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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존 스토트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분으로 꼽히시죠. 이 분이 몇년전에 주님 앞으로 가시기전 마지막 남긴 책이 있어요. Radical disciple이란 제목의 책입니다. 의역을 하면 “철저한 제자”이런 제목인데 한국번역판에는 제자도라고 번역을 했어요. 이 책을 통하여 이 분은 독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그냥 그리스도 인인가 아니면 참 주님의 제자인가?”
여러분 참 주의 제자는 다 그리스도인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다 제자가 아니에요. 물론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제자는 달라요. 주님을 따르되 철저히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 배우고, 주님을 그대로 닮기를 원하고, 또 원하는것 뿐 아니라 주님이 먼저 가신 드 길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들인거에요. 분명히 다른 것입니다.
저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게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과연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하는거에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의 단계를 넘어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세요.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하시는것입니다. 그것을 기뻐 하시는거에요. 그 분이 가신길을 기쁨으로 가기를 소망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궁극적인 자기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에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것이고 그것이 구원 받은 성도들이 해야할 구원 그 이후의 삶인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제자로서의 성숙에 대한 말씀을 하세요. 에배소서 4장을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숙의 목표를 주시는데 이렇게 말씀하세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정도로 그렇게 성숙할때까지”………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영적인 면이나, 믿음이나, 삶의 모습이나, 사역의 헌신이나, 그 어느것이든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양에 이를 정도로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쏙 빼 닮는 그런 정도의 제자로서의 목표를 주시는거에요.
그래서 제자란 말이 처음에는 열두제자에게만 쓰이다가 점덤더 범위가 넓어집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도 12제자외에도 자신을 좆는 사람을 지칭하여 나중에는 제자란 말을 폭넓게 쓰셨어요. 그리고 그렇게 사도행전을 들어가면 이 말이 이제는 신실하게 주님을 좆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하므로 예루살렘에 제자의 수가 점점 더 많아지고” 또는 “다메섹에 아니니아란 제자가 있더니, 욥바에 도르가라 하는 여제자가 있더니, 루스드라에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가주 장로교회에 이런 저런 성을 가진 제자들이 있더니” 할렐루야!
이와 같이 제자란 말을 철저하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용하는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고 바라시고 목표하시는 하나님 자녀들의 모슴인 거에요. 우리 모두가 이 제자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3년동안의 공생애 사역은 시간적으로 크게 둘로 구분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버나움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사역이었어요. 또 하나는 하나님의 때가 되어서 마지막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하시는 사역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역 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이 바로 이 두 사역의 갈림길이에요. 그래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5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어요.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그러기에 오늘 본문의 시작이 “길 가실때에”라고 시작을 하는데, 여러분 이 말이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왜냐면 이 길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기 때문이에요. 왜 가시는거에요? 죽으러 가시는거에요.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위하여, 모욕 당하시고 채찍 맞으러 가시는겁니다. 살이 찢기고 피가 뿌려지는 골고다 십자가를 향한 시작의 발걸음인거에요. “길 가실때에란” 이 짦은 말속에 바로 주님께서 먼저 가시고 또 제자들이 가야할 그 십자가의 길이라고 하는 숨겨진 멧세지가 들어 있는거에요.
그러기에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을 좆는 사람, 다시 말하면 제자의 길을 가겠다는 사람들에게 아주 강한톤으로 제자의 길에 관한 기본 프레임을 알려 주시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역 하실때에도 많은 사람이 따랐어요. 그들 가운데에서 가르치시고 복음 전하시고 병고치고 하셨어요. 그러나 이렇게 강력하게 제자의 길에 관하여 말씀 하시지는 않으 셨어요.
