적 겸손의 진수는 은혜의 섭리 안에서 죄악된 피조물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겸양을 갖게 하는 데에 있다. 스스로는 아무것도 아니며 정말 경멸할 만하고 미운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높이려는 성향을 죽이고 자신의 영광을 아낌없이 포기하는 것을 수반한다 “이것은 참된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 안에서 바로 이러한 마음을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구속사와 새언약, 타락한 죄인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섭리도 바로 이러한 겸손을 가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효력이 없는 자들은, 그들이 어떠한 신앙고백을 하든지 그들의 신앙적인 정서가 아무리 높을 것 같을지라도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박국서 2장 4절을 보자: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말의 의미는: “의인은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믿는 것을 기초로 해서 산다. 자신의 선함과 탁월함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니다” 의인은 겸손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b)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치는 성구 중에서 복음적 겸손과 결부된 것
•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시 138:6)
•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사 57:15)
•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3,4)
•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눅 15:18-19)
• “이는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네가 기억하고 놀라고 부끄러워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겔 16:63)
c)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로서의 겸손
겸손은 자기를 부인하는 그리스도인의 의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두 가지의 중요한 의무는:
1)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자기의 마음을 부인하고 모든 세상적인 목적과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2) 자신을 높이려는 본성을 부인하고 자신의 존영과 영예를 포기하며 자신을 비우는 일이다. 즉, 자신의 마음에서 자유함을 얻고 자기 자신을 버리고 죽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적 겸손 안에서 그렇게 할 수 있다. 신앙생활에서 자기부인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이다. 타락한 교회에서는 자기부인을 가르치지만, 주로 지도자에게 순종을 요구할 때 자기부인을 요구한다. 이들은 자기를 부인한 것에 대한 심리적 보상을 지도자나 자기 단체의 위상을 높임으로써 찾는다. 이들은 자기 단체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결코 쉽게 자신의 단체를 떠나지 않는다. 지도자들은 회원들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심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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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 추가
많은 불건전한 교회, 단체의 문제는, 복음에게 가장 중요한 선포인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100% 반대로 왜곡해서 가르친 것이다. 이런 곳에서 믿음을 배운 사람은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종교개혁의 출발은 마틴 루터가 “오직 믿음”이라는 복음을 발견한 것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오직 은혜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이다. 즉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일은 하나도 없으며, 구원을 받은 후에도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은혜로 온다. 우리의 행위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건전한 단체에서는 믿음을 무엇을 달성하는 도구로 본다. 즉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믿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성경에도 있지만, 문맥을 잘 살펴서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이 오해되어 “은혜를 말하는 믿음”이 “도구적 믿음”으로, 즉 무엇을 얻기 위한 수단,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다. 이것이 또한 조용기 목사가 한국의 교회를 타락시킨 하나의 수단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믿음이라는 말을 단체를 키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선교/전도하자! 믿음으로 헌신(헌금)하자! 믿음으로 순종하자! 이러한 구호는 하나님의 역사를 키우자는 대의명분이 있기 때문에 누구라도 쉽게 부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문제는 믿음은 그러한 곳에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믿음이 사용되면 믿음은 “도구적 믿음”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믿음의 장, 히 11을 완전히 반대로 이해한다. 이 거룩한 말씀을 악용하여 믿음을 부추기고 믿음을 갈고 닦으려고 노력하고, 이것에 성공한 사람은 믿음의 영웅으로 추대된다. 그러나 믿음에는 영웅이 없다. 에드워즈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벌레같은 존재이다.
믿음은 우리가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이것이 오직 믿음의 의미이다. 에드워즈의 말을 다시 한번 보자: “의인은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믿는 것을 기초로 해서 산다. 자신의 선함과 탁월함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복음적 겸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교만과 자기 확신을 키워준다.
