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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들의 얼굴에 수만 감정이 교차하며 나타났다. 모두 놀랍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느 누구도 장영실을 깔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임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경들이 보는 바와 같이 이렇게 자격루를 만들었는데 비록 짐의 가르침을 받아서 만들었소만 장 사직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것이오. 장 사직은 내가 한 가지를 말하면 열을 받아들이는 사람이오. 내가 생각하면 장 사직은 눈앞에 그 실물을 보여 주오. 지금 경들이 보는 것처럼 말이오.”
대신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임금은 옥음을 이어 나갔다.
“내 아는 바로 원나라 순제 때에 저절로 울리는 물시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소. 하나 그 정교함이 장 사직의 정교함에는 미치지 못하는 걸로 알고 있소. 이제 우리 조선의 시간이 만들어졌소이다. 길이 만대에 전할 이 위대한 기물을 만든 장 사직이 공이 크므로 호군의 관직을 더해 주고자 하는 바이오.”
파격이었다. 관노 출신 장영실이 정4품 호군에 이름을 올린 순간이었다.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했다.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장영실이 해냈고 임금은 호군으로 화답했다.
- 송재찬(동화작가, 소설가)
동화작가, 소설가
제주도 출생.
서울교육대학교 졸업.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 「찬란한 믿음」 당선.
동화집 『무서운 학교 무서운 아이들』, 『돌아온 진돗개 백구』, 『주인 없는 구두 가게』, 『노래하며 우는 새』, 『비밀족보』, 『우리 다시 만날 때』, 『홍다미는 싸움닭』, 『새엄마는 허웅아기』, 청소년소설집 『비밀에 갇힌 영혼』, 『전봉준-지지 않는 녹두꽃』 외 출간.
세종아동문학상, 이주홍 아동문학상, 소천문학상, 방정환문학상, 박홍근문학상 수상.
목차
책 속으로
이웃사촌들끼리도 자리를 뜨자 공터에는 장영실 혼자 남았다. 그는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집에 가 봐야 어머니는 일을 나가고 없다. 어머니의 일. 관기의 일. 장영실은 어리지만 어렴풋이 그 일이 떳떳하지 못한 일이며 사람들의 질시를 받는 일임을 알았다. 조금 전만 해도 범이가 깨우쳐 준 그 일. 어머니의 일은 관기의 일이었다. 그 일을 떠올리면 매번 기운이 빠졌다.
장영실은 물로 씻긴 너럭바위 위에 누웠다. 하늘 복판에 있던 해가 움직이며 다시 그림자를 늘여 나갔고 더욱 뜨거워졌지만 너럭바위는 그늘 넓은 후박나무 밑이어서 서늘했다.
아버지……. 장영실은 입술을 깨물며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말을 꿀꺽 삼켰다. 내년이면 관아에 나가 일을 해야 합니다. 어머니가 올해는 실컷 놀라고 했어요. 내년부터는 관아에 나가 죽도록 일해야 한다고요. 그런데 아이들이랑 놀다 보면 꼭 관기의 아들 영실이가……. 하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와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주저앉고 싶고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어요. 눈으로 물기가 차올랐다. 장영실은 누가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주먹으로 눈을 문질렀다.
“영실아!”
장영실은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아까 그 사내였다. 웃음기 가득하던 좀 전의 얼굴이 아니고 심각한 얼굴로 장영실을 보았다. 이 사람이 언제 다시 이리로 온 것일까?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었나? 떠나간 줄 알았던 그가 저쪽 보릿짚 낟가리 뒤에 숨듯이 지켜보고 있다가 그림자처럼 걸어온 것을 장영실은 모른다.
- 18~19쪽
장영실이 어둠 속에서 말을 더듬었다.
“나도 자네나 다름없는 노비의 아들로 태어났다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었어. 다행히 현령 덕에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네만. 난 자네가 내 곁에서 지냈으면 좋겠네. 내 자신을 위해서는 현령에게 아무것도 부탁하지 않았네만 내, 자네를 위해서라면 말을 꺼내 보겠네. 어떤가? 면천되어 연지의 짝이 되어 주지 않겠나? 오늘 낮에 자네와 이야기하는 연지를 보니 그렇게 행복해 보이더군. 그런 모습은 첨이네. 어미를 일찍 잃고 부족한 아비를 보살피느라 고생만 한 아이라네. 어떤가, 내가 현령에게 부탁해도 되겠는가?”