그런데 이제는 다릅니다. 물론 이 예루 살렘으로 가시는 길도 마찬가지로 가르치시고 복음 전하시고 병고치고 하셨어요. 그런데 주님을 따르고 좆는 그 길에 관하여 훨씬 더 수준높고 강력한 도전의 말씀을 주시는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그 새로운 길을 가시기에 신실한 참 제자들, 그 길을 따르기를 원하는 제자들이 어떻게 그 길을 가야 할지 알리기 시작을 하시는거에요.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주의 해야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말씀 해석의 문제에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오늘 이 말씀 여러분 그대로 따를 수 있습니까? 복음 위하여 홈리스 같이 평생을 떠돌면서 살아야하고, 가족도 완전히 외면하고, 모든것을 다 단절하고 주님만 따르는 삶을 살 수 있겠어요? 물론 그런 분들이 간혹 잇기는 합니다. 그러나 전적인 자신의 의지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몇번은 할 수 있겠지요. 단기선교 가면 그때는 되겠지요. 그런데 계속은 안됩니다. 수도원 같은데 들어가면 좀 나을 수 있을지는 모르겟지만 우리의 살아가는 환경이 그렇지를 않거든요. 또 주님께서도 세상속의 빛과 소금을 원하시지 숨어 있는 빛과 소금을 원하시는것은 아니거든요. 기독교의 영성자체가 원래 그렇지가 않거든요.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우리의 고만이 있어요. 그대로 따르자니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다고 주님의 말씀인데 또 안 따를 수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이런 말씀 나오면 야코라고 그러나요? 기가 좀 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는 좀 죄송스럽지만 “내 이야기는 아닌것 같애. 특별한 분들 이야기일거야. 특수 사명을 받으신 분들의 사역이야” 이렇게 얼른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비슷한 분들의 삶이나 간증을 통하여 은혜받았다는 감정으로 대리 만족을 하죠.
결국 나 자신에 대한 말씀의 적용은요, 슬쩍 스킾을 해버립니다. 아니면 정말 적용을 해도 “나는 그러지 못하는데…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한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 어떡하나요?” 이런 말씀만 생각하면 늘 괴로운 마음으로 늘 미안한 마음으로 회개는 하면서도 전적으로 따르지도 못하고 그렇게 주님을 어정쩡하게 따라 가고 있습니다.
자 오늘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당시 예수님 환경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스승과 제자의 상황은 본문의 이런 스타일이 맞아요. 당시는 스승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든 자기의 것을 버리고 스승을 따라서 함께 동거 동락을 했어요. 대부분 선생들은 학당 같은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함께 생활을 하면서 제자들이 거기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다가 더 하셨어요. 거처가 전혀 없으셨던거에요. 발 닿는곳이 거처였습니다.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전도자의 삶을 살으신거에요. 머리 둘곳이 진짜로 없으셨어요.
더군다나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예루살렘을 향한길이었어요. 십자가를 향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따르려면 오늘 주님 말씀 하신것처럼 그렇게 따르는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즉각 모든것을 버리고 바로 좆지 않으면 안되었어요. 가버나움에서는 그냥 주님을 따르는 follower로서 괜찮았어요. 그런데 지금 주님께서 가시는 길은 그게 아니엇거든요.
그야말로 전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필요하셨어요. 죽음의 길을 따라 가는 사람들이 머리둘곳 찾아 무엇하며, 장사고 작별인사고 그게 급한게 아니잖아요. 주님을 즉각 따르는 일이 급선무 였던거에요. 더군다나 주님 부활하시면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사명을 감당하여야 하잖아요. 그러기에 그런 긴박한 상황속에서 그런 철저히 따를 수 있는 제자들을 요구 하신거에요.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그때 주님을 좆겟다고 하는 자들은 그런 긴박한 상황속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거에요. 다시 말하면 무엇이 더 소중한가? 우선순위가 무엇인가 하는 프라이어리티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바로 그거에요. 우리에게 무엇이 우선인가 하는것입니다. 당장 우리에게 주를 위하여 홈리스처럼 되어라 . 부모건 자식이건 팽채쳐라. 감정도 눈물도 없이 떠나라 이런 말씀이 아니에요. 우리에게 평소 무엇이 가장 우리 삶의 우선 순위에 놓여 있는가 물으시는거에요. 또 우리가 정말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섰을때 모든것을 포기하고 모든것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를 수 있겠느냐? 강렬한 도전을 주시는거에요.
오늘 본문 보니까 첫번째 주님을 좆겟다는 사람이 그냥 “어떤 사람”이라고 나오는데 마태복음을 보면 서기관이라고 나와 있어요. 여러분 당시 서기관은 꽤 괜찮은 신분의 사람 이었어요.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교사들인데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인 지위가 있었어요. 먹고 사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주님께서 묻는거에요. 너의 우선순위가 과연 무엇이냐?