또한 이들은 “믿음이 가장 중요하므로 도덕(하나님의 거룩한 도덕법)을 뛰어넘는다”고 가르치며 실제로 그렇게 산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도덕법을 뛰어넘을 법은 아무것도 없다. 어떠한 것도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에 반대해서 수행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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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듭나지 않은 자의 겸손의 정체
a) 이들의 한계
거듭나지 않은 자는 더 큰 가치나 목적을 위해 “세상적인 목적과 즐거움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 의와 존영”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속세를 떠난 많은 은둔자들이 세상의 부와 쾌락을 떠났으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을 부인하지 않았다. 야수적인 정욕을 팔아서 마귀적인 정욕을 포식시켰다(좀 더 고상한 욕심을 채웠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코 더 나아진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본성적으로 자기 의를 의지하고 자기 자신을 높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즈는 예로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은둔자들, 엣세네파, 바리새인, 교황주의자, 교황, 이단, 피타고라스 학파, 이교도 철학자. 그 외에 특별한 덕스러운 행동과 내면적 열의를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금욕자들, 강한 율법주의자들(순종 요구, 단체의 규율 복종 요구), 금식과 특별한 기도를 통해 은사를 얻고자 하는 집단 등이다.
b) 이들의 위선
이들은 매우 겸손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이러저러한 훈련을 받아서 먼지처럼 겸손해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평가하는 표현을 쓰는 데 급급하다: “나는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요, 나는 정말 비열한 존재이며, 나는 최소한의 긍휼을 받을 만한 가치도 없고,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실 만한 가치도 없다! 오, 나는 두려우리만큼 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내 마음은 마귀보다 악하다! 아, 저주받은 내 마음이여” 그러나 대부분 그들의 그러한 표현 속에 상한 심령이나 영적 애통의 마음을 전혀 찾을 수 없다. 그들의 품행이나 행실에는 겸손의 형체가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교주들, 이렇게 타락한 교회의 목사들에게는 겸손의 흔적도 없다. 우리는 용어 사용을 조심해야 한다. 자신이 보잘것 없는 자라고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 오히려 이것은 위선으로 들리기 쉽다. 필자는 독일 교회에서 그러한 표현을 들은 적이 없다. 용어 사용보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며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의 악함과 연약함을 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뛰어나고 대단한 성도들로 비치기를 기대한다. 누구든지 그들에게 “당신네들은 오히려 정 반대라”는 식으로 암시한다면 화를 내고 달려든다.
말로는 자기의 마음이 악하고 자신은 매우 부족하여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크게 소리치는 사람이 많다. 마치 자신을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로 여기고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누가 그것을 시인하고, 당신이 부족한 사람이라서 걱정된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c)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적인 교리들과 율법적인 설교를 통렬하게 비난하면서도, 그들은 정작 율법주의자들이다. 율법주의적인 마음이 그들 마음속에서 잠복하고 작용하며, 어떤 때는 득세해서 가장 악랄한 죄를 짓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을 통렬하게 비난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은 성경에도 없는 수많은 율법을 만들어서 율법준수를 강요하고 있다: 주일에 자신의 교회만 방문해야 하는 것, 전도의 의무, 성경공부의 의무, 각종 헌금의 의무… 이들은 율법주의의 극단을 이룬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비우거나 자기 자신의 의나 선함을 비우기는커녕, 율법적인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할지라도, 예를 들어 자기 의나 거룩성, 정서나 체험이나 믿음이나 겸손 중 어느 것이라도 자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율법적인 정신이다(간증 집회, 선교대회에서 바로 이러한 것을 한다. 심지어 주보에도 자기 교회를 자랑한다. 이들은 입만 떼면 자기자랑한다: 우리는 선교사를 000명 파송했다!)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 율법주의에서 나왔다는 것은 에드워즈의 날카로운 통찰이다. 이것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것인데 업적을 중요시 여기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이다. 오직 은혜로!
진정한 영적 생명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체험한 것이나 발견한 것으로 거만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체험하고 이룬 업적을 의로 삼는다. 그가 겸비한 어휘들을 사용하고(섬기는 자, 부족한 종),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고 종용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사용하여 위대한 일을 이루었다는 인상을 줌으로써 결국은 자신이 영광을 받도록 하는 값싼 위선자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82개국 1714명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대외적으로 보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기도할 때에 대단한 용기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선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랑하시고 그분의 의로 자기를 옷 입혀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것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움직이신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의를 크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옥으로 통하는 고속도로 위에 있는 셈이다”
“참으로 스스로 기만당하는 그 가련한 삶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눈에 그처럼 놀랍게 보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소돔에 있는 가장 불결한 짐승보다도 더 괴기한 것이 그들에게도 많은데도 그렇다. 신앙을 위한 어떤 외적인 모습도 없는 소돔의 가장 비열한 짐승만도 못한 점이 많은데도 그렇게 생각한다!”