“저 같은 게 어찌 연지 아가씨 같은 분을……. 어르신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습니다. 저에게 말미를 주십시오.”
“그러세.”
“저 어르신……. 현령 나리께 제가 자주 여기 올 수 있도록, 무슨 통기 할 것이 있으면 제가 맡을 수 있도록 해 주실 수 있을는지요?”
“고맙네. 내 그리 서찰을 써 주겠네. 어서 자게나.”
장영실은 가슴이 쿵쾅거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마음을 휘몰아치는 태풍. 그러나 내가 어찌……. 갑자기 찾아온 태풍은 그를 뜬 눈으로 새우게 했다.
해가 돋기도 전에 장영실은 뒤란으로 가 항아리에 흘러내리는 물을 살폈다. 물은 어느새 투명하게 맑아져 고운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항아리에 고인 물을 다 버리고 다시 깨끗이 씻어내어 흙탕이 아닌 물로 채우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 샘에도 가 보았다. 샘은 두 사람이 넉넉하게 사용할 수 있는 규모로 맑게 고이며 밑으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54~55쪽
태조 5년 12월 7일 태조는 직접 종루에 납시어 새로 주조한 종을 보았다.
“어디, 울리어 보라.”
어명이 내려졌고 종소리는 은은하면서도 강렬하게 도성으로 퍼져 나갔다. 이 종소리는 조선을 상징하는 소리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미 나라의 표준시가 있어서 그에 맞추어 나라의 시간을 통제한다 들었다. 그래서 대국이 광활한데도 통제가 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제 이 종소리를 표 삼아 조선의 시간을 운영하려 한다. 중국에서는 물시계를 보고 종을 울리고 북을 울린다지? 이제 조선도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
태조 7년 윤5월 10일 종루에 물시계 경루가 설치되었다. 종루 가까이 금루방(禁漏房)을 신설하고 종을 울리는 일과 경루의 관리를 관장하게 했다. 조선 최초의 표준시가 종소리로 울려 나갔다. 장영실도 운종가 종루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일과를 시작했다.
장영실은 경루를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경루 제작 초기 도면을 보면 경루가 어떤 모양일지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도면의 평면이 입체적인 물체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대감은 여전히 말이 없이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기만 했다.
장영실은 도면대로 목재를 자르고 다시 못을 박으며 이 경루라는 게 어떤 원리로 물시계의 역할을 하는 지를 궁리해 보았다, 물을 채우지 않았지만 어떤 이치로 시간을 재는 지를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물의 증가나 감소를 이용하여 시간을 측정했을 것이다.
장영실이 일을 마치고 쓰다 남은 재료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세자 저하 납시오!’ 하는 내관 소리가 문밖에서 들리고 문이 열림과 동시에 충녕이 들어섰다.
장영실은 고개를 숙이고 세자를 맞이했다. 정초 대감이 ‘세자 저하, 어서 오십시오. 일이 끝났습니다.’ 하고 보고 하듯이 아뢰었다. 충녕은 장영실이 만든 나무통들을 만족한 듯이 살피더니 두 대감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기대 이상이지 않은가’ 하는 눈빛이었다. 두 대감도 고개를 끄덕였다.
-89~90쪽
임금은 즉위 2년인 1420년에 경복궁에 관측대인 첨성대를 세우고 사람을 끌어모아 천문관들이 하늘을 살피는 일을 독려했다. 즉위하며 마음에 품었던 천문 사업의 출발이었다. 임금은 가까이서 부리던 천문에 능통한 선비 넷을 서울에서 가까운 고을에 수령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임금의 필요할 때 불러서 천문을 연구하게 하고 하늘의 움직임을 관찰하게 하기 위한 물밑 작업이었다.
“전하, 아니 되옵니다. 그런 보잘 것 자들에게 그런 막중한 자리를 주다니요.”
“그렇습니다. 전하. 고을 수령이라니요. 그런 하찮은 자들이 앉은 자리가 아닌 줄 사료됩니다.”
“상왕 전하께서도 반대하실 게 분명합니다.”
