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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 합니다
간결하고 세련된 수필을 잘 쓰시는
이봉길 선생님께서 산뜻한 정월에
첫 수필집을 출간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일을 하신 선생님께
축하의 꽃다발을 드리며,
님의 글 속으로 가만가만 들어가 봅니다.
저는 수필집 『야간비행』을 받고
먼저 작가와 많은 시간을 함께해 온
비행기와 관련된 수필부터 읽었습니다.
바퀴가 지면을 뜨자 어둠 속으로 온몸이 쑥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돌아올 수 있을까?"
야간비행은 달이 없는 그믐밤이 제격이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지상의 그 무엇과도 닿지 않는 나만의 세상을 만날 수 있어 좋다. 헤어날 수 없는 어둠 속에 영영 갇혀버릴 것 같은 두려움도 잠깐, 어둠이 주는 편안함은 다시 인간이 만들어 낸 빛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
내게도 이 시간 잠들지 못하고 나를 걱정하고 돌아오기를 고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밤 지상에서 같은 별을 보고 있을 그들을 위해, 빛과 그림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갈 시간이 기다려진다. 『야간비행』
작가는 어둠을 검은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야간비행은 어둠 속을 날고 있으나, 밝은 곳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 글에서는 비행기를 함께 탄 듯 실감이 나는 표현이 압권이지만 위와 같은 자신의 심리상태가 드러나는 부분도 공감을 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돌아올 수 있을까?"
"계기를 믿어야지."
나와는 별개의 세계에 사는 듯, 멋있게만 느껴지는 조종사들에게 순간적이지만 이런 마음의 갈등이 있다는 것에 갑자기 그가 친밀하게 여겨져서
"그럼요. 꼭 돌아오십니다." 하며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다락방은 사춘기에 어머니를 잃은 슬픔과 외로움에 어쩔 줄 몰랐던 나를 감싸 주었던 은신처였다. 마치 카프카의 변신에서처럼 자신이 작게 느껴졌고, 구석진 다락방에 몸을 숨기고 바깥세상으로 나오기가 싫었다. 작은 창을 통해 별들이 만들어내는 어머니 모습을 바라보며 슬픔을 이기고 외로움을 달랠 수 있었다. 하지만 네모난 창틀 속에 갇힌 바다와 하늘은 나를 더 넓은 곳 더 높은 곳을 찾아 나서게 하는 심한 갈증을 가져다주기도 했다. 「다락방 창」
'창작수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글에선 사춘기에 어머니를 잃고 외로움을 삭이기 어려웠던 소년의 모습이 느껴져 마음이 아주 아팠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울기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작은 다락방 창을 통해서지만 바다를, 넓은 곳을 향한 꿈을 키웠고, 결국 비행기를 통해 자신이 어릴 적 가졌던 꿈 일부를 이룹니다. 그렇게 태평양 대서양을 넘어다니면서도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에서는 아직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오죽하면 남태평양과 온 하늘을 다 마셔 버리고 싶은 목마름이라 했을까요.
오솔길을 더듬어 올라가는데, 저만치 눈앞에 황금빛 달덩이가 땅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달덩이 앞에 오체투지 하듯 엎드렸다. 캄캄한 솔밭 속에 배꼽처럼 하늘이 뚫린 능 자리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고, 누런 잔디 위로 달빛이 내리고 있었다. 어디서 이렇게도 적막한 아름다움을 찾을 수가 있을까. 「선덕여왕릉」
이 표현을 읽으며 저는 전율했습니다. 숨이 콱 막혔지요.
저도 선덕여왕릉을 보았지만 저런 감동을 느끼진 못했습니다. 작가는 선덕여왕과 전생에 깊은 인연이라도 있는 듯합니다. 여왕을 사모하여 잠도 자지 않고 밥도 먹지 않았다던 지귀(志鬼)의 환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더군요. 황룡사에 불공을 드리러 온 여왕을 뵙고자 기다리다, 막상 여왕이 그 앞을 지날 때 잠들어 팔지만 받았다던 그 지귀 말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표현이 나올는지….
태양의 도시 로마, 로마는 남성의 도시다 <.....> 그 땅의 남성적이고 넘치는 기운에 대하여 자연의 밸런스‚ 즉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음양(陰陽)의 조화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긴 수로를 건설하여 도시 외곽 먼 곳에서 물을 끌어들여, 당시 150만 인구의 용수를 공급하고 광장마다 분수를 쏘아 올려, 그 땅의 뜨거운 기운을 식혀 양(陽)의 기운을 다스리고자 했던 게 아닐까. <......> 경주, 그 땅에 들어서면 포근한 여성을 느끼게 한다. 「서라벌과 로마」
동·서양의 두 도시를 연결하여 풍수로 풀어본, 수필로 남이 잘 다루지 않는 소재인데다 읽을수록 꼭 그렇다는 생각이 들도록 설득력 있게 쓰인 수필입니다.