에드워즈가 이들에게 얼마나 분노를 하고 있는지를 상상하면서 우리도 그러한 분노를 느껴보자. 만약 나도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면, 빨리 그러한 곳을 빠져나오고 하나님 앞에서 깊고 철저한 회개를 해야 한다.
d) 이들은 도덕률 폐기론자이다
어떤 사람들은 행위를 사정없이 깎아내리고, 믿음을 행위와 대비시켜 심하게 높이 추켜세운다. 그리고 자신들이야말로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진정한 복음적인 사람들로 여긴다. 또한 그리스도와 복음과 은혜의 방식을 진보시키는 훌륭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 값없는 은혜의 복음에 가장 크게 대적하는 사람들이며, 순전하고도 겸손한 기독교에 가장 위험한 대적들이다. (믿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오히려 세운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율법을 폐한다.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많은 거짓과 악을 행한다)
이들은 대단한 겸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율법에 대하여 죽고 자신을 비운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다. 자신은 율법의 행위를 완전히 떠났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그들이 바로 자기 의가 가장 강한 사람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을 온전히 비웠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티끌처럼 낮아졌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자신의 겸손의 영광을 거머쥐려고 애쓰고 있으며, 자신을 비하한 것을 대단히 크게 평가하고서 그것을 의지하여 하늘에까지 올라가려고 애쓴다. 이러한 그들의 겸손은 부풀어 오르고 자신에 차 있으며, 겉으로 내세우는 자만하는 겸손에 불과하다.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가 겸손하다고 속게 하고 겸손하다는 것을 과시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영적 교만의 본질인 것 같다.
이것은 정리자가 많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체험한 것이다. 에드워즈가 정말로 날카롭게 관찰했으며, 그의 표현력도 대단하다.
4) 영적 교만의 표증
매우 교활하고도 은밀한 불의인 영적 교만은 일반적으로 대단한 겸손의 모습으로 위장하고 나타난다. 실제로 위선자들은 겸손한 척 하려고 매우 애를 쓴다. 말과 행실에 있어서도 겸손한 표현을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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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자 추가
동양사람에게는 (에드위즈가 영적 교만이라고 표현하는) 그러한 교만이 나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가지며, 오히려 권장할 만한 것이다. 입신양명은 예로부터 삶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것은 큰 죄이므로, 그리스도인이 되면 급진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한국 문화에서는 권력과 재물이 있는 사람은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당연하며, 주위 사람들은 이것을 인정해주고 부러워해야 한다. 하물며 목사나 선교사도 이것을 과시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만명이 모이고, 그들은 모두 순종적이며…, 혹은 나는 5년 만에 100명을 선교했다. 혹은 교인들 끼리도 아들 자랑, 딸 자랑, 출신학교 자랑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신자들이 성경에서 이것을 크게 정죄하고 있는 교만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이것을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의 표시라고 생각하며 자랑한다. 이들은 아무리 성경을 배울지라도 문화적인 선(先)이해(편견)으로 말미암아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다.
박x순 목사는 위선자의 대표격이다. 그는 겉으로는 매우 부드럽고 겸손하다. 그는 많은 신자들의 존경을 받는다. 많은 사람들이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을 비난하자, 그는 대통령 편을 들었다: “4천만을 이끄시는 대통령은 얼마나 힘드실까? 나는 만 명도 안 되는 교인을 이끌기도 힘들다”. 이로써 그는 대통령 편도 들고, 자신이 거의 만명을 이끄는 목사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나는 안 하려고(영광을 안 받으려고) 했는데, 교인들이 강청해서” 큰 영광을 받는 환갑 찬치를 하였다. 이러한 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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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거짓과 영적 교만을 분간하고 구별해 낼 수 있는 보편적이고 확실한 두 가지 표증이 있다.