머리 둔다는것은 삶의 자리를 말하는것이죠.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삶의 환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물어 보시는거에요. 나를 따르는것이 지금까지 네가 따르고 추구해 왔던 그 삶의 자리 그 삶의 환경보다 정말 소중하니? 아니 사실은요 그 대답을 들으시려는것이 아니고 확실하게 바꾸라는 말씀이에요. 주님을 따를려면, 참 제자가 될려면, 그 소중함의 순위를 바꾸라는거에요. 그 모든 자신이 추구하고 사랑하고 누리던 삶의 거처와 환경 그위 첫번째 자리에 주님을 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느것보다 주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라는 거에요.
여러분 이것이 어쩌면 세상을 역류하는것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추구하고 따르고 좋아 것들을 나는 버려야 할때가 있어요. 심지어 때로는 내가 갈고 닦은것, 내가 애썼던것, 내가 이루어 놓은것마저 버려야 할때도 있을것입니다. 세상이 볼때에는 미친사람아닌가? 이런 소리 들을 수도 있는거에요. 그러나 여러분 그렇게 가는 길이 사실은 제자의 길이라는거에요. 그런것조차 감수 하는 길이, 그렇게 준비해 나가는게 우리가 가야할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고 주님께서 원하시면, 선택의 기로에 섰을때에 기쁨으로 모든것조차 던질 수 있는 사람, 이런 참 제자를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사람은 좀 다른 케이스입니다. 이 사람은 자기가 좆겟다고 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좆으라 한 사람이에요. 아마 마음에 쏙 드신 사람인가 봐요.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연로한 부친이 계십니다. 아마 병도 드신것 같아요. 그래서 오래 사지지는 못할것 같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에 이 부친이 먼저 마음에 딱 걸리는거에요. 자기가 돌보아야 하는데 아마 마땅히 맡길 사람도 없는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아버지가 곧 돌아가실것 같은데 제가 아버지 장사 지내고 주님을 따르면 안되겠습니까? 안 따를려는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선택의 기로에서 우선순위를 주님께 두지를 못하엿어요. 그러자 주님게서 말씀 하시기를 “죽은자는 죽은자로 하여금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여러분 당시 유대인들의 부모공양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었어요. 율법중 가장 큰 십계명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 말씀이 있잖아요. 특별히 부친의 장례를 모른척 한다는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어요. 아들의 역할중에서 너무나 소중한 우선 순위였습니다. 주님께서 그것 모르셨겠어요? 다 아셨습니다. 그런데 더 소중한것이 있다고 말씀 하시는 거에요. 주님을 위하여 부모도 버려라 어떻게 되든지 내 팽겨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절대 그렇지가 않아요. 그래서 디모데 전서 5장 8절을 보면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마찬가지에요. 역시 우선 순위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땅에서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누구보다도 더 애착을 가지고 작은 천국을 누려야 할 가족에 관한 문제조차도 주님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본받아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본질적인 그 길보다 소중 할 수는 절대 없다는거에요.
세번째 사람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가족을 떠난다면 당연히 작별인사를 해야 합니다. 기약없이 떠나거나 못 돌아올것 같거나 하면 마땅히 해야 하는게 인지상정이에요.
저도 러시아 선교사로 갈때에 부모님께 작별 인사를 한국가서는 못하니까 전화를 드렸어요. 그때는 프랑스에서 다른 공부를 하고 있을때니까 아버지께서는 잘 이해를 못하시는거에요. 그러니까 선교사를 갈려면 일단 한국으로 들어와서 신학공부를 다시 제대로 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 그리고 가라는 거에요. 당시만 해도 평신도선교사라는 개념자체도 잘 이해가 안될때 였어요.
그런데 그때 상황으로서는 언제 러시아가 다시 문이 닫힐지 모르는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나름대로 복음에 대한 열정이 너무나 강했엇고 또 그곳에 있는 영혼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우선 복음 전하는것이 급한 상황이었는데 보수 장로교회의 보수 장로님인 부친께서는 이해를 못하시고 더군다나 아이가 아프다면서 어떻게 데리고 가느냐면서 나중에는 막 역정을 내시는 거에요. 그래서 전화로 작별인사도 못하고 카셑 테이프를 만들었어요. 왜 내가 지금 가야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고 무엇을 원하시는지 카센트 테이프에다가 녹음을 해서 한국으로 보내고 바로 러시아로 떠났 습니다. 그때는 러시아가 다시 문을 닫으면 순교도 각오한때였는데 그래도 그렇게라도 작별 인사를 했어요.