무덤이 많은 경주와 분수가 많은 로마. 그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다가, 나중에는 서로 교역한 흔적까지 찾아 보여줍니다. 말미를 "멋진 남성의 도시 로마가 동양의 예쁜 여성의 도시 서라벌에 아름다운 보석과 목걸이를 걸어주었다고 말하고 싶다."며 도시를 인격화하셨네요. 정말 멋집니다.
고양이는 야행성이다. 집고양이는 밤새 선잠을 자거나 혀로 털을 고르는 글루밍을 하다가 새벽잠을 즐긴다. 내가 일어나는 새벽 다섯 시 반은 마고가 잠에 빠져 있는 시간인데, 한방에서 잠자는 마고도 어쩔 수 없이 나를 따라 부스스 일어난다. 그러던 어느 날 마고가 먼저 나를 깨우기 시작했다. 네 시쯤이다. 목에서 가릉 가릉 소리를 내며 앞발로 내 어깨나 가슴을 두드린다. 내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배 위에 올라와 앉기도 한다. <......>
내가 자기의 단잠을 깨우는데 대한 보복이 틀림없다. <......>
당분간 마고가 좋아하는 치즈나 살라미를 주지 않아야겠다. 이번엔 내가 놈에게 보복할 차례다. 「고양이는 겁쟁이」
참 재미있습니다. 포도주를 좋아하는 작가는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와인의 이름을 고양이에게 붙여주고 그를 귀여워하며 교감합니다. 그가 고양이 이야기를 할 때 보면 어찌나 진지한지, 마고를 그냥 애완동물이 아닌 인격체로 대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고양이는 배가 고파도 절대 비굴하지 않고, 거만하게 가져다 주는 것을 먹으며, 강아지처럼 주인에게 무조건 순종하지도 않는다네요. 받은 만큼만 정을 주는 자존심이 있어서 좋다고 하십니다. ㅎㅎㅎ.
대청마루에서 천정을 올려다보면 대들보 위에 지붕의 용마루가 만들어내는 삼각형의 터널 같은 공간이 보인다. 이런 형태는 집안에 우주 에너지를 끌어들여 생체 에너지와 우리 몸의 기를 활성화시켜 준다고 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대청마루에 모여 밥을 먹고 쉬기도 하며, 일감을 들고 와 이야기를 나누는 등 집안에서 생활의 중심 공간으로 썼나 보다. 「기와 뒤집기」
어려서 대청마루가 있는 집에 잠깐 산 적이 있어도 몰랐던 부분이네요. 천정의 대들보와 석가래 사이, 거기 우주 에너지를 끌어들여 기를 활성화 시켜주는 삼각형 터널이 있었던가요? 이런 새로운 얘길 듣는 것만도 기분이 좋습니다. 전통 한옥에 가면 살펴 볼 곳이 하나 더 생긴 것 같고, 기와를 뒤집는 나와는 전혀 생소한 이야기가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작가의 자상한 소개 덕입니다.
얼음꽃이다.
얼음꽃을 꽃으로 본 잠깐은 황홀했다. 아름다웠다. 그 다음은 아팠다. 우수를 지나고 내일이 경칩인데 나무마다 가지마다 얼음 옷을 입고 있다. 겨우내 눈바람에 시달리며 산봉우리에서 목 빼고 기다렸던 봄이 왔건만 3월에 들어서 형벌처럼 두꺼운 얼음 옷을 껴입어야한다니. 계절의 시작과 끝은 늘 이렇게 예기치 못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
사람들은 떠날 줄 모르고 얼음꽃이 만발한 산봉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누구에게나 얼음꽃 같은 아픔이, 힘겨움이 매달려 있다는 것을.「얼음꽃」
작가는 사물의 겉만 보지 않습니다. 그 주변을 보고 사물의 내면을 봅니다. 그러다 그것들이 곧바로 자신의 내면과 연결되는군요. 얼음꽃이 얼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결국은 내 마음이 추워서 누구에게나 아픔과 힘겨움이 있어 보이는 것이지요. 그래서 얼음꽃이 꽃으로 보다는 형벌로 보이는 지도 모릅니다.
