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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예선 具禮善 (1868 ∼ 1966)】 "독립운동가를 도운 로버트 그리어슨 (Robert Grierson)"
1901년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지부를 열고 교회와 학교(보신여학교), 1902년 제동병원을 설립했으며,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간도까지 전도 활동을 확장했다. 1935년 정년 퇴임 후 귀국해 1965년 별세했다.
1868년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주(州) 핼리팩스에서 출생. 한국 이름은 구예선(具禮善)이다. 캐나다에서 문리대학(文理大學)·신학대학(神學大學)·의과대학(醫科大學) 등을 졸업한 후 선교사(宣敎師)로서 1898년 9월 한국에 입국하여 서울에서 한국어을 공부하였다. 1899년 2월 캐나다 선교구(宣敎區)인 함경남도 원산(元山)으로 가서 한국어를 배우다가 1901년 5월 가족과 함께 함경북도 성진(城津)에 정착하였다.
교회와 제동병원(濟東病院)을 세우고, 보신학교(普信學校)· 보신여학교(普信女學校)·협신중학교(協信中學校)를 설립하는 한편 함경도와 간도(間島)·해삼위(海蔘威) 등지에 설립되는 소학교(小學校)의 교원양성을 위한 중등속성과(中等速成科)를 병설하는 등 인재양성에 힘써 선교사이자 의사 및 교육자로서 함경도 개화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또한 대한제국군 참령(參領)이었던 이동휘(李東輝)와도 제휴하여 교육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일본군의 만행에 항의하여 함경 남북도 지역에서 선교하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과 갈등을 일으킨 사건들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1908년 11월 3일 일본군 하마타(濱田甚藏)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으로 이동휘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용산헌병대에 구금되었을 때도 그를 찾아가 면회하였고, 1910년 1월 그가 석방되자 다시 함경도 지역에서 조사로 일하게 하였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 후 일제가 협신중학교를 항일운동의 책원지(策源地)라 하여 폐교시키자 협신중학교를 함흥영생중학교(咸興永生中學校)에 합병시키고, 소학교와 제동병원을 계속 운영하면서 북간도(北間島)·연해주(沿海州)· 신한촌(新韓村) 등지에 전도부(傳道部)를 설치하여 치외법권을 이용, 한국의 독립지사와 한인 교포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다. 그리고 함께 있던 박걸(朴傑) 선교사를 간도 룽징[龍井]으로 파견하여 전도사업을 확충하는 한편, 이동휘가 만주로 망명하도록 도왔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보신학교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만들고, 3월 10일 학교 교정에서 학생과 그리스도교 교인 수백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벌여 시위군중이 1,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일본경찰이 시위군중에 발포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자 중상자를 일일이 치료하며 돌보았으며, 당시 신문에 성진만세소동의 주모자로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후 캐나다로 돌아가 토론토에서 살면서 6·25전쟁 때 자신의 선교구였던 선진에서 월남하여 온 피난민의 곤궁한 생활을 듣고 구호금을 보내기도 하였다.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로버트 그리어슨(Robert Grierson)은 1868년 2월 15일 캐나다 노바 스코셔(Nova Scotia)주 헬리팍스(Halifax)에서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인 아버지 존 그리어슨(John Grierson)과 어머니 메리 파레트(Mary Parrett)의 아들로 태어났다. 헬리팍스 아카데미(Halifax Academy)를 거쳐 1890년 달하우지대학교(Dalhousie University)를 졸업했다. 1893년 파인 힐(Pine Hill) 신학교를 졸업하고, 1897년 달하우지 의과대학(Dalhousie Medical College)을 졸업하고 의사자격증을 받고, 1898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달하우지대학 졸업반 때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여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의 한국 개척선교사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1897년 2월 무렵 윌리엄 푸트(William Foote) 목사, 던컨 맥래(Duncan MacRae) 목사와 함께 선교사에 임명되었다.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헬리팍스에서 레나 베노잇(Lena Venoit)과 결혼했다. 부인과 함께 1898년 9월 7일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1899년 2월 함경남도 원산을 중심으로 함경도지역 선교를 담당했다. 1901년 5월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지부와 진료소를 설치하고 선교활동을 했다. 이 진료소는 1916년 제동병원(濟東病院)으로 발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1902년 간도(間島)와 해삼위(海蔘威) 지역까지 여행하며 성진을 비롯한 관북지방과 동만주 일대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원하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된 이후 일본군의 만행에 항의하여 함경 남북도 지역에서 선교하던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들과 갈등을 일으킨 사건들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1908년 11월 3일 일본군 하마타(濱田甚藏) 상등병을 구타한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자신이 전도하여 믿게 된 함남 단천군 원덕리교회(院德里敎會) 문성기(文成基) 장로의 아들 주례를 서기 위해서 말을 타고 하루에 30마일씩 150마일의 산악길을 여행하여 1908년 11월 3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일행은 이미 신부집으로 가고 없어 지칠 대로 지친 말 두 필을 교회당으로 쓰는 문성기 장로집 앞 말뚝에 매어두고 몇 마일 더 거슬러 올라가 겨우 시간 전에 신부집에 도착했다. 