문신들이 임금의 아픈 곳을 급습하며 반대하며 나섰다. 새 임금은 임금이되 더 높은 임금은 상왕 태종이었다.
“지금 뭐라 했소? 지금 상왕 전하와 과인을 이간질하려 드는 게요?”
문신들은 철렁했다. 상왕과 금상의 이간질. 그것은 강상인 사건 때 상왕이 분노하여 내지른 말이었다. 그 일로 임금의 장인 심온까지 사약을 받은 일을 문신들은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불과 지난해 일이었다.
“상왕께서 왜 반대하실지 누가 이야기해 보시오.”
임금은 싸늘하게 물었고 소리를 높였던 문신들은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다.
“지금 가뭄이 계속되어 백성들은 하늘만 바라보는데 경들은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무슨 일을 했소? 과인은 ‘왜 이리 가뭄이 드는가? 하늘의 뜻은 무엇인가?’ 하며 하늘을 보며 읍하고 있소. 하늘이 원하는 정치를 하려고, 하늘의 뜻을 알려고, 하늘의 질타에 뭐라고 응답해야 할지 늘 전전긍긍하고 있소. 과인의 귀에는 가뭄은 나라님 탓이다, 하며 원망하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이 쟁쟁하게 들리오. 태조께서도 하늘의 뜻을 구하며 천상열차분야지도를 석각한 까닭이 무엇인지 잊었소? 그 탁본을 박제처럼 보관만 하고 그 정신은 죽여서 박제시켰소? 경들이 반대하는 이 사람들은 나와 같은 정신으로 하늘을 우러러보는 이들이오. 보잘것없는 하찮은 자라고? 절대 그렇지 않소. 내 맘 같아서는 궁에서 떨어진 고을 수령이 아니라 이 궁에 불러들여 같이 하늘을 보고 싶은 마음이오. 그만큼 하늘의 뜻을 아는 게 시급한 때요. 경들이 편안한 밤을 보낼 때도 이들은 몸에서 띠도 풀지 못하고 하늘을 보며 나와 같이 고뇌한 사람들이오. 잠도 자지 못하면서 나를 도운 사람들이오. 하늘을 알지 못하면 조선은 크게 되지 못할 것이오.”
임금은 말을 끊고 문신들을 노려보았다. 문신들은 그 매서운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고개를 깊이 숙였다.
-112~114쪽
“저는 우선 거리 구경을 좀 하겠습니다.”
장영실은 천천히 거리를 걸으며 좌우 사방을 살펴보았다. 고서점만이 아니라 자화(字畫)ㆍ금석(金石)ㆍ문방사우를 준비한 점포들이 즐비했다.
장영실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고서점인 천년재(千年齋)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볼 때보다 규모가 더 큽니다. 서책도 잘 정리되어 있고요.”
장영실이 놀란 얼굴로 서가들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머리도 수염도 허옇게 늘어뜨린 노인이 웃음 띤 얼굴로 장영실을 맞았다. 늘어뜨린 머리와 수염 때문에 나이 든 얼굴도 허옇게 빛나고 있었다. 고서점 주인인 듯했다. 점원인 듯한 젊은이가 저쪽 구석에서 서책을 정리하는 게 보였다. 서점을 찾는 손님은 주인이 상대하고 허드렛일이나 서책 정리는 젊은이가 하는 듯했다.
“저희 천년재는 4대째 이어온 자랑스러운 고서점입니다. 웬만한 책은 다 있습니다. 어떤 책을 찾으시는지?”
노인은 몸에 밴 친절로 장영실을 대했다.
“저는 천문에 관한 책을 보고 싶습니다.”
장영실도 예를 다해 대답했다.
“저쪽, 오른쪽 서가 네 번째가 천문에 관한 서가입니다. 잘 오셨어요. 우리 천년재에는 천문 서책들이 다른 서점들보다 더 많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저기 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차도 마시고 천천히 구경하십시오.”
“네, 감사합니다.”
천년재는 넓기 때문에 여기저기에 찻주전자와 잔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160~161쪽
기본정보
ISBN발행(출시)
9791198502827 | ||
2024년 10월 31일 | ||
352쪽 | ||
148 * 209 * 25 mm / 580 g판형알림 | ||
1권 | ||
한국의 과학자 시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