바위에 몸을 붙이고 가야 하는 비탈길이거나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벼랑길인데, 자칫 공룡이 기지개라도 킬라치면 천 길 낭떠러지 천불동 계곡으로 성냥개비처럼 튕겨 나갈 것만 같다. 삶의 고비마다 한시름 놓기가 바쁘게 또 다른 시험대가 기다리고 있는, 때로는 곡예를 하듯 살아가야 하는 세상사와 같다고나 할까. 「공룡능선 1275봉에 서서」
여기 다 인용하진 않았지만 실감 나는 표현이 많은 글입니다. 작가는 바위를 파도로 보기도 하고 칼날로도 봅니다. 더구나 그것들이 살아서 유연하게 움직이기까지 합니다. 그가 본 공룡능선이 내 눈앞에서 꿈틀거리니, 덜컥 겁이 납니다. 혹여 바위를 잡은 손을 놓쳐 낭떠러지로 튕겨 나갈까 조마조마하군요. 아무래도 작가는 독자를 놀라게 하는데 재미를 붙인 모양입니다.
정장을 하면 넥타이와 얼굴이 마치 화병에 꽂힌 꽃처럼 한 세트가 된다. 여성들은 목걸이나 귀걸이, 브로치 등의 액세서리로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거나 돋보이게도 한다지만, 남자는 넥타이뿐이다. 얼굴과 넥타이가 매치되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든다. 넥타이의 색상과 무늬, 맨 길이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상도 달라진다. 「넥타이를 다시 매면서」
저는 한 번도 넥타이를 맨 남성을 화병이 꽂힌 꽃으로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작가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요? 여성도 아닌 남성이 꽃으로 보이다니, 상상력도 풍부합니다. 글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였어요. "맞아. 그렇구나. 남성에게는 넥타이가 포인트가 되는구나." 그러고 보면 요즘 젊은 남성들이 귀고리 목걸이로 치장하는 것도 그런 맥락인가 싶기도 합니다.
나는 동생에게 장화를 신기고 겉옷을 입혀서 손을 잡고 데리고 나갔다.
기다리던 아버지가 전차에서 내리시면 동생은 빗속으로 아버지를 부르며 찻길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빗물이 흘러내리는 얼굴에 미소를 띠시며 기다리는 우리를 나무라셨다.
“추운데 뭐할라꼬 기다리노.”
그리고는 동생을 텁석 안으시고 동생의 발갛게 얼은 뺨에 수염이 꺼칠한 볼을 부비셨다.「비가 오는데」
이미지가 눈앞에 축축하게 그려집니다. 그가 쓰는 가족의 이야기에는 저릿한 아픔과 그리움이 담겨있어요. 여기서도 동생에 대한 따듯한 사랑이 자연스레 드러납니다. 비 내리는 날 아버지 마중을 나가면서도 그냥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고 쓰면 되는데, ‘장화를 신기고 겉옷을 입혀서 손을 잡고’ 나갔다고 쓰고 있군요. 우리가 갖고 싶은 오빠의 심성이지요.
아버지를 부르며 찻길로 뛰어드는 여동생, 어린 딸의 언 뺨에 꺼칠한 볼을 부비는 아버지, 우산을 높이 받쳐 드는 아들, 평범한 모습인데도 가슴이 먹먹한 것이 시린 물줄기가 가슴 한복판으로 흘러내립니다.
손으로 음식을 먹는 순간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 아니, 내가 달라진 것이다. 몇 번은 어색했지만 내 손으로 직접 먹는 것이 금속 숟가락을 쥐는 것보다 쉽고 편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그들과 마주보고 웃으며 서로 마음을 열었다. 우리네 삶과 무엇이 다른가? 여태까지 나는 이 땅에서 무엇을 찾았고 무엇을 구하러 다녔던가? 「인도 속으로」
우리는 늘 자신의 잣대로 세상을 봅니다. 인도 여행을 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그 나라 모습을 보기보다는 자신이 지닌 편견으로 봅니다. 그러다 작가는 어느 순간 편견에서 벗어나 그들 속에 섞인 자신을 발견하며 깨닫습니다. 나를 버림으로써 너를, 또는 그를 얻게 된다는 것을. 이래서 여행은 할만한 것인가 봅니다.