1. 첫 번째 표증
이들은 자신의 신앙적인 업적을 크게 생각하며, 자신은 엘리트 신앙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항상 가르치려고 한다: 나는 뛰어난 성도요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성도요, 선하고 위대한 체험들을 한다:
•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니”(눅 18:11)
•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라”(사 65:5)
(그러나 아무나 가르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은 교사의 자격을 매우 엄격하게 제한한다. 일반 신자는 단지 복음을 전할 뿐이다)
이들은 이러한 생각에 차 있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다음과 같은 교만한 생각을 하게 된다.
a) 이들은 선생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앙 문제에 있어서 선생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기대한다:
•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롬 2:20)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받은 참신자는 그와 정반대의 성향을 보인다. 겸손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을 더 낫게 생각하게 만든다:
•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자칭 엘리트 신앙인은 자기 밑에 있는 사람에게 죽도록 겸손과 충성을 가르치고, 정작 자신에게는 이 말을 적용하지 않는다. 만약 이 말을 자신과 자기 단체에 적용한다면, 조직이 스스로 와해하기 때문이다. 이들의 생명은 차별화이다.
참신자는, 자신이 선생의 위치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보다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듣고 배우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낸다. 그들은 권위있는 체하지도 않는다. 또 주요한 경영자(목자, 목사, 장로)나 선생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약 3:1)
b) 자신의 체험을 대단하게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체험을 매우 크고 특이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기가 체험했던 일을 거침없이 말한다. “나는 대단히 큰일을 만났다”(신앙간증의 밤). 혹은 “내가 이방인 10명을 선교해서 목자로 세웠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탁월한 성도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은혜를 갖고 있다고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다. 체험의 정도에 따라서 은혜와 거룩함의 정도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정리자가 1990년 대에 시카고 유비에프를 방문했을 때, 벽에 걸려있는 차트에서 성경공부 학생 수의 통계를 본 적이 있다. 그 중에 호세 안 선교사에게는 46명의 학생 이름이 게시되었다. 이것은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 처럼 보였다: „나는 직장인이지만 1:1 학생이 46명이나 지도하고 있다. 나는 일 주일에 46번의 1:1 성경공부를 한다. 나는 믿음의 영웅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직장인이 일 주일에 46명을 1:1로 성경공부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거짓이다. 그는 헌금도 상당히 많이 한다. 어느 수양회가 끝나고 헌금을 한 자와 금액이 목록으로 나왔는데, 그의 이름이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헌신과 겸손함을 나타내지만,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는다. 실제로 그는 많은 UBF 회원의 우상이며 신화와 같은 존재이다. 필자도 그의 영웅담을 수없이 들었다.)
자신이 다른 성도보다 더 거룩한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거룩을 참으로 높게 생각하려는 주제넘음을 나타내어, 결국 그들의 교만의 확실한 증거와 마음의 허망함을 보여 주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자신이 겸손의 영의 영향 아래 있다면, 신앙에서의 그들의 성취는 자신의 눈에 그처럼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을 것이고,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그렇게 크게 찬탄하지 않을 것이다.
참 신자의 겸손:
•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참신자는 자기의 은혜와 선함이 적으며 자신이 크게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거룩함도 매우 작게 여겨진다.
• 은혜가 더해질수록 그 시야가 아주 먼 곳까지 넓혀지게 되어, 결국 영혼은 그 바라보는 대상의 광대함에 몰입된다. 그리고 천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속주를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지를 깨닫는다. 또한 자기의 사랑이 얼마나 무가치하고도 적은지를 생각하고 깜짝 놀란다. 그가 이해하는 것이 많을수록 자기의 은혜와 사랑이 적다는 것이 이상하고 놀랍게 여겨진다.
• 자신의 영적 무지와 사랑의 결핍에 대하여 크게 탄식하게 만들고, 더 많은 지식과 사랑을 위하여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추구한다.
• 자기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으므로, 자기의 은혜가 작다는 것을 발견할 뿐 아니라 자기 속에 남아 있는 부패가 너무나 크다는 것도 알게 된다.
• 모든 죄마다 그 속에 무한한 부족함과 혐오스러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산다.
• 성도의 가장 큰 성취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에 거하고 있으므로 그 하나님을 뵙기 때문에, 그 성취가 아주 작게 보인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자기가 탁월한 성도요, 특별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본 적이 없는 사람이며, 그 안에 성령님께서 거하지 않는 사람이다. 탁월한 성도가 아니라 거만하고 자기 의로 가득 찬 정신에 지배당하는 사람이다.