잔치가 한참인데 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일본군인들이 그의 말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거리를 달리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자 작은 채찍 막대를 가지고 그곳에 도착해 보니 4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말 두 마리를 번갈아가며 타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있던 일본군 병사를 말에서 끌어내리고, 나머지 병사에게 손에 잡고 있던 대나무로 된 채찍 막대로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그 병사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채찍에 맞아 상처를 입은 병사는 일본군 덕원장 헌병분견소에 근무하는 상등병 하마타였다. 이 사건은 결국 덕원군 헌병분견소장 고바야시(小林善八郞)가 개입하여 일본군측에서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강화도와 서울 지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하던 이동휘(李東輝)가 1908년부터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순회강연을 하며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해 1909년 봄 성진의 그리어슨을 찾아와 관할 구역내 설교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동휘가 국권회복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기꺼이 성서 매서인(賣書人)으로 임명하고, 1년후에는 조사(助事)로 임명하여 자유롭게 그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도록 후원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저격사건으로 이동휘가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용산헌병대에 구금되었을 때도 그를 찾아가 면회하였고, 1910년 1월 그가 석방되자 다시 함경도 지역에서 조사로 일하게 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이동휘의 애국강연 활동을 상세히 보고하면서도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배후에 일본과 동맹국 국민인 그리어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동휘는 1910년 8월 3일에 성진에서 ‘한일합방’ 반대 혐의로 체포되어 서울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8월 29일 병탄조약이 공포된 후에야 석방되었다. 이동휘는 1911년 3월에도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대무의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난 후에도 함경도 지역에서 그리어슨과 함께 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도저히 국내 활동이 불가능하자 국외로 망명을 꾀하였는데 이동휘의 국외 망명도 그리어슨이 도와주었다. 1912년 1월 원산에서 함경노회가 조직될 때 원산, 함흥, 함북대리회 중 함북대리회를 맡았다. 1916년 8월 함경노회에서 스코트(William Scott) 선교사, 박창영(朴昌英) 목사와 함께 성진 회령 지역을 맡았다. 1918년 3월 함남노회가 조직되고 같은 해 8월 원산에서 열린 제2회 노회에서 노회장에 선임되었다.
그가 함남노회장으로 있을 때 3.1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1957년에 발표한 그의 회고록에서 3.1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은 토요일이었다. 이 날은 한국 역사에 길이 남을 날이다. 또한 세계 혁명사에도 길이 기념할만한 날이다. 한 나라의 백성들이 독립을 찾기 위해 아무런 무기도 없이 오로지 손에 작은 깃발만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 용감히 외쳤던 것이다. 이 운동의 준비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되었던 것 같다. 전국 각처의 지도자들은 그날 거사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 사람이나 한국인들과 언제나 가까이 지낸 우리 외국인들은 이 일에 대해 사전에 아무런 기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는 성진지역 3.1운동을 적극 지지하고 도왔다. 그는 1919년 3월 7일 저녁 성진지역에서 다른 지역과 연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어 3월 9일 주일에는 그가 담임하던 성진 욱정교회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를 먹구름에 비유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도들이 그것을 없애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여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3월 10일 성진 만세시위는 캐나다장로회에서 운영하고 그가 원장으로 있던 제동병원 앞에서 시작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며 관공서, 경찰서가 있는 시내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일제 군경과 소방대가 출동하여 한국인을 무차별 구타하고 총을 난사하여 부상자가 속출하여 그리어슨은 그들을 치료해 주었다. 가슴에 관통상을 입은 욱정교회 장로의 동생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날 아침 일찍 성진경찰서에서 로스(Mr. Ross) 선교사와 함께 호출이 있었으나, 밀려든 환자들을 돌보느라 저녁 식사 후에야 경찰서에 가서 취조를 받고 돌아왔다. 그날 이후 그가 담임하던 성진 욱정교회 모든 장로들과 많은 교인들이 체포 투옥되어 3월 11일 주일 예배에는 참석자가 적었다. 그날 경찰서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교회 종을 오랫동안 치게 했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매일신보』 1919년 3월 15일자에 “성진(城津) 소요의 주모자는 야소교 선교사 영국인 「크레-손」인데 백성들은 화근을 없애려고 영국인을 죽인다고 떠들며 분개한다더라”고 허위로 보도하였다. 당시 투옥자들 중에는 재판을 받고 몇 년간씩 징역 언도를 받고 서울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르는 사람들이 있어, 때때로 이들을 면회하고, 교회 여신도들을 교대로 보내어 면회하고 사식을 제공하게 했다.
1919년 7월 안식년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하게 되자 교인들이 성진 욱정예배당에서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주고 7월 15일 부두까지 배웅해 주었다. 1921년 3월 세 딸과 함께 돌아와 성진선교지부에서 활동했다. 같은 해 10월 회령, 성진, 해삼위를 관장하는 함북노회 부노회장에 피임되었다. 1935년 정년퇴임 후 귀국하여 토론토(Toronto)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5월 8일 98세로 별세했다.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