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협우갈석도(금나라때 지도)를 토대로한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의 위치
실제로는 우북평은 산서성 서부에 태원은 하동군에 있었다.
연나라는 바로 우북평일대를 차지한 나라로 지금도 북평이란 지명이 산서성에 남아있고 연경산이란 지명역시 산서성북쪽에 있다. 게다가 연의
위치를 산서성에 그린 고지도도 발견되었다. 연장성을 중국사이트에서 검색하니 산서성과 하북성사이에 있다고 나온다. 그러니 아무도 연나라의 위치를
산서성을 넘어시 이야기 하지 마라!!!
고구려 왕이 예맥과 한의 현도를 침범하고 또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였다.
무오년 신라 지마왕 7년, 고구려 태조왕 66년, 백제 기루왕 42년(한 안제 원제 5, 118
맥국(貊國)은 한수(漢水)의 동북쪽에 있는데, 지역이 연(燕)과 가까워서
멸망되었다
한수는 기수로서 태행산동쪽에 있다.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진한은 북쪽으로 예와 맥과 접경하였다
위의 세가지 기록을종합해 볼때 진한에 속한 신라의 모국 사로국은 한수일대에 있었으며 연나라인 태원과 북평에서 동쪽에 있으며 현도지방인
북평이남지방과도 가깝다. 현재의 천진시일대가 제일 유력하다.
백제왕이 땅을 개척하여 낭자곡성(娘子谷城) 에 이르러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회맹을 요청하였으나, 신라 왕이 좇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두 나라는 화의를 잃었다.
계해년 신라 탈해왕 7년, 고구려 태조왕 11년, 백제 다루왕 36년(한 명제 영평 6, A.D. 63)
성(城 역성과 요동성) 사이에 관왕묘(關王廟)가 있었습니다. 가다가 올량합관(兀良哈館)ㆍ태화문(泰和門)ㆍ안정문(安定門)을 지나서 우리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니, 조선관 앞에 푯말을 세워 ‘외천보국(畏天保國)’이란 네 글자를 써 놓았습니다. 또 석하아(石河兒)를 지나서
고려동(高麗洞)으로 들어와 대석문령(大石門嶺)과 소석문령(小石門嶺)을 지나니, 두 영 사이에 왕 도독(王都督)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또
유하아(柳河兒)ㆍ탕하아(湯河兒)ㆍ두건참(頭巾站)ㆍ낭자산(狼子山)을 지나서
현득채리(顯得寨里)에 이르러 쉬었습니다.
표해록(漂海錄) 제3권무신년(1488, 성종 19) 6월
낭자산은 후대에 요동반도로 이동되었는데 가장 옛날의 기록을 찾아보니 낭자산이 요동성즉 명나라 요동도사성인 난하바로동쪽에 있었다.
백제와 신라가 만난곳이 바로 난하동쪽이었을수도 있고 혹은 지명이 서로 유사해서 오해일수도 있다.
신라의 아찬 길문(吉門)이 가야 군사와 황산진 에서 싸워서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길문을 파진찬으로
삼으니 이는 군공을 상준 것이다
삼국사기
우리 군사가 추격하여 황산군(黃山郡 연산(連山))에
이르러 탄령(炭嶺)을 넘어 마성(馬城)에 주둔하였다. 신검이 양검(良劒)ㆍ용검(龍劒)ㆍ문무 관료와 함께 와서 항복하니 왕이 그들을
위로하였다.
고려사절요 병신 19년(936), 후진(後晉) 고조(高祖) 천복(天福) 원년ㆍ거란 천현 11
고려사를 정리한 조선에서는 황산의 위치를 연산이라고 했다. 실록에는 연산은 요동도사성에서 180리에
있다고 했으니 난하에서 약 200리내외에 있다. 이곳은 백제땅이 되기도 한다. 가야가 변한이라고 했는데 변한은 대릉하남부에 있던 국가이다.
가야가 대릉하 남부에 신라와 같이 있다가 둘다 한반도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백제황제의 명으로 지배층귀족과 왕족이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남사(南史)》 서효사열전(徐孝嗣列傳)에는 이르기를, “황산(黃山)을 에워싸고
우수(牛首)에게 항복받은 것은 한나라가 성대하였을 때의 일입니다
결단코 한나라는 한반도에 온적이 없다. 한나라가 무제때 상간수에 장성을 쌓을 정도로 북진한 것은 맞으나 곧바로 고구려와 백제의공격으로
황하동쪽을 다 잃었다. 황산이 역시 상간수에서 가까움을 알수 있다. 아마도 난하일대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이 달에 가소(加召)ㆍ마두(馬頭) 두 성 을
쌓았다.
정해년 신라 파사왕 8년, 고구려 태조왕 35년, 백제 기루왕 11년(한 장제 장화 원년, A.D.
87)
마두산(馬頭山) 주에서 남으로 80리 떨어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3권의주목(義州牧)
마두라는 지명이 조선의 의주 즉 대릉하 남부에 있다.
말갈이 계림 북쪽 변경에 크게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을 살략(殺掠)하였다. 또
대령책(大嶺柵)을 엄습하고 이하(泥河)를 통과하니 왕이 백제에 국서를 보내어 구원을 청하였다. 백제 왕이 다섯 장군을 보내어 도우니 적이
물러갔다.
을축년 신라 지마왕 14년, 고구려 태조왕 73년, 백제 기루왕 49년(한 안제 연광 4, 125)
통고》에,
“발해는, 남쪽은 신라에 접하여 이하(泥河)로 경계를
하였다
현재도 이하는 북경동쪽 계현에 지명이 남아있다.
《요사》 지리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경도(東京道) 요양현(遼陽縣)은 본디 한(漢)나라의 패수현(浿水縣)이었다. ○ 패수는
또한 이하(泥河)라고도 하며, 또
헌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물에는 헌우초가 많이 자란다
계림 이사금이 북쪽에 순행하여 태백산(太白山)에 제사하였다.
무인년 신라 일성왕 5년, 고구려 태조왕 86년, 백제 개루왕 11년(한 순제 영화 3, 138)
태백산은 지금도 지명이 하북성에 남아있다.
말갈이 장령(長嶺)을 엄습하여 민구(民口)를 노략하였다. 겨울에 또 왔으나, 눈이 몹시 내려 곧 물러갔다.
기묘년 신라 일성왕 6년, 고구려 태조왕 87년, 백제 개루왕 12년(한 순제 영화 4, 139)
말갈즉 난하북부에 살던 부족이 신라를 침략했다고 한다. 역시 백제도 침략했으나 패했다. 결국 초기 고구려는 베이징에서 서남으로 차지하고
백제는 둘로 갈라져 비류백제는 난푸에 온조 백제는 하북성 남부와 산둥일대에 정착하고 신라의 모국 사로국은 난하일대에서 천진시일대에 있었다.