그는 하루 종일 시장 바닥에 앉아서 북적이는 사람들을 보면 사는 맛이 난다고 했다. 특히 오후에 이웃 사람들이 들려서 서로 인사를 나눌 때는 그 어느 때보다 기분이 좋다고 한다. 또 건너편에 우뚝 선 종려나무 이파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는 즐거움도 크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지금 이 양파를 한꺼번에 다 팔고 나면 오늘 하루 그의 인생도 사라지고 만다고. 「양파 파는 노인」
작가는 늘 바쁘게 살았답니다. 야간비행을 하면서 시차에 시달리고, 돌아와 피로를 풀기도 전에 다음 비행을 나가야 했다고 하네요. 그 생활이 끝나고 나니 노후대책을 생각해야 할 나이가 되어 허무를 느낍니다. 자신만을 위한 생활이 시작될 무렵 돌아보니 젊음은 가고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 시점에서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이후의 삶의 방향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작가는 '양파 파는 노인의 일화'를 생각 하는군요. 그는 주변의 어떤 유익한 것보다도 마음의 여유로움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간파해 냅니다. 그래서 소설이나 시가 아닌 수필을 쓰며 산을 찾고 바위에 기대며 삽니다.
바위는 조용하다. 말없이 내 마음을 흔들고 가슴이 벅차오르게 만든다. 바위는 변함이 없다.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나는 바위처럼 변함없는 사람이 좋다. 좋아하는 임의 마음도 바위만 같았으면…. 「수락산 바위」
저자는 바위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상의 닉네임도 ‘엄지바우’지요. 그가 바위를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글에 나오지만, 바로 위에 인용한 글이 그것을 요약한 말일 것입니다.
바위를 좋아하고, 바위처럼 변함없는 사람을 좋아하고, 자신도 바위이기를 바라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 내면에 수맥을 품듯 다정함과 섬세함을 지닌 이봉길 선생님의 수필집 출간에 박수를 드립니다.
남은 이야기는 수필집에서 차근차근 읽으시길 권해 드립니다.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싸늘한 겨울철에는
집안에서 창밖에 내리는 눈발을 보며
[야간비행]같은 좋은 수필집을 읽는 것도
멋진 일이라는 생각이듭니다.
겨울이 깊었으니 이제 곧 봄이옵니다.
그때가 되며 보문산 장대루에도 철쭉이 만발하겠지요. 그때까지 문우여러분,
건강하고 다복하십시요.
2013.정월
봄비, 권예자 드림.
첫댓글 축하드립니다. 야간비행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고, 우리의 열정적 기획연구소 봄비님의 펼침이주는 잔잔한 기쁨은 창작수필의 자랑이고 금요해바라기의 경사입니다. 오교수님이 묶어진 우정에 감사드리며 파란 창문과 여행지사진들 멋있습니다. 음악도 좋아서 행복하네요.
ㅎㅎㅎ 기획연구소.
표현이 재미 있고 감사합니다.
젊을 때는 초록바다에 푹 빠지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초록의 산야에 들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엄지바우님의 첫 수필집 출간을 축하드립니다.
엄지바우님의 글과 봄비님의 예리하면서도 애정어린 독후감이 행복하게 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는 왜 좋은 글을 보면 참지를 못하는가?
참 병이지요? 그래도 좋은 작가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글보다 독후감이 더 빛나고 멋집니다. 들미소님의 축하 고맙습니다^^~^
좋은 글과 자근자근한 글 솜씨와 정감어린 노래~~~ 한참 빠져 들었습니다. 첫 수필집 탄생을 축하드리고요, 봄비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감사에 감사합니다.
일곱송이 수선화는 제가 좋아하는 노래지요.
엄지바우님, '야간비행'하듯 출발지를 떠난 지 10년만에 목적지에 안착하셨음을, 동기생의 한 사람으로서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어려운 야간비행을 마쳤으니 이제부터는 '주간비행'으로 순항하시길. 권예자 선생님, 수고 많았습니다.
뜬구름님 감사합니다. 좋은 글 멋진 수필집을 많이 내신 선생님께 늘 배우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주간비행에서 뵙겠습니다^*^
별로 읽을거리가 없었던 차에 《야간비행》에 푹 빠지게 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두 손과 발가락의 엄지와 바위가 만나 닉 네임이 '엄지바우'가 되신 선생님 수필집 출간을 마음 모아 축하합니다.
기쁨 많이 누리시기 바라며 제 2집도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책을 내도 선생님 수필집만은 해야하는데, 졸작을 모아 문고판으로 내고 쑥쓰럽씁니다. 시원찮은 글 보고 엄지바우 넘 흉보기 마시길... 언제 술익는 마을에서 막걸리 한 사발로 책걸이 떼우겠습니다. 입춘추위가 대단합니다. 봄비 내릴 때까지는 따뜻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