2. 두 번째 표증
영적 교만의 첫 번째 표증은 자신의 신앙적인 업적을 크게 생각하는 것이고(나는 …했다), 두 번째 표증은 자기의 겸손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a) 거짓된 체험은 보통 가식적인 겸손을 수반한다. 가식적 겸손은 거짓된 체험들 때문에 스스로 우쭐하게 만드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거짓된 체험이란, 과거에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으로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가르치는 등, 하나님 나라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망상이다)
거짓된 신앙적 정서가 대단히 높은 지점에 이르게 될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대단히 겸손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러한 방면에서 자신이 성취한 업적을 대단히 크게 주목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스스로 감탄하도록 만든다.
b) 교만한 사람은, 정리자가 예를 들자면, 자신이 99점 정도의 믿음과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이 50점 정도만 갖춘 것으로 낮추어 상대방에게 표현했을 때, 스스로 자신을 겸손하다고 생각한다. 즉 자신의 존귀함을 낮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과대망상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동료들에게 상당히 겸손하다는 칭찬을 듣는다.
그러나 참다운 신자는 자신이 0점이라고 생각하므로, 자신을 낮출지라도 결코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항상 겸손하려고 애를 쓴다. (우리가 교회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칭찬해 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상대방을 병들게 할 수 있음을 명심하라. 그뿐만 아니라 자신도 병든다. 신자가 아니더라도 정상적인 유럽사람은 그러한 칭찬을 역겨워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타인을 인정하는 것과, 상대방이 자신에게 한 호의에 감사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c) 참신자가 자신을 작게 생각하는 이유
참신자의 마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들어와 계시다. 그분을 생각하면 자신이 얼마나 낮은 자인가를 깨닫는다. 그는 자신이 도달해야 할 목표가 얼마나 높은지를 깨닫고 겸비해진다. 더구나 자신 안에 있는 죄를 생각할 때에 교만해질 수가 없다.
이들은 자신을 훌륭하다고 높여주는 사람을 불편하게 여길 것이다. 신자는 훌륭할수록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많이 깨닫고, 또한 자신의 죄악을 깊이 깨닫게 되므로, 이들이 교만해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d) 겸손한 자는 낮은 자리에 앉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남을 높인다. 질책을 조용히 듣는다.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부당한 대우에도 참는다. 무시를 당해도 억울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쉽게 가르침에 복종한다. 자기 말에 주의를 끌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자기가 멋지다는 인상을 심으려고 하지 않는다. 겸손은 일종의 거룩한 무기력이다 (마스트리히트). 은혜로운 정서를 가진 사람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문 앞에 있는 불쌍한 거지와 같이 지극히 배고프고 궁핍하다.
e) 어떤 사람들은 교만하여 외적인 행동과 모습에 있어서 대단한 척하면서도 큰 겸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꾸민다. 이들은 큰일(남에게 과시하는 일)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항상 하는 말은 “내가 한 일은 하나도 없다.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셨다” 이것은 자기가 한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만들었으므로 신성모독죄까지 겹친다)
•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감당하지 못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시 131:1)
f)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운 겸비함과 두려움이 겸손으로부터 나온다.
•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엡 6:5)
이들은 어린아이와 같이 성도들이 아닌 자들에게도 그들의 죄를 찬동하는 것이 아닌 모든 면에서 공경하는 마음을 가진다.
• “아브라함이 일어나 그 땅 주민 헷 족속을 향하여 몸을 굽히고”(창 23:7)
정리자 결언:
독자는 이제 교만과 위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배웠으리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문화가 오히려 교만을 권장하므로, 우리는 실제로 교만하면서 자신은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교만한 자는, 자신은 영광을 받겠지만 형제들을 슬프게 만들고, 하늘 나라를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라는 것을 명심하여, 우리는 사고를 바꾸어 교만을 교회와 믿음 생활에서 쫓아내어야 한다. 한국교회는 교회성장, 선교지상주의, 혹은 복지복음으로 신자의 교만과 허영을 최고로 부추긴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인,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벌레와 같이 징그러운 존재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
첫댓글 아,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요즘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못들어 오는데 들통나버렸네요.^^
나중에 자세히 읽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