여러분 주님께서 작별인사 그 뒤에 하신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말씀 하신 작별인사가 그냥 작별인사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매여 있는것들에 대한 문제임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면서도 우리가 매여 있었던것들을 자꾸 뒤돌아 보고 싶어 하거든요. 작별인사는 뒤 돌아 보고 싶은 그 핑계중의 하나에요. 중요한것은 역시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핑계대지 말고, 매여 있었던것, 아니면 지금도 매여 있는것 그것이 더 소중한지 아니면 주님 따르는것이 더 소중한지 확실하게 우선순위를 매기라는거에요.
여러분 쟁기를 잡은자는 밭을 가는게 쟁기 잡은 목적이잖아요. 앞을 보고 가야지 뒤를 돌아보면 밭을 갈 수가 없어요. 우리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의식을 망각하지 말라는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무라에서 롯의 가족을 구원하시는데 롯의 아내는 두고 온것, 매여 잇었던것에 대한 미련을 못 버렸어요. 뒤돌아 보았습니다. 그렇게 뒤 돌아본 모습대로 소금 기둥이 되었잖아요. 주님을 철저히 따르는 제자의 길에 내 삶의 우선 순위를 확실히 두라는 주님의 음성인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참 제자의 길을 다른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해서 말씀을 하세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여러분 자기를 부인한다는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말은 내 존제 자체가 없다고 여긴다는 말과 같은거잖아요. 있어도 없다. 엣날 코메디에 나오는 영구처럼 영구없다 말만 한다고 없는게 아니잖아요. 나는 분명 있는데 내 자존심 완전히 내려 놓는거에요. 내 성격 내 욕망 내 주장 주님을 위하여서는 없는것처럼 되라는거에요. 이기적 생각 내 중심의 삶이 주를 위한 삶 주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것입니다. 우리 옛사람의 흔적을 철두철미 굴복시켜라는 말씀인거에요. 여러분 나를 철저히 부인하지 못한 베드로는 나중에 누구를 부인햇습니까? 주님을 부인햇어요. 멋잇게 고백도 하고 주님께로 칭찬도 듣고 자신은 제자로서 길을 갔다고 자부했는데 결국 주님을 그것도 세번이나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더군다나 참 제자는 자신을 부인만 하는게 아니에요.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그 죽음을 그냥 피상적으로 상상하지만 십자가 형을 수도 없이 보아왓던 당시의 팔레스타인 유대인이라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두 뼈저리게 느꼈을 거에요. 뼈를 깎는 아픔이 있어요. 피 한방울 물 한방울 다 흘릴때까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고 견뎌야 하는 고통이 있는거에요.
물론 주님께서 우리더러 목숨을 달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것은 아닙니다. 물론 필요 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주님께서 이 캘리포니아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말씀 하시는것은 예수 따라가는 십자가길을 가장 가치있는것으로 여기라는것입니다. 제자가 가는 그 아픔과 고통의 수고를 감내하라는거에요.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아픔이 있어도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 따금씩 생각나면, 아니면 내 기분따라 그 분의 길을 따르는것이 아니라 전심전력으로 부단한 노력과 헌신을 통해 좆아오라고 말씀 하시는 거에요. 거룩한 기쁨과 무한한 감격과 감사로 우리에게 놓인 제자의 길을 쉬지말고 가라는 명령인 것입니다.
그럴때에 약한것 같아 보이는 그 길이 하나님 능력의 길이 될줄 믿습니다. 고난같아 보이는 그 길이 영광의 길이요 승리의 길이 될줄 믿습니다. 죽음으로 느껴지는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영원한 새생명의 면류관을 줄것이며 이 땅의 많은 영혼들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될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 맺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그냥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사시겠습니까? 주님께서 그 길을 먼저 가셨어요. 그 길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에게도 그 길을 주님 따라 오라고 요청하시는것입니다. 이 길을 여러분 삶의 가장 소중한 우선순위에 두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원한 그 나라의 놀라운 영광의 주인공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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